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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프게 생긴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걸 멈추고 손을 도로 소매춤 속에 감췄다.
『어쨌든 나와는 상관이 없지. 어디 보자. 그럼 여기서 북쪽이...』
그리고 잠시 쓰게 웃었다.

방향 감각 제로.
미치고 펄쩍 뛸 일이다. 지도라는 훌륭한 문명의 이기도 절대 도움이 되어주질 않는다. 두서너 번씩 확인을 하고 계곡을 따라 걸음을 했건만 결론은「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시오」다.
마그너스는 고민했다. 글자를 똑바로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지도를 들었을 적에 그림의 윗 부분은 관행상 북쪽이 맞을 것이다. 더하여 지금 그가 가고자 하는 사일라그는 지도의 맨 윗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마그너스의 지팡이는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북쪽으로만 가면 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의 지팡이는 사흘 내내 남쪽을 향해 있었다. 왜 그럴까.

『사일라그로 가려면 계곡을 따라 내려가셔야지요.』
주문받은 냉동 사과를 배달하던 장사꾼이 어쩔 줄 몰라하던 그를 향해 참견해왔다.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이다. 하긴, 일직선 도로를 오르락내리락 왕복하는 것만 벌써 두 시간째다.
 
『계곡으로 내려가라니. 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계곡을 따라 내려가시라니까요. 이쪽 방향으로 가셔야 할 거요.』
『내려가?』
『내려가는 겁니다.』
『북쪽이니까 올라가야 맞지 않나?』
『참 답답한 분이네. 그거랑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과는 얘기가 서로 다르잖습니까.』
그러면서 사과 장수는 무겁게 혀를 끌끌 찼다.

맞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마그너스는 사과 장수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이쪽이다.
『틀려, 틀리다니까! 이곳 레고지엔은 우물을 가운데 두고 윗 마을과 아랫 마을로 나눠집니다. 윗 마을로 가야 계곡으로 갈 수 있다고요. 여긴 아랫 마을입니다. 계곡으로 나갈 수 있게 뚫린 길이 없어요.』
『아까는 내려가라고 했지 않았나.』
『계곡을 따라 내려가라고 했지, 누가 마을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소? 그냥 윗 마을로 올라가세요, 나으리.』
『올라가는 건가, 내려가는 건가. 아님 나 더러 지금 죽으라는 건가.』
『진짜 답답하네. 윗 마을로 올라가 계곡을 따라 내려가시라고요!』
이런 식이라면 사일라그까지 천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마그너스는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올라가라고?』
『윗 마을까지만 올라가고 다음엔 내려가는 겁니다. 어휴~!』
넌 바보냐 - 사과 장수의 탄식이 목에 걸렸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설명해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레-이위는 꽤나 자신 없는 눈치로 은화 닷푼을 주고 구입한 지도를 한숨과 같이 둘둘 말아 도로 품에 넣었다. 봇짐을 진 사과 장수가 불안한 시선을 힐끔거렸다. 저놈의 지도는 장식품이 맞다. 또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트는 걸 봐선 단순히 지도 탓만은 아닌 것도 같다만. 하여 고함은 또다시 터져나왔다.

『이곳이 계곡으로 보여?』
야단맞는 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싫은 법이다. 레-이위 마그너스는 무작정 고개부터 떨궜다.
『당신 눈은 해태야? 도중에서 안 꺾었어? 언덕을 향해 무작정 올라왔다고?』
기념비적인 산적 데뷔를 위해 언덕에 대기하고 선 사내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사일라그?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그것도 한참 반대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라 헤매는 것도 정도껏 하셔야지. 마이애미로 가겠다며 캐나다 국경 방향을 향해 이틀 내내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밟아댄 꼬락서니... 물론 이 세계엔 마이애미도, 캐나다도 없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거기다 지도는 거꾸로 들고. 솔직히 불어. 길을 잃어버렸다는 건 순전히 공갈이지? 당신, 그냥 설교가 하고 싶어져 아까 술집에서부터 날 따라온 거 아냐. 내 말이 맞지? 오지랖 넓으신 사제 지망생 나으리님.』
레-이위는 화들짝 놀랐다. 이런 오해는 딱 질색이다.
『절대로 아니야! 그쪽의 뒤를 밟아온게 아니네! 내가 뭐 하러.』
『말은 잘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땀을 질질 흘려.』
『언덕을 30분이나 걸어서 올라왔네. 땀이 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지.』
아니, 아니. 지금 땀 흘린 것이 대수냐. 마그너스는「걍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지도로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거꾸로? 거꾸로?!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어?! 정말로 땀이 나는 것 같다. 그것도 식은땀이다.

