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후작님 장난에 놀아나면 안된다니까요. 뭐가 당밀이고 뭐가 파리입니까.
당황해하는 죠르프의 속사정도 모른 채 리나는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이 정도면 황금을 싣고 간다는 기분이 들고도 남겠지요? 사실감을 내기 위해 궤짝에는 돌을 넣어두었습니다. 마차가 바람둥이 엉덩이처럼 가볍게 보여선 도적들이 의심할테니까요. 돌의 무게는 약 50kg으로 잡았습니다. 이만하면 군침을 흘리고도 남을 겁니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에서 하얀 드레스 차림새의 어린 소녀가 폴짝 뛰어내렸다. 뺨이 복숭아 빛깔이고, 머리카락은 땋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짧은 아이였다.
『언니! 준비 완료예요~ 여기는 오케이예요~!』
『오, 수고했다, 아멜리아!』
동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준 뒤, 리나는 죠르프와 로머디스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쪽의 아이는 두 살 터울의 동생으로 이름은 아멜리아라고 합니다.』
사내들은 밧줄에 목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자매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독한! 서, 설마, 당신은 동생까지 미끼로 사용할 작정인 겁니까아~!!
『그, 저, 에흠... 동생분께서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 다행이군.
『동생은 여기에 남아 소문을 한층 더 퍼뜨리는 역할을 맡을 겁니다. 저는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라가고요.』
- 다행이라는 말 취소.
죠르프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승마라는게 아무래도 숙녀들에게 권장되는 스포츠가 아니다보니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전속력으로 달리다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는 날엔 척추가 부러진다. 재수가 없으면 그 즉시 황천행이다. 그렇다고 어린애가 조랑말 몰 듯 굼벵이 속도로 기어가선 한 달이 지나도록 길바닥 노숙 신세인 건 불을 보듯 뻔하고... 모세 따라 광야 생활 30년은 사절이다. 일단 소매춤 잡고 늘어지자.
『아가씨가 뭐 하러 험한 곳까지 따라오려 하십니까. 이런 일은 그냥 남자들에게 맡기시지요.』
『음?! 제가 못미더운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숙녀님.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픈 말은 아녀자의 일과 남정네의 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저희들이 부엌에 들어가 감히 스튜를 만들거나 빵을 굽겠다고 설치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기를 뱃속에 잉태하겠다고 벼르는 남자도 없지요. 비슷한 겁니다. 말 달려 도둑을 잡는 일은 그냥 우리들 남자에게 맡겨주시면...』
반대 의견은 엉뚱한 곳에서 등장했다.
『왜요. 저는 그녀가 이 작전에 참여하는 거 찬성인데.』
『후작님!』
정원쪽에서부터 홀연히 나타난 후작은 부하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던졌다. 더하여 비난의 손가락질도.
『그대들은 여성을 폄하하려는 것입니까.』
『네?』
『작위를 여성도 승계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성차별적 발언은 시대착오적입니다. 필요하면 남정네들도 부엌에 들어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감자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 리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후작은 언제 그랬느냐며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리나양. 나름대로의 각오도 있으신 듯 하오만, 말은 타실 줄 아는 거죠?』
『후작님 만큼은 탑니다.』
『그렇게 장담하고 말에서 보란 듯이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후작님이나 실수하여 떨어지지 마세요. 보아하니 펜은 잘 잡아도 말 고삐를 잡으신 일이 거의 없으신 듯 합니다만.』
손바닥에 거친 면이 없으니 일단 의심하고 본다. 아닌게 아니라 잘 가꿔진 여자들 손처럼 피부가 보드라웠다. 방금 전에 우윳병에서 건져낸 것 같아 심히 부럽다.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굳은 살을 찾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잊고 미용 크림은 어떤 종류를 사용하는지가 궁금해졌다.
후작은 어린 여자에게 덥썩 손을 잡혔다는 점에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반감을 드러내며 손을 빼기는커녕 눈웃음부터 쳤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금의 돌발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저런- 그쪽 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아십니까. 작고 따스하군요. 매일 꽃만 만지는 건가요.』
『꽃은 안 만져요. 그런 건 취미가 아니라서.』
『그럼 무엇이 취미이신지?』
『장부 정리. 숫자에 자 대고 밑줄 긋기.』
『남다르십니다.』
응? 칭찬은 둘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에 리나는 가만히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길 3초? 어라, 외간 남자와 이렇게 친한 척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 놀라서 손을 확 놓았다.
『왜요? 그냥 잡고 있어도 괜찮은데.』
『시, 실례했습니다!』
『실례는 무슨. 언제든지 잡아도 좋으니까. 자아~ 아저씨랑 같이 손?』
리나는 정색하고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곤 급히 목례했다.
『그럼, 후작님! 준비가 끝나는대로 다시 뵙겠습니다.』
『아니, 손...』
『출발하기 전에 뵙죠.』
후작은 적잖게 실망한 눈치였다.
