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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여행이었다.
여전히 딘의 시선은 도로 정 중앙을 향한 채였다. 하지만 그가 설치한 고성능 접시 안테나는 옆으로 드러누워 불온한 공기를 열심히 탐색하느라 바빴다. 마침내 달각 소리를 내며 불이 켜진 최신형 컴퓨터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나사의 과학자를 위해 간략한 보고서를 인쇄했다.「메탄과 이산화탄소가 주성분인 대기, 인간의 허파로는 호흡이 불가능, 고약스런, 숨 쉴 수 없는...」
말을 하기 위해 아, 하고 입을 벌렸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뭐가 문제지? 새미.』
『새미가 아니라 샘이야.』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는 식으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샘은「형의 실수」를 깍듯이 정정해준 다음, 다시 한 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글자로 옮겨놓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러한 샘의 행동은 딘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도 남았다. 왜냐하면 1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샘은 무려 열 일곱 번씩이나 따끔거리는 가시가 허벅지를 찌르고 있다는 식으로 움찔거렸고, 그때마다「주의, 좌측으로 스테고사우루스 출현. 피해갈 것」이라는 잘못된 메시지가 스팸 메일처럼 접수되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구워진 웨딩 케이크 위로 파리가 앉았다.
이걸 파리채로 철썩 후려갈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살충제를 뿌릴 수도 없고.
하얀 크림 위에서 징그러운 왕파리가 다리를 싹싹 비비고 있다. 살기가 치솟는다.
『형이 묻잖아. 뭐가 문제냐고, 새미!』
이 얼마나 탁월한가. 좌우 엉덩이에 번갈아 체중을 싣는 것 정도로 남을 열 받게 만들다니.
『젠장! 똑바로 앉지 못해?!』
이쯤해서 동생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화장실 가야 해.』
입이 떡 벌어지는 발언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딘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허깨비를 본 것도 아닌데 왜 눈을 비벼.』
머리가 좋은 샘이 재빨리 틀린 부분을 지적했지만 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장거리 여행에 익숙해진 몸은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습관처럼 어떤 의식을 치렀다. 그게 뭐냐고? 화장실에 가서 방광을 비우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미키마우스 인형에 열광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거였다. 딱히 신호가 오지 않았음에도 딘은 심지어 두 번, 세 번 다녀오기도 했다.

『출발한지 이제 겨우 40분이다, 인석아. 모텔에서 나오기 전에 미리 오줌을 누지 않은 거니?』
『틀려.』
『젠장. 깜빡 잊고 양치질을 빼먹었다고 하면 귀엽기라도 하지!』
『그게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속도 좀 줄여. 아랫배가 살살 아프단 말이야.』
『뭐어?! 지금 큰게 마렵다고 했어~?!』
이거야말로 기자들이 연필에 침을 바르고 좋아라 난리를 치며 대서특필할 사건 - 공주처럼 우아한 샘 윈체스터가 궁댕이를 옴죽거리며 똥이 마렵다고 했다. 하얀색 변기가 광채를 띄며 초음속 비행기처럼 날아다녔다. 남성용 소변기가 하나, 그리고 위풍당당한 좌변기가 두 개였다. 아니다. 딘은 여우에게 홀린 상태에서 깨어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어떤 누구도, 대통령이든 교황이든, 인간이라면 감히 피해갈 수 없는 생리현상을 비웃어선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배꼽이 빠져라 (비)웃는 대신 심각해졌다. 소프트볼 경기장 근처의 벤치에 앉아「왜 우리 엄마는 돌아가셨지」를 곱씹으며 눈물을 참던 시절로 되돌아가 이마에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이 마당에 흥분하면 망하는 거다. 침착해지자.

『설사냐.』
『몰라.』
『그러니까... 그게... 크음! 제법 심각하냐?』
『주유소가 보이면 얼른 세워.』
방구 뀐 놈이 당당하다고 샘은 대놓고 명령했다.
『그리고 속도를 줄여. 지금 괄약근에 힘주며 긴장하고 있는데 좌우로 차체가 흔들리면 실수로 폭탄이 터지게 될 거야. 짐작하건데 그건 딘도 원하지 않을 걸.』
이쯤해서 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당신은 누구세요?」를 외쳤다.
『크리스토!』
『그래, 맘대로 지껄여.』
『내가 지금 의심 안 하게 생겼니?! 샘! 이건 말이 되질 않아! 말이 되지 않는다고!』
『형과 마찬가지로 나도 음식을 먹고, 소화를 시켜선, 배설을 해. 뭐가 의심스럽다는 거야.』
『식은땀 하나 안 흘리면서 맨질맨질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까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 거다! 스펀지밥이 사는 바다속 동네 이름이 비키니 시티가 아니라 콩고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하냐! 너라면 그딴 개소리를 믿겠니?!』
그리고는 화가 잔뜩 나서 쏘아붙였다.
『솔직히 바비 아저씨에게 가기 싫다고 털어놔. 네놈이 거짓말을 지어내면 개그가 되어버려.』

