※ 부담감 안 느끼고 한 장씩 짧게 쓰니까 번호 올라가는게 장난 아니네요. ※
쇼의 최종 책임자 에릭 크립키는 분노에 찬 나머지 도깨비가 되었다.
그렇다고 극중 윈체스터 형제들이 하던 것처럼 암염탄을 빵빵 쏘아대는 걸로 처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다, 젠슨과 제러드는 우산이나 피뢰침도 없이 인드라의 번개를 고스란히 얻어맞아야 했다.
『제러드. 자네는 배우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하나. 대답해보게!』
『음... 대사를 까먹지 않고 잘 외우는 거요. 같은 장면에서 말을 더듬고 NG를 스무 번 넘게 냈을 적에 주의를 주면서 그런 말을 하셨더랬죠. 잊지 않았어요.』
물론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거론할 때가 아니다.
크립키가 쥐고 있던 연필심이 압력을 못 이기고 뚝 부러졌다.
그 무시무시한 압박에 젠슨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맞네, 그것도 배우의 본분이지. 좋아, 그럼 다시 묻겠네. 배우는 뭘 먹고 산다고 생각하나.』
너무 당연한 걸 물으면 어이가 없어지는 법이다.
제러드는「오늘따라 크립키가 이상해」표정을 지으며 즉답했다.
『밥이오.』
젠슨은 머리를 보호하며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서 드드듣 기관총이 난사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고 있음이다. 크립키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되었고, 관절마디가 하얗게 변한 손으로 꽉 쥐고 있는 연필은 그 안녕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제발 전화기는 잡지 말아라. 젠슨은 기도했다. 예산 초과를 이유로 부득부득 줄거리 변경을 요구하던 방송국 관계자와 설전을 벌였던 날에 그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전화기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발로 밟았다는 얘기도 있고, 벽으로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신빙성 높은 추측은 돈이 어쩌고, 시청률이 어쩌고를 떠들던 사람의 머리를 그걸로 내리쳤다는 거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려 핏자국을 찾았다.
불행하게도 사무실에 깔린 카페트의 빛깔은 암적색이었다.
『저어, 밥이 아니면... 고기?』
『스테이크 같은 소리! 잘 들어! 배우는 얼굴로 먹고 사는 거야, 얼굴로!』
크립키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가뜩이나 동그란 얼굴이 붉게 변하니까 문어 비슷해졌다.
『얼굴로 밥 먹고 사는 주제에 그걸 대놓고 망치면 어쩌자는 거야! 엉?! 피아니스트들은 강도에게 당할 때조차 손을 사수한다는 거 몰라? 마찬가지로 배우는 얼굴을 사수해야 하네!』
『요즘엔 외모만으론 어림 없어요, 크립키.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면...』
『끼어들지 말게, 젠슨!』
이미 속이 곪을대로 곪은 연필로 책상을 톡톡 두둘겼다. 아무리 잘 봐줘도 얼굴에 난 심각한 찰과상은 일주일 이상은 기다리고 나서야 메이크업으로 감출 수 있을 것이다. 줄거리를 바꿔《같은 동업자 헌터들끼리 몸싸움이 있었습니다》라고 해도 시뻘건 스크래치가 난 얼굴을 계속해서 클로즈업 할 수는 없다. 결국 샘 윈체스터가 나오는 장면만 골라 나중에 따로 찍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젠장맞을! 그렇게 따지면 나중에 찍을 분량이 사실상 거의 전부다. 그가 책임지고 있는 TV쇼「슈퍼내츄럴」은 두 명의 주연 배우에 대한 의존도가 무척 높았고, 그것은 누가 봐도 치명적 위험 요소였다. 한 명이 빠지면 연쇄 도미노 붕괴는 지금처럼 초읽기가 되어버린다.
『으이그~!! 나를 그냥 민둥 대머리로 만들어라, 만들어!』
인정하자. 일주일 촬영 스케줄은 물 건너갔다. 스트레스로 황금 같은 머리카락들을 잃느니 일찌감치 직원들을 휴가 보내고 그동안 에너지를 재충전 하라 지시를 내리는게 훨씬 낫다.
『그래서 말인데.』
순간 크립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는 탐색하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그 얼굴의 상처, 아래에서 말들이 많더군.』
젠슨은 바짝 긴장했다. 저 너구리가 얼굴을 망친 당사자만을 부르지 않고 젠슨까지 사무실로 오라고 한 까닭이 있었던 거다. 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무어라 수군거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순간 귀에서 띵~♬ 소리가 났다.
『스텝들 말로는 주차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을 적에 주먹질을 했다고...』
다 듣지 않고 제러드가 울부짖었다.
『그게 뭔 소리예요?! 나는 젠슨을 해치지 않아요! 절대로요! 젠슨을 다치게 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나만보면 앞발을 든 곰이다, 서스콰치다 그러는데요, 나는 그렇게 사납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아요. 내 주먹은 솜주먹이라고요! 젠슨? 젠슨도 내가 막 무서워 보이고 그래요? 내가 젠슨을 주먹으로 막 때릴 것처럼 보이나요? 그래서 가끔씩 날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그러는 거예요?』
이런, 맙소사. 젠슨은 소란을 피워대는 제러드를 조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크립키의 눈이 그의 대머리 만큼이나 번들거렸다.
『이상한 표정이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크립키.』
『왜 거짓말 해요. 이상한 표정으로 보잖아요! 꼭 양치질하다 잇몸에서 피가 난 사람처럼...』
『제발 진정해, 파달렉키. 이곳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네가 날 때렸을 거라 의심하지 않아. 솔직히 떡이 되도록 맞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로 보여.』
『에?』
『그러니까 크립키는 지금 내가 널 때린 거냐고「완곡하게」묻고 있는 거야.』
『에?!』
제러드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 다음, 다시 젠슨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말문이 막혔는지 속눈썹만 꿈뻑거렸다.
『당신이 나, 나를?』
저게 연기라면 오스카 삼촌이 웃으며 맨발로 달려온다. 크립키는 두손을 번쩍 들었다.
『알았으니 그만들 해. 그러니까 그건 단순히 사고였고, 두 사람이 싸운게 아니라는 거지?』
『물론이죠!』
제러드는 굉장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올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