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아, 새미. 피가 좀 나지만 아프진 않아. 네가 걱정할만한 문제는 아무 것도 없어. 저울 한쪽에 진실을 매달고, 다른 한쪽으로 거짓을 매달면 양측의 지나친 무게의 차이로 계량하는 접시가 밖으로 튕겨나갈 것이다. 딘 윈체스터는 숙련된 거짓말쟁이였다.
샘은 한동안 레드 제플린이 음악의 아버지인줄만 알았다. 이상한 표정을 한 여교사가「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니? 음악의 아버지는 제플린이 아니라 바흐란다」라며 이를 바로잡아 주었을 적에 소년은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가 형의 뒷통수를 향해 킥을 날렸다. 아니,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보호자는 어디 있느냐 질문하던 가게 종업원에게「우리 엄마는 잠시 화장실에 가셨는데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던 딘이다.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냐 물으면 싱긋 웃으며「전국을 돌아다니며 다이어트 운동용품을 팔아요」라고 말했다.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던 누구와는 달리 얼굴색 하나 안 변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 그것은 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무슨 문제 없습니까? - 없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는 무용지물이다. 기계에 전원을 넣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프는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좁은 방구석에서 용의자를 취조하는 형사들은 그런가 보다 납득한다. 문제는 없단다. 단조로운 삐삐 소리를 내는 거짓말 탐지기는 그런 딘의 주장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는 신이 나서「거봐요, 내가 뭐라고 그랬수. 문제 없다고 그랬잖소」큰소리 뻥뻥 친다.
속으로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주제에. 어금니를 꽈득 깨물었다. 샘은 그 위선의 가면을 철저하게 깨부수고 싶었다.
『오, 바로 그거야, 새미. 오, 새미... 이제 갈 것 같아. 가버려.』 열에 들뜬 딘의 혼잣말을 정확히 흉내내자 유리컵에 지나치게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처럼 쩍 하고 표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딘의 얼굴이 파랗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빙산에서 최초의 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졸지에 서식처를 잃은 펭귄의 처지가 가엾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온난화가 진행 중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냐며 샘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구 차원의 재난 앞에선 일개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와도 같다. 미안하다, 펭귄.
『너, 너, 너...!!』 『설마 형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은밀한 상대가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아닐테고.』 『그만해...』 『아님 폰타나에서 외계인과 만난 적이 있다는 가수 새미 헤이거*? 야구선수 새미 소사*?』 『샘!』 『그렇게 버럭 소리 지르지 않아도 다 들려.』 빙산은 계속 무너져야 한다. 덕분에 남극 물개가 전멸한다고 해도 상관 없다. 영국 땅덩어리 크기의 얼음이 모두 녹아 플로리다 해안이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들 그게 어떻다는 건가. 『정말로 새미 소사라면 앞으로 형은 야구는 다 봤어.』 얼굴의 각도는 그대로 한 채 눈동자만 위로 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운동복을 들어올려 벨트에 찬 권총집을 보여주고 천천히 옷을 내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흉기는 없을지언정 충분히 위협적이다. 『평생 야구 중계따윈 못 볼줄 알아.』
협박 아닌 협박에 딘은 입을 벌렸다. 그럼 맨날 축구만 보라고? 『축구도 안돼.』 『그럼 농구...』 『농구도 안돼.』 『아예 TV 자체를 보지 말라고 하지 그러냐.』 『나만 봐.』 『뭐?』 『나만 보라고.』
숨을 훅 들어마신 딘은 버릇처럼 오른발 위로 왼발을 포갰다. 네 살 연하의 아기 형제가 겁 대가리를 상실한 채 하늘 같은 형님에게「명령」을 했다는 건 둘째다. 배꼽 밑으로 얼음이 파고들었다. 장이 꾸룩거리고 뒤틀렸다. 이 지랄맞은 상황에서 과연 나는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나?
① 지상 최대의 농담을 들었다며 깔깔 웃는다. ② 그냥 무시하고 내일의 날씨 이야기로 바로 건너뛴다. ③ 야구도, 축구도, 농구도 포기하고 왜 너만 봐야 하느냐며 정색하고 따지듯 덤벼든다.