입술을 안으로 오무린 샘이 눈을 흘겨떴다.
이에 질세라 딘은 단상에 올라 상습 지각생들을 나무라는 교장 선생님의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싸늘한 눈빛만으로 충분히 각자의 의견을 전했다.
『얼간이.』
『멍청이.』
쓰잘데기 없는 부연 설명을 뒤로한 채 임팔라는 끽 소리를 내며 갓길에 정차했다. 그와 동시에 샘은 날렵한 동작으로 - 그게 과연 괄약근에 힘주고 있다는 사람의 자세인가 - 튕겨나가듯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문짝이 부스러져라 차문을 닫는 것으로 딘의 마음 씀씀이에 대한 작은 고마움을 표현했다. 밍크 고래가 수족관에서 헤엄을 쳐도 이보다 더 웅변적이진 않으리라. 딘은 눈을 질끈 감고 하나, 둘 숫자를 헤아렸다. 이 정도로 동생을 때려선 안 된다, 이 정도로 동생을 때려선 안 된다. 동생을 때려선... 하느님, 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붕붕 소리가 나도록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며 목이 터져라 고함질렀다.
『이 새끼가 지금 죽을라꼬! 당장 돌아와!』대답 대신 샘은 고개를 빳빳이 세웠을 뿐이다.
『우린 지금 네 녀석 고추 깔대기를 손보러 비뇨기과를 방문하는게 아니야. 왜 뒤로 빼고 지랄이야! 아무렴 바비 아저씨가 야메로 고래를 잡겠냐! 야! 새미!』
집요하고도 꿰뚫는 것 같은 시선만 돌아왔다. 유독한 물질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동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순전히 재미로 편의점에서 초콜렛이나 건전지, 성인용 잡지책 같은 잡동사니를 훔쳤을 적에 짓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원망, 그리고 비난... 그리고 천사와 유니콘의 존재를 믿는 소년의 애원이었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입안에 고인 쓴 맛의 침을 뱉었다. 그리고 악을 썼다.
『그래!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데 이 형이 거기로 데려가주지 않아 정말 미안허다! 기린이 보고 싶은데 동물원에 못 가서 어떻게 하냐. 게이들의 기독교회에서 찬송가를 불렀어야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뜯어말린 이 못난 형의 양심이 마구 가책을 받는다!』
감정적 소모전은 그가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딘은 말싸움으로는 동생을 못 이겼다. 침묵이 안개처럼 깔리는 전장에선 더더욱 기를 못 폈다. 담벼락 위에 일렬로 세워놓은 빈 맥주 깡통을 모조리 명중시킬 줄 알아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어린 동생 앞에선 그딴 건 별 소용없었다. 샘을 다루려면 존이 가르쳐준 것 말고 전혀 다른 기술과, 전혀 다른 전술이 필요했다.
『잘 들어, 이 못난 자식아! 다섯까지 세는 동안 안 돌아오면 길바닥에 내버려두고 나 혼자 갈 테다! 하나, 둘, 셋~!!』
윽박지르는 것 말고는 설득의 수단이 없다는 건 서글프다.
『망할 놈의 똥강아지.』
그리하여 마지막 말은 푸념 섞인 혼잣말에 가까웠다.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샘은 시선을 길바닥 쪽으로 떨어뜨렸다. 검정색 잉크로 찍혀진 작은 발자국들의 흔적을 따라가듯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어쩌면 땅위로 올라온 개미가 줄을 지어 기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낭패다. 비가 올 거라는 신호니까.
『옛날에도 그랬어.』
『뭐?』
『옛날에도 그랬다고! 형이 지독한 독감에 걸렸을 적에 아빠는 나를 데리고 짐 신부님에게로 갔어! 가는 도중에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먹게 해주고, 평소에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던 그림책도 잔뜩 사줬어!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신부님께 인사시키고는 그대로 내뺐어! 형이랑 둘이서만 집으로 돌아갔다고!』
『에?』
『그때도 아빠는 정면만 응시하며 운전을 했어! 콜록거리며 힘들어하는 형에게 콜라를 건네준다고 했다가 실수로 뒷자석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었을 때도 수건만 던져주고 내 눈은 안 쳐다봤어!』
그런 일이 있었던가. 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에 없다.
『있었어!』
『그런데 왜 나는 생각이 나지 않는 거지?』
샘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건... 내가 너무 울어대서 30분 뒤에 짐 신부님이 아빠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거든.』
『오우!』
애가 울어봤자 얼마나 울겠느냐 우습게보면 안 된다. 진짜지 샘은 질리게 울어댈 줄 아는 신통한 녀석이었고, 일단 악을 쓰기기 시작하면 몹쓸 망령도 귀를 막고 십 리 밖으로 달아나고도 남았다. 화재경보기가 울리는 건 애교에 가깝다. 그리고 경보기는 총으로 쏘아 망가뜨려도 된다.
「어쩔 수 없겠소, 존. 독감에 걸린 두 명의 윈체스터에게 죽도록 시달릴 각오를 하고 이리 돌아오시오.」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신부도 서럽게 울부짓는 어린애 앞에선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싱크대에 세제를 풀어넣는 요령으로 손가락을 둥굴게 휘저었다.
『그게 언젯적 일이냐. 세 살? 아님 다섯 살?』
『잘 모르겠어. 으음... 형이 노먼 영감님네 고양이 매카티를 납치했던 때가 언제지?』
『맙소사! 그럼 넌 네 살이었어, 샘!』
『그래서?』
『나는 여덟 살! 하지만 독감에 걸렸던 건 기억이 나지 않아. 너, 제대로 알고 떠드는 거냐? 아무래도 전혀 다른 내용을 엉뚱하게 각색해서 기억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 형은 첫 번째 키스 상대의 이름조차 틀리게 기억하는 돌머리지만 (* A signal for Help : 샘은 딘에게 그의 첫 번째 여자친구의 이름이 에밀리가 아니라 엘리슨이라고 지적했지요. 팬픽 설정입니다.) 난 안 그렇거든.』
『흥이닷! 그 가엾은 여자애한테 유통기한 지난 썩은 우유를 끼얹는 심술을 부린 건 새카맣게 잊어먹고 있었으면서 어디다 대고 자기 머리 좋다고 자랑질이냐, 이 왕대갈박 악당아!』
『형이야말로 멋진 창작의 세계에서 살고 있네요.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지 마시지!』
『너야말로 마크 트웨인 뺨친다, 야!』
『켁! 마크 트웨인을 알기는 알아?「톰 소여의 모험」도 안 읽은 주제에!』
『읽었어! 그러니까 독후감도 써서 제출했지!』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알아, 딘. 미시시피 강에서 톰은 헤엄을 쳤습니다, 풍당풍당. 이렇게 딱 한 줄만 적어서 냈잖아!』

