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을 타고 느리게 피가 돌았다. 플로어에 흐르는 음악 역시 느리다.
거 뭐시다냐...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REO-스피드웨건의 Can't fight this feeling 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낮설지만 아름다운 세계, 그녀가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곳으로 가볼 수 있어요, 몇몇 취객들이 귀에 익은 부드러운 음율에 맞춰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푸른 빛이 어우러진 실내 조명 때문일까, 청명한 바다 아래서 수초들이 물살에 반응하여 아름답게 율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는 반대편이 훤히 비춰보이도록 투명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감출 수도 없는 것, 참을 수도 없는 것 - 모래 깊숙이 달빛이 침투하면 조개는 산란을 시작하고, 그 명랑한 바다 거품 속에서 사랑의 여신은 태어난다. 이 느낌을 참을 수 없어요. 구석으로 앉은 여자가 숨 죽여 낮게 웃었다. 물론 딘을 향해서가 아니고, 동석한 애인을 향해서였다.

『멍청한 닭들 같으니. 꼬꼬댁 하고 닭장에서 울기나 할 것이지.』
팔뚝이 가려워 미칠 지경이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반항심이 솟구쳤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그게 밥 먹여주듸.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분홍빛 하트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당연히 동생은 넌더리를 냈다.
『언제는 운전하다 말고 신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으면서.』
『뭐? 내가? 난 안 미쳤어!』
『정색하지 마. 옆에 앉은 내가 다 창피해. 됐으니까 그냥 긴장이나 풀어. 그렇게 뻣뻣하게 있으면 사람들이 그런 형을 보고 은행 강도에게 위협받고 있는 배 나온 지점장이라 착각할 거야.』
『누가 배 나온 지점장이라는 거냣!』
『왜 화를 내? 머리가 벗거진 것보단 배가 나온게 차라리 낫지 않아?』
『틀린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나는 배도 안 나왔고, 머리도 안 벗겨졌어!』
『맞아. 그리고 형은 은행 지점장도 아니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샘은 작은 크기의 감자를 입에 넣었다.

요리의 이름도 생소하다. 빠숑 어쩌고 했던 것도 같고, 아니면 빵드레, 내지는 줼레 어쩌고 했던 것도 같다. 물론 셋 다 아닐 수 있다. 아무튼 샘이 주문한 건 수분이 많은 요리로 크고 오목한 접시에 옥수수 스콘과 같이 담겨 나왔다.
그 맛이 어떻냐고? 알게 뭐람. 딘의 눈에는 코흘리개 애들이나 먹으면 딱인 죽사발로 보였다. 야채는 너무 익혀서 물렁거렸고, 양념이 덜 발려져 허멀갰다.
그래도 샘은 해물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줼레 우짜고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섭식 장애를 가진게 아닌가 의심받던 과거를 내던지고 호록호록 소리를 내가며 스푼으로 뜨거운 덩어리를 건져 먹는데 그때마다 눈매가 발정난 고양이처럼 가느다랗게 변했다.

딘의 눈도 (샘과는 달리 나쁜 의미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맛있냐, 새미.』
『맛있어.』
그런가 보지.
무시하고 무설탕 음료를 마셨다.

