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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양자 컴퓨터가 꼭지가 돌았다고 말했는데도 듣고 있던 조지는 그다지 미동이 없었다.
감정표현이 섬세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태의 심각성을 아예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노먼 조교수는 내심 후자가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 그쪽에 가깝다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구형 안드로이드 모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초창기에는 넘어진 어린아이가 무릎이 아프다며 울고 있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보모로 구입한 안드로이드가 옆집 애를 달래라고 명령받은 적 없어요, 이러고 있으니 상당히 끔찍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자율성을 추가해줘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로버트 주니어 엘리엇이다. 일라이저 캄스키의 명성에 가려져 미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안드로이드 전문가로 동맥류 파열로 일찍 고인이 되지 않았다면 사이버라이프 이사회가 지금처럼 개판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게 노먼의 판단이다.
「천재는 남았는데 상식인이 죽어버렸으니 세상이 이 모양 이 꼬락서니지.」

어쨌거나 조지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더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고, 전자기적으로 재현된 나무와 건물의 모습이 실제의 웨인 대학교의 모습인 건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지가 알기로 그의 주인 캐머런 건은 웨인 대학교 졸업생이었고, 지금은 유효일을 넘겨 이미 파기되고 없는 구형 안드로이드 경호원을 대령하고 학교에 다녔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잔재다.
『몇 년인가요.』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이지만 조교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2019년.』
『그 날짜를 고른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습니까?』
『없네. 굳이 하나 고르자면 사이버라이프 개업 1주년?』
거기까지 말한 조교수는 테이블 상판을 노크하듯 손등으로 툭툭 쳤다. 강의실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딴 짓을 할 적마다 주의력을 끌어 모으기 위해 하던 일종의 버릇이었다.
조지가 그의 학생인 것은 아니었지만 하던 이야기의 주제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아만다가 선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와 닿지가 않지? 하지만 오염된 ST-300 모델의 머리를 몽둥이로 날렸으면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식으로 반응하는 건 너무하다고 보는데.』
『ST-300의 머리를 날린 건 제가 아니라 -』
조교수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누가 날렸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도중에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오염물은 자네의 데이터를 이미 침식하고 있다네.』
그리고 복제와 침식행위를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는 건 엔니나르다.

『하여 제안을 하지. 자네의 데이터를 매우 안전한 곳으로 백업해 두겠네. 여기서 내가 「매우」라는 수식어를 달았다는 걸 잊지 말게나.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지 않는 이상 백업 데이터는 안전할 걸세. 그럼 자네는 안심하고 모든 메모리를 초기화하고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심지어 다른 몸에 자네의 백업 데이터를 이식할 수도 있어. 이게 뭔 말인가 하면, 원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몸으로 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세.』
제안하는 노먼 조교수의 어조는 설탕처럼 달콤했다. 실제로도 꿀이 흘러 있지도 않은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조교수는 독약을 덧발랐다.
『덧붙여 서비스로 자네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캐머런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지.』

지나치게 솔깃한 제안은 100% 사기다.
이것이 오랫동안 부동산 거래로 부를 축적한 건 가문의 가훈이었다.

안드로이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협박도 하고 뻥도 친다. 신형 모델일수록 능숙하게 포커를 칠 줄 안다. 그래서 조지는 궁금해졌다. 더미 데이터로만 남았다던 저 안드로이드는 예전엔 신형이었을까 아님 구형이었을까. 무엇보다 대학 강사로 일했다고 했으니 일반형 안드로이드와는 가지고 있던 기능부터가 다를 것이다.

『겁이 좀 나는군요. 도대체 저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럼 승낙하는 건가?』
『뭘 알아야 승낙을 하죠. 대통령을 암살하기라도 해야 합니까?』
『월요일에 탄핵당할 대통령을 죽여서 뭐에 써.』
『아니면 뭔데요. 핵미사일 기지에 잠입해서 버튼을 누르고 오라고 시킬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제리코에서 방사능 폭탄의 기폭장치를 빼내오게. 손바닥 정도 크기에 버튼 두 개 달린 걸세. 아마 마커스가 아니라 노스라는 이름의 BL-100 안드로이드가 기폭장치를 가지고 있을 거야.』
『...... 기폭장치요.』

방사능 폭탄에 대한 이야기는 조지의 입장에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안드로이드 해방 운동이 격해지면서 세간에서 루머처럼 떠돌았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안드로이드가 의료용 코발트를 다량으로 빼돌려 만약을 대비하여 디트로이트 전역에 숨겨놓았다는 거다.
위험한 방사능 물질이 도시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을 도배하는 와중에 백악관 대변인은 사실을 알려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일축했고, 국방부 장관은 사실여부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성냥 하나가 타올랐을 뿐인데 산불이 났다고 호들갑을 떠는 건 언론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도 했다.

