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칭 말하는 <빠꾸>를 당할 줄이야...;; 정식 수정본을 올리는데로 이 글은 삭제하겠습니다. *
작게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점점 커지더니 지금은 마이크를 붙잡고 공연 중인 프레디 머큐리가 되어버렸다. 벙벙한 표정을 지은 샘은 욕실 방향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노래인지 외침인지, 그것도 아니면「엘 고어는 사탄이다」구호인지 이쪽에선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특급 롤러코스터를 타고 360° 회전을 거듭해 간식으로 먹은 핫도그를 고스란히 게워냈다. 기백은 훌륭한데 음정, 박자는 죄다 꽝. 마지막은 가가멜이 스머프를 붙잡으려다 벼랑에서 추락하며 비명을 지르는 걸 닮았다. 《@)#_~♬ 우갸우갸, %(#)%~♪ 흐응응~♩》 잔뜩 신이 나서 지휘하는 포즈까지 잡았던 것 같다. 와장창 하고 플라스틱 물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이제 샘은 화를 내는게 좋을지, 아님 웃어야 좋을지 헷갈렸다. 『형! 적당히 좀 해. 계속 그러면 옆방에서 시끄럽다고 항의 들어와.』 그런다고 얌전해지면 딘 윈체스터가 아니긴 하지만.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이 나오는 시절은 이미 지났다. 아니, 솔직히 말해 딘 윈체스터에겐 그런 태평스런 시절 자체가 없었다. 거울을 보며 여드름을 고민할 나이에 그는 일렬로 진열한 깡통에 모두 몇 개의 총알 구멍을 낼 것인가를 두고 불타올랐다. 예쁜 여자아이와 같이 영화관에 갈 궁리를 하는 대신에 겁나게 뜨거운 탄피를 땅바닥에서 어떻게 주워올릴 것인가를 연구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 샘은 도리질했다 - 남들은 다 겪는 사춘기를 비정상적으로 건너뛴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애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성숙하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철이 덜 들었다. 이예이예 정신나간 후렴구에 샘은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야?』 『음?』 『연거푸 커피 열 다섯 잔을 마신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타올 한 장만 허리에 두르고 욕실 밖으로 나온 딘은 동생의 타박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불을 지른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왜 이러셔, 새미. 형님은 그냥 기분이 좋은 거야. 굳이 이유를 달자면 저녁에 먹은 감자튀김이 무척 맛있었다고 할까.』 『흥! 차라리 오늘 본 검정머리 웨이츄리스가 취향이었다고 하지 그래.』 『물~론 그런 까닭도 있고.』
가볍게 넘기는 대답에 샘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다. 그래봤자 딘은 노랗게 튀는 불똥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캔맥주의 팝탑을 땄다. 그의 사랑스런 신경질쟁이 동생은 비가 와도 툴툴거렸고, 비가 오지 않아도 툴툴거렸다. 사소한 반응까지 일일이 신경썼다간 뇌가 타버린다. 적당히 무시하고 있다가 이젠 되겠거니 하는 찬스를 노려 뒷통수를 쓱쓱 쓰다듬으면 끝, 시선은 이미 스포츠 뉴스로 향해 있었다. 그래, 오늘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이겼나, 졌나? 목구멍을 넘어가는 맥주는 시원해서 기분 좋았다.
『옷이나 제대로 입어. 어깨를 차갑게 하고 있음 감기에 걸려.』 『아직 더워.』 『딘! 내 말 안 들려?! 감기 걸린다니까!』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어조다. 시선을 엉뚱한 벽장쪽으로 돌린 동생은 똥구멍이 헐었다는 식으로 안절부절이다.
그 까닭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딘은 계속해서 능청을 떨기로 결심했다. 『아, 덥다... 샘? 너도 마실래?』 팔랑팔랑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딘을 향해「응」이라는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딘은 냉장고 문을 새로 여는 대신, 자신이 마시고 있던 캔맥주를 동생을 향해 내밀었다. 샘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형이 허리에 감고 있는 타올 속으로 손가락 하나를 미끌어뜨렸다.