『어이? 지금에 와서 지도를 보는 척해도 늦었어.』
웨더라는 이름의 친구는 버럭 화냈다.
『사일라그로 간다면서 이 언덕으로 올라왔다는 거짓말을 누가 고스란히 믿어줄 거 같냐!』
화만 냈던가, 펄펄 뛰었다.
『하여간 신을 섬기는 족속들이라니!』

『오해라니까. 거기다 나는 특별히 신을 모시거나 하고 있지 않네. 이 옷차림 때문에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한데 이건 순전히 보온성과 통기성을 강조한...』
『시끄럿, 사제 지망생! 내가 한 두 번 당해봤는지 아나. 안 봐도 뻔해. 산적질은 나쁘다느니, 회개하고 착한 사람이 되라느니, 신을 믿고 천국 가라느니 떠들면서 어떻게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보겠지. 내 심정이 지금 어떤지 알기나 해?! 불명예를 안은 검사의 기분이 어떤지 눈꼽만큼도 모르면서!』
『모르이.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안녕. 잘 있으시게. 나는 그만 가 보겠...』
『어딜 가!』
『왜 이러시나. 잡지 마시게. 나는 갈 길이 먼 사람이라네.』
『멀든 가깝든, 일단은 기다려!』
『어허라, 더 얘기할 것이 뭐가 있겠나. 그쪽은 산적질을 계속 하시게. 방해할 생각은 없다네.』
『당신 바보야? 사일라그는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
『이쪽!』

이렇게 되면 저주받은 거라고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레-이위 마그너스는 하얗게 질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젠장, 나에게 동서남북의 개념에 대해 다시 설명해달라. 아니면 모든 길은 사일라그로 통한다고 말해주던가.
 
『와. 진짜 바보네.』
웨더 크라우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역대 거짓말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거였어. 사실 나는 산적 데뷔를 하겠다는 댁이 걱정되어 따라온 것이 아니라 끝장의 방향치인 탓에 길을 잃어버린 거랍니다 - 이게 사실이라면 개가 웃을 노릇이지.』
『멍멍. 개가 웃었네.』
『.......... 우엑, 정말인 거야?』
『북쪽으로 가려면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방향은 높이완 상관 없지.』
『위도는 높이의 문제가 맞네.』
『그치만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건 위도가 아니라 고도의 문제지. 그리고 이거 아슈? 사제 지망생 나으리님. 난 지금 산적 데뷔 중이라는 거.』

청년은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을 툭툭 건드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레-이위 마그너스도 정색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거 싫은데. 설마... 내가 처음인 건가?』
『처음이다.』
『믿기질 않는군. 그쪽이 산적 데뷔하러 나간지 시간이 제법 흘렀을 터인데... 그동안 이 길로 단 한 명도 안 지나갔다고?』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한 명도 안 지나갔다.』
『맙소사. 그럼 내가 산적 데뷔야?』
『바로 그렇다. 자! 갖고 있는 거 다 꺼내놔!』

Posted by 미야

2009/03/24 13:09 2009/03/24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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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9/03/24 23:40 # M/D Reply Permalink

    오래간만에 슬레이어즈이군요~~~꺄아~~~

    벗뜨 리나와 제르가디스가 나오질 않아용..엉엉..