『그건 그렇고, 우린 캘리포니아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형.』
『무슨 캘리포니아?』
영문을 몰라 벙벙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딘을 향해 샘이 읍, 하고 입술을 안으로 오무렸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이 병신아.」
그치만 샘은 대학 교과 과정을 밟다 만 인텔리라서 네 살 연상의 피붙이에게 그 따위의 폭언은 퍼붓지 않는다. 그냥... 그러니까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표정만으로 사람을 병신 취급한다.
『사람 셋이 연달아 자살한 아파트... 뭐야.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아?』
기억 났다. 딘은 무설탕 음료가 목게 걸려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첫 번째 세입자는 자살한게 맞아. 이름은 로라 래리건이고 나이는 마흔 일곱이야. 아니, 일곱이었어. 사인은 약물 과다이고,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지.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황으로 보자면 명백한 자살이야. 5년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키우던 금붕어가 죽었고, 폐경했거든.』
『뭐어?! 폐경~?!!』
쓸데없이 목소리를 크게 하고 있는 딘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샘은 얼른 그의 발잔등을 밟았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여자가 그들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설명하는 샘의 목소리는 덕분에 한 곱절 작아졌다.
『조용히 해, 딘. 공공장소에서 떠들만한 단어가 아니라고?』
『그, 그치만... 어이가 없어서. 사람이 겨우 그런 까닭으로도 죽냐? 거, 거... 폐경.』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로라는 아기를 끔찍하게 가지고 싶어했어. 그런데 폐경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임신을 할 수가 없잖아.』
『맙소사. 아기를 원한다면 입양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이 바보. 종족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남의 자식을 키우고 싶어하는 것과 같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예민한 성격의 암컷 둥지에 다른 새가 낳은 알을 넣어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다음 날 아침에 맛있는 계란 후라이 하나를 먹을 수 있게 돼. 알겠어? 이 여잔 심지어 고양이나 개도 키우지 않았다고. 그녀가 기껏 애완용으로 키우던 건...』
『금붕어.』
『그래. 금붕어야. 로라 래리건은 남의 아기를 자신의 품에 안아 키울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소중한 아기를 키워낼 주머니는 낡아버렸다. 남자친구는 떠나갔다. 시합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시계는 멈췄다. 그녀는 절망했고, 살 의욕 자체를 잃어버렸다.
『결국 로라가 선택한 건 수면제를 잔뜩 먹고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는 거였어.』
경찰은 퉁퉁 불어 분해 직전까지 간 로라의 시체를 물에서 건져냈다. 사망한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어서 냄새가 무척 고약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욕지기 나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있잖아? 도시 괴담의 시작은 모양새가 대충 비슷한 것 같아.』
샘은 다소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아파트는 그 이후로 한동안 비어 있었다 - 당연하지 않겠느냐며 샘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펫과 벽지를 모두 바꾸고, 욕실은 통째로 들어냈어. 그런데도 세입자가 나타나질 않자 시세에 비해 이건 공짜다 싶은 싼 임대료를 내걸었던 것 같아. 그게 화근이었지. 1년 반이나 지나서야 두 번째 임자가 이사를 오긴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껴안고 있는 사람이어서 경찰이 수시로 들락거렸다는 거야.』
『으이그... 짐작이 간다.』
『맞아. 총성이 들렸으니 수화기를 들고 911을 눌러야지.』
『자살이 아니라 살해 사건이었던 거냐?』
『아니. 상해 사건이야, 딘. 두 번째 세입자 에릭 가드너는 다리에 총을 한 방 맞았어도 죽진 않았거든. 그래서 경찰은「소파에서 나온 그 마약은 내 것이 아니오」라는 말을 그에게서 직접 들었을 것이고, 구두 상자에서 나온 거액의 현금 다발이 죽은 이모로부터 받은 유산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고, 일련번호가 지워진 38구경이 쓰레기통에 어쩌다 줏은 습득물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이고... 블라블라.』

샘의 설명으로는 거실이 피투성이었다고 한다.
입주민에겐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귀신이 붙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아파트. 욕실에서 한 명, 거실에서 한 명.
밤새도록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느니, 누군가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걸어다닌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좋아, 좋아. 이참에 끝까지 가자고. 그럼 세 번째는?』
『나이 일흔 여덟의 노파가 침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어. 그래서 아파트 사람들은...』
『윽! 아무 말도 하지 마, 새미.』
『노친네가 귀신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
『아무 말 말라니까.』
샘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음 소리를 삼켰다.
『심.장.마.비.』
『아악~!!』

