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아마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딘지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로 핀치가 말했다. 그러면서 시선은 리스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메모판으로 향했는데 그곳에 붙은 인물 사진을 재차 확인하려는 의미라기보다는 어디로 눈을 두면 좋을지 몰라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더하여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에 대고 문질렀다.
당신, 지금 거짓말 하는 거 딱 걸렸어.
리스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핀치는 다시 한 번 더 뻥을 쳤다. 『제가 가장 잘 하는 일은 분명 아닙니다. 허나 미행하는 일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원래부터 천부적인 스파이 재능이 있었던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이 대사는「우리 일곱 살짜리 아들이 알파벳을 A부터 Z까지 쓸 줄 알아요, 에헴!」으로 들렸다. 알파벳 정도로 아들이 천재인 것 같다 자랑하면 곤란 - 중국어로 시앙지아오(바나나) 핑구어(사과) 챠뭬이(딸기) 이러고 카나리아처럼 노래를 부른다면 약간은 납득하겠지만 - 놀이터의 주부들은 전부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고작 A, B, C, D 가지고 으쓱거리지 말란 말이다 - 마찬가지로 리스 또한 이마에 주름살을 더했다. 천부적인 스파이 재능? 반나절도 되지 않아 거꾸로 미행을 당하고도 남을 남자가 어디서 그런 헛된 소리를. 반격당해 한바탕 멍석말이를 당하지 않음 다행이다.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고개를 뒤편으로 돌려 유리판에 붙은 번호의 사진을 응시했다. 슬슬 아가씨 호칭을 떼고 나이를 야금야금 먹고 있는 여성이 오늘의 번호다. 올해 나이 서른일곱. 변호사인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코를 으쓱이며 자랑해도 되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문직에 종사를 하고 있고, 가족끼리 우애가 깊고, 저축한 돈도 제법 있고, 신용도 평가도 좋다. 다시 말해 갑자기 녹색의 트롤로 돌변하여 핀치의 이마 한 가운데를 돌 몽둥이로 때릴 인상은 아니다.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된 총기류는 없으며, 전과기록이나 정신병 이력도 없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이력만 보자면 미국이 자랑삼을 선량한 시민으로 보였다.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그런 시민 말이다. 꿈에서라도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가 저지른 최악의 나쁜 짓은 아마도 무단횡단일 거다.
핀치는 재차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별 문제 없을 거예요, 리스 씨.』 하지만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루트를 그 예로 들어보자. 사진으로 본 그녀의 인상은「사람의 생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 먹는 악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위층 인사를 전문으로 하는 심리 상담사답게 지적으로 보였고, 가늘고 여린 팔과 다리는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그녀는 예뻤고, 눈빛은 차분했다. 근육 불딱불딱의 험상궂은 그런 인상이 결코 아니었다는 말씀, 그리하여 리스는 뺨에 바람을 집어넣으며 겉옷을 챙기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제발 부탁이니 멸치 빼앗긴 고양이 흉내는 그만두세요, 미스터 리스.』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를 이상하게 하고 보는 핀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을 위해 방탄 브래지어 - 조끼가 아니다 - 를 늘 착용하고 있지만 총알의 속도라는 건 대략 시속 3,000/km가 넘는다. 속도가 너무 빠르기에 비유하자면 축구공 사이즈의 작은 운석이 지표면과 충돌하면 엄청난 깊이의 구덩이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두꺼운 철과 납을 재료로 로마식 철갑을 두른다한들 정면에서 근접 발사한 총알에 맞으면「살짝 긁혔어요」수준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 각도가 나빴다던가, 맞은 총알의 숫자가 많았다던가, 아니면 범인이 쏜 총알이 철갑탄이었다던가... 악몽의 갯수는 무궁무진하다. 그나마 리스는 운이 좋았다. 다행이었던 건 한 번 튕겼다 날아온 총알이었다는 것. 그래서 갈비뼈에 살짝 금만 갔다. 일주일에서 15일 정도 시일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거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핀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무식한 이 남자는 러닝셔츠 위로 녹색의 수도관 테이프를 칭칭 둘러 감고는「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당장 복귀하겠습니다」우겼다.「집에서 쉬면 오히려 잘 낫지 않는 법입니다」이러며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핀치는... 100마디 말로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 두 팔을 벌리고 리스와 기꺼이 포옹했다.