미확인 원고 일부

※ 어느 원고의 일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르가디스가 “마법의 힘으로 사람이 순간이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를 순찰대원에게 설명하는 장면이네요. 이거 뭐지? ※


사내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에... 또... 그 내용이...』
반복된 훈련으로 대단한 마법사 앞에서도 번데기 주름을 잡을 수 있었다. 고위 관리직의 귀족도 오랏줄로 포박한 적이 있는 몸이다. 범죄는 물럿거라.
허나 아무리 잘났어도 생소한 분야 앞에선 죽을 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가 시어머니 저녁상을 준비하는 며느리의 기분이다. 간장종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설탕은 또 어디 숨었나. 국그릇과 밥사발은 왜 안 보이나. 손바닥에서 땀은 나는데 밥상에 올려진 건 허연 김치가 전부다. 살려달라. 비참함을 하나 가득 담아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방은 성의를 갖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자신의 부족한 머리로는 그 내용을 반의 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제 이해가 좀 가는가, 선생.』
『솔직하게 말하리다. “아마도 그런 것 같소” 라곤 양심상 말 못 하겠소.』
『간단히 말하자면 모르겠다는 거군.』
그나마 상대의 인내심이 보통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충분히 짜증이 나고도 남았을 터인데 이름이 제르가디스라고 한 이 소년은 지금까지 목소리 톤에 변화가 없었다. 몰라? 하는 수 없지. 그럼 다시 설명한다. 침착한 태도로 아까 했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려 했다.
맥기는 머리를 긁어댔다. 저쪽은 아니어도 슬슬 이쪽이 돌아버릴 지경이다.

『제발 상상력을 발휘해보라고. 자! 이 접혀진 종이를 사람이라 가정하고...』
급조된 퍼포먼스의 보조로 예의 금발의 검사가 동원되었다.
가우리는 제르가디스가 시키는대로 네 번 접혀진 종이의 한쪽을 손으로 잡았다. 그 반대쪽 종이는 제르가디스가 단단히 붙들었다. 설명은 계속되었다.
『가우리? 종이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
『응.』
『이 상태에서 내가 종이를 잡아당기면...』
가우리가 힘을 빼고 있었기 때문에 종이는 제르가디스 손으로 무사히 옮겨갔다.
『원래는 이래야 한다는 거야.』
소년은「사람」역할을 해준 종이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코앞에서 흔들어댔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요.』
맥기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 난 바보다. 상상력 짧다. 손가락으로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를 번갈아 가리켰다.
『종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갔소. 그런데 뭐요. 뭐가 잘못이라는 거요.』
『아직까지는 잘못이 아니지. 실제로는 일이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게 바로 문제라고. 자, 이번에도 이 종이를 사람이라 상상을 해. 그리고 눈여겨 잘 보라구. 가우리? 이번엔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어.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투로 잡고 있으라고.』
『알았음.』
『종이는...』
이번엔 달랐다. 제르가디스가 종이의 한쪽 끄트머리를 힘주어 잡아당기자 종이는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이런 식으로 동강이가 나는 거다.』

팔짱을 끼고 찢어진 종이를 노려봤다. 종이가 사람이고, 그 종이가 찢어졌다는 건 이해했다.
그런데 말이지. 도대체 누가, 무엇이, 어떤 (무식한) 힘이 종이를 - 사람을 - 지금처럼 잡아당기고 놓는다는 건가.

『일단은 미지의 힘이라고 해두지, 선생.』
제르가디스는 반토박으로 찢어진 종이를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이것으로 다섯 번째다.
슬슬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제르가디스는 조심스레 상대의 반응을 떠보았다.

직업상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만 충실한 맥기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엔 영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죽을 힘을 다해야만 했다. 한참만에야 맥기는 사람을 김밥처럼 둘둘 싼 멍석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망할 멍석을 천둥번개의 신이 서로 이리 주시오, 마시오, 잡아당기는 것이다.
『멍석이 아니야!』
『그런게 아니라면... 카펫이오?』
소년은 실소했다. 멍석이나 카펫이나.
『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마법을 설명하는 건 진짜 어렵군.』
설명하려다 날 밤 지새겠다. 혼잣말 도중에 제르가디스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여하간 이것이 지금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의 실체다. 사람이 죽은 원인이지.』
『잠깐만 기다리시오. 궁금한게 하나 있소.』
『질문해봐.』
『일단은 “미지의 힘” 이라고 표현한 건... 댁들도 정확하게는 잘 모른다는 거요?』
『유감스럽지만 그 말이 정답. 이거다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우리에겐 없어.』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세계는 불확정성으로 가득찬 수수께끼의 퍼즐이다. 위대한 현자들도 약간의 그림을 놓고 나머지 모양을 대충 상상할 뿐이다. 조각은 작았고, 전체의 모양은 지나치게 크다. 따라서 완성된 그 모양이 코끼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정작은 기린이었다, 식의 일들은 빈번히 발생했다. 이러한 류의 착각은 분명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원망하려면 작은 눈과, 왜소한 머리를 창조한 조물주를 원망해야 한다. 보이지 않음에, 그리고 알 수 없음에... 어차피 인간은 방대한 우주 앞에 고개를 떨구게끔 되어 있다.