Posted by 미야
2008/06/15 19:36
2008/06/1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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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내 룸메이트는 머리 좋고, 예의바르고, 잘 생겼고, 참을성 많고... 하늘에서 뚝 떨어졌구나 싶을 정도로 좋은 녀석이었다. 말수가 극단적으로 작다는 걸 빼면 흉을 볼 꺼리가 없어 우리는 늘 곤란함을 겪었다.
『흉을 볼게 없긴 뭐가 없냐. 그 수도승 녀석, 좀처럼 어울려주질 않는다고~!! 모처럼 같이 놀자고 권했더니 한심해 죽는다는 식으로 노려바써. 씨잉... 시험 끝내자마자 아르바이트부터 챙기는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냐! 세상에, 일하러 갔어, 일하러! 그 곰탕색히!』
미안. 비행기가 추락해 가까운 친척이 몰살당했다는 식으로 목놓아 울부짓고 있는 친구는 살짝 무시해주길 바라. 맥주도 너무 마시면 취한다는게 이래서 확인된다니까. 『칼리. 벌써부터 주정이냐. 계속 그러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버린다.』 『어라. 어디서 강아지가 왈왈거리는데 왜 내 눈엔 안 보이지. 그거 희안허다.』 『환청까지 들리십니까. 자~알 하십니다. 여기요! 얘한테 찬물 좀 줘요!』 손가락을 튕겨 신호하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 아래에선 칼리의 종아리를 재주껏 걷어찼다. 『꺄울!』 여자를 발로 차다니, 이 무식한 놈 어쩌고 푸념이 쏟아졌지만 어쨌든 교통정리는 필요하다.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서. 『하늘에서 떨어진게 맞다니까.』 그렇다. 지금 우리들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샘 윈체스터다.
『난 잘 모르겠어. 그냥... 평범하지 않아?』 알콜에 약한 마이클은 신중하게 손아귀에 쥔 유리잔을 빙글 돌렸다. 물빠진 청바지를 하느님처럼 신봉하는 이놈은 이번에 샘과 같이 일반교양 수업을 두 개나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강의실 뒤편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꺽다리에겐 별 감흥을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음, 수업엔 빠지는 일 없고, 그렇다고 손을 들어 교수에게 질문도 하지 않고, 여자애들과 데이트하는 일도 없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그렇게 말했다. 『커다란 덩치가 아니었음 난 그 녀석이 같은 강의실에 앉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걸.』 『현대 미국 문화사 개론이었지?』 『아니. 문학 총개론이었어.』 『그거나 이거나.』 『그래. 네놈의 골빈 머리가 뭘 알겠냐. 아파치 헬기나 아파치 인디언이나 똑같은 종자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마이클이 눈을 부릅떴다. 두꺼운 근시용 안경 너머에서 푸른 눈동자가 번개를 쏘았다. 피뢰침도 없는 나는 알아서 엎드릴 수밖에.
싸움이 벌어질 거라고 착각한(?) 미아가 워워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그치만 샘이 평범하다는 마이클의 주장엔 나도 동의해.』 그리고 진정한 여자는 프라다만 입는다는 식의 추가 발언을 하여 칼리를 경악시켰다. 『사실은 평범 그 이하지. 윈체스터는 늘 싸구려 마트 옷만 입거든.』 『미아!』 『왜 그래, 칼리?』 『그건 실례야!』 『어... 그래?』 미아는 부잣집 졸부 외동딸이라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칼리와 마이클은 짐짓 시선을 주고받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저런 인격 모욕적 발언을 아무렇게나 해대는 미아의 성격은 물렁뼈라는 거다. 한 없이 착해빠진 녀석이「모르고서」사람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뱉는 건 정말 끔찍스럽다. 그녀는 아프리카 빈민국에 가서 옥수수가 없음 케이크를 먹으렴 떠들고도 남을 위인이다. 사촌 동생이 아니었다면 시험 끝났다, 맘 놓고 죽어보자 모임에 같이 껴주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랴. 나는 핏줄이니까 약간만 분노했다.
