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은 POI와 같지 않으며 등장인물의 성격과 이름만 빌려왔습니다.
단편으로 끝낼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부 진행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교수, 안에 계세요?』
알이 뱅글뱅글 도는 두꺼운 안경을 걸친 핀치는「교수」라는 호칭에 반응하여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던 일이라고 해봐야 어려운 종류도 아니고 손으로 갈겨 쓴 회계 장부의 검토 작업이었지만 - 잡화점의 에밀리 루이스는 간혹 숫자를 틀리게 적곤 한다. 세제 1kg의 가격은 30다트인데 장부에는 3다트로 기입이 되어 있다. 이러니 금전출납기에 들어간 현금과 장부상의 잔액이 서로 안 맞을 수밖에. 장부를 도로 덮기 전, 볼펜을 들어 틀린 부분에 V자로 체크를 했다.
『들어오렴, 후스코. 그런데 나는 교수가 아니란다.』
『네? 하지만 안경을 쓰고 계시잖아요.』
소년이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건 좀 아닌데. 얘야? 네가 알고 있는 교수는 어떤 사람인지 차분하게 한 번 설명을 해보겠니.』
『아저씨처럼 안경을 쓴 사람이오.』
후스코는 그런 간단한 걸 왜 묻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핀치가 기가 막히다는 투로 입을 벌리자 후스코는 기분이 나빠졌다. 어째서 저 영감은 나를 바보 원숭이 쳐다보듯 하는 거지. 후스코는 체온이 뜨거운 어린애답게 발끈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핀치는 그렇다, 아니다 설명을 생략한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대학이라는 것이 사라진 마당에 교수니, 박사니 하는 호칭 자체가 부질없다. 많이 배운 사람 - 이런 의미라면 꼭 틀렸다 하기도 그렇고... 하여 핀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니.』
『잠깐만요. 말 돌리지 마요. 교수라고 부르는게 잘못인가요.』
『그 문제는 나중에 토론하도록 하자꾸나, 후스코... 어디보자. 그래도 모처럼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대접이 신통치 않구나. 녹차라도 마실래?』
『녹차라는게 저번에 마셨던 녹색의 구정물을 의미하는 거라면 사양할랍니다.』
『허! 참으로 예절바르구나! 녹색의 구정물?!』
핀치는 짐짓 화를 내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런다고 해봐야 대장간의 곱슬머리 차남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핀치는 허당이다. 주먹이 강하지도 않고, 목소리가 크지도 않다.
후스코가 일곱 살이던 무렵, 장난삼아 조약돌을 던지고 도망친 적이 있었는데 이 허약체질 사내는 나 잡아봐라 메롱메롱 이러고 뛰어가는 일곱 살 남자애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건 둘째고 - 날씨가 좋은 날엔 그도 정상인처럼 걸을 수 있다. 흐린 날에는 인상을 찡그린 채 왼쪽 다리를 절며 걷는다 - 다른 어른들처럼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겠다 고함도 못 쳤다. 너무나 얌전하고 너무나 유약하다. 마차가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만 봐도 현기증을 일으키며 어지럼증을 호소할 지경이니 말 다했다.
그런 남자가 정색하며 화를 내봤자. 흥.
후스코는 어디 먹을 건 없나 두리번거리며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마을을 방문한 움무 상인이 제트-트랜스 전지를 팔고 싶어해요. 모두 두 개를 가져왔는데 하나는 작동을 하고 하나는 녹이 쓸어 망가져 있어요. 그래서 아빠가 교수를 모시고 오라 하셨어요. 상인이 전지를 팔고 싶어 하거든요.』
핀치의 얼굴 근육이 굳었다.
『제트-트랜스 전지?! 그 사람들이 그 귀한 걸 어디서 가져왔다고 하든.』
후스코는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 알면서 왜 그래요. 그들은 움무라고요. 쓰레기를 뒤지고 무덤을 파죠. 땅 아래 세계를 제멋대로 돌아다녀요.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는 자기네들도 모를 걸요? 아니면 다른 마을에서 몰래 훔쳐온 것일 수도 있죠.』
『그래서 네 애비는 전후 사정도 모른 채 그걸 덥썩 사야 한다 말을 꺼냈다는 거냐.』
비난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후스코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제기랄.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뇨!』
세계는 붕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류의 문명이 붕괴했다.
원인이 뭐였느냐고?
일단은「질병」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뇌가 말고기처럼 변형이 되어버리는, 치사율이 높은 무서운 질병이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런 질병은 없었으며, 혹독한 기후 변화 탓이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를 연구할 학자 자체가 사라졌으니 지금에 이르러 멸망의 이유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우주선을 만들 줄 알았던 인류는 후퇴와 퇴보를 거듭하여 지금은 동물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어업, 축산업 같은 것들이 되었고 의사와 과학자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씨가 말랐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글자와 산수를 배운다. 사실상 그게 배우는 것 전부다. 고등교육은 불가능하다. 지식은 단절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컴퓨터를 모른다. 책은 대단히 희귀한 물건이며, 별의 궤도라던가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명맥을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핀치가 안경을 벗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벗으면 사물을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세상을 보는 건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가끔씩 핀치는 안경을 벗는다. 그러면 눈을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네 아버지를 비난한게 아니란다, 후스코. 산다는 건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지.』
제트-트랜스 전지는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구 시대의 유물이다. 어른 손바닥 크기이고 그 속에는 많은 전기가 들어가 있다. 충전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30년 가까이 큰 도시의 불을 밝힐 수 있다. 문제는 충전 기술을 잃어버려 제대로 활용을 못 한다는 점에 있달까, 지금은 0.1% 정도의 성능만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긴한 물건이다. 대장간의 풀무질하는 기계를 돌리는데 사용한다면 아마 평생 쌩쌩 돌리고도 남으리라. 그렇게 귀한 물건을 기껏 풀무질하는 기계에 사용할 거냐는 비난은 둘째로 치고 -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그런 무식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 실제로 이 마을에선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는 동력원으로 제트 전지를 사용하고 있다.
핀치는 얼굴색을 달리했다.
『차라리 이웃 마을에서 몰래 훔쳐낸 거라면 마음이 놓일 거다. 그들이 섣불리 노아의 구역으로 들어갔던게 아니었음 좋겠는데...』
구 인류 - 노아들이 살던 곳은 이제 저승이 되었다.
저승의 독기는 맹독이다. 사람을 죽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걸 선명하게 기억하는 핀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