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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심각한 상황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물어본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 D, 앤더슨은 많이 달랐다.

『좋아.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한 번 말해봐. 예를 들자면... 1번, 싱크대 배관이 꽉 막혔다. 2번, 침실 유리창으로 물이 샌다. 3번, 흰개미가 마룻바닥을 먹어치우고 있다.』
이어지는 보기를 다 듣지 않고 딕 그레이슨은 최악의 상황을 거론했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건물 자체가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허어... 토네이도.』

그것만으로 전부 알아들은 눈치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일 없이 그저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 전부를 설명하기가 난감했던 딕 입장에선 숨통 트이는 일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남자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지붕이 무너졌다는 비유만 듣고 상황의 심각함을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경찰관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울해지는 감수성 풍부한 세탁소 사장님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 이건 아니다 싶은 나머지 입술에 침을 축이고 더 설명하려 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됐거든?』
한마디로 말해 앤더슨은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개차반이었다.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처음부터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고함과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택가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순찰차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상황이었는데 심지어 마이클은 차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았다.
신음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아파트 4층으로 불이 훤히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그럴 법했지만 딕 그레이슨은 한 가지 우려할 법한 점을 상기해냈다.
「시아라.」
승강기에 올라갔을 적에 버튼에 붉은 손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지라 하느님 맙소사 신음하며 소매로 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죽었다 되살아났다고 해도 상처가 아물었을 리 없으니 출혈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승강기 내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4층 복도에도 손가락 모양대로 다섯 개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벽에 손을 짚었던 것 같다. 아침에 아파트 주민들이 일어나 저 핏자국을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는 게 두려워졌다. 점점이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코피가 나서 그랬습니다」변명하기엔 양도 많았다.

어느새 그의 걸음걸이가 신중해졌다.
순찰차도 제대로 잠지 않았는데 자기 집 현관문 단속을 제대로 했을 리 없다. 5cm 정도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대로 박차고 들어가는 대신 반 박자 숨을 내쉬고 가만히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맨발로 현관 아래 서있던 소녀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히익 소리를 삼켰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는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오른손으로 식칼을 쥐고 있는 채였다.
「시아라. 시아라 맞지?」
소리를 지르지 말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도와주러 왔어.」

소녀는 큰소리를 내지 않을 만치 영특했다.
대신 빌어먹을 지경으로 자기 고집 또한 강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며 식칼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찌를 수 있다며 표정을 아주 독하게 지었다. 얼마나 지독한지 손을 떨지도 않았다.
《여자가 작정하고 무기를 들면 남자보다 더 악독해지는 법이다. 여자라고 봐주면 안 돼. 결심하는 과정이 복잡해서 그렇지 그녀들은 한 번 작정하면 살상을 저지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그 살상 대상엔 자기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지.》
민간인에게 결코 공개되지 않는 전술교본에는 무기를 든 다수의 적이 있을 시 남자보다 여자를 먼저 행동불능 상태로 만들라고 가르친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행동불능으로 만들라는 것이고, 내포되어진 진짜 의미는 원거리 헤드 샷이다. 아이와 여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던 일반 사회의 암묵적 규칙이 여기서 완전히 뒤집어진다.
《자살 폭탄 조끼를 입고 있는 어린 소녀가 만약 너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글쎄다.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한 가지는 이것이다.
자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총을 쓰지 않는다.

