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체스터 형제는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길을 걸었다.
다만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여름의 불꽃놀이를 따라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는 걸 관뒀다. 대신 헤어 스프레이나 치약 같은 용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들리거나, 펩토비스몰을 얻으러 약국을 찾는 사람들처럼 전진했다. 그깟 소화제 한 알을 사려고 1.5km의 거리를 빙 돌아서 갈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형제는 강도가 나올 것처럼 생긴 어두컴컴한 공터를 과감히 가로질렀다.
딘은 그저 모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밤새 싸구려 B급 영화를 틀어주는 텔레비전과 스프링이 망가진 소파가 있는 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으면 했다.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 이게 가장 중요했다 - 골치 아픈 현실을 잊은 채 에디 머피 주연의「너티 프로세서」영화를 보며 딸린 식구가 없는 홀애비처럼 낄낄 웃길 원했다.
파란 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주머니에서 구겨진 영수증을 꺼내 하수도 구멍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씹던 껌을 버리는 요령으로 던진 영수증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뇌와 번민이라는 것도 쓰레기처럼 쉽게 버려질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만... 관두자. 그런게 가능하다면 머리를 삭발하고 수도원으로 잠적하는 사람들이 나올 리 없다.
『딘.』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던 샘이 한참만에 입을 떼자 딘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는 지금 빈틈 투성이의 널빤지 위에 서있다. 벌레가 씹어댄 나무는 튼튼하지 않다. 곧 무너질 것처럼 삐걱 소리를 내고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선반에서 건조식품 상자를 들어 제조년월일을 확인하는 60대 여자처럼 콧잔등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샘이 중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만 했다.
『그 이야기 아니? 새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집주인이 밖으로 나가 문을 열어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계단 위에 웅크리고 있었대. 집주인은 달팽이를 집어 멀리 던져버렸어.』
먼지 섞인 바람에 길다란 나무 그림자들이 출렁거렸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알콜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몸뚱이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덕분에 목소리가 호들갑스러웠다.
『3년 후에 다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렸어. 집주인이 나가 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같은 달팽이가 자기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앉아 있는 거야.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니 달팽이가 화가 잔뜩 나선 소리를 질러댔어. 그때 왜 저를 집어던졌죠?』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절에나 유행하던 농담이다. 그것도 틀니 착용이 의무화된 영감님들의 골동품 죠크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광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쳤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타이밍을 모르겠어. 언제 웃어야 해?』
『저~어런. 새미.』
손을 위로 올려 목에 걸고 있는 애뮬렛을 더듬거렸다. 시선은 계속해서 정면을 향한 채였다.
땀이 났다. 덥다.
갈증을 느끼고 침을 삼켜봤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축축해지는 건 엉뚱한 쪽이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다 낚시를 즐기고 있는 목사를 만났어. 그런데 목사 옆에「끝이 다가왔습니다. 돌아가세요」라는 하얀 푯말이 서있는 거야.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욕설을 퍼부었어. 얼어죽을 종말론자야, 여기까지 와서 내가 설교를 들어야겠냐. 너나 행동거지를 잘 해라. 그리고는 속도를 올려 낚시 중인 목사를 지나쳤지.』
『딘.』
『몇 초 후에 끼익 하고 타이어가 미끌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 강물에 풍덩 빠지더래.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했어. 다리를 짓다 말았다는 안내를 왜 다들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하, 하, 하!』
『제발. 하나도 안 웃겨.』
『이거 왜 이래. 재밌잖아. 안 재밌어? 그럼 이건 어떠냐. 여객선이 마침 작은 섬을 지나치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소리를 질러대며 미친 듯이 손짓을 하고 있더래. 궁금해진 승객이 저게 누구냐고 선장에게 물었더니 선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했어. 잘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우리가 이곳을 지나갈 때면 저 난리를 피워요.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샘은 이제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무 재밌어 돌겠다...』
『젠장. 그려, 내 이야긴 좇나게 후지다.』
똥 같은 수작임을 인정하며 쓰게 웃었다. 순간 희망이라는 것과는 정 반대인 감정이 지구 둘레를 도는 우주 쓰레기처럼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수명을 마친 인공위성, ㄱ자로 부러진 안테나, 우주인들이 먹다 버린 햄버거 포장지, 나사에서 5개 국어로 발행한 작동 기능 설명서...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 역시 천차만별이다. 개발 이전의 원래 모습대로 깨끗하게 치우려면 1억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딘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었다.
『제발... 새미! 그냥 모르는 척하면 안돼?』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했다. 그것은 하늘이 파란 것만큼이나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일곱 빛깔의 무지개처럼 복잡했다. 앓느니 죽는다. 안에서 썩어나가든, 곪아터지든, 그냥 뚜껑을 덮어두는 것만이 상책이다. 그런다고 더 나빠질 것도 아니지 않은가. 환부의 냄새를 맡고, 진물이 흐르는 살갗을 꾹꾹 눌러봤자 금방 새 살이 돋진 않는다. 그걸 왜 샘은 몰라주는 걸까. 야속하다.
『꼭 이래야 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아니잖아!』
고개를 슬쩍 내린 샘이 두 눈만 시퍼렇게 치켜떴다.
도마뱀을 닮은 서늘한 무엇인가가 발 위를 기어 발목까지 올라왔다.
