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이야기는 매우 짧으며,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순서 따위는 무시해도 상관이 없으니 앞에서 뒤로, 혹은 뒤에서 앞으로 읽어도 됩니다.
「면회 사절」이라고 적혀진 팻말을 무시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 안녕, 엘리스. 이곳은 과연 하트의 여왕이 다스리는 이상한 나라이군.
오랜 시간동안 침대에 묶여있던 그녀의 몸은 어린아이처럼 왜소해 보였다. 어떻게 작동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의료 기구들이 여윈 몸과 연결되어 숫자와 그래프, 규칙적으로 점멸되는 작은 불빛을 토해냈다. 튜브와 전선이 덩굴 줄기처럼 뻗어나가면서 침대에 뿌리를 내렸다. 조만간 석화되어 떼어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엘리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겠으나 리스는 그것들이 그녀를 색깔 없는 물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한 줌의 고깃덩이...
『안녕, 내 이름은 존이라고 한단다.』
엘리스의 무색 투명한 눈동자가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으며 리스에게로 향했다. 흰색의 의사 가운이 아닌, 검은 양복 차림새의 낯선 사내를 향하여 그녀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어떠한 두려움도, 생전 처음 보는 이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좋지 않은 소식이야. 제이크가 죽었단다.』
그녀가 단 한 방울의 눈물만 흘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는... 음.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어. 그리고...』리스는 가슴이 답답해졌다.『사랑하고 있다, 이 말을 누이인 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받았다.』
엘리스는 혈육의 죽음을 무슨 일기 예보처럼 받아들였다.「내일 오전 무렵 한때 소나기가 쏟아지겠습니다」- 그래봤자 병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그녀에겐 우산이 필요 없었다. 비는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사지 마비 환자인 그녀는 바람 한줌 느낄 수 없고 따뜻한 햇살 아래서 풀냄새를 맡을 일도 없다. 모든게 헛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스는 제이크의 죽음에 반응하지 않았다. 천둥이 치고 거센 폭풍우가 몰려와도 더 이상 엘리스에겐 닿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엘리스.』
『그다지.』
『그럼 안 돼. 제이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너는 자세한 전말을 모두 알아야 할 이유가 있어. 그가 어디를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어디가 멍들고 부러졌는지, 너는 자세히 알아야만 해. 그가 총에 맞고 얼마나 아파하고, 괴로워했는지... 내 눈을 보렴, 엘리스.』리스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 차가웠다.『이 모든 걸 네가 원했잖니. 네가 그에게 말했잖아. 복수를 하라고, 네 몸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원한다고... 엘리스.』
인형처럼 똑바로 누운 상태에서 그녀가 눈꺼풀을 깜빡였다.
『틀려, 아저씨.』
찰나와 같이 소녀의 푸른 눈동자 속으로 섬광이 번득였다.
『제이크에게「오빠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했을 뿐이야. 그게 전부야.』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쉬었고 갈라져 있었다.
『2년 전 자동차 사고로 목과 등을 다쳤어. 운이 나빠 전신 마비가 왔고 손가락도 마음대로 못 움직여. 웃긴 건 운전대를 잡은 제이크는 경상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나는 중상이었다는 거지. 하,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나는 안전밸트를 매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 모든 건 안전밸트 탓이 아니다. 엘리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고말고. 상대 차량의 부주의가 참상을 불러왔다. 엘리스는 차선을 넘어 그들에게로 똑바로 달겨들던 은색 스포츠카의 모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놀란 표정과, 비명을 지르던 입술의 둥근 모양까지 기억했다.
『오빠는 친구들과 맥주를 마셨어. 음악을 크게 틀어놓았고, 나는 오빠에게 화를 내고 있었어. 제이크가 내 게임 CD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았거든. 방을 어질러 놓았다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것도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 그래서 짜증을 내면서 오빠의 등이랑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어. 제이크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날 꼬집으려 했고... 그가 앞을 잘 보지 않은 건 나 때문이기도 해.』
말을 길게 하는 건 힘들었다. 엘리스는 금방 숨이 차 헐떡거렸다.
『하지만 사고는 우리 탓이 아니야.』
은색 스포츠카를 운전하던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실수로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어.』
상체를 숙여 그걸 다시 주우려고 했던게 화근이었다.
『그가 우리 차를 덮쳤어. 우리가 아니라... 그가.』
상대는 부유한 사업가의 외동 아들이었다.
제이크는 음주운전을 했고, 그들의 변호사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은색 스포츠카를 운전한 남자는 보석으로 곧 풀려났다.
리스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엘리스의 눈이 그런 그의 동작을 따라왔다.
『제이크가 그를 죽이려고 했어.』
『그런 것 같네.』
『그는 비무장의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어. 나는 그를 막아야만 했어, 엘리스. 그게 내 일이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무기를 버리려 하지 않았어. 결코 버리려 하지 않았어. 필사적이었어. 왜냐하면 그건 제이크의 의지가 아니라 엘리스, 너의 의지였기 때문이야. 그는 여동생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동생의 말에 깊이 상처를 받았고, 네 용서를 구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노라 믿고 절망해버린 거야. 그래서, 엘리스...』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결박당한 소녀를 노려보며 리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런 식으로 제이크를 구석으로 몰아버린 네게 나는 너무 화가 나.』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