『딘.』 『기다려, 아직 생각 중이야.』 답변을 독촉하는 동생을 향해 도끼눈을 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 노력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뺨이 일그러졌다. 5초간 생각했다. 어느 쪽도 현명한 선택은 아닌 듯하다. 다시 3초간 생각했다. 시야가 핑핑 돌면서 과전압이 흐른 머리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회색의 연기가 솟구쳤다. 끝장나게 싫은 느낌... 새카만 어둠을 헤치며 건전지가 닳은 손전등 하나만 믿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것보다 곱절로 나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발을 헛딛고 그냥 굴러 떨어진다. 생각 같아선 아무에게나 손을 흔들며「도움이 필요해요!」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샘은 새침한 미스 아메리카처럼 한쪽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보랴. 그건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즉시 이빨로 사람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도베르만의 자세였다. 딘이 외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피바람 나는 사건은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절벽을 기어내려와야 했다. 망할, 뒈져죽을, 우라질... 욕이란 욕은 죄다 주워삼키며 딘은 깊게 심호흡했다.
『딘. 그래서?』 『바비 아저씨가 전화하셨다.』 『...』 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엄청난 부피의 빙산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마당에 갑자기 바비 아저씨가 튀어나오면 나더러 어쩌라고? 절묘한 선택임은 분명하다. 이미 그들 윈체스터 형제에겐 한 가족이나 다름 없는 바비다. 이야기가 곁길로 새는게 싫다고「당신 현관에 누가 구토했어요」따위로 반응할 수는 없다. 그가 윈체스터가 사람들에게 보인 헌신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고양이보다 더 교활한 우리 형.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제?』 테이블을 세차게 걷어찰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신 소금통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무슨 일로?』 샘의 손아귀에서 흰색 소금통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누가 먼저 눈을 깜빡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딘은 동생이 걸어오는 눈싸움엔 아랑곳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에게 혹시 마이클 메리먼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느냐 물으시더라고.』 『그게 누구인데?』 『너도 기억에 없지? 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 일기장에서 그런 이름을 본 적은 없는데.』 『그렇지? 그런데 짐 신부님 이름을 대면서「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라고 했다는 거야.』 『음... 그거야말로 수상하군.』
헌터들은 끼리끼리만 모이는 습성이 있다. 쉽게 말해 폐쇄적이다. 그리고 그 교우 관계는 대단히 좁아 흰색의 울타리 안으로 생소한 검정색 양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존의 지인은 바비의 지인이다, 짐의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존의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따라서 바비가 잘 모르는 자가 짐 신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 그것도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보통이 아니라고 봐도 괜찮다. 얘들아? 내 머리가 녹슬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아님 저 작자가 나에게 사기를 치는 걸까. 밤새 잠을 설치고 긴 고민 끝에 딘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을 바비의 얼굴 표정이 선명하다.
소금통을 위태롭게 돌리던 걸 멈춘 샘은 머리에 털 나고 생전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긴장시켰다. 『뭐야. 그 마이클이라는 사람은. 짐 신부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바비 아저씨께 알렉산더 맥클라렌의 성경 주석을 팔아 치우려고 그랬대?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태초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레쉬트인데 명사 레쉬트에 전치사 베-가 접두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혼을 쏙 빼놓고?』 『단순히 책만 파는 거였다면 아저씨가 우리에게 전화까지 하셨을까.』 『물론 아니지. 바비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몇 개월까지 무이자 할부가 되느냐 물어보셨을 걸.』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새미.』 마이클은 책은 물론이고 구두도 팔지 않았다. 길게 말을 하지도 않았다. 누구가 생각나게끔 무뚝뚝한 어조로「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말투는 정중하고 예의발랐지만 듣는 사람이 완전히 질려버릴 정도로 말이 짧았다고 한다. 용건이 있어 전화를 걸어온 건 그쪽이면서 예, 아니오로만 대화를 나누려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바비가 투덜거렸을 정도다.
『그래서?』 『손님 접대용 맥주에 성수를 타놓는 분이야. 만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바비 아저씨가 늘 하시던 말씀이잖아. 겉가죽은 신사였는데 알고 봤더니 헌터들을 습격하는 악마였습니다, 해서는 웃음도 안 나와. 고지식하게「도움이 필요하쇼? 그럼 우리집으로 오쇼」라곤 못 하지.』 『그래도 돕겠다고 하신 거 맞지?』 『겉으로는 나 몰라라 해도 사람이 팔을 붙잡으려 하면 은근히 거절 못 하는 분이잖냐. 아닌게 아니라 안전한 제3의 장소에서 차분히 만나자고 하신 모양이야.』 샘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말대로 바비는 그런 사람이야 - 라는 긍정의 뜻도 있었고, 그 제3의 장소라는 곳에 우리도 같이 가보는게 좋겠어 - 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비는 노련한 사냥꾼이라 실수할 일은 없지만 역시 하나보다는 둘이 좋고, 둘 보다는 셋이 낫다.
