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랄까. 내 룸메이트는 머리 좋고, 예의바르고, 잘 생겼고, 참을성 많고... 하늘에서 뚝 떨어졌구나 싶을 정도로 좋은 녀석이었다. 말수가 극단적으로 작다는 걸 빼면 흉을 볼 꺼리가 없어 우리는 늘 곤란함을 겪었다.
『흉을 볼게 없긴 뭐가 없냐. 그 수도승 녀석, 좀처럼 어울려주질 않는다고~!! 모처럼 같이 놀자고 권했더니 한심해 죽는다는 식으로 노려바써. 씨잉... 시험 끝내자마자 아르바이트부터 챙기는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냐! 세상에, 일하러 갔어, 일하러! 그 곰탕색히!』
미안. 비행기가 추락해 가까운 친척이 몰살당했다는 식으로 목놓아 울부짓고 있는 친구는 살짝 무시해주길 바라. 맥주도 너무 마시면 취한다는게 이래서 확인된다니까.
『칼리. 벌써부터 주정이냐. 계속 그러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버린다.』
『어라. 어디서 강아지가 왈왈거리는데 왜 내 눈엔 안 보이지. 그거 희안허다.』
『환청까지 들리십니까. 자~알 하십니다. 여기요! 얘한테 찬물 좀 줘요!』
손가락을 튕겨 신호하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 아래에선 칼리의 종아리를 재주껏 걷어찼다.
『꺄울!』
여자를 발로 차다니, 이 무식한 놈 어쩌고 푸념이 쏟아졌지만 어쨌든 교통정리는 필요하다.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서.
『하늘에서 떨어진게 맞다니까.』
그렇다. 지금 우리들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샘 윈체스터다.
『난 잘 모르겠어. 그냥... 평범하지 않아?』
알콜에 약한 마이클은 신중하게 손아귀에 쥔 유리잔을 빙글 돌렸다.
물빠진 청바지를 하느님처럼 신봉하는 이놈은 이번에 샘과 같이 일반교양 수업을 두 개나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강의실 뒤편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꺽다리에겐 별 감흥을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음, 수업엔 빠지는 일 없고, 그렇다고 손을 들어 교수에게 질문도 하지 않고, 여자애들과 데이트하는 일도 없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그렇게 말했다.
『커다란 덩치가 아니었음 난 그 녀석이 같은 강의실에 앉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걸.』
『현대 미국 문화사 개론이었지?』
『아니. 문학 총개론이었어.』
『그거나 이거나.』
『그래. 네놈의 골빈 머리가 뭘 알겠냐. 아파치 헬기나 아파치 인디언이나 똑같은 종자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마이클이 눈을 부릅떴다. 두꺼운 근시용 안경 너머에서 푸른 눈동자가 번개를 쏘았다. 피뢰침도 없는 나는 알아서 엎드릴 수밖에.
싸움이 벌어질 거라고 착각한(?) 미아가 워워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그치만 샘이 평범하다는 마이클의 주장엔 나도 동의해.』
그리고 진정한 여자는 프라다만 입는다는 식의 추가 발언을 하여 칼리를 경악시켰다.
『사실은 평범 그 이하지. 윈체스터는 늘 싸구려 마트 옷만 입거든.』
『미아!』
『왜 그래, 칼리?』
『그건 실례야!』
『어... 그래?』
미아는 부잣집 졸부 외동딸이라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칼리와 마이클은 짐짓 시선을 주고받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저런 인격 모욕적 발언을 아무렇게나 해대는 미아의 성격은 물렁뼈라는 거다. 한 없이 착해빠진 녀석이「모르고서」사람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뱉는 건 정말 끔찍스럽다. 그녀는 아프리카 빈민국에 가서 옥수수가 없음 케이크를 먹으렴 떠들고도 남을 위인이다. 사촌 동생이 아니었다면 시험 끝났다, 맘 놓고 죽어보자 모임에 같이 껴주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랴. 나는 핏줄이니까 약간만 분노했다.
『어떻게 너는 셔츠의 색과 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냐!』
『어머! 그러는 리처드도 윈체스터가 입은 분홍 셔츠에 대해 욕을 했었잖아!』
『물론 욕을 했어, 미아. 그치만 그건 샘의 센스 자체를 두고 욕한게 아니야! 20% 세일품 중에서 팔 기장이 맞는 옷이 그것밖에 없었다며 만사 포기하고 그걸 입어야만 했던 녀석의 궁진한 생활 형편이라는 걸 욕했던 거야!』
샘은 가난하다. (추정) 양친은 일찍 돌아가시고, (추정) 의지할 가족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추정) 머리가 좋아 장학금을 타냈지만 (확실) 대학에선 생활비까지 책임져주진 않는다. (확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많이 어렵나봐.』
돈이 어디서 저절로 생기는게 아니니 몸이 바스러져라 일해 식비와 용돈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에 목숨을 걸면 성적이 떨어진다. 성적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대학에서 약속한 장학금이 취소된다. 그래서 샘은 식비를 줄이고, 단벌 옷을 고집하는 걸로 현실과 타협했다. 덕분에 푹 꺼진 눈자위는 옆에서 보면 무서울 정도다.