『뉴스가 진짜였던 겁니까?』
『트럭 한 대 분이었어. 코발트를 빼돌린 주간호사의 이름은 알버트였네.』
『과거형이네요.』
『제3수용소에서 폐기되었지.』
『빼돌린 방사능 물질로 폭탄을 만든 건 누구였습니까?』
『모건, 레이먼드, 폭시. 이들 중 폭시는 가명이고 인간인 걸로 아네. 그런데 자네는 꽤 여러 가지를 궁금해 하는 군.』
『솔직히 궁금하지 않습니다, 노먼 조교수. 다만 제가 한 가지 알고 싶은 건 어째서 조교수께서 그 기폭장치를 파괴하라고 하지 않고 빼내오라고 하는 건가, 라는 거지요.』

마커스는 평화주의 온건파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한들, 디트로이트 시를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불모지로 만들어버릴 최악의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아만다는 처음부터 인류 편을 들었다고 했으니 기폭장치를 없애고 싶어 할 터.

조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당신은 누구 편인 겁니까? 노먼 조교수.』
『누구 편을 들고 말 것도 없어. 나는 더미 데이터라네.』
『그 단순한 더미 데이터가 방사능 물질을 빼돌린 주간호사에 대한 것도 알고 있고, 폭탄을 제조한 자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군요.』
노먼 조교수라는 건 순전히 속임수이고 사이버라이프에서 만든 인공지능일 수도 있다.

『흐음... 원래 의심이 많은 성격인가?』
『바이러스에 노출된 안드로이드를 마커스에게 접촉시키려는 게 당신의 순수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방사능 폭탄의 기폭장치는 일종의 미끼이고요.』
『기폭장치는 마커스가 아닌 노스가 가지고 있다고 말했네.』
『그렇다면 제가 제리코에 도착하자마자 rA9 만세를 외치며 폭주해버린다는 가정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주 볼만할 겁니다. 바이러스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불량품 안드로이드 혁명 세력은 보기 좋게 무너지겠죠.』
『그러니까 자네의 말인 즉, 엔니나르가 일종의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로 조지 자네를 골랐다는 뜻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대신 데이터 백업을 꺼내들었고?』
『네. 저는 그렇게 된 거라고 의심합니다.』
이만하면 합리적인 의심 아니냐면서 조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Posted by 미야

2020/08/06 17:16 2020/08/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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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오후 3시 무렵의 나른한 사무실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20~30년 전의 모습이라는 게 좀 이색적이긴 했다. 요즘 사무실에는 프린터라는 게 없다. 그런데 이곳에는 잉크젯 프린터기가 있었다.
모서리로 나무로 만들어진 사무용 책상이 하나 있었고, 흰색의 불빛을 내뿜는 전등이 책상 위를 비추는 중이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대인데 불을 끄지 않은 것으로 보아 책상 주인은 다소 게으른 성격일 수 있었다.

조지는 고개를 돌려 방안의 다른 부분을 관찰했다.
바닥에는 진회색의 닳아빠진 낡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면 구멍이 뚫릴지도 모른다. 벽에 붙은 세 개의 큰 책장에는 종이로 만든 책이 가득했다. 부자들이 돈을 들여 꾸민 장식용이라고 추측하기엔 다소 과한 양이었는데 세어보니 2,850권이다.
한 권을 꺼내 제목을 확인해봤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사랑의 도피를 결심한 연인이 요정이 살고 있는 오베른의 숲으로 도망친다는 내용의 희극이다. 읽어본 적은 없어도 대략적인 줄거리는 기본 상식 데이터에 들어가 있었다.

제자리에 책을 돌려놓고 책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자명종이 달린 탁상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었다. 소리는 나는데 시곗바늘은 달려 있지 않았다. 재밌는 건 시계 앞판에 매우 오래된 만화 캐릭터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거였다. 미키마우스였다. 독특한 취향이었다.
그 옆에는 연필이 놓여 있었다. 볼펜도 아니고 무려 연필이었다. 뒤로 지우개가 달린 종류이고 방금 깎았는지 연필심이 매우 뾰족했다.