『그럼 다시 설명해볼까. 이 종이를 사람이라 가정하고...』
지치지도 않나 보다. 제르가디스는 여섯 번째로 종이를 접으려 했다.
으악 소리를 내며 그걸 재빨리 가우리가 만류했다. 제발 그만 좀 하십시다. 가우리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막고 (약간의 토기를 느꼈던 것 같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Posted by 미야

2009/03/24 12:52 2009/03/24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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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9/03/24 23:44 # M/D Reply Permalink

    어라? 왠지 마족이 아닌 이상 어떤 공간에 들어서면 사람이 죽게 된다는 이야기인듯 싶군요.. 그런데.. 원작에서 제로스가 사람을 데리고 이동한 장면은 하나도 없었던가...먼산 -_-;

  2. 환유 2009/03/25 01:15 # M/D Reply Permalink

    조사 시리즈네요~ *_* [조사를 시작하노라] 로 시작했던! 뒷부분 보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다 ;ㅁ;

  3. 미야 2009/03/25 09:25 # M/D Reply Permalink

    삭제하기 전에 남겨두길 잘한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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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사내다.
외모도 출중하겠다, 실력도 좋겠다, 마음씨 참하겠다, 왕실에서 진작에 눈독을 들여 기사단에 들어와 일해볼 생각 없느냐 넌지시 스카웃 제시도 한 모양이다.「그러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면 팔자가 확 달라질 판이었다. 그러나 가우리란 자는 이미 정해진 자리가 있다며 그 좋은 제안을 극구 사절했다.
제가 원하는 건요, 아저씨. 끼마다 배부르게 먹고, 배꼽 친구가 손닿는 곳에 있고, 심심할 적마다 마실 수 있는 몇 통의 사과술만 있으면 되어요.
졸지에 아.저.씨.가 되어버린 왕실 대리인은 당혹감에 멀쩡한 콧수염만 꼬았다.

『호오, 그 정해진 자리라는 곳이 제피리아였나?』
『제피리아였네. 남작이 매 식사마다 배불리 먹게 해주겠다고 약조한 모양이지, 뭐.』
지난 저녁 성찬을 떠올리며 무심코 군침을 삼키고 보는 죠르프였다.
『그리고 배꼽 친구랑 같이 으라차차?』
『듣기로는.』
『으음.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무시할만큼 소중하다는 배꼽 친구들이라는 것이... 저치들이야?』
뒤쪽을 향해 가만히 턱짓했다.

가우리와 같이 따라나선 두 기사의 이름은 정글스와 부르무이다.
연령대는 얼핏 보기엔 가우리보다는 약간 위로 보인다. 하지만 신상명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니 정말로 어떠한가에 대해선 판단이 불가능하다. 혹시 또 아는가. 겉으로만 늙어보이는 것일 수도. 아니면 구렁이와 사촌이라 100살이 넘었을 수도 있다.
웨이브진 천연파마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정글스는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냥 봐선 화가 단단히 난 사람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성격 탓이 아니라 단순히 엉덩이가 아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보니 말을 탄 자세가 대단히 어설프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 질문하면 재빨리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친절하게 말대꾸를 해주는데 돌아서면 마누라와 대판 싸우고 온 상태로 원상복구. 찡그린 눈썹을 풀면 썩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 껌처럼 딱 붙어가는 부르무는 매몰차다는 느낌이다. 진한 초컬릿 빛깔의 망토로 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데다가 후드 아래로 드러난 차가운 얼굴 덕분에 근접이 힘들다. 덕분에 지금껏 부르무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르무 본인도 이제껏 입에 담은 말이라는 건「어이, 거기 나뭇가지 조심」이 전부다. 그게 아니었다면 혹시 벙어리인가 의심했을 것이다.
이런 타입은 곤란하다 - 죠르프는 은밀히 걱정했다. 신중하고 무거운 입... 백주대낮에 대로를 질주하는 기사라기 보다는 영주로부터 내려진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는 첩자라는 느낌이 있다. 왜 있잖는가. 각도 깊은 지붕을 맨발로 달려가고, 던지는 나이프마다 백발백중에다가, 달 없는 야밤에 강물 속으로 잠수해서 사라지는, 그런 사나이.