이쯤해서 제2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두 분.」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소곳이 충고했다.
「위험하니까 계속 갓길에 정차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젊은 두 청년이 목이 터져라 언성을 높이고 있으니 누군가 관심을 갖고 접근할 수 있다. 상대가 교통 경찰관이라고 생각한 딘은 재빨리 가식된 미소로 표정을 바꾸고 이쯤이겠거니 싶은 곳을 응시했다.
『아이고~ 수고 많으십니다!』
어랍쇼, 그런데 열심히 기웃거렸어도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딘! 뒤쪽이야!』

그럴 수밖에.
상대는 꼭 붙인 무릎 위로 양손을 올려놓은 채 임팔라 뒷자석에 이미 얌전히 앉아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8/10/08 14:05 2008/10/0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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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라니스터 2008/10/08 17:49 # M/D Reply Permalink

    샘은 여러가지 다향한 형열받기하기스킬을 보유하고 있군요. 좌우 엉덩이에 번갈아 체중 싣기 라니... 대단한 녀석입니다.

  2. 쥬레스 2008/10/09 19:57 # M/D Reply Permalink

    드,드디어 천사라고 주장하는 귀신 등장인겁니까; ㅅ;<<아아 미야님 소설 정말 열씨미 보고 있습니다ㅠㅠ 언젠간 순서를 맞춰봐야 겠어요(...)
    파라다이스 어쩌구(어이)에 언급한 MLR은 문라이트 로드인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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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게 흘러가는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그녀는 내 꺼야!』
『기세 좋게 올라탔다가 토한게 언제라고 그래. 그러지 말고 내게 넘겨.』
『젠장, 사람이 어쩌다 실수한 거 갖고 너무 그러지 말자!』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다 말고 목소리를 억지로 낮췄다. 아침 댓바람부터 주차장에서 옥신각신 다투면 아무래도 사람들 주의를 끌기 마련이다. 아닌게 아니라 피곤에 지친 몸으로 렌터카에 열쇠를 끼어넣던 세일즈맨이 고개를 번쩍 들고 이쪽을 쳐다봤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인가. 그 표정에는 놀란 부분도 있고, 흥미진진한 것도 있다. 비유하자면 여행객들의 텐트를 후리고 통조림을 훔쳐내는 반달곰을 우연히 목격했다는 식이다. 겁은 나지만 동영상으로 찍어「아메리카 홈 비디오」프로그램에 내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눈치다.