사색이 되어「잠깐만요」이러고 타임아웃을 요청한 고용인은 한참동안 호흡을 하지 못했는데 기습적인 끌어안김에 당황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불붙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였다. 그까짓 테이프로 고정해봤자 부러진 갈비뼈에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면 뇌에서 통증을 담당하는 부위로 형광 빛의 불꽃들이 펑펑 터지게 되어 있다. 고난도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나 죽어요 고함을 지르지만 않았을 뿐이지 리스가 느꼈을 아픔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미칠 지경의 수준이었으리라. 「이거 정말이지... 끝내주는 애정 표현이군요.」 진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는 소리를 해봤자 이미 늦었다.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미스터 리스. 당신은 지금 달리기조차 할 수 없다고요.」 싫든 좋든, 그게 핀치가 현장으로 나와야 했던 까닭이다.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소형 이어폰으로 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아직 제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요, 미스터 리스.』 실수 = 미행 실패로 인식한 핀치가 귀를 만지다말고 발끈하여 대꾸했다. 세탁소에서 볼일을 마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여자가 가방을 고쳐 메었다. 핀치는 긴장하여 건물 벽쪽으로 더욱 몸을 붙었다.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엔 수상한 동작이었다. 스쳐 지나가던 덩치 큰 흑인이 돌연 얼굴색을 달리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설명하려는 리스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차분했다. 동시에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그녀는 더 이상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아요, 핀치. 컴퓨터 자료로는 휴가 상태로 나오지만 사실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유족과 병원간의 쌍방 합의로 일을 덮었지만 중대한 의료 과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저지른 개인적인 실수가 직접적인 환자의 사망 이유인지까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한 명의 의사와 세 명의 간호사가 일을 관뒀거나 직장을 옮겼습니다. 조안은 일을 그만뒀는데 병원 기록이 수정되지 않았어요.》 『뭐라고요?』 《병원 기록이 수정되지 않았다고요.》 주변 시선을 인식한 핀치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미행 중인 여자는 담배를 사려고 한 건지 세탁소에 인접한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가기 전 조안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아 핀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더 가까이 가봐야 할 듯했다. 『그럼 현재 그녀는 무직인 건가요? 리스.』 《그렇다고 봐야죠.》 리스는 문제의 의료 과실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알려왔다. 《핀치? 그럼 조안의 집에 가볼 건가요.》 『오, 당장은 아니고요. 저는 지금 조안과 같은 가게로 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순간 번쩍거리며 눈부신 별똥이.
『이 남자예요! 이 남자 맞아요! 이 남자가 저기서 여자를 몰래 쳐다보고 있었다니까요. 내가 다 봤어요. 핸드폰으로 사진도 여러 장 찍더라니까요!』 『마이클, 마이클. 그렇다고 무작정 주먹부터 날리면 곤란...』 흑인 남자가 가게 주인의 지적에 다욱 흥분하여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거였다. 『뭣?! 누가 때렸다는 거예요?! 살짝 옷만 잡았잖아요! 왜 과장하고 그래요?!』 『누가 과장했다고 그래. 어쨌든 소동은 사절하고 싶...』 『살짝 옷만 잡았다니까요! 봐요, 이렇게 옷만 잡았다고요! 날 못 믿어요?!』 『알았다고, 알았어. 넌 변태의 옷만 잡았어. 내가 봤어. 넌 옷만 잡았어.』 못 이기는 척하며 가게 주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요는 일이 커지는게 싫은 거였다. 멱살을 놓지 않으려 드는 흑인 젊은이를 다독거려 손을 떼게 만들고 핀치에게는 어서 달아나라 눈짓하는 걸 봐선 경찰이 출동하게 만들기가 싫은 눈치다.