『최근엔 시험 준비로 바빠서 가계부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친 모양이야. 요즘엔 밥을 전혀 안 먹더라고.』
나의 이 말에 세 명의 친구들은 경악에 가득차 입을 꾹 다물었다.
21세기 미국에서 돈이 없어 아사하는 대학생이라.
마이클은 질려서 말도 안 나온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그럴것이 마이클이 몸을 담고 있는 기숙사엔 굶어 죽은 유학생 괴담이라는게 있다. 스탠포드에선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다고 했던가, 수학 전공이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수업에 나타나질 않아...
마이클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필리핀.』
미안하다. 필리핀 출신이었댄다. 아무튼 수업에 나타나질 않아...
『기다려. 갑자기 헷갈리네. 말레이시아일지도 모르겠어.』
젠장! 어쨌거나 수업에 나타나질 않아...
『진짜야? 굶어서 죽었다고? 정말?』
사람이 모처럼 분위기를 타고 있는데 말이지. 이야기를 싹뚝 자르지 말아, 미아.
『그렇게 질겁할 것 없어, 미아. 근거 없는 괴담이야, 괴담. 어쩌면 학생 비자가 잘못되어 추방당한 걸지도 몰라.』
『아냐. 스터디 모임에서 제시카가 그랬는데 그 학생은 1980년대 필리핀 쿠데타에 휩쓸린 거라고 해. 왜 있잖냐, 구두 많은 이멜다, 마르코스... 굶어 죽었다는 쪽보다는 이쪽이 더 현실감 있지. 그치만 학업을 중단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 민주화 시위 도중에 총 맞아 죽었다는 결론은 좀 불쌍해.』
나를 바보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아예 마이클과 칼리까지 번갈아 끼어들었다.
좋다 이거야. 21세기에 괴담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아무튼 학생은 허공으로 감쪽같이 증발했고, 그때부터 밤이면 밤마다 기숙사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생각났다며 마이클이 갑자기 표정을 달리했다.
『그러고보니 샘이 그 괴담에 유독 관심이 많았어.』
『그래?』
『난 봤다. 도서관에 가서 캠퍼스 괴담 자료도 찾고 옛날 학부 기록까지 뒤져보더라고.』
『호오?』
『걔 은근히 그런 거 밝히는 것 같지 않니? 유령이나 귀신, 좀비나 뱀파이어 같은 거.』
『글쎄다. 할로윈 파티는 질색이라고 분명 자기 입으로 그랬는데...』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샘이 좀비를... 많이 좋아했던가?
마이클은 쓰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왜? 샘이 좀비를 좋아한다고 하면 좀비 영화 DVD라도 선물하려고?』
그러면서 대놓고 내 흉을 봤다.
『그거 아냐? 칼리. 저 짐승은 알리슨과 데이트를 하면서 샘 이야길 스물 일곱 번이나 했댄다.』
『에엑? 진짜?!』
『있잖아, 샘은 말이지... 있잖아, 샘은 말이지.... 가엾은 알리슨. 얼마나 화가 났음 나에게 살짝 귀띰하길 아무래도 리처드를 죽여버려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망설이지 말고 총으로 쏴버려. 여자를 배려하지 않는 남자는 죽어도 싸.』
나는 강하게 반박했다.
『과장이야! 너희들은 데이트 할 적에 친구 이야긴 하나도 안 하냐?!』
『물~론 하지. 그치만 넌 정도가 지나쳐, 리처드. 알리슨 앞에서 일곱 번 정도만 말했어도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넌 거기다 더하기 스무 번이라고. 샘 윈체스터는 말이지, 샘 윈체스터는 말이지... 첫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야!』
『강한 부정은 긍정~♬』
『아니라니까!』
『리처드는 변태~♪』
『그런게 아니라니까!』
낯간지러운 애정 따위가 아니다. 정직하게 말해 자꾸만 신경이 가는 것뿐이다.
『그냥...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샘을 보면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 불안해. 곁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가 않아.』
풀 죽은 목소리를 하고 알콜을 마셨다.
『단지 그뿐이야.』
우리 엄마가 그랬다. 어느날 갑자기 웃으면서 바이바이.
나는 그녀가 떠나간 날의 아침을 여전히 기억한다.
텅 빈 눈동자를 하고 내 머리에 키스하던 엄마를 기억한다.
아주 가끔씩, 샘은 엄마처럼 텅 빈 눈동자를 하고 거울을 본다. 나는 그게 무섭다.
그때의 샘은 자기 모습을 보고 있는게 아니다. 거울 저편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
가족... 아니면 소중한 애인...? 알게 뭐람. 샘은 자신에 대한 이야긴 일절 하지 않는다. 오지랖 넓게 캐물으려 하면 실실 웃으며 회피한다. 괘씸하다. 나는 내 여동생 신체 사이즈까지 시시콜콜 다 불어 바쳤는데.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애와 키스한 이야기까지 죄다 말해줬는데.
『마시자~!!』
사념에 쩔어 한숨을 푹푹 쉬는 나를 향해 칼리가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리처드를 위하여~!!』
『곰탕색히 샘 윈체스터를 위하여~!』
『그린피스 만세!』
『TI(국제투명성기구) 만세!』
『생물종 다양성 보호의 날 만세~!』
대학생은 쓸데없는 이유로 술에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