『신경쓰이나.』
『물론일세.』
당연한 거 아니냐며 죠르프는 배꼽 친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야밤에 표창이 슝슝 날아다니는 건 질색이란 말일세.』
하지만 정작 죠르프의 걱정스런 눈길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 부르무에서부터 시선을 약간만 돌려보자. 오른쪽에서 약간만 더. 그러면 보일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 아니, 소녀가 말고삐를 죽자 살자 쥐고 있는게 말이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실제로는 많이 지쳤다. 근성 하나로 기절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다는 걸 전투의 프로는 한 눈에 알아차렸다. 경련을 일으키는 팔뚝, 힘줄이 돋아난 이마, 핏기 가신 뺨은「당장 죽을 거 같어. 살려줘~!」를 외치고 있었다.

로머디스는 긍정했다.
『문제군.』
『문제지.』
다만 여기서의 문제는... 죽을 똥을 싸는 그녀가 아니다.
옆에서 조금만 더~! 응원의 구호를 외치는 금발의 청년 기사가 바로 문제다.

아가씨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흡사 동생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착한 형님 같다. 움푹 파인 도랑이 나타나면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를 해준다. 그리고 안전하게 잘 뛰어넘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때때로 마실 물도 권한다. 달리는 속도가 늦춰질 적엔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며 기운 내라고 꼭 어깨를 친다.
그럴 적마다...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의 눈이 야광충처럼 번들거린다는 것이 공포스럽다.

지가 뭐라고 눈에 힘주는 건데?!
주인된 자의 감정 상태가「구질구질함」정도가 아니라「거지발싸개 같음」이라는 걸 깨닫자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이거, 무지 불안하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서로 눈짓했다. 보름 전쯤인가, 스토커처럼 따라붙던 엘리스 양이 집안 거실에다 자기 초상화를 무단으로 붙여놓고 도망갔을 때보다 분위기가 더 살벌하다. 그림을 두짝으로 분질렀을 적엔 그런가보다 넘어가기라도 하지. 행여라도 사람을 무릎팍에 올려놓곤 둘로 분지를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뭣 땜시? 기사가 아가씨를 섬기는게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마침 가브리에프가 리나를 향해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자기가 한모금 먼저 꼴깍 먹고 아가씨를 향해 물주머니를 건냈다. 아닌게 아니라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반색하며 주머니를 받아 뚜껑을 열었고, 이윽고 턱을 번쩍 들어 마음껏 원샷이라는 걸...

『기, 기다렷! 기다리십시오!』
그러니까 거기서 딴지를 거는 당신이 비정상이라니까요.
『누가 입을 대지 않은 새 물 주머니를 가지고 오십시오.』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요.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오면 되지요!』
우길 걸 우겨요.
로머디스는 폭삭 늙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번개처럼 무두질을 해서 즉석으로 가죽 물 주머니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요. 네? 차라리 호숫가로 내려가서 손바닥으로 물 바가지를 만들어 모두의 목을 축일 물을 길어오라고 하시지 그러슈.

죠르프가 휘익 휘파람을 불어 신호했다.
어쨌거나 핑계가 좋다. 쉬어가자.