조안은? 그 와중에도 핀치는 가게 내부를 살폈다. 틀렸다. 여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뒷문은 활짝 열려 있다. 《핀치, 뭐 하고 있어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을 리스가 입이 바짝 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도망쳐요!》 순간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Posted by 미야
2013/04/01 14:40
2013/04/0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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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작업하네요. 일단은 워밍업.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눈가가 벌개진 핀치가 모니터를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쳤다. 항상 예의바르고, 이성적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사내가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시늉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리스는 분명 심각한 일이 생긴 거라며 거의 뛰다시피 하여 컴퓨터 쪽으로 향했다. 도서관 시스템으로 피어스가 장난삼아 만든 스파이웨어가 침투했다던가, 루트가 불쑥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던가... 가정할 수 있는 일들의 가지 수는 많았다. 단순하게는 실수로 게이 포르노 사진을 클릭했다는 것부터 쿨러 부품이 고장났다는 것까지 다양했다. 어쩌면 하드 드라이브에 배드 섹터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님 민감한 기계 위로 물을 쏟은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일입니까, 핀치.』 모니터에 화풀이를 하던 중이던 고용주는 죄 짓는 현장을 들켰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별 거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안경을 벗고 눈두덩이를 어루만지는 동작으로 보아 제법 심각한 수준의 스트레스 요인이 발생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다. 그래서 리스는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여 질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핀치.』 입을 앙 다문 고용주는 대답 대신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리스를 쏘아보았다. 여러 번 얻어맞아 지문으로 흐려진 모니터 화면에는 숫자가 카운트되고 있었다. 국방부의 레벨5 수준의 연구소에서 가져온 하드 드라이브로부터 띄운 화면이다. 3,000 단위가 훌쩍 넘는 시간이 1초씩 야금야금 줄어드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착, 착 소리를 내며 시간이 깎여나갔다. 그리하여 마지막 0초가 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추측이 불가능 - 암호화된 코드는 상당히 복잡해서 핀치 혼자서는 힘에 부치는 눈치다. 며칠을 매달려 봐도 높은 벽만 보인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흡사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복원된 공룡의 DNA를 보고 있다던가...』 의자 등받이에 체중을 걸고 길게 늘어진 핀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암호를 쉽게 깰 수 없다는게 분하기도 하거니와 앞으로의 일이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좋아요.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고요. 지금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설 때라고 생각되는군요.』 리스는 체중이 실린 의자를 붙잡고 책상에서 떼어냈다. 『모니터를 홧김에 때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내 말이 맞죠?』 그리고는 입구 쪽을 향하여 의자를 돌려세웠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하자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한 가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도대체 무얼 하면 좋단 말인가. 일 중독자인 두 남자는 금붕어처럼 눈꺼풀을 꿈뻑거렸다.
『저는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를 듣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라디오는 좀...』 핀치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뉴욕으로 폭풍이 상륙하려는 중이다. 일기예보는 빨간 글씨로 폭우를 강조했고 일부 지역 주민들에겐 안전한 장소로의 대피를 권고하고 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채널이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재난 대비 속보만 내보내고 있다. 스포츠 야구 어쩌고는 사치다. 리스는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겁니다, 라고 말하고 코트를 챙겼다.