쭈그리고 앉는 것으로 눈높이를 낮춘 그는 대화를 시도했다.
아이가 칼을 휘두르면 크게 베일 수 있는 간격이라는 점은 무시했다. 여차하면 알프레드에게 부탁해 꿰매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이클 선배가 많이 다쳐서 돌아왔을 거야.』
찌르겠다는 협박이 통하지 않자 시아라는 당황한 눈치다.
『그는 안에 있니?』
순간적으로 아이의 눈동자가 안쪽을 향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대답이었다.
『혹시 그가 너를 다치게 했니?』
시아라의 어깨가 굳었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다. 마이클 윈저를 내심 보호자로 여기고 있을 아이는 그 질문이 상당히 불쾌했던 것 같다. 소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입을 벌려 F로 시작되는 욕을 퍼부으려고 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냉장고에서 뭔가를 요란하게 끄집어내어 던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는 그 작은 입으로 F*** 단어를 대수롭지 않게 완성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서로 얽혀 들어갔다.
시아라는 한층 더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다급하고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제야 딕 그레이슨은 납득했다.
소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 게 아니었다. 지키고자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저어, 선배에게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안쪽을 손가락질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시퍼런 칼에는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아이의 눈만 보았다.
『내가 들어가 보면 안 될까.』
『안 돼.』
『왜 안 돼? 내가 마이클을 도우려는 게 시이라는 싫어?』
『싫은 게 아니야.』
소녀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나조차 가까이 갈 수가 없어 - 절망에 가득찬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그릇이 바닥을 뒹굴었다.
심각한 싸움의 현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마이클은 코를 킁킁거렸고 밀폐용기 안의 내용물을 씹지도 않은 채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포크나 스푼을 사용할 여유따윈 없었다. 주먹으로 쥐고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 조리가 되지 않은 냉동식품 몇 가지도 이미 해치웠다. 포장이 찢긴 잔해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그중에는 날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삼켰으니 역류할 법도 했다. 우웨엑 소리를 내더니 누런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할 지경인데 그걸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린 자세로 다시 주워 삼켰다.
씹지도 않았다. 그냥 진공청소기마냥 흡입하고 있다는 게 맞았다.

『이쪽으로. 바닥에 그어진 붉은 선 안쪽으로 들어가선 안 돼.』
시아라가 딕의 옷자락을 세게 끌어당겼다.
발아래를 바라보자 정말로 테이프를 붙여서 만든 붉은 선이 보였다.
이게 무슨 선이냐고 물어보자 시아라는「패닉 라인」이라고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정작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는 듯 뺨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워싱턴 조약에 대한 질문을 받은 직후 짓는 표정과 흡사한지라 딕은 더 자세하게 캐묻는 걸 포기했다.

이제 마이클은 구역질나게 느끼한 땅콩버터로 손을 뻗었다.
본인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이마를 찌푸리더니 가볍게 신음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으로 - 착각이었을 수도 있는데 잠시나마 마이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땅콩버터를 거꾸로 들어 내용물 전부를 쏟아냈다. 오른손을 포크레인처럼 사용해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우웩 구역질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헐떡이던 것도 잠시, 토사물을 다시 게걸스럽게 주워 먹었다.

Posted by 미야

2016/08/02 16:51 2016/08/0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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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문자 2016/12/23 22:53 # M/D Reply Permalink

    dc는 캐릭터만 아는 수준이었는데 미야님 글이 좋아서 여기까지 읽었습니다. 늘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마이클의 정체와 앞으로의 전개가 너무 궁금합니다. 딕이 굉장히 자상한 느낌이라 여심이 설레네요^//^ 뒤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곧 성탄절인데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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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즉부터 제법 많은 초현실적 존재를 만나왔다.
데미갓인 원더우먼부터 시작해서 크립톤 행성 사람인 슈퍼맨, 화성의 마지막 생존자인 마샨 맨 헌터라던가... 사이보그 기계인간이라던가.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도 알고 있다. 솔로몬 그런디라고, 지금은 마법으로 엄중 봉인되어 공동묘지 어딘가에 사일러스 골드라는 이름이 새겨진 측은한 묘비 아래 잠들어 있다. 그렇다. 이 세계에는 모자에서 흰 토끼를 끄집어내는 속임수로서가 아닌 마법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총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가 멀쩡히 다시 일어나 숨 쉬는 자를 앞에 두고도 호들갑을 떨 까닭이 없었다.
『병원! 일단 병원부터! 아니다, 그보다는 응급처치를...!!』
그렇고말고. 어디까지나 그는 침착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면 어디까지나 그건 당신의 시력 문제다.

