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까지나 건전을 지향하는 (응?)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저장고를 뒤져봐도 해당 문서가 없길래 죄다 날렸나 아침부터 울부짓고... 휴. ※
1분은 60초다. 1부터 60까지의 숫자를 또박또박 헤아리면 1분이 된다.
그렇게 따지면 참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60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1분이 얼마나 짧은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졸린 눈을 부비며 하품을 지긋이 하고, 코를 만지고,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봤다가, 발을 꼼지락거리면 어느새 1분이 흐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서 목깃을 세운 회색 코트 차림새의 수상한 사내가 남의 호주머니를 뒤져 몰래 훔쳐간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60의 숫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송두리째 증발하고, 그런 까닭으로 당신의 수명은 방금 전에 1분이 줄었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샘은 넋을 잃었고, 무릎의 휘청거림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에 그는 60초와 1분의 시간이 아닌 나머지 수명 전부를 한꺼번에 도둑 맞았고, 그 탓에 떡갈나무를 닮은 추레한 노인이 되었다. 모든 생명력은 고갈되었다. 머리는 백발이 되었으며, 홍채는 탄력을 잃어 뻣뻣해졌다. 좁아지고 흐려진 시야는 오로지 그의 낡아빠진 신발만을 비췄다. 바짓단 사이로 드러난 마르고 덧 없는 발목이 조소를 자아냈다. 지팡이 없이는 체중을 지탱할 수도 없는 몸은 앞으로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치욕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칼, 살육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은 소멸한다. 정명의 대로에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간다.
『샘! 빨리 와서 날 도와줘!』
날카롭게 울리는 이명. 그것은 끔찍스런 바다의 범람을 닮았고, 들판에서 황충이 날개를 펴고 덤비는 소리와도 같았다.
『샘!』
싫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도우라는 건가. 박살난 피붙이의 머리 조각을 수습하라고? 시체를 씻기고 염을 하라고? 부릅뜬 눈을 편히 감겨주라고? 관에다 못질을 하라고?! 못 한다. 안 한다. 그런 일을 할 각오따윈 되어 있지 않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나중에까지 그럴 것이다. 물에 젖은 눈꺼풀을 닫은 샘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뿔로 만든 악기를 불어 빨리 달리기를 종용해도 그는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을 부르지 마요!』
만약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아들은 아버지를 땅에 묻어야 하고, 동생은 그 형의 시신을 물에 띄어 흘려보내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은 언젠가 정해진 수명을 다하고 야훼가 아담을 저주한 바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들의 육체는 서서히 썩어간다.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다.
『싫어요! 싫다고요!』
그런 현실따위... 개나 먹으라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불에 태운게 엊그제 같다.
그런데 이번엔 형의 시체마저 태우라는 건가.
『날 그냥 내버려둬요!』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면 요-만큼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 녀석.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낸 리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모두를 대신해서 소매를 걷어올렸다.
교통 사고에서처럼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이 다친 것이 확실한 환자의 경우 섣불리 만지지 않는게 제일 좋다고 전문 응급요원들은 설명한다. 도움을 준답시고 손을 내밀었다가 반대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아주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단순히 눈으로만 보고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최소한 맥을 짚어야 심장이 뛰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낼 수 있고, 눈꺼풀을 뒤집어야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단 손을 대기 시작하면 급한 마음에 애들에게 사탕이나 팔던 구멍가게 주인이 돌팔이 야메 의사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운 교통 사고 현장의 분위기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부채질을 하면 하지, 결코 말리지는 않는다.