여기서 다시 문제. 스트레스를 풀려면 도대체 어디로 가면 좋단 말인가. 집, 직장, 집, 직장을 고수하던 두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가볍게 맥주 한 잔 어때요.』 『전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스터 리스.』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걸 제안해 봐요. 영화라던가, 뮤지컬이라던가... 아무거나.』 탁구공이 넘어왔지만 핀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대편으로 넘겼다. 『글쎄요. 리스 씨는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음... 가만 있자. 마거렛 맨스필드라는 이름의 사회복지사가 소개해준 곳이 한 군데 있지요.』 『어디에 있는 극장입니까?』 『극장이라뇨. 아닙니다.』 『에?』 『매주 화요일 모임인데요, 금주를 독려하는 자리이지요. 그런데 도박이나 마약중독과 같은 다른 문제를 가진 친구들까지 다 함께 모여 자기 얘기를 해요. 대다수는 신세 한탄이지만 가끔 감정이 격앙되어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죠. 어렸을 적에 돌아가신 어머니, 살인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 형, 결혼에 다섯 번 실패한 누나... 다 끝나면 손수건에 코를 풀고, 준비한 샌드위치를 먹고, 뱃지도 나눠 갖지요.』 이게 무슨 냉장고에 넣어둔 콩 스프에 푸른 곰팡이 창궐하는 소리랴. 그러니까 지금 같이 중독자 모임에 나가자는 건가. 그것도 알콜 문제로?! 기가 막히다는 걸 감추지도 못하고 핀치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방금 그 이야기, 그거 진심입니까, 미스터 리스?』 고용인은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농담입니다. 중독자 모임에 우리가 왜 나갑니까. 당신은 술도 못 마시잖아요.』 폭풍우가 심하니 커다란 우산이 필요할 거라면서 주섬주섬 준비물을 챙겼다.
결국 그들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오래된 클래식 무비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극장은 핀치가 곧잘 찾아가는 장소다. 히치콕 영화를 밤낮으로 틀어주는 기간엔 따로 할인 티켓을 구입하기도 한다. 세 편을 연속해서 보면 다음 한 편은 무료로 보게 해준다. 그 할인권을 매점에 제시하면 팝콘을 50% 가격으로 살 수 있다. 과도한 염분 탓에 구입이 꺼려지기는 해도 영화를 보면서 야금야금 집어먹는 팝콘은「이런 것이야말로 문화」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래서 핀치는 특대형의 팝콘을 늘 사곤 했다. 『팝콘이 먹고 싶어요?』 판매대에 쏠린 눈길을 알아차리고 리스가 한 봉지 살까요, 하고 물어왔다. 핀치는 군침을 삼키는 대신 도리질을 했다. 『팝콘은 불량식품이에요, 미스터 리스. 열량이 무진장 높다구요.』 일부러 거짓말을 했음에도 리스는 평범한 버터 맛으로 두 봉지나 사왔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포장을 들어보였다. 핀치는 그 포장지에「거짓말은 100년 뒤에나 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걱정 마요. 콜라도 같이 샀어요.』리스는 의기양양했다.
이번 주는「활극」특선으로 한쪽에선 라쇼몽을, 다른 한쪽에서는 서부의 탈주자를 상영했다. 동양이냐 서양이냐 취향대로 알아서 고르라는게 극장주의 배려인 듯하다. 칼이냐 총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리스는 당연히 총을 골랐다. 『윈체스터 1866 모델은 최고죠.』 『그러지 말고 마차나 기차 종류로 관심을 돌려봐요.』 좌석에 나란히 앉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핀치를 앞쪽으로 앉히고 리스는 대각선 방향으로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수상한 사람이 핀치에게 접근하면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각도다. 핀치는 불만을 표현했다. 『이럴 필요가 있는 건가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 뒤통수가 따끔따끔 아프겠군요.』 『그 정도 갖고 아프긴 뭐가 아파요. 엄살이 심하군요, 핀치. 자! 당신이 앉을 자리는 저쪽입니다.』 『정말 못 말릴 고집이군요.』 혀를 내두르는 고용주를 향해 리스는 빙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고집이 만만하지 않은 건 핀치도 마찬가지였다. 인디언들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 그들은 기습이라는 단어의 뜻을 과연 알고는 있는 걸까 - 영국인들이 세운 마을로 막 침략하였을 즈음 가만히 의자에서 일어나 리스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매너가 나빠요, 핀치. 불이 꺼졌는데 극장 안을 막 돌아다니고.』 능청스러운 전직 CIA 요원이 잔소리를 해대자 핀치는 헛기침했다. 『일단 영화에 집중합시다, 미스터 리스.』 『그러시든지.』 그러면서 두 사람은 어둠을 틈타 손을 꼭 잡았다.