레드후드의 헬멧을 아무렇지도 않게 갈취한 마이클은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제법 빨랐다는 것과는 별개로 걸음걸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방금 전까지 시체였다는 점을 무시하자면 술에 취했거나, 아님 중증의 파킨스 환자의 보행 장애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있다.
『마이클! 기다려요. 부축해드릴게요.』
『아아.』
이도저도 아닌 대답이었다.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딕의 호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서 가까이 오지 말라는 거절의 몸동작을 해보였다.
『미안, 너도 보다시피 내가 지금 살짝 맛이 가서 말이지... 더 가까이 오면 내가 뭔 짓을 할지 감히 장담을 못 해.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말고 좀 떨어져줬음 좋겠어.』
협박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어디까지나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으며, 사고회로가 금방에라도 바스라질 것 같다는 점에선 환각상태에 빠진 중증의 마약 중독자보다 더 위험했다.
『내가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말은 진짜야. 그러니 시험해보려 하지 말고 거기서 손들고 서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이클에 수중엔 개조한 글록 권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권총을 흔들어 보이자 딕은 시키는 대로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참기 힘든 두통이 엄습하는 가운데 마이클은 인내력의 잔해물이라 부르는 찌꺼기를 바닥까지 긁어냈다.
『순찰차는 내가 가져갈게. 택시를 잡아탈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아서 그래.』
『그 상태로 운전이 가능할 리 없잖아요.』
『괜찮아. 살살 운전하면 돼.』
만취 상황에서의 운전보다 몇 곱절이나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우기고 보았다.
『그러지 말고 절 믿어줘요. 전 선배 편이에요. 제가 운전할게요.』
마이클은 헐떡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대신 휴대폰으로 딕에게 대신 연락 좀 해줘.』
『딕?』
『너 말고 다른 딕.』
딕 그레이슨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할 여유 따윈 없었다. 마이클은 정말 급했다.
『앤더슨 녀석에게 길게 설명하려고 하지 마. 그냥 비상사태라고만 해. 그래도 다 알아 들어.』
『선배님...』
『아우, 씨! 넌 그냥 전화만 하라고!』
탁상용 전화기나 쓰레기통이 주변에 있었음 홧김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주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기에 대신 그는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 비상사태인 건 틀림이 없지.
마이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딕은 다짜고짜 레드후드의 자켓 안주머니를 허락도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총 두 발 맞고도 저는 무사합니다. 이렇게 걱정을 해주셔서 정말 감동 먹었습니다. 두 번 먹었습니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끙끙 앓던 레드후드가 이를 갈아댔다.
그런다고 딕 그레이슨이 조금이라도 미안해 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더듬거리는 손길은 성추행에서 고작 한 큰 술 덜어낸 정도였고, 레드후드는 더욱 진저리를 쳤다.
『씨발아! 어딜 더듬어!』
『바이크 열쇠 어딨니.』
『허리춤에.』
『어디에 세워뒀는데.』
『건물 출입구에서 7시 방향. 그런데 빌려준다고 아직 말 안 했다.』
『......』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해왔다.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어딘지 강압적인 분위기여서 레드후드는 기분이 언짢았다. 이럴 적엔 please,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거라고 웨인 가(家)의 집사 알프레드가 조언했지만 아무래도 사내애들이다보니 효과는 없었다.
『시동을 걸려면 열쇠를 꽂고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리는 거 맞지?』
시중에서 판매되는 바이크처럼 다뤘다간 점화장치가 그 자리에서 폭발한다. 도둑맞을 것을 염려하는 것도 아니면서 레드후드는 손버릇 고약한 이들을 겨냥해 악의적인 개조를 곧잘 했다.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살의가 충만하다는 점에서 그 성질이 매우 나빴다.
『흠집 내면 모가지 따버린다.』
마지못해 허락하며 레드후드가 투덜거렸다.

상당히 서둘렀어도 따라잡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말로는 살살 운전하겠다고 했으면서 순찰차는 시속 90km에 이르는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신호도 무시했다.
한적한 시간대여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운 나쁜 사람들 몇몇은 단순히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는 이유로 죽어나갔을 것이다.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네... 진짜.」
훔쳐온 쇼핑카트에 전 재산을 싣고 가던 노숙자가 질겁해선 이를 피했다. 야, 이 미친 경찰 새끼야 -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린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노숙자가 꽤나 귀한 재산이었을 통조림 깡통을 두 개나 집어던졌다. 하나는 참치 깡통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파인애플이었다. 요란하게 굴러가다 뚜껑이 벌어졌는지 지나치자 달큰한 설탕 냄새가 맡아졌다.

「진짜로 집으로 가는 방향... 아, 위험!」
끔찍한 졸음운전 같았다. 차량이 좌우로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인도 위로 바퀴 하나가 올라갔다. 균형을 잃은 순찰차는 정신없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신문 가판대와 정면충돌까지 앞으로 3초, 아슬아슬하게 다시 도로로 내려오더니 운 나쁜 쓰레기통을 멀리 튕겨냈다.
「저러다 차량전복을 일으키고 다시 죽겠는데.」
곡예하듯 좌회전 하며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을 적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딕 또한 바이크의 오른쪽 엑셀 손잡이를 미친 듯이 돌렸다.