가브리에프가 자연스럽게 리나의 말고삐를 잡았다. 달리던 말이 걸음을 멈췄다.
아, 지쳤다. 소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말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다리가 저려서 그런지 엉거주춤한 자세다. 시험삼아 몇 걸음 떼어보지만 게다리 걸음으로 겨우 세 걸음 걷고는 좌절 삼태기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바깥으로 굽혀진 무릎이 원 위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똑바로 걷는다는 건 애시당초 무리다. 벌레에게 고추를 물린 어린애처럼 두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엉거주춤 움직이는 것밖엔 할 수 없다.

그런 리나를 보고 기사들 중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들도 그런 꼬락서니로밖엔 걸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워낙에 그 모습이 웃기니까 웃고 봤다.
이것들이. 웃었어?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후작이 으르렁댔다.
로머디스가 눈알을 굴리며 어이 없어 했다.
그거 참. 답지 않은 레이디 보호 정신입니다요. 언제는 자기가 제일 먼저 웃었을 거면서.

이런 정신 사나운 분위기 속에서 리나 인버스가 서글픈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웃기니까 웃으라고 해요. 나도 웃긴데 뭐.』
『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리나양. 무엇이 웃기단 말입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보여준 승마 솜씨에 관하여 마음껏 찬사를 보내고 싶은...』
『위로의 말씀은 그만하시면 됩니다, 후작님. 내가 지금 어떤 꼬락서니인지는 제가 더 잘 알고 있거든요. 으아, 정말 한심하네. 운동 부족이었나봐. 엉덩이부터 안 아픈 곳이 없네.』

여자가 대놓고「엉덩이」운운해도 괜찮은 것인지는 나중으로 미루자. 간단한 맨손 체조를 시작하면서 그녀가 뒤로 엉덩이를 쑥 뺐다. 팔을 앞으로 길게 내밀고 옆구리 구부리기, 허리 뒤로 당기기... 읏샤읏샤 기합을 넣어가며 움직였다. 마무리로는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기까지.
더 놀라운 건 제피리아에서 따라온 일행 모두가 그런 그녀의 동작을 순서에 맞춰 따라했다는 거다.
제피리아에선 모두가 이런 체조를 하고 있나?
다른 건 몰라도 음침한 사내 부르무가 깡총뛰기를 따라하는 광경은 엽기 그 자체였다.
『결린 몸을 풀어주는 체조입니다. 관절이나 근육에 좋아요.』
『정말인가요? 아가씨.』
『그렇고 말고요. 그레이워즈 후작님도 긍정하실 걸요. 그렇죠? 몸이 편해지죠?』
이런. 저편에서 후작이 체면 불구하고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에 맞춰 모두가 뒤로 엉덩이를 뒤로 쭈욱...

어쨌거나 햇님의 기울어진 각도를 봐선 사람에게도 슬슬 영양보충이 필요할 때다. 말들을 쉬게하고 각자 알아서 자리를 펼쳤다. 슬프게도 솥을 걸어놓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육포와 말린 빵, 약간의 건포도와 과일로 주린 배를 달래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배가 고프다 그거 하나는 계속 불평하던 리나 인버스는 맹물에 풍덩 담가놓은 빵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다. 물에 불리기 전엔 이빨도 안 박히는 빵이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봐도 버터 냄새는커녕 밀가루라는 느낌도 안 난다. 흡사 돌덩이 같다.
『이, 이걸 먹으라고...』
하지만 허허벌판에서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익히지 않은 살코기나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음식은 풀밭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복사열에 금방 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린 빵이야말로 야외 생활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문명의 만찬인 셈이다.

『복통으로 죽을 것인가, 아님 맛이 없어 죽을 것인가의 선택인 거지.』
『그럼 기왕 죽는 거, 복통으로 죽을래.』
『오냐, 네 소원대로 그럼 내일 아침은 썩은 스프로 하지.』
뒤집어질 일 또 하나.
제피리아는 아주 이상한 곳임이 분명하다. 기사가 영주의 딸에게 반말을 찍찍 한다.
그리고 그 영주의 딸도 기사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막 한다.
정글스는 그게 뭐 대수냐며 물을 마셨다. 리나 인버스 역시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물을 마셨다.
그들 뒤에서 가우리 가브리에프는 맹렬하게 빵을 뜯어먹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9 10:36 2008/03/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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