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신경쓰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레이워즈 후작은 나긋나긋 웃으며 테이블 위로 펼쳐진 지도를 돌돌 말아버렸다.
『도적떼 출몰 이야긴 단순한 동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도둑놈들은 하나도 나오질 않았답니다. 제 부하놈들이 열심히 뒤졌음에도 머리카락 하나 안보이던걸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놈들도 눈치가 있는데「날 한 입에 잡아 잡슈~」하고 군인에게 덤벼들까. 차라리 밧줄을 들고 스스로 교수대를 향해 걸어간다. 그것도 아니라면 온 몸에 날고기 매달고 상어 밥이 되겠습니다 복창한 뒤에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들거나.

『저희들은 평복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하! 이 남자가 지금 백 살 구렁이가 미끄럼틀 타는 소리를 하나. 평복이 뭐가 어째?
갑옷만 벗어던지면 뭐하느냔 말이다. 수십 명의 젊은 남자들이 일제히 말을 달리는데 도적들이 그걸 보고 매력을 느끼면 그 날로 천지개벽이다. 산적들의 입맛에 맞으려면 연약해 보이는 귀부인, 옷차림이 훌륭한 시동, 더러는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 호기심을 자아내는 커다란 보따리가 필수이다. 이쪽에서 찌르면 곧장 반격할 것이 분명한 튼튼한 남자들을 뭐 하러 건드리냐. 손수건만 팔랑 흔들고 그냥 보낸다.
『산적놈 주제에 취향에 따라 골라 먹는다는 겁니까.』
당연히 골라 먹는다. 강도질에 평등 개념이 어디에 있누. 가진게 많아 보이고, 끽소리 내지 못할 약한 놈부터 턴다.

이 무능한 집단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강도 토벌이라는 걸 하겠다는 거냐.

무능이라는 단어에 반응,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만 돌돌 말았던 지도를 손수 다시 펼쳤다.
무능하다고? 누가. 내가?
『알고 있습니까? 리나양. 쫓아가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따라오게끔 만드는 겁니다. 기껏 따라갔더니 죄다 도망쳤더라, 하르시폼 경의 넋두리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리나양은 도둑들을 따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소득이 없어요. 꿀단지엔 파리가, 파이 조각엔 어린애가 달라붙는 겁니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손가락으로 달그닥 달그닥 말 달리는 흉내를 내며 버닛사 대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검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리고는「히히힝-」하고 말이 앞다리 차는 모양도 냈다.
『호오- 봉화를 올리라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소문을 진득하게 뿌려 차라리 산적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쪽으로 달려오게끔 하는 거죠. 그게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버스 남작의 영애와 그녀가 운반하는 모종의 궤짝을 보호하기 위해 그레이워즈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더라~ 어떻습니까. 머리에서 불꽃이 번쩍하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그거 확실하겠는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녀는 후작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게 수긍하는 눈치였다.

뭐가 확실하고, 뭐가 좋은 생각이냐!
똥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다급해진 로머디스는 천식 발작을 일으킨 환자인양 기침을 터뜨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주인 나리, 잠시만... 아가씨? 죄송합니다.』
로머디스는 남작의 영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철판을 덧댄 슬리퍼로 흠씬 두드려 맞을 것을 각오하고 후작과 함께 뒤쪽으로 물러났다.
『허억, 허억. 나으리,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그렇죠?』
당연하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궤짝 자체도 문제가 되는데 한 술 더 떠서 남작의 열 여섯 난 영애를 에스코트 하는 일에 후작가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보냈다고 해봐라. 소문 좋아하는 인간들이 그걸 두고 뭐라 상상할지는 너무나 뻔하다.

지금껏 서신 왕래조차 없던 사이면서 갑자기 웬 친한 척?
후작이 제피리아에 거금의 자본을 투자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남작이 후작에게 거금의 정치 자금을 건네줄 정도로 나라에 큰 사건이 벌어질 조짐도 없고.
그렇다면 들고 가는 궤짝은 돈뭉치가 아니라 단순한 옷상자?
이래서는「아항~ 후작이 남작의 어린 딸을 첩으로 들이려고 하는구먼」으로 결론이 난다.

첩이다. 애인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니고. 첩이다!
『소문이라는게 원래 그런 거죠. 그걸 잘 아시면서 소문을 진득하게 뿌린다고요?!』
세상에. 결혼이나 미리 하고 염문을 뿌려라, 이 빌어먹을 노총각아.
거기다 열 여섯 소녀의 앞 날을 새까맣게 망칠 일 있냐. 로머디스는 울상지었다.
『후작님! 절대로 안되요!』
『안되긴. 내가 안된다고 해도 저쪽에선 강제로라도 하겠다는 눈치구먼.』
『그러니까아~!! 재밌어 죽겠다는 식으로 허벅지를 때리면 안된다니까요!』
『허벅지는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손뼉만 쳤지.』
『그게 그거잖습니까!』
즐기고 있는 거죠? 즐기고 있는 거죠?! 눈동자 굴리는 거 봐라. 로머디스는 발버둥쳤다.
『여자와 아이는 지켜줘야 합니다. 망가뜨려서는 안됩니다. 그게 기사의 정신입니다!』
『어허! 기사도 정신이야 기사들이 지켜야지요. 하지만 나는 기사가 아닙니다. 내가 어려서 한때나마 수도승 생활을 했다는 이야긴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요? 로머디스. 나는 지금도 법사 지망생입니다.』

흥! 그렇게 나오깁니까. 그렇지만 이걸 아셔야지.
우리 슬레진 왕국 황태자의 캐치플레이즈는「악당은 물렀거라」잖소. 일이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 때는 스무 살 연하를 건드린 변태로 낙인찍혀 귀족 사회에서 영구 추방이오!

