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아, 새미. 피가 좀 나지만 아프진 않아. 네가 걱정할만한 문제는 아무 것도 없어.
저울 한쪽에 진실을 매달고, 다른 한쪽으로 거짓을 매달면 양측의 지나친 무게의 차이로 계량하는 접시가 밖으로 튕겨나갈 것이다. 딘 윈체스터는 숙련된 거짓말쟁이였다.

샘은 한동안 레드 제플린이 음악의 아버지인줄만 알았다. 이상한 표정을 한 여교사가「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니? 음악의 아버지는 제플린이 아니라 바흐란다」라며 이를 바로잡아 주었을 적에 소년은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가 형의 뒷통수를 향해 킥을 날렸다.
아니,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보호자는 어디 있느냐 질문하던 가게 종업원에게「우리 엄마는 잠시 화장실에 가셨는데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던 딘이다.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냐 물으면 싱긋 웃으며「전국을 돌아다니며 다이어트 운동용품을 팔아요」라고 말했다.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던 누구와는 달리 얼굴색 하나 안 변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 그것은 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무슨 문제 없습니까?
- 없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는 무용지물이다. 기계에 전원을 넣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프는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좁은 방구석에서 용의자를 취조하는 형사들은 그런가 보다 납득한다. 문제는 없단다. 단조로운 삐삐 소리를 내는 거짓말 탐지기는 그런 딘의 주장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는 신이 나서「거봐요, 내가 뭐라고 그랬수. 문제 없다고 그랬잖소」큰소리 뻥뻥 친다.

속으로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주제에.
어금니를 꽈득 깨물었다. 샘은 그 위선의 가면을 철저하게 깨부수고 싶었다.

『오, 바로 그거야, 새미. 오, 새미... 이제 갈 것 같아. 가버려.』
열에 들뜬 딘의 혼잣말을 정확히 흉내내자 유리컵에 지나치게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처럼 쩍 하고 표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딘의 얼굴이 파랗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빙산에서 최초의 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졸지에 서식처를 잃은 펭귄의 처지가 가엾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온난화가 진행 중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냐며 샘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구 차원의 재난 앞에선 일개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와도 같다. 미안하다, 펭귄.

『너, 너, 너...!!』
『설마 형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은밀한 상대가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아닐테고.』
『그만해...』
『아님 폰타나에서 외계인과 만난 적이 있다는 가수 새미 헤이거*? 야구선수 새미 소사*?』
『샘!』
『그렇게 버럭 소리 지르지 않아도 다 들려.』
빙산은 계속 무너져야 한다. 덕분에 남극 물개가 전멸한다고 해도 상관 없다. 영국 땅덩어리 크기의 얼음이 모두 녹아 플로리다 해안이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들 그게 어떻다는 건가.
『정말로 새미 소사라면 앞으로 형은 야구는 다 봤어.』
얼굴의 각도는 그대로 한 채 눈동자만 위로 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운동복을 들어올려 벨트에 찬 권총집을 보여주고 천천히 옷을 내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흉기는 없을지언정 충분히 위협적이다.
『평생 야구 중계따윈 못 볼줄 알아.』

협박 아닌 협박에 딘은 입을 벌렸다. 그럼 맨날 축구만 보라고?
『축구도 안돼.』
『그럼 농구...』
『농구도 안돼.』
『아예 TV 자체를 보지 말라고 하지 그러냐.』
『나만 봐.』
『뭐?』
『나만 보라고.』

숨을 훅 들어마신 딘은 버릇처럼 오른발 위로 왼발을 포갰다. 네 살 연하의 아기 형제가 겁 대가리를 상실한 채 하늘 같은 형님에게「명령」을 했다는 건 둘째다. 배꼽 밑으로 얼음이 파고들었다. 장이 꾸룩거리고 뒤틀렸다. 이 지랄맞은 상황에서 과연 나는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나?