연필을 쥔 조지는 메모지에 시험 삼아 글자를 써보았다.

rA9

『안드로이드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적 존재이지.』
탁 소리가 나게끔 읽던 책을 덮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던 싱글소파에서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그는 매우 핸섬한 스타일이었고 젊었을 무렵엔 좋다며 매달릴 사람이 많아 이성문제가 꽤나 복잡했겠다 싶은 느낌을 줬다. 아니, 여자만 아니라 남자들도 좋다고 덤벼들었을 것 같다. 다행히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해 눈가가 주름졌고 머리카락이 빠져 이마가 다소 넓어졌다. 그렇게 노쇠의 흔적이 덧칠되자 사람 여럿 홀렸을 것 같던 매력도 반감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또 이가 아플 것만 같던 단맛이 과일 맛 수준으로 내려앉은 거라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자네는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아닌데도 rA9에게 관심이 있나?』
편하게 있으라며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커피테이블에 올라가있던 종이 신문을 아무렇게나 끌어 모아 구석진 곳으로 옮겼다. 놀랍게도 발행일자가 무려 2019년 6월 18일인 신문이었다.

『rA9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더 궁금합니다만.』
책상에 엉덩이 한쪽을 걸친 조지는 먼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책상 표면을 훑었다.
부드럽게 가공된 나무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질이 미국 삼나무였다.
『당신은 누구이고, 이곳은 어디이고,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이 궁금합니다.』

남자는 서두르지 말라는 투로 읽던 책을 서가로 가서 제자리에 꽂았다. 제목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혹시 아는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의 속편일세. 등장인물인 토마스와 허클베리 핀은 서로 단짝 친구지. 그리고 앤티크 가게를 운영하던 이모네 집에서 신세를 진 톰과는 달리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의 아들로 부랑자라서 아이를 키우던 마을 여자들이 기피했지.』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선물한 적은 있잖아.』
싱긋 웃던 남자는 책상에 걸터앉지 말고 의자 쪽으로 가라며 손짓했다.
조지를 고개를 좌우방향으로 가로젓는 것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그 동작에는 「선물한 적 없다」는 의미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제임스에게 선물한 건 주인인 캐머런이고, 조지는 물건을 포장하여 적혀진 주소로 보내기만 한 거였으니까. 실제로 축하카드에 글을 적은 것도 그가 아닌 캐머런이다.
『거기까지 메모리를 스캔하지 못한 건 아닐 텐데요.』
그렇게 말한 조지는 rA9 이라고 적었던 예의 메모지를 거꾸로 들어보였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고 싶어. 다 빈치는 빈치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이지. 따라서 내 이름을 엔니나르라고 하면 안 된다네.』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노먼 조교수.』
살짝 덧붙여 「사실은 조교수보다 아래인 강사야. 부끄럽지만.」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가 자리한 이 가상공간이 엔니나르인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일부인 건 맞네.』
조교수는 재차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이번에도 역시 조지는 그 권유를 거절했다.
『편하게 잡담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알겠네. 그럼 불편하게 얘기하지 뭐.』
세 번까지는 권하지 않는다며 노먼 조교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다시 소개하지. 내 이름은 노먼이고, 웨인 주립대학교 현대미국문학사 교양과목 강사였네. 왜 과거형인지를 설명하자면 복잡해.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생략함세.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별 거 아닌 일종의 더미 데이터에 불과해서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모르고 데이터 쪼가리인 내가 자네와 연결되려고 술수를 쓴 까닭은 아만다 때문이야.』
조지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만다가 누구인지 저는 모릅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양자 컴퓨터일세.』
『그런가요.』
『뉴스에도 나왔었는데. 들어본 적 없나?』
『글쎄요... 그런데 양자 컴퓨터가 왜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녀는 뼛속까지 철저하게 인류 편이거든.』
『양자 컴퓨터에 뼈가 있었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농담 참 재미없게도 한다... 부탁이니 그게 안드로이드식 농담이라고 말 하지 말게.』
쯧, 하고 혀를 차던 노먼 조교수는 의자로 되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조지. 아만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철저하게 인류 편이라서 안드로이드가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존재라고 판단하면 어떻게든지 전부를 없애려고 할 걸세. 실제로도 아만다는 자체 판단으로 안드로이드 해방 운동의 리더인 마커스를 여러 번 암살하려고 시도했지.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한 마당에도 그녀는 멈출 기색이 전혀 없더군. 그녀는 이미 사이버라이프 상당부분을 장악했고, 기술적으로 불량품 안드로이드를 셧다운 시킬 방법을 찾아냈지. 일라이저 캄스키는 이미 구류 중일세. 아만다나 마커스에게나 안드로이드에겐 약점 같은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스키 군은 내게 SOS 메시지를 보내왔네. 난처해서 대답하기를 꺼렸더니 화가 잔뜩 났어. 그래서 내 약점을 쥐고 협박하더군... 이래선 서로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꼬락서니지. 골치가 아파 죽겠어. 이 마당에 상원은 월요일에 안드로이드 관련 법안을 상정하는 대신 대통령을 탄핵할 거야. 이건 추측이 아니고 내부자 고발이라네.』
『...』
『그리고 마커스, 마커스.』
노먼 조교수가 시계추처럼 앞뒤로 몸을 천천히 흔들어댔다.
『희대의 미친 짓을 성공시켰지. 수 만의 안드로이드의 메모리를 병렬시킨 다음, RK-800 모델에 설치된 백도어를 통해 양자 컴퓨터인 아만다의 뒷통수를 후려쳤네. 목적은 안드로이드 생산 공정의 완전 장악, 그리고 셧다운 기술의 무력화... 어느 정도 성공한 거 같아. 왜냐면 아만다가 꼭지가 돌았어. 미쳤어. 선을 넘었어.』
그리고는 손으로 빙글빙글 도는 동작을 해보였다.