으이그, 내가 못 살아.
딘은 다치기 싫으면 저리 꺼지라는 식으로 몸짓했고, 말귀를 얌전히 알아들은 사내는 얼른 운전석 쪽으로 몸을 감췄다. 부르릉 시동을 거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래봤자 한 여자를 두고 삼각관계에 빠진 (절대로 오해!) 두 변태를 훔쳐보는 눈길은 그대로여서 딘은 등껍질이 가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어깻죽지를 긁적거리며 다시 시작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도중에 방해를 받았더니 헷갈리네. 그래! 운전은 내가 할 거야. 그러니까 임팔라 열쇠 내놔.』
『좀 현명해질 수는 없어? 형이 구토를 하기 위해 등을 구부리면 전봇대는「안녕하쇼~ 형씨들」 이러고 우리에게 다가올 거야. 난 그런 끔찍한 일은 겪고 싶지 않아.』
『누가 할 소리! 넌 차렷 자세로 핸들을 꼭 잡고도「전봇대 형씨들, 안녕하쇼~ 이 몸은 샘 윈체스터라고 하오. 이제부터 잘 부탁하오」이러잖아. 나도 그건 사절하고 싶다.』
『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맨날 담벼락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카미카제인 줄 알겠다. 억울해!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운전하는데!』

샘은 화가 나면 입을 앙 다물고 턱을 뾰족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다. 그때마다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의 청년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대신 등장하는 건 발톱을 세운 사나운 야생 고양이다.
온몸의 신경줄이 24시간 세탁소 간판처럼 불을 밝혔다. 발끈해서 덤비는 동생이 썩 달갑지 않은 딘은 일단 신중해지기로 했다.
『이거 왜 이러시나. 넌 신호위반 딱지도 끊었잖아.』
『그거야 형이 옆에서「밟아, 아~씨, 밟아」난리치며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으니까 그랬지!』
『굼벵이 마실 나가는 3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 내가 참견을 안 하게 생겼냐. 생긴 건 멀쩡한데 왜 그리 둔해 터졌는지.』
『누가 둔하다는 거야! 그게 동생에게 운전을 가르쳐준다고 해놓고 귓청 떠나가라 메탈리카 테이프를 틀어놓은 사람이 할 말이야?!』
『어허라, 경고하는데 감히 메탈리카를 욕하지 마, 샘.』
『누가 메탈리카를 욕했다는 거야! 내가 욕한 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은 형이야!』
『그럼 할머니 자장가나 졸리는 찬송가라도 틀었어야 했다는 거니? 이거 왜 이러셔!』
『할머니 찬송가도 필요 없어! 내 말은 익숙하지 않은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형이 날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야 했다는 거야! 그런데 형은 킬킬 웃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만 했잖아!』
『이게 어디서 기억을 각색하나. 난 안 웃었어. 대신 비명만 질렀지. 왜냐하면 그 망할 놈의 전봇대가「안녕하쇼~ 형씨들」이러고 반갑게 인사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딘은 동생의 잘난 머리를 찰싹 후려갈겼다.
『그만 투덜거리고 열쇠나 내놔.』

자동차에 올라타는 것에만 반나절을 소비하고 앉았으니 갈 길이 멀다.
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샘은 노란 빛깔의 거미를 잘못 삼켰다는 식으로 굴었다.
그래봤자 네 살의 차이는 뛰어넘기가 불가능한 저승과 이승의 간격과 비슷해서 샘은 형님의 말씀에 깍듯이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형이 운전할거야?』
깃대가 꺾어진 흉물스런 전장의 깃발을 신경질적으로 뭉개며 샘이 물었다.
『그게 지금 내가 원하는 거야.』
『알았어. 하지만 몸 상태가 나빠진다 싶으면 곧바로 나에게 말하고 차를 세워야 해.』
『오냐.』
『약속하는 거다?』
『지긋지긋한 녀석! 그렇게 할게. 약속하마!』
딘은 길게 뻗어나간 도로를 주시했다. 오전의 햇살에 벌써부터 달아오른 아스팔트 포장도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햇빛을 즐기기엔 다소 더운 날이 될 듯 싶다. 전선주에 연결된 고압선들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늘어졌다. 찌는 듯한 여름도 머지 않았다.