① 지상 최대의 농담을 들었다며 깔깔 웃는다.
② 그냥 무시하고 내일의 날씨 이야기로 바로 건너뛴다.
③ 야구도, 축구도, 농구도 포기하고 왜 너만 봐야 하느냐며 정색하고 따지듯 덤벼든다.

『딘.』
『기다려, 아직 생각 중이야.』
답변을 독촉하는 동생을 향해 도끼눈을 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 노력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뺨이 일그러졌다.
5초간 생각했다. 어느 쪽도 현명한 선택은 아닌 듯하다. 다시 3초간 생각했다. 시야가 핑핑 돌면서 과전압이 흐른 머리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회색의 연기가 솟구쳤다. 끝장나게 싫은 느낌... 새카만 어둠을 헤치며 건전지가 닳은 손전등 하나만 믿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것보다 곱절로 나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발을 헛딛고 그냥 굴러 떨어진다. 생각 같아선 아무에게나 손을 흔들며「도움이 필요해요!」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샘은 새침한 미스 아메리카처럼 한쪽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보랴. 그건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즉시 이빨로 사람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도베르만의 자세였다. 딘이 외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피바람 나는 사건은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절벽을 기어내려와야 했다.
망할, 뒈져죽을, 우라질... 욕이란 욕은 죄다 주워삼키며 딘은 깊게 심호흡했다.

『딘. 그래서?』
『바비 아저씨가 전화하셨다.』
『...』
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엄청난 부피의 빙산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마당에 갑자기 바비 아저씨가 튀어나오면 나더러 어쩌라고?
절묘한 선택임은 분명하다. 이미 그들 윈체스터 형제에겐 한 가족이나 다름 없는 바비다. 이야기가 곁길로 새는게 싫다고「당신 현관에 누가 구토했어요」따위로 반응할 수는 없다. 그가 윈체스터가 사람들에게 보인 헌신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고양이보다 더 교활한 우리 형.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제?』
테이블을 세차게 걷어찰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신 소금통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무슨 일로?』
샘의 손아귀에서 흰색 소금통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누가 먼저 눈을 깜빡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딘은 동생이 걸어오는 눈싸움엔 아랑곳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에게 혹시 마이클 메리먼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느냐 물으시더라고.』
『그게 누구인데?』
『너도 기억에 없지? 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 일기장에서 그런 이름을 본 적은 없는데.』
『그렇지? 그런데 짐 신부님 이름을 대면서「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라고 했다는 거야.』
『음... 그거야말로 수상하군.』

헌터들은 끼리끼리만 모이는 습성이 있다. 쉽게 말해 폐쇄적이다. 그리고 그 교우 관계는 대단히 좁아 흰색의 울타리 안으로 생소한 검정색 양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존의 지인은 바비의 지인이다, 짐의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존의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따라서 바비가 잘 모르는 자가 짐 신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 그것도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보통이 아니라고 봐도 괜찮다.
얘들아? 내 머리가 녹슬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아님 저 작자가 나에게 사기를 치는 걸까.
밤새 잠을 설치고 긴 고민 끝에 딘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을 바비의 얼굴 표정이 선명하다.

소금통을 위태롭게 돌리던 걸 멈춘 샘은 머리에 털 나고 생전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긴장시켰다.
『뭐야. 그 마이클이라는 사람은. 짐 신부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바비 아저씨께 알렉산더 맥클라렌의 성경 주석을 팔아 치우려고 그랬대?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태초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레쉬트인데 명사 레쉬트에 전치사 베-가 접두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혼을 쏙 빼놓고?』
『단순히 책만 파는 거였다면 아저씨가 우리에게 전화까지 하셨을까.』
『물론 아니지. 바비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몇 개월까지 무이자 할부가 되느냐 물어보셨을 걸.』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새미.』
마이클은 책은 물론이고 구두도 팔지 않았다. 길게 말을 하지도 않았다. 누구가 생각나게끔 무뚝뚝한 어조로「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말투는 정중하고 예의발랐지만 듣는 사람이 완전히 질려버릴 정도로 말이 짧았다고 한다. 용건이 있어 전화를 걸어온 건 그쪽이면서 예, 아니오로만 대화를 나누려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바비가 투덜거렸을 정도다.