『오케이. 바비에게 따로 전화를 걸지 않아도 되는 거지?』 『내가 이미 그러자고 알렸어, 샘.』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야?』 『당연하지. 내가 왜 술을 주문 안 하고 이 따위 맛 대가리 없는 음료를 홀짝인다고 생각해?』 『배가 나와서.』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너무나 긴 시간동안 같이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붙어 있었다. 거기에 대해선 잇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소금통으로 장난치는 걸 관뒀다. 제기랄, 모처럼 딘을 구석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밥은 다 먹은거지? 샘. 그럼 일어나자.』 어느새 딘은 안전한 장소로 달아나 예의「나는 너의 형이다」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젠 일요일 저녁만 되면 은근히 압박감에 시달린다고나 할까. 좋아서 하는 짓이지만 가끔은 모니터를 노려보며 <보다 괜찮은 취미생활을 진작에 개발했어야 했어> 후회하기도 합니다. 자, 머리 나쁜 사람들을 위한 레드 썬 주문을 외워봅시다. * 에피소드를 복습한 결과 짐은 신부님이 아니라 목사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로만 칼라 덕분에 착각했는데 교회의 모습이지 성당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나 여기선 신부님으로 걍 나갑니다. 예전에 썼던 분량까지 수정하려면 장난이 아니게 되므로...;; 어차피 앞뒤가 안 맞고 있지만요. * 마이클은 <베리알 차일드> 편에 다시 나옵니다. * 글의 배경은 2007년이며, 제가 쓰는 글의 전부가 Croatoan 에피소드 전 시기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샘은 아직 초능력자이며 (우갹!) 존의 유언이 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황달이 아자젤도 잘 살아 있습니다.
Posted by 미야
2008/05/25 20:09
2008/05/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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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을 타고 느리게 피가 돌았다. 플로어에 흐르는 음악 역시 느리다. 거 뭐시다냐...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REO-스피드웨건의 Can't fight this feeling 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낮설지만 아름다운 세계, 그녀가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곳으로 가볼 수 있어요, 몇몇 취객들이 귀에 익은 부드러운 음율에 맞춰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푸른 빛이 어우러진 실내 조명 때문일까, 청명한 바다 아래서 수초들이 물살에 반응하여 아름답게 율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는 반대편이 훤히 비춰보이도록 투명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감출 수도 없는 것, 참을 수도 없는 것 - 모래 깊숙이 달빛이 침투하면 조개는 산란을 시작하고, 그 명랑한 바다 거품 속에서 사랑의 여신은 태어난다. 이 느낌을 참을 수 없어요. 구석으로 앉은 여자가 숨 죽여 낮게 웃었다. 물론 딘을 향해서가 아니고, 동석한 애인을 향해서였다.
『멍청한 닭들 같으니. 꼬꼬댁 하고 닭장에서 울기나 할 것이지.』 팔뚝이 가려워 미칠 지경이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반항심이 솟구쳤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그게 밥 먹여주듸.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분홍빛 하트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당연히 동생은 넌더리를 냈다. 『언제는 운전하다 말고 신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으면서.』 『뭐? 내가? 난 안 미쳤어!』 『정색하지 마. 옆에 앉은 내가 다 창피해. 됐으니까 그냥 긴장이나 풀어. 그렇게 뻣뻣하게 있으면 사람들이 그런 형을 보고 은행 강도에게 위협받고 있는 배 나온 지점장이라 착각할 거야.』 『누가 배 나온 지점장이라는 거냣!』 『왜 화를 내? 머리가 벗거진 것보단 배가 나온게 차라리 낫지 않아?』 『틀린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나는 배도 안 나왔고, 머리도 안 벗겨졌어!』 『맞아. 그리고 형은 은행 지점장도 아니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샘은 작은 크기의 감자를 입에 넣었다.