『어떻게 너는 셔츠의 색과 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냐!』 『어머! 그러는 리처드도 윈체스터가 입은 분홍 셔츠에 대해 욕을 했었잖아!』 『물론 욕을 했어, 미아. 그치만 그건 샘의 센스 자체를 두고 욕한게 아니야! 20% 세일품 중에서 팔 기장이 맞는 옷이 그것밖에 없었다며 만사 포기하고 그걸 입어야만 했던 녀석의 궁진한 생활 형편이라는 걸 욕했던 거야!』
샘은 가난하다. (추정) 양친은 일찍 돌아가시고, (추정) 의지할 가족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추정) 머리가 좋아 장학금을 타냈지만 (확실) 대학에선 생활비까지 책임져주진 않는다. (확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많이 어렵나봐.』 돈이 어디서 저절로 생기는게 아니니 몸이 바스러져라 일해 식비와 용돈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에 목숨을 걸면 성적이 떨어진다. 성적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대학에서 약속한 장학금이 취소된다. 그래서 샘은 식비를 줄이고, 단벌 옷을 고집하는 걸로 현실과 타협했다. 덕분에 푹 꺼진 눈자위는 옆에서 보면 무서울 정도다. 『최근엔 시험 준비로 바빠서 가계부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친 모양이야. 요즘엔 밥을 전혀 안 먹더라고.』 나의 이 말에 세 명의 친구들은 경악에 가득차 입을 꾹 다물었다.
21세기 미국에서 돈이 없어 아사하는 대학생이라. 마이클은 질려서 말도 안 나온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그럴것이 마이클이 몸을 담고 있는 기숙사엔 굶어 죽은 유학생 괴담이라는게 있다. 스탠포드에선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다고 했던가, 수학 전공이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수업에 나타나질 않아... 마이클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필리핀.』 미안하다. 필리핀 출신이었댄다. 아무튼 수업에 나타나질 않아... 『기다려. 갑자기 헷갈리네. 말레이시아일지도 모르겠어.』 젠장! 어쨌거나 수업에 나타나질 않아...
『진짜야? 굶어서 죽었다고? 정말?』 사람이 모처럼 분위기를 타고 있는데 말이지. 이야기를 싹뚝 자르지 말아, 미아. 『그렇게 질겁할 것 없어, 미아. 근거 없는 괴담이야, 괴담. 어쩌면 학생 비자가 잘못되어 추방당한 걸지도 몰라.』 『아냐. 스터디 모임에서 제시카가 그랬는데 그 학생은 1980년대 필리핀 쿠데타에 휩쓸린 거라고 해. 왜 있잖냐, 구두 많은 이멜다, 마르코스... 굶어 죽었다는 쪽보다는 이쪽이 더 현실감 있지. 그치만 학업을 중단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 민주화 시위 도중에 총 맞아 죽었다는 결론은 좀 불쌍해.』 나를 바보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아예 마이클과 칼리까지 번갈아 끼어들었다. 좋다 이거야. 21세기에 괴담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아무튼 학생은 허공으로 감쪽같이 증발했고, 그때부터 밤이면 밤마다 기숙사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생각났다며 마이클이 갑자기 표정을 달리했다. 『그러고보니 샘이 그 괴담에 유독 관심이 많았어.』 『그래?』 『난 봤다. 도서관에 가서 캠퍼스 괴담 자료도 찾고 옛날 학부 기록까지 뒤져보더라고.』 『호오?』 『걔 은근히 그런 거 밝히는 것 같지 않니? 유령이나 귀신, 좀비나 뱀파이어 같은 거.』 『글쎄다. 할로윈 파티는 질색이라고 분명 자기 입으로 그랬는데...』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샘이 좀비를... 많이 좋아했던가?
마이클은 쓰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왜? 샘이 좀비를 좋아한다고 하면 좀비 영화 DVD라도 선물하려고?』 그러면서 대놓고 내 흉을 봤다. 『그거 아냐? 칼리. 저 짐승은 알리슨과 데이트를 하면서 샘 이야길 스물 일곱 번이나 했댄다.』 『에엑? 진짜?!』 『있잖아, 샘은 말이지... 있잖아, 샘은 말이지.... 가엾은 알리슨. 얼마나 화가 났음 나에게 살짝 귀띰하길 아무래도 리처드를 죽여버려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망설이지 말고 총으로 쏴버려. 여자를 배려하지 않는 남자는 죽어도 싸.』
나는 강하게 반박했다. 『과장이야! 너희들은 데이트 할 적에 친구 이야긴 하나도 안 하냐?!』 『물~론 하지. 그치만 넌 정도가 지나쳐, 리처드. 알리슨 앞에서 일곱 번 정도만 말했어도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넌 거기다 더하기 스무 번이라고. 샘 윈체스터는 말이지, 샘 윈체스터는 말이지... 첫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야!』 『강한 부정은 긍정~♬』 『아니라니까!』 『리처드는 변태~♪』 『그런게 아니라니까!』 낯간지러운 애정 따위가 아니다. 정직하게 말해 자꾸만 신경이 가는 것뿐이다.