『평소보다 속도를 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목요일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해야 해. 우린 너무 많은 시간을 길바닥에서 허비하고 있다고. 금요일부턴 바비 아저씬 댁에 안 계셔.』
『어... 무슨 일 있어?』
팔짱을 끼다 말고 샘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표면적으로 폐차장을 운영하고 있는 바비네 집은「사업을 접은지 한 3년은 되었거든요」싸늘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전표를 끊는 직원은 당연히 없고, 거래하고자 나타나는 손님들도 없다. 고철을 취급하는 앤서니라는 이름의 사내가 어쩌다 두툼한 현찰을 들고 찾아오지만 그나마 1년에 한 두 번 정도다. 윈체스터 형제들도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을 뿐, 딘은 LA 다저스의 야구 모자를 쓴 앤서니가 대머리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다.
『유나바머*(문명혐오주의자 테러리스트로 20년간 숲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우편물로 폭탄을 발송했다)를 흉내내는 아저씨가 무슨 일로 집을 비우신다는 거야?』
샘은 바비가 새장가라도 드는 건 아니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쁜 아줌마랑 데이트라도 있대?』

소년이여, 핑크빛 꿈은 그만 꾸어라.
차이라면 조금 늦게 시작했다는 것 정도다. 샘 역시 딘과 마찬가지로 10대가 되자마자 총을 잡았고, 암연탄을 빵빵 갈겼고, 썩은 시신을 불살랐다. 궂은 일은 형이 앞장서서 해치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생은 덜했지만 기본적으로 샘이 해야 하는 일은 모두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클립으로 수갑 풀기와 같은 낭만과 담 쌓은 모든 행동들 말이다.
『아저씨가 오랜만에 외출한다고 하면 넌 제일 먼저 데이트가 떠오르니?』
당혹감에 휩싸인 채 동생을 쳐다봤다.
동화적인 (계집애처럼) 사고방식이 가능한 그는 누구인가. 샘이 낯설다.
『바비 아저씨게 그 말씀을 드리면 어떤 얼굴을 하실지 엄청 궁금하다.』
동생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청바지의 보풀을 뜯어내는 척했다.
『아니, 말하자면 그냥 그렇다는 거고...』
자기 딴에도 부끄러운 줄 아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딘은 조금은 안도했다.

『데이트는 아니야. 그렇다고 사건인 것도 아니고.』
『그럼 무슨...』
『친분이 있는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있다고 하셨어. 구체적으로는「책」때문이라고 하셨고. 구하기 힘든「그쪽」으로의 책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왔나봐. 원본이라면 박물관으로 가야 하는 귀한 물건인데 짝퉁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명이 나서 업자들 손으로 넘어간 것 같아. 하지만 우리들 입장에선 거기에 적힌 내용만 중요하지 양피지나 제본의 상태, 역사적 가치는 언급할 까닭이 없는 거잖아?』
『그건 그래.』
동의의 뜻을 담아 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샘 윈체스터다. 책 이야기에 수긍하기가 무섭게 새로운 의문이 솟구쳤다.
『잠깐만. 그럼 우리가 이렇게 서두를 까닭이 없잖아.』
『에?』
『바비 아저씨가 외출했다 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느긋하게 가면 된다고. 우리야말로 급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꽁지로 불이 붙은 것도 아니잖아?』
그들은 바비네 집에 허락 없이 들어가도 야단을 맞지 않는 유일한 존재다.
잠겨져 있는 현관은 알아서 따고 들어가면 된다. 단, 주방에 있는 냉장고는 건드리지 말고 - 식탐이 강한 딘이 그의 일주일치 식량을 단박에 거덜내는게 영 탐탁치 않았던지 바비는 단서조항 하나만큼은 확고히 달아놓았다. 그거 빼놓고는 대체적으로 환영받는 입장이다.
『난 형이 이렇게 옴죽거리며 안달하는게 이해가 안 가.』
스탠포드 전액 장학생 씨는 손가락까지 동원하며 헤아렸다.
『아저씨가 안 계시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만이고, 그딴 짓은 예의가 아니다 판단이 들면 돌아오실 때까지 관광이나 하면서 얌전히 기다리면 돼. 내 말이 틀려?』
샘은 딘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문제라도 있어?』

뱃속이 간질거렸다. 기분 좋은 쪽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위장이 있는 부위를 지긋이 눌렀다. 이래서 공붓벌레는 문제다. 접근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남의 속사정도 모르고 구멍을 깊게 판다. 그리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 기어코 머리를 숙이고 흙더미 안에 뭐가 숨었는지를 캐내고야 만다. 몹쓸 벌레에 물린다고 엄포를 놓아도 소용이 없다.
『문제? 글쎄다... 그런 거 없어.』
『내 눈을 보고 다시 한 번 더 말해주겠어?』
『미안한데 지금 운전 중이야. 전방 주시의 의무가 있어.』
『형!』
『그거 아니? 샘. 난 아까 네가 불평했던 내용을 그대로 곱씹고 있어. 부탁이니 이 형이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렴. 같지도 않은 불평을 퍼부으며 방해만 하지 말고. 전봇대가「안녕하쇼~ 형씨들」이러고 인사하는 건 너도 싫지?』

콜트는 사라졌다. 악마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현재 행방불명이다.
존의 갑작스런 죽음과 딘이 혼수상태에서 기이하게 깨어난 걸로 봐선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략 짐작은 가고 있다. 굳이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원인과 결과가 너무나도 훌륭하게 맞아 떨어져 구태여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배후에는 노란 눈의 악마가 있다. (* 본문의 배경은 2시즌 중반입니다.)