여자들이 들판으로 나올 적에 하는 말이라는 건「벌레가 많아 끔찍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 바람이 불어 머리 스타일이 엉망이 되었어, 말똥은 질색이야, 땀에 젖어 기분이 좋지 않아」등등일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남자들은 여간한 일이 아닌 이상 숙녀를 대동하고 여행하는 일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해도 화살처럼 내리꽂는 불평불만을 들어줄만한 심적 여유라는 건 그리 많지 않음이다. 터미네이터에게 반복해서 말해보자.「벌레가 많아 끔찍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장담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용광로로 뛰어들 거다. 이때의 대사는「I'll be back」이 아니고「다신 날 찾지 말아요」다.
그런 까닭으로 서른 다섯 명의 기사들은 예정에도 없던 리나 인버스의 동행을 반기지 않았다. 그녀가 남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랬다.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귀찮게 굴고 있다 - 라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흘끔거리고 살피는 눈초리엔 그리하여 불편한 기색이 하나 가득이었다. 여자면 여자답게 집구석에서 수나 놓을 것이지. 더러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저택을 떠나온지 약 2시간이 경과하자 흘끔대는 시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지금껏 입에 올린 불평이라는 건「배고파」가 전부였다. 나무에서 진초록색의 메롱벌레가 떨어졌을 때에도 까무라치지 않고 대신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땅바닥에 버렸다.
다시 2시간이 경과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대신 옆으로 붙어 참견질하는 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꼬리뼈가 말안장에 닿아 얼얼할 적엔 이렇게 하는게 좋다, 멀미가 날 것 같으면 이렇게 침을 삼켜라 등등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로부터 다시 1시간이 흐르자「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냐」식으로 완전히 섞여버렸다.
말 달리자.
죠르프는 나지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달리는 폼이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군. 자세도 딱 잡혔고. 그렇지 않나? 로머디스. 꼭 기사단에 막내가 들어온 것 같어.』
기사단의 막내! 그래도 여자인데 막내!
로머디스는 대답하기가 심히 민망하여 하아~! 기합을 넣고 말 궁둥이나 때렸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무너진다. 저 바다 건너편에서부터 가치관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 궁둥이를 한 번 더 때려보자. 이랴.
그런 로머디스에게 죠르프는 한층 더 가깝게 들러붙었다.
『이봐, 이봐. 주름살 펴라고. 이 정도면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제피리아에서 따라붙은 기사들도 나름대로 아가씨를 잘 호휘하고 있고 말이지. 자네의 눈썹이 작살 맞은 갈매기가 될 까닭이 없어 보이는구먼. 응? 로머디스?』
제피리아에서 리나를 따라나선 기사는 모두 셋.
게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금발의 미청년은 이름이 가우리 가브리에프라고 한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착한 눈매에 여자 뺨치는 예쁘장한 얼굴이다. 겉가죽만 봐선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다. 작년에 있었던 전국 검술대회에서 아깝게 2위를 차지한 남자라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력은 누가 뭐래도 진짜다. 결국 무승부로 판가름난 박빙의 승부에서 동점연하승의 법칙에 따라 2위로 입상, 현 국왕대리인 피리오넬 왕자로부터 기사의 검을 선사 받았다. 단순히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아 진 것이다.
『그랬대?』
『그랬네.』
『호오- 1위는 누구였는데?』
『제르가디스 도련님.』
『아이쿠.』
무명의 평민 씨가 굴지의 명문가 도련님을 제치고 우승을 한다는 건 대회 스폰서들의 감정을 긁어놓는 법이다. 슬레진 제국이 신분상 제약에 관해 꽤 너그러운 편이라고 해도 그렇다.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며, 기사는 비단으로 옷을 해입어야 한다. 못생긴 공주와 누더기 옷의 기사는 예로부터 반사회적이라며 배격받아왔다. 따라서 이 자는 순전히 신분상의 까닭으로 경기에서 불이익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2위. 그것도 단순히 나이 때문에.
그거 참... 진짜 실력자다 이거지. 로머디스는 슬그머니 뺨을 쓸었다.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우승자의 화관을 받아왔음에도 그들의 얼음 도련님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도련님은 화관을 내팽개쳤다.
『에잇.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둬. 어쨌거나 이쪽 나이가 더 어린 건 사실이니까. 작년 우리 도련님은 열 아덟, 저쪽은 스물 다섯이었다고. 그러니까 아주 조작된 승부라고도 할 수 없을 거야. 체격 차이라는 것도 있잖아? 저치는 아무리 봐도 190cm는 넘게 생겼구먼.』
여덟 다음의 숫자가 열이라고 믿는 청년이 제대로 자기 나이를 세었는지를 오늘에 이르러 캐캐미 묻지 말자. 거기다 가우리 가브리에프 본인이 승부에 별 집착을 두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왈가왈부할 까닭이 없다. 가우리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으며,「저기요? 돈 많이 주나요? 우리 아가씨가 돈을 무지하게 좋아하세요」라고 말해 모두를 경악시켰다. 그리고는 제법 두둑한 상금을 챙겨 웃는 낯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좋은 사내로고.』
『그렇지? 나 젊었을 적 생각이 나는구먼.』
『듣지 않은 걸로 치겠네.』
로머디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