『그냥...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샘을 보면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 불안해. 곁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가 않아.』 풀 죽은 목소리를 하고 알콜을 마셨다. 『단지 그뿐이야.』
우리 엄마가 그랬다. 어느날 갑자기 웃으면서 바이바이. 나는 그녀가 떠나간 날의 아침을 여전히 기억한다. 텅 빈 눈동자를 하고 내 머리에 키스하던 엄마를 기억한다. 아주 가끔씩, 샘은 엄마처럼 텅 빈 눈동자를 하고 거울을 본다. 나는 그게 무섭다. 그때의 샘은 자기 모습을 보고 있는게 아니다. 거울 저편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 가족... 아니면 소중한 애인...? 알게 뭐람. 샘은 자신에 대한 이야긴 일절 하지 않는다. 오지랖 넓게 캐물으려 하면 실실 웃으며 회피한다. 괘씸하다. 나는 내 여동생 신체 사이즈까지 시시콜콜 다 불어 바쳤는데.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애와 키스한 이야기까지 죄다 말해줬는데.
『마시자~!!』 사념에 쩔어 한숨을 푹푹 쉬는 나를 향해 칼리가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리처드를 위하여~!!』 『곰탕색히 샘 윈체스터를 위하여~!』 『그린피스 만세!』 『TI(국제투명성기구) 만세!』 『생물종 다양성 보호의 날 만세~!』 대학생은 쓸데없는 이유로 술에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미야
2008/06/08 21:36
2008/06/0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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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형제는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길을 걸었다. 다만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여름의 불꽃놀이를 따라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는 걸 관뒀다. 대신 헤어 스프레이나 치약 같은 용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들리거나, 펩토비스몰을 얻으러 약국을 찾는 사람들처럼 전진했다. 그깟 소화제 한 알을 사려고 1.5km의 거리를 빙 돌아서 갈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형제는 강도가 나올 것처럼 생긴 어두컴컴한 공터를 과감히 가로질렀다. 딘은 그저 모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밤새 싸구려 B급 영화를 틀어주는 텔레비전과 스프링이 망가진 소파가 있는 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으면 했다.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 이게 가장 중요했다 - 골치 아픈 현실을 잊은 채 에디 머피 주연의「너티 프로세서」영화를 보며 딸린 식구가 없는 홀애비처럼 낄낄 웃길 원했다.
파란 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주머니에서 구겨진 영수증을 꺼내 하수도 구멍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씹던 껌을 버리는 요령으로 던진 영수증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뇌와 번민이라는 것도 쓰레기처럼 쉽게 버려질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만... 관두자. 그런게 가능하다면 머리를 삭발하고 수도원으로 잠적하는 사람들이 나올 리 없다.
『딘.』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던 샘이 한참만에 입을 떼자 딘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는 지금 빈틈 투성이의 널빤지 위에 서있다. 벌레가 씹어댄 나무는 튼튼하지 않다. 곧 무너질 것처럼 삐걱 소리를 내고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선반에서 건조식품 상자를 들어 제조년월일을 확인하는 60대 여자처럼 콧잔등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샘이 중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만 했다.