D. 앤더슨은 어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인다...》
그리고 돌아누워 베개에 바로 얼굴을 파묻은 것 같았다. 어찌나 조용하던지 딕 그레이슨은 통화가 자동으로 끊어진 모양이라고 착각하고 재다이얼 버튼을 누를 뻔했다.
『앤더슨! 이봐요, 앤더슨!』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비상사태입니다! 마이클 윈저가 전하랬어요. 비상사태라고요!』
혹여 다시 잠든 것은 아닐까 싶게 핸드폰 너머는 다시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대답하는 앤더슨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Posted by 미야

2016/07/27 15:32 2016/07/2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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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하다 제대로 당했다 - 반사적으로 양팔을 수직으로 세워 가드하려 했지만 쓰나미 지나가고 방파제 세우는 격이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휘두르기가 왼쪽 어깨에서 쇄골로 이어지는 부위를 정확히 맞췄다.
「윽!」
초보자의 그것이라도 해도 수긍했을 공격이 통한 탓도 있었고...
다른 까닭이 보태어져 어깨를 움켜쥔 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병신육갑 떨던 그 망할 몽타주가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어?!」
배트맨 패밀리에게 붙잡힌 방화범이 (머리통을 벗겨버리겠다는) 협박에 순응하여 미스터 츄파춥스의 몽타주 제작에 협조한 적이 있다.
이를 묘사한 자가 향정신성 약물에 취해 있었다는, 배트맨 가라사대 보충설명 태그를 붙여놨던 문제의 몽타주는 딱 보기에도 B급 스플래쉬 영화 속 특수 분장 그 자체였다. 피부가 벗겨졌고, 눈꺼풀이 녹아내렸고, 뺨에 난 구멍을 통해 어금니와 잇몸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가닥가닥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비비드한 형광 주홍색이었다.
「뽑아낸 자료를 처음 봤을 적엔 드레이크의 재수 없는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레드로빈을 욕했다.
이렇게 보니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이건 누가 봐도 같은 제작자가 만든 할로윈 가면이었다. 같은 틀에서 찍어내 채색만 다르게 했을 뿐이다. 하나는 눈언저리의 두두룩한 살덩이 위로 파란색을 칠했고, 하나는 붉은색 물감을 칠했다. 단지 그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었다.
「그 방화범이라는 놈, 약에 취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칭찬을 받아야 할 만큼 열심히 해줬던 거군. 역시나 배트맨. 얼마나 무섭게 협박했으면.」

얼음 위를 스치듯 뒤로 미끄러져 공격자와 세 걸음 떨어졌다.
『좀비...?』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도 폐가 이완하고 수축하는 가슴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심장은 뛰고 있는가, 모르겠다. 그런 건 맥을 짚어봐야 확신할 수 있을 터다.
그런데도 움직임은 제법 자연스러웠다. 바닥에 떨어진 곤봉을 주워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휘두를 정도다. 밀림에 사는 원숭이도 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알지만 좀비는 도구에 대한 인식이 없다. 대다수의 뇌 기능이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지붕 위의 생존자를 노리기 위해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돌려야 한다는 걸 몰라 몸통 박치기부터 하고 본다.
「하지만 지금 저 남자라면 담장에 몸통 박치기를 하는 대신 창고에서 사다리를 가져올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 건가?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줘도 뒤통수 절반은 스프처럼 곤죽이 되어버렸을 텐데. 전부를 100%라고 했을 적에 뇌가 40%만 남아도 괜찮은 거였나?」

그때 마이클의 입이 벌어지면서 후우, 하고 긴 숨소리가 빠져 나왔다.
레드후드는 질색했다.
시체가 뿜은 입김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을 강철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 닦고 싶어졌다.

저것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여기요, 저기요 고함을 질러대는 딕 그레이슨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상체를 왔다갔다 흔들면서 흡사 뒤를 돌아볼 것 같은 동작을 취했으니까.
이때다 싶어 개조한 글록을 꺼내들어 좀비의 머리를 조준했다.

깡.