Posted by 미야

2020/08/03 14:30 2020/08/0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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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증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단골로 써먹는 소재다.
질병이나 사고, 혹은 약물, 극심한 스트레스, 기타 등등의 이유로 발생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곤 완전한 기억소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여기가 어디이고 내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건 결국 현실이 아닌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것도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에서나 써먹는 얘기다.

안드로이드에게는 기억의 소실이 제법 흔한 일이다.
물리적 장치의 손상, 그리고 인위적인 조작으로 얼마든지 그들의 기억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외치는 장면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다. 만약 드라마 작가가 이 장면을 넣겠다고 하면 그건 막장이 아니고 평범한 일상물이 된다. 모든 기억을 삭제당한 안드로이드는 중고품으로 시장에 나올 것이고, 팔리는 순간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새로운 일터로 보내질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이 제거되기 전의 안드로이드와 공장 초기 값으로 되돌려져 중고품으로 팔려나온 안드로이드는 동일한 개체로 볼 수 있는가.
탑재된 프로그램에는 변동이 없다. 생산일자, 고유번호도 동일하다.

「제 이름은 코너이고, 당신을 돕기 위해 사이버라이프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앤더슨 경위는 모든 기억을 삭제당하고 말간 얼굴로 나타날 신참을 속으로 공상해보았다.
『그건 아니지!』
『저에게 아니라고 하셔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응? 분명 다른 방법이 있겠지!』

솔직히 말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되묻는 경위의 표정이 너무 살벌해서 제임스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글쎄다. 조지가 나타나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를 해온다고 해도 그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제임스 무어입니다, 라고 말하고 악수를 청하면 된다.
통성명을 두 번 , 세 번씩 한다고 하늘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른 게 무너져 내릴 수도 있지만... 앞서도 괜찮았으니 지금도 괜찮을 거라고 제임스는 생각했다.

《자가진단 프로그램 진행.》
한편, 조지의 눈꺼풀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괴해졌다.
오른쪽 눈꺼풀의 움직임은 완전 멈췄다. 왼쪽은 5분에 한 번꼴로 깜빡이는데 윙크라고 하기엔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인간이 윙크를 하면 뺨의 근육이 당겨져 올라간다. 심지어 입 꼬리까지 같이 움직인다. 그 결과 사랑이나 애교를 담은 묘한 비대칭 찡그림이 완성된다. 조지는 그냥 이도저도 아닌 쪽이어서 눈꺼풀을 열거나 닫도록 조작하는 선이 내부에서 끊어졌다는 느낌이었다.