Posted by 미야
2013/03/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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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다시 썼어요... 작업을 중지하라는 신의 계시 같음.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자주 이용하던 공중전화가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 『시대가 변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이용률은 저조한데다 유지비는 많이 들잖아요.』 공구함을 정리하며 사내가 말했다.
TA&T 회사의 지역 공중전화 유지보수 팀으로 리포트가 올라가면 눈치껏 중간에 가로채거나 한줄 슬그머니 끼워 넣는 식으로 나름 농간을 부리고 있었는데 일이 바쁜 관계로 잠시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당해버렸다.「철거예정」글자를 발견하자마자 맨발로 뛰어나왔는데 회사 로고가 박힌 작업복을 입은 직원은 그보다 더 빨라 기계를 신속히 뜯어버렸다. 『남겨진 전화 부스도 조만간 정리할 겁니다.』 기다려 - 그걸 가져가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하라고 - 누가 보아도 당황한 기색인지라 잘려나간 전선을 정리하던 직원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핸드폰의 보급률이 얼마나 높으면 거의 대다수의 미국인이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다. 공중전화 부스가 철거되어 큰 불편함을 느끼는 부류는 쫄쫄이 갈아입을 장소가 필요한 수퍼맨 빼면 돈 없는 불법이민자들밖에 안 남는다. 그런데 지금 그가 마주보고 있는 남자는 제법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고 있다. 안목이 없어 잘 몰랐지만 사실 핀치가 입고 있는 양복의 가격은 남자의 5개월치 급여와 맞먹는 수준이다. 핸드폰이 없어 공중전화를 애용할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그런데 왜 안색이 새파랄까.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됩니까.』 게다가 애원하기까지 한다. 『전보가 사라진 것과 비슷한 겁니다. 여기서 다시 10년이 지나면 핸드폰 또한 없어지겠죠.』 포기하고 한 시대의 종말에 그만 작별인사를 하라며 뜯어진 전화기의 잔해를 가리켰다.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핀치가 창조한 기계는 덩치만 커다란 바보는 아니라서 공중전화가 사라지면 다른 소통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지 대응 방식을 마련하여 리스와 핀치에게 지속적으로 번호를 보내올 것이다. 그러니 거리에서 공중전화 한 대 사라졌다고 풀 죽은 표정을 할 까닭이 없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것이다. 그럴 거라고 믿고 싶다. 「아으아으아.」 의자에 앉았다가 곧바로 다시 벌떡 일어섰다. 「어쩌지. 차라리 통신회사를 인수해버릴까.」 하지만 이 경우엔 자금력이 문제가 아니라 익명성이 큰 문제가 된다. 몇 개의 유령회사를 동원하여 호텔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공공자재로 인식되고 있는 통신회사의 인수는 얘기가 다르다. 세금만 먹는 바보들이라 욕을 얻어먹고 있을지언정 미합중국 정부는 나름 자신의 할 일을 해내고 있다. 뭔가 수상하다 생각한 관련 기관에서 유령회사의 자금 흐름을 비밀리에 추적하기 시작하면 도마뱀 꼬리를 자르는 정도로는 흔적을 감추지 못한다. 자칫하면 발각된다. 핀치로서는 그런 모험을 감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한다. 안드레아 보깔톨로냐 가명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볼까. 공중전화, 필요합니다. 고국에 있는 아내, 기다립니다. 없어져 불편해요. 쓸데없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기업이 특정 개인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가. 안경을 벗었다가 눈살을 찌푸리곤 도로 콧잔등 위로 얹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생겼습니까.』 리스의 눈으로 보기에 지금의 핀치는 진한 커피를 연거푸 마셔댄 사람처럼 보였다. 『아님 어디 아픈 곳이라도...』 『아뇨.』 반사적으로「신경 쓰지 마세요」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우리 집 앞에 있던 공중전화기가 갑자기 철거되어 속상해요.」라고 해봐라. 그 즉시 입이 귀에 걸려서는 뉴욕시 공중전화 철거현황 자료를 구해다놓고 곳곳에 빨간색 X자를 그려놓을게 틀림없다. 