운전하던 자세를 바로 잡았다.
노란 눈의 악마.
그들의 원수.
엄마가 죽었고, 제시카가 죽었고,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샘은... 그의 하나뿐인 동생은...

먼지라도 들어간 모양이다. 눈이 쏘는 듯 아파왔다.
운명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공책에 씌여진 대본처럼 미리 정해진 그 무언가가 있다면?
피해갈 수 있는가. 과연 무사히 거기로부터 도망칠 수 있겠는가.

어둠속에 괴물이 있다. 사악한 악마가 있다.
그리고 그 악마는 말했었다.
「계획이 있단다. 샘과 다른 아이들을 위한 나의 계획이...」

가슴속에서 심장이 돌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악마를 무찌를 수 있을 만큼 딘 윈체스터는 충분히 강하던가?
작은 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다. 길게 잡아당겨진 뼈가 엿가락처럼 가늘어지는 기분이다.
순간 신경통을 닮은 불쾌한 통증이 발 아래까지 빠르게 흘러내렸다.

Posted by 미야

2008/09/28 20:45 2008/09/2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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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틀 2008/09/29 00:03 # M/D Reply Permalink

    미야님, 슈내에 미쳐 돌아다니다가 몇 달째 숨죽여 블로그를 스토킹하던 그림자인데 말이죠, 대체 님의 정체가 뭘까요? ^^* 실제로 출판하시는 작가분은 아니신거죠? (참고로 명색이 에디텁니다) 늘.. 감탄하다 쳐울고 갑니다. 정말 미야님 글 사랑해요 ㅠㅠ 진심으로, 설령 전업이 아닐지라도 부업작가라도 추천드려요. 아웅 부끄러...

  2. 멍든물고기 2008/09/29 02:07 # M/D Reply Permalink

    캬악~~ 3편이네요ㅠ 너무 반가워요ㅠㅠ 과연 샘이 저사실을 알게되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ㅠ

※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4시즌도 시작했겠다, 게으름은 그만 피워야겠죠. ※


일반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약장을 열고 아스피린부터 찾는다.
그러나 딘 윈체스터는 무기부터 챙긴다.
속이 텅 빈 커다란 스포츠 백을 동생의 발치로 던지면서 그는 명령했다.
『거기다 그득 챙겨서 돌아와.』
그것은 존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만사에 조심해라. 징검다리는 건너기 전에 반드시 두드려라. 그러고도 미심쩍다 생각되면 지렛대를 써서라도 돌을 뒤집어라. 싸구려 여인숙에서 하룻밤 머물지언정 밤마다 유령이 목격되는 폐옥에 떨어진 것처럼 긴장을 늦추지 말아라.
그 말을 어찌나 자주 들었던지 귀에 딱지가 앉았을 정도다. 그래서 딘은 아파 죽을 것 같은 몸뚱이를 끌고 방의 이곳저곳을 확인하며 최첨단 도청 장치를 찾는 CIA 요원처럼 굴었다. 가구의 문짝을 모조리 열어봤고, 서랍을 끝까지 잡아당긴 뒤에 밑바닥을 손으로 휘저었고,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전기 스위치를 죄다 눌러 깜빡깜빡 흔들리는 전등이 없는지를 점검했다.

그들의 직업은 헌터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하나 없지만... 샘은 산소 호흡기를 통해 최후의 숨을 들이마시는 중환자처럼 쿠룩 소리를 냈다.
『형. 이러다 연방 정부 은행을 털려는 나쁜 놈으로 신고 당할 거야.』
베개 밑으로 바짝 날이 선 칼을 감춰두는 건 순전히 버릇이라고 치고.
침대 아래로 장전된 산탄총을 두 자루나 꾸겨 넣는 모습엔 할 말을 잃었다. 다음으로는 옷장에 한 자루 추가.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았는지 재떨이를 치우고 협탁으로 38구경을 올려뒀다. 뿐만 아니다. 딘의 손에는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총이 두 자루 더 남아 있었다.

