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번호가 도착했습니다, 미스터 리스.』
하지만 리스는 평소와 달리 핀치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핀치는 번호가 적혀진 메모지가 아닌 포장지로 싸여진 상자를 들고 있었고, 납작한 모양새의 선물 상자는 넥타이가 들어가기에 아주 적당한 크기였다.
리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투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너무 고급이어도 안 되며, 그렇다고 유행에 뒤쳐져서도 안 된다. 리서치 결과, 형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은 차분한 청회색의 격자무늬 - 리스의 따져 묻는 시선을 의식한 핀치는 서명이 필요한 행정 서류라도 되는 양 상자를 내밀었다.
바로 이런게 문제다. 사적인 선물이 아닌,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뉘앙스가 리스를 열받게 만들었다.
『이제는 이게 지켜야 할 드레스 코드가 되는 겁니까. 저는 넥타이를 좋아하지 않는데요.』
『잠시만요. 지금 저더러 리스 씨의 취향을 존중해달라 요구하시는 건가요.』
핀치의 말투는 원한에 감싸여 싸늘했다.
『설탕 한 스푼이 들어간 센차, 정확하게 한 스푼입니다. 이게 제 취향이죠. 이걸 깔끔하게 무시하고 무가당의 센차를 가져다 준 사람이「존중받아야 하는 취향」어쩌고를 주장하는 건 아귀가 맞지 않죠.』
역시나 녹차가 원인이었군. 리스는 뒷통수를 긁었다.
『그 설탕 한 스푼 말입니다, 핀치. 차이나타운에서 개인적으로 신세를 졌던 첸 노인이란 분이 있는데요. 녹차에 설탕을 넣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흥분해서는 어떤 코쟁이가 녹차에 설탕을 넣어 마신다는 거냐, 양놈들은 도대체 녹차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녹차의 생명은 자연에서 우러난 담백함이다, 거기에 설탕이라니, 쌀밥에 사탕 뿌려 먹는 입맛인 거냐, 완전히 미친 짓이다, 이러면서...』
다 듣지 않고 핀치가 고개를 까딱였다.
『첸 노인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제 취향을 존중해줘서 무척 고맙다고요.』
그리고는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보드판 쪽으로 걸어갔다.
『앤 블리스, 15세. 여성. 보호자는 이모인 캐서린 그로보스. 모친은 지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부친은 7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금이 간 부위를 셀로판 테이프를 두껍게 붙여 고정한 유리 판넬은 오늘따라 텅 비어 있었다.
프로필 사진조차 찾지 못한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휑한 경우는 드물다.
리스는 핀치가 어쩌면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잠시 의심했다.
『15세면 아직 학생이겠군요. 그리고요? 이게 전부입니까?』
핀치는 똑 부러지는 어조로「아직까지는 이게 전부다」잘라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미스터 리스.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기록상으로 블리스는 심지어 태어나 지금까지 학교를 다닌 적도 없습니다.』
리스는 두 눈을 꿈뻑였다.
『학교도 안 다녔다고요. 미국에서 그런게 가능합니까?』
『선천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거나, 범죄에 연루되었거나, 부모의 종교적 신념 때문이거나... 홈스쿨을 하는 학생들이 200만이 훌쩍 넘습니다. 주 정부가 공인한 교과과정을 따르고 거기에 따른 학업 평가를 받지만 사립이든 공립이든 학교에는 가지 않는 거죠. 부모나 가정교사, 인터넷 학습 등을 통해 교과를 배웁니다.』
『흐음... 그리 썩 좋은 것처럼 들리지는 않네요.』
『학생에게요, 아님 우리에게요?』
거기까지 말한 핀치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리스에게 건넸다.
『어쨌든 사정이 그렇다보니 제가 찾아낸 건 치과 기록이 전부입니다. 자산 및 법적 관리는 이모인 캐서린 그로보스가 전부 대신하고 있고, 모든 흔적은 그곳에서 끊깁니다. 어쩔 수 없이 그로보스 양을 먼저 만나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리스가 애써 외면한 선물 상자를 다시 들이밀었다.
넥타이.
고급은 아니며, 다소 촌스러운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자 자, 일단 한 번 걸쳐봐.
『NHERI (미국가정교육리서치연구소) 이름을 들먹이려면 지금 그 옷차림으로는 안 돼요.』
리스는 핀치가 심술을 부리고 있는게 맞다 확신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