『그 이야기 아니? 새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집주인이 밖으로 나가 문을 열어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계단 위에 웅크리고 있었대. 집주인은 달팽이를 집어 멀리 던져버렸어.』 먼지 섞인 바람에 길다란 나무 그림자들이 출렁거렸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알콜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몸뚱이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덕분에 목소리가 호들갑스러웠다. 『3년 후에 다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렸어. 집주인이 나가 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같은 달팽이가 자기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앉아 있는 거야.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니 달팽이가 화가 잔뜩 나선 소리를 질러댔어. 그때 왜 저를 집어던졌죠?』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절에나 유행하던 농담이다. 그것도 틀니 착용이 의무화된 영감님들의 골동품 죠크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광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쳤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타이밍을 모르겠어. 언제 웃어야 해?』 『저~어런. 새미.』 손을 위로 올려 목에 걸고 있는 애뮬렛을 더듬거렸다. 시선은 계속해서 정면을 향한 채였다. 땀이 났다. 덥다. 갈증을 느끼고 침을 삼켜봤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축축해지는 건 엉뚱한 쪽이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다 낚시를 즐기고 있는 목사를 만났어. 그런데 목사 옆에「끝이 다가왔습니다. 돌아가세요」라는 하얀 푯말이 서있는 거야.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욕설을 퍼부었어. 얼어죽을 종말론자야, 여기까지 와서 내가 설교를 들어야겠냐. 너나 행동거지를 잘 해라. 그리고는 속도를 올려 낚시 중인 목사를 지나쳤지.』 『딘.』 『몇 초 후에 끼익 하고 타이어가 미끌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 강물에 풍덩 빠지더래.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했어. 다리를 짓다 말았다는 안내를 왜 다들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하, 하, 하!』 『제발. 하나도 안 웃겨.』 『이거 왜 이래. 재밌잖아. 안 재밌어? 그럼 이건 어떠냐. 여객선이 마침 작은 섬을 지나치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소리를 질러대며 미친 듯이 손짓을 하고 있더래. 궁금해진 승객이 저게 누구냐고 선장에게 물었더니 선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했어. 잘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우리가 이곳을 지나갈 때면 저 난리를 피워요.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샘은 이제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무 재밌어 돌겠다...』 『젠장. 그려, 내 이야긴 좇나게 후지다.』 똥 같은 수작임을 인정하며 쓰게 웃었다. 순간 희망이라는 것과는 정 반대인 감정이 지구 둘레를 도는 우주 쓰레기처럼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수명을 마친 인공위성, ㄱ자로 부러진 안테나, 우주인들이 먹다 버린 햄버거 포장지, 나사에서 5개 국어로 발행한 작동 기능 설명서...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 역시 천차만별이다. 개발 이전의 원래 모습대로 깨끗하게 치우려면 1억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딘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었다.
『제발... 새미! 그냥 모르는 척하면 안돼?』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했다. 그것은 하늘이 파란 것만큼이나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일곱 빛깔의 무지개처럼 복잡했다. 앓느니 죽는다. 안에서 썩어나가든, 곪아터지든, 그냥 뚜껑을 덮어두는 것만이 상책이다. 그런다고 더 나빠질 것도 아니지 않은가. 환부의 냄새를 맡고, 진물이 흐르는 살갗을 꾹꾹 눌러봤자 금방 새 살이 돋진 않는다. 그걸 왜 샘은 몰라주는 걸까. 야속하다. 『꼭 이래야 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아니잖아!』
고개를 슬쩍 내린 샘이 두 눈만 시퍼렇게 치켜떴다. 도마뱀을 닮은 서늘한 무엇인가가 발 위를 기어 발목까지 올라왔다. 전문가의 육감이 그 목소리에 깃든「위험」을 감지했다. 위가 꿈틀거리는 걸 느끼고 딘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걸 보며 입술을 비틀며 동생은 웃었다. 상냥한, 포근한, 매력적인, 기타등등의 좋은 뉘앙스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미소였다. 마치 스위치가 비정상적으로 내려간 것처럼 - 딘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의 저 표정을 짓고 있는 샘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미치광이 엘리콧 박사의 유령에 당해 맛이 완전히 갔었을 때... 그때 동생은 딘의 뱃가죽 한 가운데로 암염탄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항상 그런 식이지. 형은.』 딘의 양팔을 붙잡은 샘의 손가락은 투명하리만치 창백했다. 『형의 그런 태도는 이젠 진절머리가 나.』 빠르게 생각했다. 엘리콧 박사의 유해는 불태웠던게 아니었나. 지금 샘의 머리를 조작하고 있는 건 뭐지.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 이걸로는 죽지 않아, 딘. 하지만 죽고 싶어질 정도로 아플 거야. 숏건을 쥐고 샘은 장담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가죽에 구멍만 안 뚫렸을 뿐이지 딘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폐쇄된 정신병동 바닥을 기었다. 몸이 아팠고, 육체적 고통과는 별개로 죽고 싶어졌다. 아플 거라는 말과, 죽고 싶어질 거라는 말은 그래서 둘 다 맞았다.