『여기다 항공기 정비교본에다 경비행기 비행요강만 있음 완벽하겠군. 그럼 우린 무역센터를 공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될 수 있어. 이름도 압둘라니 알 쉐리로 고쳐 불리우고 말이야.』
『뭐? 경비행기 교본? 그게 무슨 헛소리냐. 이 형이 비행기를 끔찍이 싫어한다는 거 몰라?』
잠시 걸터앉았던 침대 모서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딘은 동생의 불평에 손사래부터 치고 보았다.
두 개의 싱글 베드 중에서 입구에서 떨어진 쪽은 샘의 몫이다. 딘은 거기서 팔을 아래로 뻗어 준비해둔 총이 손에 잡히는지를 점검했다. 이만하면 되겠나 - 너무 깊숙이 숨겨두면 정작 필요할 적에 써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발에 차이게 가까이 두면 오발 사고의 우려가 높다. 딘은 잠시 턱을 어루만진 뒤에 동생의 팔이 자신보다 훨씬 길다는 걸 염두에 두고 위치를 다시 고쳤다.

『끙차! 그런데 소금은?』
『응?』
『동생아. 지금 오페라 하우스로 닭이 등장했냐. 왜 그런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먹으려는데 정작 필요한 조미료가 없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딘은 입 모양만으로「소금」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반복했다.
『뭐야, 새미. 소금 어딨어. 트렁크에서 안 꺼내온 거야?』
『어, 그게... 저기, 음...』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인석아! 까먹을 걸 까먹어야지!』

두 손을 청바지 뒷주머니로 찔러박은 채 주차장까지 달음박질한 샘은 오리 주둥이가 되었다.
언젠가 딘도 결혼하여 그만의 가정을 꾸리겠지만 결코 좋은 남편은 되지 못할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그의 특기는 100년 사랑도 잿더미로 만들기에 충분했다.「여보, 사랑해. 그런데 당신 요즘 무지 살졌어」면박을 주는 식이랄까. 한 핏줄인 그조차 악 소리를 낼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어느 여자가 과연 참아줄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고랑내 나는 양말만 쳐도 충분히 이혼감 - 씩씩거리며 임팔라의 뒷 트렁크를 열어젖힌 샘은「빌어먹을!」고함을 질러댔다.

『딘! 지금 뭐하는 거야!』
신성한 왕소금 두 포대를 끌어안고 방으로 돌아온 샘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핸드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다. 누구와? 무슨 까닭으로? 샘은 당황했다. 여기에「도대체 나 없는 사이에 어느 년이랑 붙으려고!」비명까지 덧붙이면 그야말로 완벽한 아침 불륜 드라마 그 자체 - 머리가 살짝 돌은게 아닌 이상에야 딘을 추궁할 수 없는 그는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응? 뭘 하고 있냐니. 네 눈은 해태냐. 이 형님은 전화하고 있으시다. 점심 먹은 걸 죄다 게워냈더니 뱃속이 헛헛해서 말이야. 뭐라도 주문해서 먹으려고.』
동생이 뿜어내는 불온한 공기를 눈치채지 못한 딘은 그대로 등을 돌리며 핸드폰에 대고 외쳤다.
『내 말 들었어요? 영어 몰라요? 배달 되냐고요!』

리는 그들 형제에게 간단히 악수를 나눈 뒤 다른 뱀퍼들과 마찬가지로 캐나다로 향했다. 단, 남미에서 날아온 사냥꾼들과는 달리 표정이 푸르죽죽했는데 미국의 국경을 넘는 까닭이「즐겁고 기쁜 사냥」이 아니고「지루하고 골치 아픈 조율」에 더 가까운 탓이었다.
『그만 싸우라며 뜨거운 물을 끼얹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젠장.』
뱀퍼들의 목적이「남의 피를 빠는 개새끼들의 완벽한 멸종」이라 의심치 않았던 샘은 솔직히 리가 불평하는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하~ 주님의 은총이어라.」
「무슨...?」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야. 큰 전쟁으로 인구가 급감하면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베이비붐이 일어나지. 집집마다 아기가 앵앵대고 기저귀 찬미가가 울려퍼지면 즐거울 것 같지? 알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인플레이션, 실업자 증가, 가치관 혼란, 사회보장 제도의 붕괴... 좀 이해가 가니, 스탠포드 전액 장학생 씨?」
가방 속으로 속옷 꾸러미를 억지로 쑤셔 넣다말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커피 빛깔의 스타킹 한 짝이 무슨 족쇄처첨 발목에 걸려 데롱거렸다. 그래서 샘의 시선은 리의 얼굴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다리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사냥이 끝난 뒤엔 뱀파이어의 숫자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는 건가요?」
「실제로 늘어나. 두뇌가 피로해지는 일이지. 당연하지 않겠어? 그 자식들도 번식을 한 줄 안다고. 거기다 인간의 여자들처럼 임신에서부터 출산까지 10개월이나 잡아먹지도 않아요. 그냥 아무나 붙잡아 피를 빨고, 다시 피를 주입하면 끝. 그렇게 하기까지 1분도 채 안 걸려.」
리는 제대로 짜증을 부리면서 스타킹을 잡아챘다.
「그래서 일부는 적당히 살려둬야만 하는 거야.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인다고 능사가 아니거든. 자칫하면 그 반동으로 뜨내기 뱀파이어 숫자만 늘어나게 돼.」
웃음기라곤 요만큼도 없는 얼굴로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화장품 파우더 통을 걷어찼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뭔지 알아?《어쩌다보니 뱀파이어가 되었거든요》족속이야. 흡혈 충동을 제어할 줄도 모르는 주제에 힘은 바보처럼 세지. 머리도 나쁘고 지혜도 없어. 목마름에 헐떡이다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날아다니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른 리는 화장실 안쪽에서 양치질 중인 딘을 향해 버럭 외쳤다.
「어이, 형씨! 캐나다 관광에 관심 없어? 내가 공짜로 시켜줄게!」