사흘 뒤에는 초인종이 울릴 것이고, 놀라서 나가보면 페페로니 피자 상자를 들고 있는 리스가 시치미를 떼고 서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사흘이 지나면 주문하지도 않은 싱글 침대가 배달될 것이고, 의외로 뻔뻔한 구석이 있는 고용인은 손가락으로 작은방을 가리키며「제가 저 방을 쓸게요, 괜찮겠지요?」즐겁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것 같냐 - 일부러 점잔을 빼며 의자에 착석했다. 그 작은 허풍을 못 알아차릴 리스가 아니다. 『단골 재단사가 이사라도 갔어요?』묻는 목소리에 장난끼가 가득이다. 『리~이~~스~ 씨.』 『알았어요. 얌전히 입을 다물겠습니다. 전 착한 사람이니까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 리스가 몇 개의 소설책을 들고 핀치의 시야가 닿지 않은 장소로 이동했다. 그래봤자 낯선 인기척이 들리면 3초도 되지 않아 핀치의 손을 끌어당길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바지 뒤춤으로 장전된 권총 한 자루도 쑤셔 넣었다. 도서관은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게을리 할 까닭은 없다. 발자국 소리가 점차 멀어지면서 싱글거리는 눈웃음만이 헨젤과 그레텔이 숲속에 뿌린 빵부스러기처럼 남았다.
핀치는 다시 손깍지를 한 자세로 골몰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10년 뒤에...」 사회가 그 모습을 바꿔감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편리한 공중전화기가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을 정도다. 물론 표면만 보자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아이들은 10년 전처럼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달나라까지 로켓을 쏘아올리고, 수백만 대의 자동차가 도로를 왔다갔다 움직인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있으며, 공원의 나무는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낙옆을 떨군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각각의 일상은 그렇게 격변하지 않았다. 미래에 죽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들은 오늘을 살아간다. 주부들은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장바구니 안으로 시리얼 박스와 우유를 담는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면 가게로 나와 새 우유와 빵을 산다. 또 일주일이 흐르고... 또 흘러서.
그러나 그 일상의 바닥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묵시록이.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그만둬! 무엇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거야, 맙소사... 정신 차려. 10년 전과, 지금과, 다시 10년 후를 여기서 고민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잖아.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10년 후의 미래 같은게 있을 것 같아? 고작 1년 뒤의 날 확신할 수 없는데 공중전화기의 종말을 걱정해서 뭐에 써먹어.」 가슴이 뛴다. 먼 과거에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찌꺼기들이 부글부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뺨을 만졌다. 탄력을 잃은 피부가 암시한다. 노쇠한 현자는 무능력하다. 고루한 노인이 할 줄 아는 건 후회밖에 없는 법이다. 다가올 미래를 염려할 힘 따위는 없다.
귀 밝은 남자가 한숨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성큼거리며 다가오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핀치.』 『왜요, 리스 씨. 갑자기 그렇게 정색을 하고.』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요?』 『괜찮습니다, 미스터 리스. 가끔 이유 없이 심란할 때가 있잖아요? 저에게 오늘이 그런 날인가 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핀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걱정하는 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Posted by 미야
2013/02/27 20:33
2013/02/2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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