딘은 완전히 풀이 죽었다. 얼어죽을 타블로이드. 귀신이 붙긴 뭐가 붙어.
『그래도 우리가 직접 가서 조사해볼 수는 있어, 딘. 만의 하나라는게 있으니까.』
『됐다. 그만 웃고 밥이나 마저 먹어라.』
『왜? 정말로 할머니가 로라의 유령을 봤을 수도 있잖아?』
『관둬. 다리에 총 맞은 마약 떨거지 놈이 잊은 물건을 찾으러 머리에 스타킹 쓰고 아파트로 들어갔다가 겁쟁이 노파를 기절시켰다는데 1달러를 건다. 도시 괴담이라는게 다 그렇지, 뭐.』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되고 성난 영혼이 없다는 말에 만세 삼창을 해야 옳을 터인데 이건 뭐 불난 곳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 불평하는 소방관이라도 된 기분이고... 샘에게 고개를 돌리며 명랑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굉장하네, 샘. 언제 조사를 다 한 거냐? 난 네가 노트북을 켜는 것도 몰랐어.』
『형이 화장실에 들어가 내 이름 부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 짬짬이 알아본 것뿐이야.』
『워-』
『뭐, 경찰 데이터 베이스에 슬쩍 들어가 기록을 뒤져보는 건 늘 하던 거고...』
『잠깐잠깐잠깐! 그게 아니라!』
『웃겨. 아침마다 깔끔하게 면도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욕실에서 한참동안 죽치고 있는데, 이쪽에서「가엾게도, 변비구나」생각할 거라 여겼어?』
『워-』
『그리고 늘 생각했던 건데... 형은 그거 할 적에 소리가 크다고.』

앰뷸런스와 방송국 차량이 몰려들었다. 정복의 경찰관들과 카메라를 든 취재진이 서로 엉켜 난리법썩이다.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웃어야 하나? 찡그려야 하나? 아님 마구 화를 내야 할까? 기자 네 명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렸다. 고가의 마이크 장비가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샘 윈체스터 씨가 마침내 폭탄 발언을 하고 말았는데요!》
《거기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그거를 할 적에 소리가 매우 크다고 하던데요.》
《의도적인 거였습니까, 아님 원래 그렇습니까?》
《정말로 마스터베이션을 할 적에 동생의 이름을 부르나요?》
왜 그런 걸 나에게 물어 - 회반죽을 엷게 바른 듯한 엉망진창의 낯빛을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피를 빨기 위해 달겨드는 각다귀 같았다.
《딘 윈체스터 씨!》
기다렸다는 투로 경찰관들이 차갑게 빛나는 수갑을 들어보였다.
세상의 모든 눈동자들이 그를 책망하며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딘은 크게 숨을 삼켰다.
망할. 전기 충격기로 머리를 지지면 혹시 정상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위하는 기분을 네 놈들이 알 턱이 있냐.
음료수 잔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08/05/18 19:22 2008/05/1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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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나기 2008/05/18 22:32 # M/D Reply Permalink

    굉장히 시니컬해진 샘과 건강하게 살아있는 딘을 보니 눈물만 솟구칩니다.ㅠ.ㅠ
    크허헉.ㅠ.ㅠ

  2. 아이렌드 2008/05/18 22:52 # M/D Reply Permalink

    정말로 샘희가 딴놈하고 바람이라도 나야 덜컥 정신이 들까요? 그러게 다 들통날걸 왜 자꾸 튕기냐고....

  3. 레인 2008/05/19 08:42 # M/D Reply Permalink

    딘을 자꾸 당황시키는 샘이 왜이렇게 좋은거지요? ㅡ,.ㅡ

  4. 로렐라이 2008/05/19 21:36 # M/D Reply Permalink

    올려주신 소설에 덩실덩실 좋아하다가 소나기님 덧글 보고 가슴 속에서 씁쓸함이 올라왔어요 ㅠㅠ 건강하게 살아있는 딘....아놔orz 정말, 미야님 소설에서라도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는 딘 보니까 좋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ㅠㅠ 대체 이놈의 드라마가 뭔데 이렇게 감정을 뒤흔드나요ㅠㅠ 아아 덧글이 삼천포로 빠졌네요! 딘은 언제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로 버틸 수 있을까요~!

  5. 미야 2008/05/21 08:54 # M/D Reply Permalink

    건강하게 살아있는 <- 이 부분에서 저는 지하 3,000미터 암반 아래로 추락했어요. 슬퍼서 샘이랑 딘이 얼굴도 못 보겠어요. T^T 엉엉, 크립퀴 대마왕. 빨리 내 새끼 살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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