샘은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딘은 그때까지도 광고지에 실린 음식 사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또띠아 속에 토마토와 쇠고기를 가득 넣고 표면에 치즈를 입힌 멕시코 음식이었다.
『예! 치즈를 입힌 비프 타코 세트요!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린다니까요!』
『이 바보 식충아. 그거 먹음 위장이 다시 뒤틀릴 거라고.』
『어... 지금 네가 말한 거냐.』
『그래. 내가 말했다. 전화기 내려놔, 딘. 눈물 콧물 펑펑 흘리면서 게워냈던게 언제라고 벌써 밥 타령이야. 미쳤어?』
『이거 은근히 기분 더럽네. 말투가 불손하구나, 새미.』
『내 탓은 아니야. 바보에겐 친절하게 굴 맘이 안 드는데 어쩌라고.』
『인석아! 형에게 자꾸 바보, 바보 하지 마!』
『정 듣기 싫음 똑똑하게 굴던가.』
『이건 말도 안돼! 소금처럼 기초적인 것도 빼먹고 안 챙기는 동생에게 내가 왜 바보라고 욕을 먹어야 해?!』
두 팔을 벌리며 분통을 터뜨리는 형을 짐짓 모르는 척하며 손바닥으로 자기 입술을 문질렀다.

작별 인사를 나눈 이후 리는 샘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럴 까닭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샘은 캐나다로 같이 가자 그녀로부터 어떠한 권유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딘은?

긴박한 거래 날짜가 코앞으로 닥쳤는데 직원들이 죄다 찜질방으로 도망쳤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장님처럼 딘은 주먹을 들었다 놓았다 야단이었다.
『배고파~!』
『침대에 눕기나 해. 한숨 푹 자고난 뒤에 느긋하게 저녁을 먹자.』
『무리야! 배가 고프면 잠이 안 와.』
음식에 대한 욕구는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지 딘은 계속해서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샘은 그게 신경에 거슬려 미칠 지경이었다.

- 나 몰래 리와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건 아닐까.

소금을 가지러 주차장으로 내려간 사이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을 수도 있다. 나름 서두른다 했어도 3분은 족히 걸렸고, 그 정도 시간이면 상대로부터의 답장이 도착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어? 새미 너, 표정이 왜 그래.』
『피곤해졌어.』
『어쭈?! 바보 형을 상대하느라 아주 녹초가 되었다 이거냣!』
형의 핸드폰을 들여다봐야 한다. 샘은 엄지손가락을 지긋이 깨물었다. 물론 만사 용의주도한 그의 형은 통화내역을 따로 저장해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딘의 핸드폰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라도 확인을 하지 않음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샘은 방구쟁이!』
『유치해.』
『샘은 여자 속옷 입는다!』
『유치하다고.』
『샘은 똥구멍에 털이 났어요! 잔뜩 났어요!』
『딘!』

쫓아가서 목을 졸라버리겠다는 식으로 팔을 크게 휘저었다. 그런다고 해봤자 허풍에 가까운 동작이어서 딘은 낄낄대며 쉽게 피해버렸다.
『알았다고, 동생아. 네 말대로 밥은 좀 있다가 먹도록 하자.』
그리고는 핸드폰을 다시 귀에 대고 신경을 집중시켰다.

『여보세요... 바비? 저예요, 딘! 목요일까지 도착할 거라고 연락드렸었잖아요. 예! 우린 다 무사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물론이죠!』
그런 딘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샘의 얼굴에는 근심과 불안이 가득했다.

Posted by 미야

2008/09/21 20:52 2008/09/2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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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렌드 2008/09/22 12:38 # M/D Reply Permalink

    의부증일까 독점욕일까... 어느쪽이든 횽아는 머리가 아픈겁니다.

  2. 멍든물고기 2008/09/25 20:53 # M/D Reply Permalink

    와우,,, 새미..... 의심이 많네요 딘피곤하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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