요리의 이름도 생소하다. 빠숑 어쩌고 했던 것도 같고, 아니면 빵드레, 내지는 줼레 어쩌고 했던 것도 같다. 물론 셋 다 아닐 수 있다. 아무튼 샘이 주문한 건 수분이 많은 요리로 크고 오목한 접시에 옥수수 스콘과 같이 담겨 나왔다. 그 맛이 어떻냐고? 알게 뭐람. 딘의 눈에는 코흘리개 애들이나 먹으면 딱인 죽사발로 보였다. 야채는 너무 익혀서 물렁거렸고, 양념이 덜 발려져 허멀갰다. 그래도 샘은 해물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줼레 우짜고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섭식 장애를 가진게 아닌가 의심받던 과거를 내던지고 호록호록 소리를 내가며 스푼으로 뜨거운 덩어리를 건져 먹는데 그때마다 눈매가 발정난 고양이처럼 가느다랗게 변했다.
딘의 눈도 (샘과는 달리 나쁜 의미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맛있냐, 새미.』 『맛있어.』 그런가 보지. 무시하고 무설탕 음료를 마셨다.
『그건 그렇고, 우린 캘리포니아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형.』 『무슨 캘리포니아?』 영문을 몰라 벙벙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딘을 향해 샘이 읍, 하고 입술을 안으로 오무렸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이 병신아.」 그치만 샘은 대학 교과 과정을 밟다 만 인텔리라서 네 살 연상의 피붙이에게 그 따위의 폭언은 퍼붓지 않는다. 그냥... 그러니까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표정만으로 사람을 병신 취급한다. 『사람 셋이 연달아 자살한 아파트... 뭐야.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아?』 기억 났다. 딘은 무설탕 음료가 목게 걸려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첫 번째 세입자는 자살한게 맞아. 이름은 로라 래리건이고 나이는 마흔 일곱이야. 아니, 일곱이었어. 사인은 약물 과다이고,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지.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황으로 보자면 명백한 자살이야. 5년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키우던 금붕어가 죽었고, 폐경했거든.』 『뭐어?! 폐경~?!!』 쓸데없이 목소리를 크게 하고 있는 딘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샘은 얼른 그의 발잔등을 밟았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여자가 그들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설명하는 샘의 목소리는 덕분에 한 곱절 작아졌다. 『조용히 해, 딘. 공공장소에서 떠들만한 단어가 아니라고?』 『그, 그치만... 어이가 없어서. 사람이 겨우 그런 까닭으로도 죽냐? 거, 거... 폐경.』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로라는 아기를 끔찍하게 가지고 싶어했어. 그런데 폐경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임신을 할 수가 없잖아.』 『맙소사. 아기를 원한다면 입양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이 바보. 종족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남의 자식을 키우고 싶어하는 것과 같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예민한 성격의 암컷 둥지에 다른 새가 낳은 알을 넣어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다음 날 아침에 맛있는 계란 후라이 하나를 먹을 수 있게 돼. 알겠어? 이 여잔 심지어 고양이나 개도 키우지 않았다고. 그녀가 기껏 애완용으로 키우던 건...』 『금붕어.』 『그래. 금붕어야. 로라 래리건은 남의 아기를 자신의 품에 안아 키울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소중한 아기를 키워낼 주머니는 낡아버렸다. 남자친구는 떠나갔다. 시합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시계는 멈췄다. 그녀는 절망했고, 살 의욕 자체를 잃어버렸다. 『결국 로라가 선택한 건 수면제를 잔뜩 먹고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는 거였어.』 경찰은 퉁퉁 불어 분해 직전까지 간 로라의 시체를 물에서 건져냈다. 사망한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어서 냄새가 무척 고약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욕지기 나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있잖아? 도시 괴담의 시작은 모양새가 대충 비슷한 것 같아.』 샘은 다소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아파트는 그 이후로 한동안 비어 있었다 - 당연하지 않겠느냐며 샘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펫과 벽지를 모두 바꾸고, 욕실은 통째로 들어냈어. 그런데도 세입자가 나타나질 않자 시세에 비해 이건 공짜다 싶은 싼 임대료를 내걸었던 것 같아. 그게 화근이었지. 1년 반이나 지나서야 두 번째 임자가 이사를 오긴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껴안고 있는 사람이어서 경찰이 수시로 들락거렸다는 거야.』 『으이그... 짐작이 간다.』 『맞아. 총성이 들렸으니 수화기를 들고 911을 눌러야지.』 『자살이 아니라 살해 사건이었던 거냐?』 『아니. 상해 사건이야, 딘. 두 번째 세입자 에릭 가드너는 다리에 총을 한 방 맞았어도 죽진 않았거든. 그래서 경찰은「소파에서 나온 그 마약은 내 것이 아니오」라는 말을 그에게서 직접 들었을 것이고, 구두 상자에서 나온 거액의 현금 다발이 죽은 이모로부터 받은 유산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고, 일련번호가 지워진 38구경이 쓰레기통에 어쩌다 줏은 습득물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고... 블라블라.』
