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하는 거, 너무 비싸요. 그치만 3시간 넘게 걸리는 걸 염두에 두자면 꼭 비싼 것도 아닌 것 같고... 라고 해도 한 번에 7만원 와장창은 출혈이 크혀. ※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에 들어와 그 거주자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제일 먼저 뭘 하면 좋을까.
간단하다. 집안을 장식한 각종 사진을 뒤지면 된다.
《정확하게 따지면 생판 남은 아니지. 여긴 내 집이고, 사는 사람은 바로 이 몸이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모던한 느낌의 액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풋 하고 콧김을 뿜었다.
디즈니랜드에서 샘과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연미복을 입고 따라붙은 미키마우스가 어지간히 짜증났던지 사진 속의 그는 우거지상이다. 반면에 샘은 사탕을 선물받은 어린애처럼 좋아서 난리가 났다. 그리고 딘은 곧바로 눈치챘다. 샘이 기뻐하는 까닭은 단순히 도널드 덕이나 구피 때문은 아니었다. 뺨의 홍조와 시선의 위치만 봐도 그건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식, 혼자서 신났군.』
진짜지 다 커다란 남자 둘이서 창피하게 손깍지를 끼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사진을 집었다.
이번에는 혈압이 곤두박질쳤다. 청바지에 T셔츠 차림새의 그가 검지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총을 쏘는 시늉을 해보이고 있다. 바보처럼 혀도 낼름 내밀었다. 웃자고 그런 건지, 아님 보는 이들을 허탈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건지는 구분이 안 갔다. 아니면 의도했던게 둘 다일 수도.
사진이 찍힌 날짜는 2002년이다. 배경으로는 친구로 짐작되는 젊은이들이 저마다 큼직한 술병을 하나씩 꿰차고 까무라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딘은 눈꺼풀을 꿈뻑거렸다. 웃통을 벗어던진 채 털복숭이 가슴에다「얼간이」란 글자를 낙서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애쉬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여전히 어깨를 덮었고, 오랜 음주 습관으로 배가 나온 것도 똑같았다. 다만 여기선 MIT 공대를 무사 졸업했는지 히피가 갖기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비싼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 구석으로는 썬글래스를 착용한 조도 보였다. 분위기로 보아 그녀는 경찰인 것 같았다. 황당하게도 무리 속엔 I♡NY 로고가 찍힌 셔츠를 허리에다 질끈 동여맨 메그도 들어가 있었다.
탁 소리가 나게끔 해서 액자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평범한 일상.
피냄새 자욱한 전쟁과는 거리가 먼 평온한 삶.
아무도 죽지 않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지도 않다.
자신의 본명으로 된 신용카드 청구서를 찾아냈을 적엔 목젖이 다 드러나게끔 웃음을 터뜨렸다. 미스터 마호고프도, 버코비츠도, 맥귈러커디도 아니었다. 딘 윈체스터는 비자 카드로 식료품을 구입했고, 자동차에 기름을 넣었다. 다이하드 4편 DVD를 주문하고, 식사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는 착실히 세금도 내고 있을 것이다.
『와하하하! 이거 재밌다. FBI로부터 추적을 당할 일은 죽어도 없다는 거군.』
흘러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이렇다 할 연고지도 없던 어제의 나는 잊어주세요. 신용카드 위조에, 살인 혐의, 은행강도 어쩌고도 신경쓰지 마시고요.
휘파람을 불며 청구서를 구겨 쓰레기통 속으로 골인시켰다.
마침 집으로 배달되어온 청구서는 한 장이 더 있었다.
『어디 보자... 새뮤얼 싱어.』
그들이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는 샘의 주장은 정말이었던 거다.
꺼림직한 느낌에 눈썹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황새는 메리에게 고추 달린 아기 바구니를 전달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끔찍스런 배달 사고다. 럼주를 잔뜩 먹고 취한 것이 확실한 황새는 문패의 이름을 잘못 읽고선 윈체스터 집안이 아닌 잘 알지도 모르는 싱어라는 부부에게 갖난 아기를 데려갔다. 샘 윈체스터는 그래서 샘 싱어가 되었다. 거액의 소송, 그리고 변호사가 필요하다.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 얼씨구? 그럼 나는 외동 아들인 거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이다. 죽상을 하고 아기 똥기저귀를 갈았던 딘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샘에게 이유식을 떠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노래를 불러주고, 걸음마를 연습시키고, 베이비 샴푸로 머리를 감겨주었던 형은 없다. 그거 참 편리하네. 바퀴벌레가 우굴거리던 싸구려 모텔방에서 안간힘을 다해 샘을 보호하던 그의 노력은 송두리째 증발했다. 대신 그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싱어 부부의 책임이 되었다. 최우선 순위를 무조건 샘으로 두지 않아도 된다니, 믿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샘이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걱정해야 하는 건 싱어 부부의 몫으로 이제 그는 자유다.
자유...?
흠칫해서 몸을 곳추세웠다. 갑작스런 통증이 어금니를 시리게 만들었다.
