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복도를 지나가던 시멘스키가 카터를 향하여 가볍게 눈인사를 해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그쪽도 마찬가지여서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서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멘스키에게는 일행이 따로 있었다. 남자가 둘, 그리고 여성이 한 명이었다. 세 사람 모두 고위직 공무원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저 양반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나중에 들었는데 속칭 데상트로 불리우던 인터넷 포르노 업자 하나가 구치소에서 돌발 폭력 사태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사고이고, 그 데상트라는 자가 일라이어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시멘스키는 일라이어스의 암살 지령이 어떻게 구치소 내부로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데상트? 흠. 이름이 기억이 나. 그 친구를 음주운전으로 체포했던 적이 있었지? 자기.』
비디오 자료를 뒤적거리던 동료가 간덩이가 부어 아무렇지도 않게 성희롱 발언을 했다.
『자기?』
급격한 온도 하강을 눈치 챈 쿠싱은 데스크에 한쪽 발을 걸친 난봉꾼 자세를 허겁지겁 바로잡았다. 졸음에 취해서 실수를 했다. 3시간 내내 비디오 판독만 했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쿠싱은 용서를 구하는 표정으로 카터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관대하지 않은 편이었고, 쿠싱은 방금 지탄을 받을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이 있었다.
『어흠! 아무튼 이쪽은 건진게 없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가며 쿠싱이 설명했다.
『동네 CCTV 카메라가 단체로 망가진 모양이야. 중요한 타이밍에 죄다 화질이 엉망이야. 이쪽 신호등 앞의 카메라는 노이즈가 없지만 대신 각도가 나빠. 판독이 힘들어.』
『그러니까 저격 장면이 나오는 카메라 녹화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건가요.』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 봐. 45개 카메라를 확인했는데 하나같이 녹화가 되지 않았어. 솔직히 난 오싹한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지나간다. 평화로운 장면이다. 오전 8시 12분 30초. 시스템 에러로 인한 급격스런 노이즈. 12분 52초. 총격 사건 발생. 이후 4분간 데이터 복구 불가. 카메라는 혼란에 빠진 군중의 모습을 담는다.
『이래선 마치 카메라가 자기네들끼리 짜고 담합이라도 한 것 같잖아. 망할 놈의 무생물 주제에.』
짜증 섞인 욕설을 퍼붓던 쿠싱이 쥐고 있던 연필을 던졌다.
B.『어얼둬스로 가는 비행기 편을 알고 싶소.』
남자는 잘 나가는 사업가처럼 보였다. 눈매가 날카롭긴 했으나 호감형이었다.
항공사 직원은 어얼둬스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컴퓨터로 조회하여 알아보겠습니다.」상냥히 대답했다.
『아, 미안하오. 오르도스요. 미국에선 그렇게 발음을 하지.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에 위치한 도시요. 몽골어로「궁의 수호막」이라는 의미지.』
『중국입니까.』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중국이오.』
『사업차 방문하시는 건가요.』
『아니오. 마누라 몰래 바람을 피러 가는 겁니다.』
모니터를 주시하며 마우스를 달각달각 클릭하던 항공사 직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한 걸 여쭤봤군요. 죄송하지만 직항 코스는 없습니다. 일단 베이징으로 가셔서...』
『베이징!』
존슨 클라이너는 속으로 총 여행 시간을 가늠해봤다. 아무리 빨라도 18시간도 더 넘게 걸리겠다. 그리고 경험상 2시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착될 거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C. 남자는 자신이 허공에서 날아온 총알에 귀를 잃어버린 피해자라고 밝혔다.
『당신의 이름이 해롤드인가요.』
『해롤드?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내 이름은 해리 베커만이오.』
카터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다섯 명의 증인이「저 사람이 맞아요」일제히 합창을 했다는게 문제다.
얼굴 반을 붕대로 칭칭 감은 피해자는 성을 내며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려댔다.
『빨리 범인을 잡아주시오!』
당신을 부축하여 같이 현장으로부터 도망치려 한 남자는 누구였습니까, 라는 질문은 덕분에 흐지부지 사라졌다. 공식적으로 베커만은 자신을 도와주려한 남자에 대해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베커만은 개인적으로 진 빚이 많은 사내였다. 그런 배경 탓에 이후 조사는 개인 원한과 채무 쪽으로 치우쳤다.
D. 핀치는 잠에서 깨어났다.
솔직히 잠을 잤다는 인식은 없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이 제법 시간이 흘러갔고, 창밖은 어느새 어두웠다. 눈만 감고 있던게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지금 몇 시입니까.』
『22시 17분입니다. 좀 어때요? 핀치.』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리스는 물을 가져와 마시게 했다. 침 삼키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물을 억지게 마시게 해서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일단 한 모금의 물로 목을 축이자 갈증이 제법 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핀치는 고맙다는 시늉을 해보이고 빈 컵을 돌려주었다.
리스는 이불을 끌어당겨 목덜미 부근까지 잘 덮어주었다.
『생각 같아선 공복 상대로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리우 말로는 억지로 식사를 하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내일 아침까지는 더 자도록 해요. 아편 탓에 어지러울 거예요.』
『배는 고프지 않아요, 존. 당신이 식사를 권했다면 나는 정말 괴로웠을 겁니다. 그런데 잠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원래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선 잠을 이루지 못해요,』
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치만 이곳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가 아니죠. 그죠?』
핀치는 그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두어 번 와봤을 뿐입니다.』
『그런 것 같았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존. 나는 고용주로서 당신의 복지 환경에 신경을 쓴 겁니다.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보다 편안하게...』
약기운 탓도 있거니와 얼굴 반쪽을 붕대를 감아선 제대로 앞을 보기 힘들었다. 리스의 팔을 잡고 싶었을 뿐인데 손가락은 엉뚱한 허공을 훑었다.
그런 건가, 유령은 아무리 노력해도 잡을 수 없는 건가. 지친 마음에 쓸쓸한 감정이 끼어들었다.
『당신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요.』
리스가 그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아뇨. 솔직히 나는 매우 기뻤답니다. 그러니 사과하지 말아요.』
그의 손을 붙잡은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글썽글썽 눈물이 차올랐다.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당신이 무사히 살아 있어서 기쁩니다.
당신을 잃어버릴까봐 많이 무서웠어요.
『존?』
『잠시 이대로 손을 잡고 있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어디 멀리 가지 말아줘요.』
『나는 지금 당신 옆에 있습니다.』
핀치는 긴장을 풀며 잠을 청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