샘의 설명으로는 거실이 피투성이었다고 한다. 입주민에겐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귀신이 붙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아파트. 욕실에서 한 명, 거실에서 한 명. 밤새도록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느니, 누군가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걸어다닌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좋아, 좋아. 이참에 끝까지 가자고. 그럼 세 번째는?』 『나이 일흔 여덟의 노파가 침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어. 그래서 아파트 사람들은...』 『윽! 아무 말도 하지 마, 새미.』 『노친네가 귀신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 『아무 말 말라니까.』 샘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음 소리를 삼켰다. 『심.장.마.비.』 『아악~!!』
딘은 완전히 풀이 죽었다. 얼어죽을 타블로이드. 귀신이 붙긴 뭐가 붙어. 『그래도 우리가 직접 가서 조사해볼 수는 있어, 딘. 만의 하나라는게 있으니까.』 『됐다. 그만 웃고 밥이나 마저 먹어라.』 『왜? 정말로 할머니가 로라의 유령을 봤을 수도 있잖아?』 『관둬. 다리에 총 맞은 마약 떨거지 놈이 잊은 물건을 찾으러 머리에 스타킹 쓰고 아파트로 들어갔다가 겁쟁이 노파를 기절시켰다는데 1달러를 건다. 도시 괴담이라는게 다 그렇지, 뭐.』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되고 성난 영혼이 없다는 말에 만세 삼창을 해야 옳을 터인데 이건 뭐 불난 곳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 불평하는 소방관이라도 된 기분이고... 샘에게 고개를 돌리며 명랑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굉장하네, 샘. 언제 조사를 다 한 거냐? 난 네가 노트북을 켜는 것도 몰랐어.』 『형이 화장실에 들어가 내 이름 부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 짬짬이 알아본 것뿐이야.』 『워-』 『뭐, 경찰 데이터 베이스에 슬쩍 들어가 기록을 뒤져보는 건 늘 하던 거고...』 『잠깐잠깐잠깐! 그게 아니라!』 『웃겨. 아침마다 깔끔하게 면도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욕실에서 한참동안 죽치고 있는데, 이쪽에서「가엾게도, 변비구나」생각할 거라 여겼어?』 『워-』 『그리고 늘 생각했던 건데... 형은 그거 할 적에 소리가 크다고.』
앰뷸런스와 방송국 차량이 몰려들었다. 정복의 경찰관들과 카메라를 든 취재진이 서로 엉켜 난리법썩이다.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웃어야 하나? 찡그려야 하나? 아님 마구 화를 내야 할까? 기자 네 명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렸다. 고가의 마이크 장비가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샘 윈체스터 씨가 마침내 폭탄 발언을 하고 말았는데요!》 《거기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그거를 할 적에 소리가 매우 크다고 하던데요.》 《의도적인 거였습니까, 아님 원래 그렇습니까?》 《정말로 마스터베이션을 할 적에 동생의 이름을 부르나요?》 왜 그런 걸 나에게 물어 - 회반죽을 엷게 바른 듯한 엉망진창의 낯빛을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피를 빨기 위해 달겨드는 각다귀 같았다. 《딘 윈체스터 씨!》 기다렸다는 투로 경찰관들이 차갑게 빛나는 수갑을 들어보였다. 세상의 모든 눈동자들이 그를 책망하며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딘은 크게 숨을 삼켰다. 망할. 전기 충격기로 머리를 지지면 혹시 정상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위하는 기분을 네 놈들이 알 턱이 있냐. 음료수 잔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08/05/18 19:22
2008/05/1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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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스톱워치 신드롬」이라는 걸 인터넷으로 검색하셔도 그런 건 자료로 안 나와요.
언제나처럼 TV를 켜고 환해진 화면을 응시했다. 『얼레.』 그러다 리모컨을 쥔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살색은 살색인데 털투성이 살색이다.
