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 같은 수확의 계절을 고대하며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던 제피리아의 영주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나홀로 집에」영화 포스터로 변했다. 서른 명이 훨씬 넘는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나간다. 비록 그 몸에 갑옷을 걸치지 않았지만 말을 모는 폼을 보자면 훈련받은 군인들이다. 이러니 머리 속으로「전란」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말발굽에 채인 먼지 속으로 피바람이 느껴진다. 겁이 덜컥 난 한 여자가 코흘리개 자식놈을 챙기며 날품 파는 남편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알아서 엎드린 남자도 있었다. 더러는 밭고랑에 숨었다. 일부 머리 좋은 인간들은 군소리 없이 밀가루를 사재기하러 떠났다. 전란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곡식의 가격이 폭등한다. 덤으로 성행하는 암시장이라는 것도 있고. 이런 저런 까닭으로 말들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사람들이 별 남지 않았다.
흐음, 사람들이라...
바람 부는 날의 나뭇잎처럼 흩어지는 농부들을 흘깃 바라본 후작이 말고삐를 고쳐 잡았다.
『이제 슬슬 남작의 영내로 들어온 것 같군요.』
『예, 각하. 앞으로 조금 더 가면 인버스 남작의 저택이 보일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속도를 줄여볼까요.』
죠르프는 그거 참 반가운 말씀입니다요, 하고는 부하들을 향해 재빨리 신호했다. 말이 그렇지 쉬지 않고 이틀을 내리 달렸다. 여간해선 불평하는 법 없는 불알 친구 로머디스도 설사병 도진 환자처럼 엉덩이를 말 안장에서 들었다 놓았다 안달하고 있다. 원인은 장담하건데 땀띠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라도 땀과 박테리아의 공격엔 속수무책인 것이다. 도적들 수백명을 혼자서 처리할 수는 있지만 벌겋게 짓무르는 살점엔 대책이 없었다.
『속도를 줄여라~!』
뒤따르던 기사들의 얼굴로 좋아라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사일라그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들이었다. 쉰다는 말에 불평할 인간은 없었다.
『워, 워!』
이쯤해서 죠르프는 새삼 감탄했다는 투로 자신의 주인을 쳐다봤다.
원래 피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무예니 검술이니 하는 것과는 담 쌓고 살아왔다. 외모를 봐도 짐작이 간다. 저 가느다란 손목으로 검을 휘둘러댄다? 부러질 것 같은 다리로 적들을 걷어찬다? 상상이 안 간다. 소문으로는 최고의 기사라 추앙받는 미르가지아 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지만... 죠르프는 딱 잘라「아마 세 살 무렵의 일이었겠지」라고 추측했다. 코흘리개 시절이었다면 그들의 주인 그레이워즈 후작도 미르가지아 공의 머리로 나뭇가지를 찔러넣었을 수는 있었을 거다. 어쩌면 맨손으로 쓰러뜨리고 항복의 선언을 받아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릴 적의 일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이미지는 촛불로 불을 밝힌 장서관에서 삽화 가득한 서책을 들고 콧방귀를 뿡뿡 뀌는 거라서 다른 사람과 대련을 한다는 걸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책은 들어도 검은 들지 않는다. 아니, 책보다 무거운 것 자체를 들지 않는다. 그것이 그레이워즈 후작의 이미지였다.
이쯤해서 죠르프는 다시 한 번 더 주인된 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저 책벌레 주인이 백전노장의 부하들보다 워째 말을 더 잘 달리는 거냐. 느긋하게 말을 모는 수준이 아니라 질풍노도의 속도로 질주한다. 하아! 하아! 말 궁둥이를 걷어차며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한다. 날아간다고 해도 믿겠다. 정말이지 따라가는 사람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이건 공개하기 민망한 비밀이지만 숨이 턱까지 찬 죠르프는 실수로 두어 번 혀도 깨물었다. 볼썽사납게 숨을 헐떡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후작을 봐라. 그토록 오래 달리면서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다. 호흡도 가지런하다. 허리는 반듯하고 그 잘생긴 엉덩이도 말 안장에 잘만 붙어있다. 천 리를 단숨에 달리고도 피곤한 내색도 하지 않는다.
죠르프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혹시... 인간이 아닌 거냐.
『이곳은 좋은 곳이로군요.』
『네?』
이제는 산책하듯 유유히 말을 몰던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이 채찍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완벽에 가까운 정비. 다리는 튼튼해 보이고, 수로도 제대로 보수가 되어 있군요.』
미안합니다, 나리. 그쪽만 쳐다보느라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했수.
죠르프는 허겁지겁 표정을 달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곧 수긍했다.
딱 부러진다 라는 것이 그 첫 번째 느낌이었다. 두 번째 느낌은「필요한 지출은 신속 정확하게!」라는 것. 영지의 규모는 사일라그와 비교해서 보자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작았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이 닿아 있었다. 개울엔 여러 개의 통바트가 반듯하게 바리를 잡아 혹시라도 집중호우에 불어난 물이 마을을 향해 들어오는 일 없도록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다. 잡초가 산뜻하게 베어진 길은 마차가 다니기 쉬워 보인다. 산짐승의 돌격을 막고자 세워둔 울타리도 튼튼해 보인다. 듬성듬성 서있는 소작인들의 집들도 전반적으로 토실토실하다. 풍경도 그림처럼 훌륭하다. 뒤로는 나지막한 야산이, 앞으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 극찬의 대상이 된 제피리아의 명품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오호라. 영주의 품성과 영지의 풍경은 곧 동격이라던데.
