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 백수는 숨쉰다

올해 1월 23일인가... 9년간 다니던 사무실 관뒀다.
당시에는 간절히 그만두고 싶었는데 4월까지 빈둥거리다 보니 인간적인 모욕은 다 감수하고 계속 근무할 걸 그랬나 후회하는 순간도 오긴 오더라. 3월까지는 정말 즐겁게 빈둥거렸는데 4월이 되니 기분이 급변했다.
지루한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에도 나만 계속 딱딱한 흙 속에 정체되어 있다는 그런 느낌?
여행을 가겠다고 다짐해 놓고 정작 시간이 많아지니 밖에 나가 버스조차 타기가 힘들다.
지금은 히키코모리다.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방구석에 숨었다. 계속 잠만 자는 거 같다.

객관화는 제법 쉬웠다. 유튜브에 나와 같은 상황을 호소하는 영상이 엄청 많았다.
그런데 뭐. 해결 방법이 있던가.
나이 쉰을 넘어 취업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력서 넣은 곳에선 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아, 뭐. 그래서 어쩌라고. 생각을 멈춘다. 그럼 약간은 편해진다.

아침 7시에 깨어났다가 8시까지 다시 잔다.
8시가 넘으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어디서 문자라도 날아오지는 않을까 긴장한 채로 간단한 식사를 한다.
스팸 메일과 광고성 전화가 간간이 온다. 전화벨 소리에 노모가 반색한다. 면접 보라고 연락왔니?
그럴 리 없다. 나는 웃는다. 그리고 멍하니 창밖을 본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심심해서 가방을 들고 마트에 나왔다.
저축해둔 돈이 있으니 당분간은 괜찮다. 옛날 하던 버릇대로 먹고 싶은 걸 골라 장바구니에 넣는다.
가격표를 보는 짓은 20년 전에도 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사고,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내 경제 철학은 그렇다. 그래서 낭비가 심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세일하는 품목을 고르라고 조언을 듣는다. 한성 유부초밥을 저렴하게 팔고 있다. 당장 먹지도 않을 거면서 샀다. 그럼 낭비가 아닐까.
궁금해 하며 과자 코너로 간다. 하지만 딱히 먹고 싶은 과자가 없어 느린 걸음으로 코너를 빠져나온다.
건강이 나빠져 탄수화물과 액상과당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어코 뻥이요 한 봉지를 손으로 잡았다.

가게에서 빠져나와 언덕길을 올라가며 하늘을 쳐다본다.
전깃줄 위로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았다. 불결한 낙하물을 경계하며 비둘기와의 거리를 가늠한다.
동시에 뭐 하는 짓이지 라고 한탄한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건지.


마흔 살이 되면 스스로 죽겠다고 주변에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딱히 생각해두지 않았다. 목을 매달아서? 번개탄을 피워서?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사실 난 그 전에 내가 건강 상의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돌연사 할 거라 믿었다.
그냥 쓰러져 죽겠거니 - 저승사자가 코웃음을 칠 일이다. 세상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나는 올해 쉰 넷이다. 여전히 건강 상태는 좋지 않지만 곧 죽을 거 같진 않다. 펄쩍 뛸 일이다. 세상에... 나 아직도 살아 있어?! 어떻하지?
그리고 나서 오늘 저녁 식사로 어제 만든 카레를 먹으면 되겠다고 다시 생각한다.

와... 뭔가 뻔뻔한 거 같아.

아무튼.



9년 동안 쳇바퀴 돌던 생활을 하면서 정말 괴로웠는데
쳇바퀴에서 내려와도 여전히 괴로운 건 반칙이다.

예수님.
원망할테다.

Posted by 미야

2024/04/24 18:27 2024/04/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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