신체 건강한 남자 둘이서 으샤으샤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딘의 취향이 아니다. C컵의 풍만한 가슴, 군살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잘록한 허리, 그리고 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아니라면 흥미가 돋질 않는다.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고 발기한 좇을 보여줘봤자 시큰둥한 콧소리만 나올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서 맨날 보는 걸 가지고 좋다, 싫다 감상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 큼, 하고 목에 힘을 준 뒤에 모텔에서 제공한 채널 편성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닳은 인쇄물로 올라간 제목은「로즈비키 쇼」이다. 비키는 빨강 머리의, 데뷔한지 5년이 흘러 어느새 삭아버린, 젖통 성형을 무려 다섯 번이나 한, 레즈비언 포르노 스타다. 딘은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나긋나긋한 언니들끼리 고양이처럼 서로의 몸을 비벼대고 있어야 정상일 터,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눈에 밟히는 건 알통이 불딱불딱한 형님들이시다.
이것들이 미친나. 오늘날의 미국에선 성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 왜 지랄 같은 호모들이 큰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았을까를 궁금해 하는게 또 미국인이다. 『재수 없어.』 뾰족한 여자 젖꼭지 나와라, 여자 젖꼭지... 손님들에게 제공된 유료 성인 채널은 모두 세 개다. 하나가 꽝이라면 다른 두 개가 있다. 서부의 총잡이처럼 리모컨을 들어 빨간색으로 점등되는 부분을 조준했다.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5분이 흘렀다. 『...』 화면은 아까와 변함이 없어 여전히 털투성이 살색.
『형, 이거 게이 포르노인데.』 『응?』 『엄청 싫어하지 않았어? 이런 거... 저어, 딘?』 리모콘을 가슴에 꼭 쥔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에 반응,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딱 절반만 돌아왔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눈빛은 계속해서 멍했고 피부는 젖은 신문지처럼 창백하다. 상한 음식을 잘못 집어먹고 당장에라도 토할 듯한 기세다.
『딘?』 피카츄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시청한 아동들이 집단 발작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아, 틀렸다. 피카츄가 아니라 포켓 몬스터다. 그리고 뉴스에서 봤던게 아니고 스텐포드 재학 시절에 기숙사 동기생이 작성하던 레포트에서였다. 1997년 12월 16일,《전뇌전사 폴리곤》에피소드에서 약 3초 가량 강렬한 빛이 화면을 뒤덮었고, 이를 즐겁게 보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어지럼증과 두통, 현기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런 큰 소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카츄는 1999년에 타임즈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등극했을 정도로 미국에서조차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당연히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충분히 우려할만한」이란 수식어를 헬륨 풍선에 매달아두고 싫어하는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계속해서 피카츄를 사달라고 졸라댔고, 인형과 비디오 게임기가 시장에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고, 그것들은 메이드 인 제팬이거나 차이나, 내지는 홍콩... 『이야기가 어디로 튀는 거냐.』 『그걸 나한테 따지기 전에 일단 앉지 그래.』 샘은 달지도, 짜지도 않은 밋밋한 목소리로 훈계했다.
다시 5분이 흘렀다. 계속해서 살색. 덧붙여 약간의 털.
형제들은 자신들의 침대에 각각 걸터앉은 채로 화면을 주시했다. 기쁜 부활절을 맞이하여 교황 성하께옵서 친히 미사를 집전하고 계시다. 희망과 화해, 치유의 메시지를 경청하는 시골뜨기 사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내려놓았다. 우리 사회에 각종 문제와 불안과 고통이 존재하는 만큼, 믿는 자들의 형제의 사랑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 네, 사랑이고 말고요. 딘은 이제 병든 닭처럼도 보이고 있다.
『콜라 마실래?』 뜨끔한 딘은 동생의 권유가 세상에서 제일 불건전한 거라도 되는 양 한참을 쳐다보았다. 옆면으로 빛을 받아 곱절로 투명해진 딘을 향해 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무설탕인데.』 말이 나왔으니까 그렇지 다이어트 콜라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TV 화면에 나오고 있는 장면이 불량함의 집결체다. 악마다. 사탄이다.
머리를 짧게 자른 사내가 파트너의 하얀 허벅지를 위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기에 얼굴을 박고 - 혀를 길게 내밀어 항문을 핥작이고는 - 침이 흥건히 묻은 입구를 검지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러 압박했다. 츄웁츄웁 소리를 내며 음란하게 빨아들였다. 다시 핥고,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혀로 간질였다. 자극을 받아 피부가 붉게 물들어갔다. 안쪽으로 살이 꿈틀대고 움직였다. 그 반응에 어쩐지 기쁜 듯한 표정으로 사내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두 마디가 사라졌다. 터져나오는 교성.