아메 의사도 때론 납작한 들창코를 클레오파트라의 코로 만들 수 있다드라. 믿으면서 아멘한다. 최대한 조심해가며 쓰러진 딘의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머리를 받친 손바닥이 피로 흥건히 젖지 않은 걸로 봐선 시작이 좋았다. 그러나 리는 쓸데없는 희망으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왜곡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22구경 탄환의 경우는 두개골처럼 단단한 뼈를 쉽게 관통하지 못한다. 더듬거려 확인한 뒷통수의 모양새가 온전하다고 좋아하기엔 아직 이르다. 머리 속으로 들어간 총알이 뇌를 고속으로 휘젖다가 부드러운 젤리가 된 덩어리들과 같이해서 가라앉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코나 입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있는 걸 눈여겨 보며 짧게 다듬은 머리카락을 신중한 태도로 위로 쓸어넘겼다. 하지만 검댕이 많이 묻은 탓에 사입구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짐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쳇 소리를 내며 더러운 머리카락을 다시 반대편으로 헤집었다.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총성이 먼저였던가, 아님 딘 윈체스터가 쓰러지던게 먼저였던가. 동시였던 것도 같고, 쓰러지던게 먼저였던 것도 같다. 어쩌면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감각이라는 건 여차하면 혼동을 일으키고 잘못된 정보를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일수다. 그러니까 파르르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눈꺼풀도 어쩌면 단순한 시각적 착각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헐떡거리는 입김이 닿아 속눈썹이 살짝 흔들린 것일 수도 있다. 심장이 멎었음에도 시체의 손가락은 꿈틀거린다. 속단을 내리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헤이! 내 말 들려?』
귀에 가까이 대고 이름을 불러보았다. 빌어먹게도 그의 가슴은 아직 따스했다.
『이봐! 딘 윈체스터!』
그러다 문득 딘의 오른손으로 시선이 갔다. 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총을 쏘고 자살하려 했다면 손에 총을 쥐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대신 손등으로 빨갛게 눈에 띄는 자국이 보였다. 동전 하나 크기였고 모양은 둥글었다. 마치 날아오는 돌에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리는 돌연 기묘한 운명 같은 것에 사로잡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운명은 그들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포위하고 있었고, 강력했고, 사람의 자유의지라는 것 자체를 비웃게 만들었다.
퍼득 어떠한 가설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고,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딘이 떨어뜨린 권총은 5m 앞으로 굴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낯선 물건이 덤으로 하나 더 놓여져 있었다. 묵직한 부피의 남성용 시계, 시곗줄이 망가진... 그녀는 신음했다. 이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았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았음에도 그놈의 망할 시계의 상표가 짝퉁 론진일 거라는데 흔쾌히 100달러를 걸 수 있었다. 예의 브래드 피트를 닮은 뱀파이어 남자가 끼고 있던 바로 그 시계다.
윌리엄 텔은 아들의 머리 위로 사과를 올려다놓고 멀리서 화살을 당겨 단번에 명중시켰다. 일개 산적도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상대는 사람보다 감각이 수 십배는 월등한 뱀파이어다.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아이의 머리 위로 올라간게 사과가 아니라 훨씬 작은 포도알이었다고 해도 너끈히 쏘아맞출 수 있다.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자의 손등으로 손목시계를 집어던져 훼방을 놓는 것쯤은 애들 장난이다.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는 고개를 들어 거기겠거니 싶은 쪽을 쳐다보았다. 허나 모습은 없었다.
《맹세하는데 자비를 베풀려던 건 절대 아니야. 당신도 잘 알겠지만 앞으로가 더 큰일이니까.》
그 존재감은 너무나 작아서 리는 그 목소리가 순전히 환청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 시계는 어차피 수리가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그냥 버린 걸세.》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리는 그가 애매하게 한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수줍어하는 것도 같았고, 필요도 없는 진공 청소기를 실수로 주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난처해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왜, 내지는 어째서, 라고 묻지 말게.》
촛불이 흔들리듯 점차 말꼬리가 희미해졌다. 자신감 없는 음성은 후~ 하고 숨을 부는 작은 바람에도 갈기갈기 헤어졌다.
《그런데 그 시계는 짝퉁이 아니야. 정말로 밀라노에서... 거금을 주고...》
그 마지막은 거품이 꺼지는 소리를 많이 닮았다. 불이 꺼졌고, 기척은 곧 사라졌다.