순간 그레이워즈 후작의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물! 맙소사. 그렇게나 벌어지나요. 우리들 나이 차이가.』
『지금 나이 차이가 얼마냐를 깨닫고 새삼 쇼크 받을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우리들」이라뇨? 언제부터 각하와 리나양이 우리라고 불리우는 가까운 사이가 된 겁니까?!』
『그렇군. 올해로 내 나이가 서른 여섯이군. 세월 참 빠르다.』
『각하! 이 시대엔 우주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안드로메다까지 가지 마시고 어여 이리로 돌아오십시오!』
『허.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니 작은 목소리로 부르십시오, 로머디스. 귀가 아픕니다.』
『하여간 전 반대입니다, 나으리. 남작의 영애를 일에 말려들게 하지 마세요.』
『맙소사.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이라도 했답니까. 난 그저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고 저쪽에서 그거 좋겠다고 맞장구를 치던데요, 뭐.』
그리고는 고개를 빼꼼 돌려 남들 다 들으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리나 인버스양. 제 부하가 그 작전은 위험하니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데-』
저편에서 열 여섯의 소녀가 재빨리 대답했다.
『인생은 어차피 모험이에요. 남자가 어딜 뒤로 빼요!』
과연 그럴 줄 알았습니다. 후작은 만족스러워하며 팔을 벌렸다.
『들었습니까, 로머디스. 아가씨는 산적들을 붙잡아 정의를 구현하고 싶어합니다.』
『안된다니까요오-』

계속되는 부하의 읍소에 후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슬슬 짜증이 치솟는데 이걸 어쩌지. 로머디스? 그대는 목이 밧줄로 졸린 뒤에 괜찮다고 할 겁니까. 아님 그냥 괜찮다고 할 겁니까.』
내가 미쳤지. 이 작자에게 뭔 잡소리를...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로머디스는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막아야 했었다며 후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쌍두마차다. 감청색의 최고급형 휘장이 드리워진, 여성 귀족들이 애용하는 스타일의 마차다.
진땀을 줄줄 흘려가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금으로 치장한 궤짝이 보였다. 그리고 최고급 실크 드레스 - 그것도 결혼식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등을 돌리고 앉아 궤짝의 자물쇠를 손보고 있었다. 노랑도 빨강도 아닌, 하필이면 흰색이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소녀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려고 했다. 로머디스는 겁이 덜컥 나서 실례했습니다 인사도 잊고 마차의 문을 쾅 닫아버렸다.
정말로 하는 거야, 정말로 하는 거야... 하도 가슴이 뛰어 성호라도 긋고 싶어졌다.

『허억, 허억. 여보게, 죠르프!』
『왜 그러나, 로머디스. 발작인가, 아님 두통이 심한가. 그리 머리를 움켜쥐고.』
『두통은 무슨!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네. 뒷일을 부탁함세.』
『하지만 뒷 일이고 앞 일이고 우리가 나서서 할 일은 별로 없는 걸.』
죠르프의 말 그대로이다. 일은 저쪽에서 알아서 추진하고 있다. 하다못해 술값 몇 푼을 쥐어주고 소문 좋아하는 허풍쟁이들도 몇 구한 듯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는 주당들에게야 이건 공짜로 먹는 꿩이나 마찬가지일 터, 따라서 내일이면「인버스 남작네 뒷뜰에서 공룡 알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산 다섯 개는 넘어갈 거다.
『공룡 알?』
『왜 눈을 꿈뻑거리고 그러나. 드래곤의 알 말일세.』
『진짜?』
『남의 뒤뜰에 쭈그리고 앉아 새끼를 치는 드래곤이 있다면 있는 거겠지.』

본가에서의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온 식구가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 있다. 일부러 과시하듯 온 집안을 뒤집어놓고 지붕 꼭대기로 인부들의 세탁한 바지를 널었다. 이삿짐을 싸서 집 팔고 제피리아를 떠난다고 해도 믿겠다. 뛰어다니는 하인들에 깨지는 접시들, 날아다니는 부지깽이들, 굴러다니는 지구방위대 및 외계인들...
이 와중에 홀로 독보적인 모양새로 사람들을 호령하고 있는 건 이 집의 첫째 딸이다.
『더 커다란 자물쇠를 가져오라니까! 됐어! 그 다음은 거기! 이걸 옮겨! 다음!』
왜들 그리 느려 터졌느냐며 언성을 높인다. 기다란 홍옥 빛깔의 머리카락을 질끈 끈으로 묶어놓고 전두지휘하고 있다. 거기다 사람 기절하게끔 남성용 바지를 입고 있다.
로머디스는 뽀얀 거품을 물었다.
바지이-?! 하얀 드레스 입고 마차 속에 들어가 있던 숙녀는 그럼 도대체 누구여?!

이쪽을 발견했다. 리나 인버스가 반색을 하고 다가왔다.
『여어, 로머디스 씨, 죠르프 씨.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걷는 모양새도, 하다못해 말투까지 이미 남자다.
『아, 아, 아가씨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군요.』
산전수전 다 겪은 죠르프는 패닉까지는 일으키진 않았다. 그래도 입은 떨렸다. 아첨하듯 손바닥을 부비대며 허리를 숙이는 건 그가 매우 당황했다는 의미이다.

『그나저나 이게 다?』
『당밀로 파리를 잡는다 작전입니다.』
그렇게 말한 리나는 손을 탁탁 털며 짐꾼들을 향해「그 상자는 이리로!」라고 호령했다.

Posted by 미야

2008/03/21 09:35 2008/03/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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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8/03/24 22:41 # M/D Reply Permalink

    얼라? 엊그제부터 오늘아침까지 이 페이지가 안뜨더니 갑자기 다시 되네요?
    잠적하신 줄 알고 심히 놀랐었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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