『그래서?』
『손님 접대용 맥주에 성수를 타놓는 분이야. 만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바비 아저씨가 늘 하시던 말씀이잖아. 겉가죽은 신사였는데 알고 봤더니 헌터들을 습격하는 악마였습니다, 해서는 웃음도 안 나와. 고지식하게「도움이 필요하쇼? 그럼 우리집으로 오쇼」라곤 못 하지.』
『그래도 돕겠다고 하신 거 맞지?』
『겉으로는 나 몰라라 해도 사람이 팔을 붙잡으려 하면 은근히 거절 못 하는 분이잖냐. 아닌게 아니라 안전한 제3의 장소에서 차분히 만나자고 하신 모양이야.』
샘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말대로 바비는 그런 사람이야 - 라는 긍정의 뜻도 있었고, 그 제3의 장소라는 곳에 우리도 같이 가보는게 좋겠어 - 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비는 노련한 사냥꾼이라 실수할 일은 없지만 역시 하나보다는 둘이 좋고, 둘 보다는 셋이 낫다.

『오케이. 바비에게 따로 전화를 걸지 않아도 되는 거지?』
『내가 이미 그러자고 알렸어, 샘.』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야?』
『당연하지. 내가 왜 술을 주문 안 하고 이 따위 맛 대가리 없는 음료를 홀짝인다고 생각해?』
『배가 나와서.』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너무나 긴 시간동안 같이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붙어 있었다. 거기에 대해선 잇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소금통으로 장난치는 걸 관뒀다.
제기랄, 모처럼 딘을 구석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밥은 다 먹은거지? 샘. 그럼 일어나자.』
어느새 딘은 안전한 장소로 달아나 예의「나는 너의 형이다」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젠 일요일 저녁만 되면 은근히 압박감에 시달린다고나 할까. 좋아서 하는 짓이지만 가끔은 모니터를 노려보며 <보다 괜찮은 취미생활을 진작에 개발했어야 했어> 후회하기도 합니다.
자, 머리 나쁜 사람들을 위한 레드 썬 주문을 외워봅시다.
* 에피소드를 복습한 결과 짐은 신부님이 아니라 목사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로만 칼라 덕분에 착각했는데 교회의 모습이지 성당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나 여기선 신부님으로 걍 나갑니다. 예전에 썼던 분량까지 수정하려면 장난이 아니게 되므로...;; 어차피 앞뒤가 안 맞고 있지만요.
* 마이클은 <베리알 차일드> 편에 다시 나옵니다.
* 글의 배경은 2007년이며, 제가 쓰는 글의 전부가 Croatoan 에피소드 전 시기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샘은 아직 초능력자이며 (우갹!) 존의 유언이 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황달이 아자젤도 잘 살아 있습니다.

Posted by 미야

2008/05/25 20:09 2008/05/25 20:09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896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소나기 2008/05/26 00:28 # M/D Reply Permalink

    이런 교활한 딘 같으니라구!!!!!!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군요!!!
    딘의 장이 꾸륵거린게 저와 같은 이유로 꾸륵거린거면 좋겠어요^^

  2. 로렐라이 2008/05/27 17:19 # M/D Reply Permalink

    딘의 숙련된 마음 숨기기에 혀를 휘두르며 모니터 앞에 앉아 안타까움에 온몸을 배배 꼬고있는(읭?) 저orz 흑흑
    미야님, 덕분에 항상 즐겁게 보고 있답니다. 감사해요!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172 : 1173 : 1174 : 1175 : 1176 : 1177 : 1178 : 1179 : 1180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0719
Today:
564
Yesterday:
1861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