이젠 진짜 시간이 없다. 리는 너무나 생생한 꿈에서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현실감을 되찾았다. 돌연 복부에서 뭔가가 폭발했고, 모든 지각능력이 신축성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시계는 진짜 론진이고, 빚졌다고 치지.』
물 먹은 솜덩이처럼 축 늘어진 딘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선택은 딱 두 가지다. 나는 네 형을 이대로 편히 죽게 해줄 수도 있어. 그는 아픔은 하나도 느끼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물론 우린 포기하지 않고 딘을 살려낼 수도 있어. 대신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끔찍스럽게 고통스럽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자! 어떻게 할까. 응?』
한쪽 저울에는 편안한 죽음. 그리고 그 반대편 저울로는 고통스런 삶이 올라가 있다.
무엇을 집어들 것인가. 둘의 가격은 똑같다.
교활한 장사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선택하는 고객의 손을 응시했다.
샘은 손등으로 벌겋게 변한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샘은 그 입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그는 살아야 해요.』
「딘이 살았으면 좋겠다」, 내지는「딘은 이대로 끝내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가 아니었다. 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했다. 죽어선 안 된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한 고통은 알 바 아니다. 육지로 올라온 인어가 겪어야만 했던 처참한 저주따윈 신경 안 쓴다. 샘은 어떻게든 딘이 살기를 원했고, 자신의 옆에 있어주길 바랬다. 행여라도 편안하게 떠나가길 희망한다고 해도 놓아줄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밧줄로 휘감아 끌어당길 것이다. 너무 심하게 잡아당겨 팔뚝 하나가 잘려나간다고 해도 상관 없다. 샘은 모든 비난을 감수할 것이고, 미움받을 준비도 했다.
샘은 선택의 저울에서 전갈의 독이 발리워진 삶을 망설임 없이 들어 올렸다.
리는 그 선택이 정확한지를 확인해야 했다. 나중에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그것처럼 난감할 일은 없을 터. 이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교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너에게 총구를 겨누었다는 걸 결코 잊으면 안돼, 샘. 쉽게 생각했다간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총을 쏘려 했다는 것도...』
채 듣지 않고 샘은 차가운 형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로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쓰다듬고, 호호 입김을 불고, 손가락을 깍지꼈다.
『설명은 됐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정나미 떨어진다는 눈길로 샘을 내려다보던 리는 이윽고 항복의 의미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알았다. 일단 장소를 바꾸자. 네 형의 머리를 잘 잡아. 그리고 네 형의 혈액형이 뭐지?』
『나랑 같아요.』
『넌 바보냐?! 그건 답이 될 수 없지!』
기다렸다는 식으로 순찰차들이 달려오는 요란한 경적소리, 그리고 구급차들과 소방차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는 어둠을 훼방하는 파랗고 빨간 불꽃들을 향해 힐끔 시선을 주었고, 허리를 굽혀 딘이 떨어뜨린 권총을 찾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차, 잊으면 안 되지.』
그리고 자칫 깜빡 잊을 뻔했다는 투로 박살난 남성용 시계를 따로 챙겼다.
2층의 창문이 쨍그렁 소리를 내며 깨졌다. 샘은 상체를 숙여 혹시라도 모를 파편으로부터 딘을 보호했다. 불길이 사방에서 이글거렸고, 그 모습은 마치 모의 재판과 처형으로 막을 내리는 참회의 화요일 축제 (* 마디그라) 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1년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뛰어 넘도록 하자. 샘은 정신을 잃은 딘의 얼굴과 목, 그리고 어깨를 어루만졌고, 무척이나 작아 보이는 그를 품에 안았다.
『형,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만약 잘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바로잡을 테니까...』
그 난장판 속에서 샘은 놀랍도록 침착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날 믿어.』
단호하게 말한 샘은 커다란 손으로 딘의 뒷통수를 촘촘한 그물처럼 잘 감쌌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