돈만 많은 졸부는 아닌가부다 하고 죠르프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다 퍼득 깨닫고 고민에 빠졌다.
인버스 남작은 그레이워즈 후작이 질색하는, 이른바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평민 출신의 신흥 귀족이다. 속칭, 말 뼈다귀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보자. 신분의 수직 상승이 가능할 정도로 그 사내의 재주와 능력이 월등하다는 것이고, 귀족 사회로의 진출을 거뜬히 소화해낼 정도로 기본이 탄탄하다는 거다. 깨달음의 충격에 죠르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업신여긴 말 뼈다귀는 실은 진수성찬의 한우 쇠갈비였다?
부와 인맥으로 하나하나 성을 쌓고 자신의 명패를 그 대문에 달아놓는다.
실력 하나로 승부를 걸어 운명의 여신으로부터 승리의 화관을 쟁취한다.
놀고 먹어도 귀족 나으리들과는 근성이 다르다. 뼛속까지 승부욕에 가득 차있다.
이런 자를 대상으로 주사위 놀이를 하려면 소매춤에 눈속임용 주사위를 세 개는 감추어야 한다.
그런 자가 확실한 영지 관리 능력까지 과시하고 있다면?
죠르프는 이마를 때렸다.
더하여 다섯 개의 눈속임용 주사위를 소매춤에 집어넣어야 한다.
그레이워즈 후작도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넌지시 로머디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걸 봐선 말이다.
『로머디스. 인버스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뭐 들은 내용은 없나요.』
로머디스는 벌에게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이 인간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작자의 위에 스트레스성 빵꾸를 내러 왔냐!
물론 뱃통이 개미처럼 작은지라 소리내어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두어 번 어흠 헛기침 한 뒤에 대략적인 것만 추슬러 보고했다.
『각하도 아시겠지만 남작은 포도주 상인 거부입니다. 작위는 21년 전에 모범 납세자 훈장과 같이 받았습죠. 소유한 재산으로 따지면 슬레진에선 랭킹 34위의 부자입니다. 제피리아 포도주 상회 주인이지요. 덕망은 좋은 편입니다. 검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더군요.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랍니다. 부인과는 일찍이 상처하고 슬하에 자녀가 두 명 있습니다. 위로가 아들이고, 아래가 딸인데 자녀들은 둘 다 아직 미혼입니다. 에... 그러니까...』
다 아는 내용이었다. 후작은 손을 흔들어 그만 입 다물라 했다. 그리고는 무감동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흥! 그래봤자 자식 교육엔 썩 성공한 것 같진 않군요.』
그러니까 겁도 없이 대 귀족에게 손찌검을 한다. 후작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놈의 버르장머리라는 건 분명 개 망나니일 것이다.
뭐, 그럴지도.
로머디스는 어깨만 으쓱였다. 어쨌든 직접 눈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코가 뒷통수에 달려있는지, 눈이 세 개인지조차 모른다. 후작의 선입관 그대로 망나니일 수도, 아니면 신들의 걸작일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 아들이라는 자가 제르가디스의 뺨을 휘갈기고는「이 나쁜 놈아!」욕을 했다는 것만 오로지 확실하다.
이쯤해서 로머디스는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뭔 사건이 있었기에 차가운 눈동자의 도련님이 뺨을 맞았다는 건가.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이 칼 같은 성품으로 유명하듯, 그의 조카 또한 명성이 드높다.
그 별명이 차가운 미소의 얼음꽃.
이 도련님 또한 후작 못지않은 완벽주의자다. 이쯤해서 짐작되겠지만 실수는 여간해선 하지 않는다. 설사 실수를 했다고 해도 티를 안 낸다. 어렸을 적에 실수로 말에서 떨어져 뼈에 금이 갔을 적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갔다더라 하는 이야긴 거의 전설이다. 한 걸음에 달려온 의사가「아프지 않습니까?」하고 놀라서 물어보자 상냥히 웃으며「당연히 아프다」라고 대답한 이야긴 지금도 사교계에서 널리 화자되고 있을 정도다. 세상에나. 웃으면서 말했단다.
그런 도련님이 뭘 어드라케 했다고 열 여섯 시골뜨기 소년에게 뺨을 다 맞았을꼬.
『저기 말입니다.』
모두의 상념을 깨고 죠르프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듣자하니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한답디다. 딸도 인버스, 아들도 인버스.』
이해가 안 간다. 후작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대로의 말이겠죠, 각하. 딸이나 아들이나 인버스 가문의 자식들처럼만 키워보자!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망나니는 아니...』
이번엔 후작의 눈썹이 불쾌감을 피력하며 갈매기처럼 휘어졌다.
이크크! 위험하닷! 죠르프는 서둘러 말의 고피를 늦추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행렬의 뒤로 쳐졌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주둥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하여간 이놈의 방정맞은 주둥이!
『뭐, 좋습니다. 모든 것은 본인을 직접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후작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눈에 띄게 풀 죽은 모습을 한 부하를 뒤돌아 보았다.
그렇다.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망나니인지 개죽이인지는 그때 가서 보자.
하! 소리를 내며 말을 몰았다.
『자! 그럼 남작으로부터 보란 듯이 환대를 받아볼까요.』
그리고는 시위하듯 무작정 인버스 가의 저택으로 발을 들이밀고 보았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