페이크였다. 순전히 돌아보는 척만 했을 뿐으로 레드후드는 어쩐지 그가 씩 (비)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곤봉이 손목을 후려쳤고, 충격으로 권총 자루를 놓쳤다.

『승ㅈㄹ이 ㅏ! 아오~!』
저 대사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어도 느낌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일 거라 쉽게 짐작이 갔다.
『젠장! 욕하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허리를 숙여 떨어진 이삭을 줍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서로 빼앗고 뺏는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왼손을 뒤춤으로 내려 예비용 권총을 꺼내들었다. 게다가 그는 양손잡이다.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완.전.히. 죽.었.다. 되.살.아.난. 뒤.부.터. 일종의 재활 훈련을 거쳐 지금은 왼손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정확히 조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씨ㅂ, 그러식ㄱ? 또 해ㅂㅗ자ㅜ!!』
떨어진 무기를 허겁지겁 주워 올린 마이클도 조준을 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발사 자세를 취하는 레드후드를 보자마자 천장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댔다. 이후로도 완전히 제멋대로여서 한 발은 눈 감고 바닥에, 한 발은 천장에, 다른 한 방은 벽면에, 그런 식으로 총알을 낭비했다.
아이러닉하게도 덕분에 대응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마이클이 레드후드를 노렸다면 이야기는 쉬웠다. 짐작하고 피하려면 총구의 방향만 보면 되었다. 그러나 무차별로 난사되는 총알 앞에선 손깍지를 하여 머리를 보호하고 자세를 낮추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 날렵하기로 소문난 딕 그레이슨도 날카롭게 비명을 질러댔다. 콘크리트 기둥을 맞고 튕겨나간 총알이 불꽃을 튕기며 코앞으로 날아와 바닥으로 기다란 흠집이 패이게 만들었으니 기겁을 할 법도 했다.

『이거 탄창이 며ㅊ발ㅉ아지?』
난사를 중단하고 그가 질문했다. 개조한 권총이라 탄창이 몇 발짜리가 들어가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3?』
정답은 22발이었다. 하지만 탄창이 비었다고 믿게 하고 싶었던 레드후드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글쎄.』
『뭐, 상관없ㅓ. 한ㅂ 정도는 남았게ㅆ지. 야, 새끼야, 방탄조끼 입어ㅆ어?』

타앙.

질문을 던진 것과 동시에 가슴 정 중앙으로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충격은 대형망치 여러 개를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의 몸 위로 동시에 떨어뜨린 것과 비슷했다.
『어훅... 씨발! 이러는 법이 어딨냐! 안 입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특수한 다이니마 소재의 상의는 훌륭하게 총알을 막아내었다. 그래도 몸에 구멍만 안 나게 만들었을 뿐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갈비뼈가 아려 속 편하게 기침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알겠더라, 있고 어ㅆ거 같았어.』
『추측일 뿐이잖아!』
『씨꺼, 샊갸. 암튼 안 죽었잖아.』
그리고 같은 위치로 또 한 방 쐈다.
『악!』
눈물이 찔끔 솟았다.

가운데손가락을 세운 채 마이클이 화를 냈다.
『짜증나게. 하필이면 얼굴을 망가뜨려서... 집에 가기 힘들게 되었잖아!』
『......집?』
『그럼 이 몰골로 술집에 놀러가리?!』
바로 맞받아치려 했는데「집」이라는 단어를 접하자 공격수치가 절반 이하로 왕창 깎여버렸다.

집으로.
돌아갈 장소로.

『아, 씨. 몰라, 짜증나. 지쳤어. 집에 갈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마이클은 밭에서 다 자란 무를 수확하듯 레드후드의 헬멧을 벗기려 했다.
상대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망가진 외모를 감출 헬멧을 얻는 것이 목적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손으로 강화 플라스틱 표면을 움켜잡고는.
『어우, 땀 냄새.』
뽑았다.


*** 여름 휴가를 맞아 치과 치료 중입니다. 써뒀던 걸 손보려던 계획은 종이짝처럼 구겨버리고 그냥 올려요. 이가 아프니까 만사가 귀찮고,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식사를 거의 할 수가 없음... 어제 점심에 국수 먹고 오늘 점심에 컵라면 먹음. 중간생략, 이하생략. 배가 고픕니다. 넹.

Posted by 미야

2016/07/21 14:53 2016/07/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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