정말 괜찮아? 코찡찡이에게 닷셈과 뻴셈을 가르쳤을 싱어 부인과, 아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고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을 싱어 씨에게 모든 걸 넘겨도 괜찮은 거야? 럭키참스만 먹겠다고 고집을 피워대던 녀석의 버릇을 그들이 어떻게 고쳐놨는지, 넌 하나도 모르게 되는 거라고.「우리 마을」이란 제목의 연극에서 농부로 분장한 샘이 대사를 더듬으면 손을 흔드는 건 네가 아니고 싱어 부인이야.
모르겠다. 비디오 카메라를 들이대며「우리 아들 잘 해라~♬」응원하는 여자를 상상해봤다.
좋은 부모들이었을까? 자상했을까? 그들과 같이 해서 샘은 행복했을까?
축구화를 사주기는커녕 축구공도 못 차게 했던 존을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갈비뼈가 뻐근해졌다. 존은 샘이 학급 대표로 연극을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는 포터러프스에 나타난 늑대 인간을 처리하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웠고, 참석을 신신당부하는 선생님의 알림장은 석 달 뒤에나 겨우 들춰봤다. 이쯤해서 더 나쁜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존은 샘에게 좋은 아빠 노릇도 못 하고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우리 고집쟁이 막내에게서 원망받을 일은 이곳에선 없겠네요, 아버지.』
신문에서 오려낸게 분명한 종이 조각에 대고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용감한 영웅 - 수퍼마켓에서 복면 강도와 싸우다 사망. 삽시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린애를 데리고 쇼핑을 나온 임산부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강도에게 덤벼들었고,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안타까운 희생에 지역 경찰 총장이 직접 애도를 표했다.
딘은「영웅」이라는 글자에 목이 매었다. 흐릿한 사진 속의 존은 반듯한 슈트 차림새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전의 그의 직업은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사냥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다. 그래도 불의와 싸우고 사람 셋을 살리고 갔으니 그 다웠다.
『딘.』
상념에 빠져있는 그를 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 즉시 딘은 허겁지겁 눈물을 지우고 부기맨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씩씩한 형으로 되돌아갔다. 약한 모습을 샘에게 들켜선 결코 안 된다. 헛기침을 하며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물건들을 치웠다.
『왜 그러니.』
그것들이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지긋이 관찰하던 샘의 표정은 어두웠다.
『잠이 안 와.』
딘은 반사적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들고 전원을 껐다.
『미안, 이제 시끄럽지 않을 거야.』
『저어, 그게 아니라...』
『응?』
『자고 싶어. 재워줘.』
미묘한 뉘앙스를 가진 부탁에 딘은 비굴하고 더부룩한 미소를 지었다.
스무 살이 넘은 남자가 자고 싶다고 말하는 건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잠을 자고 싶다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상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뒤돌아 달아날 태세도 진작에 갖추었다. 동생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나다니, 치욕적이다. 그치만 사냥꾼의 본능은 보름달의 지배를 받는 그 무언가를 단단히 경고하고 있었다.
『눈 감고 하나, 둘, 숫자를 세면 어느새 잠이 슬슬 온다네.』
『딘.』
『그래! 나는 문단속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다시 가서 확인을 해야겠다.』
『그거, 오토 록인데.』
『기계를 맹신하지 마, 샘. 전기 면도기가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 한다는 말도 있잖아.』
『저어... 지금 날 피하는 거야?』
『어허! 거북하게 그런 거 묻지 말고. 그러니까 너는...』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이라도 하는게 어떻겠니 - 라는 말은 도중에 쏙 들어갔다.
찍어 누르는 키스다. 아니, 이런 건 키스도 아니다.「공격, 레슬링, 압박, 강제적 인공호흡」기타등등의 단어들이 노란색 전구를 반짝이며 광속으로 날아갔다.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도 딱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테크닉 꽝, 무드 꽝, 오로지 아프다는 느낌밖엔 없었다.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샘의 키스는 서툴렀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건 상대가 너무나도 필사적이라서 이러다 죽겠다는 말이 결코 엄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샘. 지, 진정하고... 샘! 아윽!』
질겁하여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하려고 하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렸다. 여유라고는 좁쌀 만큼도 없는, 그야말로 심장을 헤집고 할퀴는 행위였다. 순간 코끝에서 200배 농도로 압축된 탄산 음료의 충격이 질주했다. 상대로 하여금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라는 건 알겠다. 그래도 이래선 안 되는 거다.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살갗이 끔찍하게 쓰라렸다. 거기다 세게 눌리기까지 하고 있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비릿한 피맛에 신음하며 얼음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추워하는 샘을 밀었다.
엉뚱하게도 녀석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반항했다.
《인석아! 아픈 건 나라고!》
결박하겠다며 팔을 두르고 그저 덤비는 것밖엔 할 줄 모르는 그를 어처구니 없다는 시선으로 올려다 보았다. 핏방울이 옮겨가 샘의 입술은 온통 붉었다. 그리고 녀석은 세상의 끝이라고 보고 온 듯한 절망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