저것은 어디까지나 애정 행위가 아니다. 사랑이 아니다. 코앞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바보들이 바빌로니아 음녀의 금화가 짤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명과 마이크를 들이밀고 있을 것이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그만큼 속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트너를 애무하는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나는 이 사람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얇은 피부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일적마다 감정이 북받쳐오른다. 가슴을 문지르는 투박한 손은 영원에 대고 맹세하는 동작을 많이 닮았다. 딘의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짧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고개를 숙여 상대에게 키스했다. 온몸을 떨며 그의 키스를 반갑게 받아들이는 남자는 누구처럼 곱슬머리였다.
『왜. 부러워?』 난리법썩의 장면을 같이 봤음에도 샘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저거 해보고 싶어?』 거스름 돈은 필요 없다는 식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하게 해줄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그렇게 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님 내가 해줄까?』 이건 알렉산드로 볼타의 본명이 스쯔므르스쯜린 카라즈나카우쉬키 어쩌고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이가 없다. 참을 수가 없어져 딘은 얇은 면 재질의 겉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샘도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호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은 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어둠에 젖은 도로를 천천히 걸어갔다. 어차피 행선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이제 곧 여름 (* 드라마와는 별개로 배경은 2007년입니다) - 머지 않아 곧 닥칠 찌는 듯한 더위를 벌써부터 반색하며 날벌레들이 울부짖었다. 그것들은 불켜진 건물 유리창을 향해 나이 든 노파처럼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카미카제식으로 돌진하곤 했다.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살겠다는 의지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행위였다. 머리가 깨져 죽은 벌레들의 사체가 가로등 주변으로 낙엽처럼 널렸다. 딘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강하고 텁텁한 바람이 불어와 그것들을 주차된 차량 아래로 아무렇게나 쓸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바닥에 붙박힌 몇 마리의 벌레 껍질이 발에 밟혔다. 느낌은 바싹 구워진 땅콩 껍질 같았다. 이제 그들은 두 블록을 걸었다.
『더워.』 목이 마르다고 생각했는데 튀어나온 말은 약간 엉뚱했다. 하긴, 더우니까 목이 마른 것이리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딘은 입고 있는 셔츠의 목깃을 헐렁하게 잡아당겼다. 『비는 안 오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길가 가로등에 똑바로 고정시켰다. 어느새 걷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돌진, 돌진, 돌진...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 카미카제.
샘은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보폭을 일정하게 하고 얌전히 따라오는 것이 전부이다. 덕분에 약간은 소름끼쳤다. 야근을 끝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아가씨들을 노리는 치한처럼, 아니면 도깨비처럼 - 그렇다면 겁에 질려 핸드백을 움켜쥔 여자는 누구라는 건가 - 착실하게 딘의 그림자를 밟았다. 이게 만약 영화였다면 스산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뒤편을 부지런히 힐끔대는 여자의 눈동자가 크게 클로즈업 되었을 거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좌우를 두리번 거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눈앞의 표적에게만 집중한다. 짐승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는 이미 그 시선으로 여자를 발가벗겼다. 단추를 푸는 그런게 아니라 찢어발기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은 역시 그건가.「누가 나 좀 살려주세요~!!」라는 비명?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고 냅다 맨발로 달려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주먹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샘.』 『응.』 『부탁할게. 그만둬.』 샘은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딘.』 그리고 천하의 딘 윈체스터를 충분히 겁 먹게 만들고도 남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은.』
그럼 나중에는 뭔 짓을 저지르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잖아! 온몸의 살과 뼈가 제멋대로 튕겨올랐다. 발목이 아스팔트 밑으로 파묻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샘은 경직되어 있는 형을 천천히 지나쳐 한창 성업중인 주점으로 눈길을 주었다. 때맞춰 조잡한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문이 열리면서 적당히 술에 취한 남녀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튀어나왔다. 감자와 조개가 같이 조리되는 맛있는 냄새가 그 틈새로 풍겨나왔다. 텅 비어버린 휴지통 같은 얼굴을 한 샘이 서로에게 반해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연인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엉뚱하게도 배가 고프다는 투로 코를 킁킁거렸다.
Posted by 미야
2008/05/12 15:51
2008/05/1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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