전문가의 육감이 그 목소리에 깃든「위험」을 감지했다. 위가 꿈틀거리는 걸 느끼고 딘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걸 보며 입술을 비틀며 동생은 웃었다. 상냥한, 포근한, 매력적인, 기타등등의 좋은 뉘앙스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미소였다. 마치 스위치가 비정상적으로 내려간 것처럼 - 딘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의 저 표정을 짓고 있는 샘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미치광이 엘리콧 박사의 유령에 당해 맛이 완전히 갔었을 때... 그때 동생은 딘의 뱃가죽 한 가운데로 암염탄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항상 그런 식이지. 형은.』
딘의 양팔을 붙잡은 샘의 손가락은 투명하리만치 창백했다.
『형의 그런 태도는 이젠 진절머리가 나.』
빠르게 생각했다. 엘리콧 박사의 유해는 불태웠던게 아니었나. 지금 샘의 머리를 조작하고 있는 건 뭐지.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
이걸로는 죽지 않아, 딘. 하지만 죽고 싶어질 정도로 아플 거야. 숏건을 쥐고 샘은 장담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가죽에 구멍만 안 뚫렸을 뿐이지 딘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폐쇄된 정신병동 바닥을 기었다. 몸이 아팠고, 육체적 고통과는 별개로 죽고 싶어졌다. 아플 거라는 말과, 죽고 싶어질 거라는 말은 그래서 둘 다 맞았다.
돌연 궁금해졌다.
장전된 산탄총이 있었음 이번에도 샘은 방아쇠를 당겼을까?
모르겠다.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격류로 변한 강물이 사방을 할퀴며 흘러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목이 졸릴 거라 판단한 딘은 서둘러 몸을 빼고자 했다. 그러나 동생의 팔 힘은 어디까지나 장난이 아니라서 거리를 벌린다는 애초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샘의 얼굴은 코앞으로 진을 치고 있었고, 뜨거운 콧김이 고스란히 딘의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차분하지 못한 마음으로 왼쪽 손목을 홱 쳐들어 동생의 가슴을 밀쳤다. 그래봤자 바윗덩이를 계란으로 치는 느낌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샘은 거의 속삭이듯 음성을 낮춰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깜짝 놀라 황급히 눈길을 피하는 딘을 향해 샘은 한층 더 으르렁댔다.
『나를 좋아하잖아.』
『그야... 우, 우린 형제이고...』
감히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 계속 같이 있어왔으니까...』
혀가 꼬였다.
『서로를 좋아하는 건 다, 당연한 거 아니야?』
어둠 속에서 샘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당연한 거구나.』
그와 동시에 위력적인 기세로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아니, 바위를 닮은 샘 윈체스터가 머리부터 들이밀고 보았다. 법정 제한속도를 깡그리 무시한 채 똑바로 돌진해 들어오는 입술은 말 그대로 흉기나 다름 없었다. 쇳덩이는 딘의 아랫입술을 찍고 파란색 불꽃을 튕겨냈다.
『윽.』
달콤하다, 부드럽다 어쩌고의 키스에 대한 표현은 모두 거짓부렁이었다. 새벽 4시 15분에 끔찍한 숙취로 눈을 떴을 때처럼 끙끙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흡사 세게 던진 야구공에 얻어맞은 감각이다. 쓰라리고 얼럴했다.
밀고 들어오는 혀를 거부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형의 태도를 샘은 납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뒷통수를 잡고 머리를 강제로 돌려놓으려 하는 걸 봐선 말이다.
딘은 발끈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아팟! 음료수 뚜껑 돌리듯 하지 마! 뼈 부러졋!』
『왜 이래! 입술 내놔! 날 좋아하잖아. 좋아한다며!』
통증에 울부짖는 그를 향해 다시금 거친 호흡이 더듬더듬 내려왔다. 배려라고는 요만큼도 없고, 한심할 정도로 엉성한 입맞춤이다. 이리저리 도망치는 딘을 추적하며 누르고, 찍고, 다시 눌러댔다. 그리고 어떻게든 혀를 넣겠다며 꽉 다물린 딘의 이 틈새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끔찍. 방패처럼 세운 앞니에서 탕탕 소리가 울렸다.
짜증을 느낀 딘은 체중을 실어 샘을 뒤로 확 떠밀었다.
『샘! 그만해!』
『너야말로 그만해!』
붕 소리와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어랍쇼. 이게 날 쳤어.
아픔보다는 네 살 연하의 남동생에게 손찌검을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반격해야 하나? 아님 피해야 하나? 샘은 두 눈을 치켜뜬 채 작정하고 두 방의 펀치를 더 날렸다. 오른손 한 방, 왼손 한 방, 그건 흡사 관제탑의 안내에 따라 활주로로 내려서는 비행기 같았다. 시퍼런 섬광이 번쩍였다. 딘은 턱 아랫부위로 심각한 통증을 느꼈고, 명치가 쪼그라드는 감각에 무릎을 굽혔다. 그걸 보면서도 샘은 덤벼들려는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극단적인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어깨를 덜덜 떨면서 곰처럼 커다란 앞발을 - 아니, 오른팔을 높게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목뼈가 부러지겠구나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샘은 계속해서 주먹을 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딘은 멈칫멈칫 한쪽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샘...?』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풀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낸 샘은 올렸던 팔을 힘 없이 떨어뜨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