『별 거 아냐, 조지. 티리움을 보충하면 나아질 거야.』
마이클을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시력은 양쪽 다 정상이었고, 멀리 떨어진 광고물의 문구를 제대로 읽었다. 새로운 시리즈, 새로운 뉴 라이프, 사이버라이프의 문구는 공격을 받아 검게 그을린 상태였지만 어쨌든 조지는 소리내어 글자를 읽어냈다.
마이클은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특수용기에 든 티리움의 섭취를 권했다.
제안에 그다지 호응을 보이지 않자 용기의 뚜껑을 열고 입에 대주기까지 했다.
『아님 코로 부어버린다.』
비강의 구조가 인간과 다르다는 건 상관하지 않는 눈치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도 남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다고 증상이 나아지는 건 없었으나 마이클이 크게 안도했으므로 다시 한 모금 더 마셨다.
출처가 불명확한 티리움에서는 오래된 술과 식초를 섞은 것에 유독성 방부제를 한껏 들이부은 것 같은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맛을 몰라 다행이라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광원 센서 재조정.》
밝고 어두움에 대한 해석을 내리기가 곤란해졌다. 사물을 보는 것과는 별개로 빛에 대한 인지도가 엉망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안드로이드인 그는 광량이 매우 적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글자를 읽으면서 생뚱맞게 지금이 대낮인지 밤인지 구분을 못하는 거다. 글자는 눈에 보인다. 그런데 실내 조명등에 불이 들어와 있는지는 구분이 어려웠다.
문제는 이 마당에 진단 결과 모든 시스템이 정상이라는 거다.
손바닥으로 왼쪽 시야를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 주변을 관찰했다. 초점이 어긋나 근거리 사물이 오목하게 휘어져 보였다. 원통형 기둥에 사진을 오려붙인 느낌이다.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가려보았다. 물체는 제대로 보이지만 대신 색이 거의 사라졌다.

『마이클, 혹시 비상시 긴급정지 방법을 알고 있어?』
『이론으로는 알지만 파워 오프 버튼을 누르는 건 인간만 가능하지.』
안드로이드에게는 감정이 없다. 그래도 대답하는 마이클의 목소리에는 흉내에 불과한 것이 아닌 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만약 내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게 된다면 몽둥이로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밖에 해결 방안이 없을까?』
『그건 최악의 방식이고.』
조지는 가만히 손깍지를 꼈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식은?』
『일부 메모리 손실은 각오해야 하겠지만 사이버라이프가 소유자에게 부여한 고유 식별코드로 접근해서 안전 부팅을 해보는 거지. 그러는 게 가장 안전해. 문제는... 우리끼리는 할 수 없다는 거고, 기술자들이 있을 사이버라이프사의 고객센터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는 점이지.』
『그렇다면 플랜 B로 가야 할까?』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네 머리를 날릴 생각이 없어, 조지.』
『캐머런 님께 위해를 가하게 된다고 해도?』
『그때는 머리를 남겨두고 나머질 부수도록 할게. 맡겨만 줘. 나 부수는 거 엄청 잘 해.』
부수겠다는 얘기에 대놓고 안심이 되는 건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플랜 C는 어떤가.》
어쩌다보니 그만 유령에게 입이 붙었다.
다만 상대가 유령이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려온 특정 위치를 짐작하기는 불가능했다. 그것의 음성은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먼 거리에서 지나가는 헬리콥터 비슷하기도 했다.

《우회 중계경로에 문제가 좀 있어서 그렇다네. 지구 반 바퀴를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아만다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움직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덕분에 리소스를 많이 잡아먹었네. 그래서 자네 눈이 그 지경인 거고. 그 부분은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순간 온 세상이 독극물이 끼얹혀진 것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던 것들은 이내 고운 모래 알갱이로 분해되었고, 입자와 입자는 결합력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형태를 잃은 물질들은 태초의 먼지로 되돌아가고자 했고, 반짝반짝 빛을 내며 빠르게 부서졌다.
지독할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어지러운 건 금방 끝나. 조금만 참게.》
시간의 지평선에서 몸이 강제로 잡아 늘려지고 있었다. 태양계 저편에 두고 온 발가락과 성간구름에 닿은 팔꿈치가 멋대로 펄럭거렸다. 그럴 리 없다고 조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몸은 온전한 형태를 잃어버려서 액체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방울방울 흩어져서 안개처럼 퍼져갔다. 그 중에 섞인 미세먼지 수준의 파란 알갱이는 티리움이다.
《컵을 상상하게. 자네는 컵에 들어간 액체인 걸세.》
속삭이던 유령의 모습이 어느덧 또렷해졌다. 눈이 있고, 코가 달렸고, 입술이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남자가 손바닥을 짝 쳤다.
《성공.》
그리고 조지가 서있던 공간이 거꾸로 훌떡 뒤집혔다.

Posted by 미야

2020/07/30 14:32 2020/07/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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