돌연 궁금해졌다. 장전된 산탄총이 있었음 이번에도 샘은 방아쇠를 당겼을까? 모르겠다.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격류로 변한 강물이 사방을 할퀴며 흘러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목이 졸릴 거라 판단한 딘은 서둘러 몸을 빼고자 했다. 그러나 동생의 팔 힘은 어디까지나 장난이 아니라서 거리를 벌린다는 애초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샘의 얼굴은 코앞으로 진을 치고 있었고, 뜨거운 콧김이 고스란히 딘의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차분하지 못한 마음으로 왼쪽 손목을 홱 쳐들어 동생의 가슴을 밀쳤다. 그래봤자 바윗덩이를 계란으로 치는 느낌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샘은 거의 속삭이듯 음성을 낮춰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깜짝 놀라 황급히 눈길을 피하는 딘을 향해 샘은 한층 더 으르렁댔다. 『나를 좋아하잖아.』 『그야... 우, 우린 형제이고...』 감히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 계속 같이 있어왔으니까...』 혀가 꼬였다. 『서로를 좋아하는 건 다, 당연한 거 아니야?』
어둠 속에서 샘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당연한 거구나.』 그와 동시에 위력적인 기세로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아니, 바위를 닮은 샘 윈체스터가 머리부터 들이밀고 보았다. 법정 제한속도를 깡그리 무시한 채 똑바로 돌진해 들어오는 입술은 말 그대로 흉기나 다름 없었다. 쇳덩이는 딘의 아랫입술을 찍고 파란색 불꽃을 튕겨냈다. 『윽.』 달콤하다, 부드럽다 어쩌고의 키스에 대한 표현은 모두 거짓부렁이었다. 새벽 4시 15분에 끔찍한 숙취로 눈을 떴을 때처럼 끙끙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흡사 세게 던진 야구공에 얻어맞은 감각이다. 쓰라리고 얼럴했다.
밀고 들어오는 혀를 거부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형의 태도를 샘은 납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뒷통수를 잡고 머리를 강제로 돌려놓으려 하는 걸 봐선 말이다. 딘은 발끈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아팟! 음료수 뚜껑 돌리듯 하지 마! 뼈 부러졋!』 『왜 이래! 입술 내놔! 날 좋아하잖아. 좋아한다며!』 통증에 울부짖는 그를 향해 다시금 거친 호흡이 더듬더듬 내려왔다. 배려라고는 요만큼도 없고, 한심할 정도로 엉성한 입맞춤이다. 이리저리 도망치는 딘을 추적하며 누르고, 찍고, 다시 눌러댔다. 그리고 어떻게든 혀를 넣겠다며 꽉 다물린 딘의 이 틈새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끔찍. 방패처럼 세운 앞니에서 탕탕 소리가 울렸다.
짜증을 느낀 딘은 체중을 실어 샘을 뒤로 확 떠밀었다. 『샘! 그만해!』 『너야말로 그만해!』 붕 소리와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어랍쇼. 이게 날 쳤어. 아픔보다는 네 살 연하의 남동생에게 손찌검을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반격해야 하나? 아님 피해야 하나? 샘은 두 눈을 치켜뜬 채 작정하고 두 방의 펀치를 더 날렸다. 오른손 한 방, 왼손 한 방, 그건 흡사 관제탑의 안내에 따라 활주로로 내려서는 비행기 같았다. 시퍼런 섬광이 번쩍였다. 딘은 턱 아랫부위로 심각한 통증을 느꼈고, 명치가 쪼그라드는 감각에 무릎을 굽혔다. 그걸 보면서도 샘은 덤벼들려는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극단적인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어깨를 덜덜 떨면서 곰처럼 커다란 앞발을 - 아니, 오른팔을 높게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목뼈가 부러지겠구나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샘은 계속해서 주먹을 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딘은 멈칫멈칫 한쪽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샘...?』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풀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낸 샘은 올렸던 팔을 힘 없이 떨어뜨렸다.
Posted by 미야
2008/06/03 20:44
2008/06/03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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