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옷만 갈아입고 도서관으로 허겁지겁 돌아온 핀치는 깜짝 놀랐다.
대단히 지친 안색으로 도서관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는 리스의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신문지 두 서너 장을 바닥에 깔고 - 하느님 맙소사 - 노숙자 시절의 노하우를 십분 활용, 등을 구부린 채 두 팔로 양복 상의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거라 착각하고 비명을 질러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핀치가 그러지 않은 까닭은 구석으로 얌전히 놓여진 구두의 존재를 재빨리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정글과도 같을 거리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소지품을 훔쳐갈 도둑이 없으므로 - 아니 아니, 지금 밑창 닳은 신발 따위를 쳐다보고 있을 때인가... 핀치는 제자리를 이탈한 심장을 수습했다.
『미스터 리스?』
왜 이 남자는 집에 가서 눕지 않은 걸까. 것보다 차가운 맨 바닥에 신문지가 무슨 소용이라고 - 거의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굽혀 리스의 어깨를 흔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동작이지만 예전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 그의 등뼈는「허리를 구부림 = 유니버셜 발레단이 선보이는 고난이도 동작」임을 일방적으로 주장했고, 그만큼 어려운 동작을 함에 있어서의 합당한 댓가를 요구했다. 다시 말해 탈이 난 근육이 세게 당겨져 눈물이 날 만큼 엄청 아팠다.
『리스.』
그래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존?』
인기척에 반응,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리스는 누운 자세 그대로에서 눈꺼풀만 뻐끔 들어 올렸다.
보아하니 아직까지 스위치가 켜지지 않은 눈치다.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같고, 아니면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도 보였다.
계속해서 희망이 없는 어둠 언저리를 헤매면서 사람을 잡아먹는 못된 괴물에게 쫒기는 중인게 분명했다. 영혼을 노리며 배회하는 불길한 그림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리스의 눈빛은 혼탁했다.
『일어나요.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돼요.』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불렀건만 리스는 핀치의 등장이 실제가 아니라 꿈의 연장이라고 착각한 것 같았다.
엷게 미소를 지으면서 리스가 속삭였다.
『손을 잡아줄래요. 부탁입니다.』
『존?』
『왜요. 안 되는 거예요?』
『존!』
『어.......... 음? 여기가 어디죠. 어.......... 핀치?』
핀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꼬대하는 전직 CIA 요원이라니.
『일상으로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미스터 리스. 커피가 필요해 보이는군요.』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를 한 잔 이상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다.
핀치는 자신이 악덕 고용주가 되어버린 이 비참한 현실을 유감으로 여겼다. 사흘 가까이 잠을 거의 자지 못한 고용인이 견디다 못해 신문지를 깔고 누워 비몽사몽 중에 헛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지 똥갱이 같은 근무 조건을 지적하며 고소장을 제출하겠다고 해도 말릴 자격이 안 된다. 미안하다 사과할만한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세수를 대신 하고 있는 리스를 곁눈질하던 핀치는 시커먼 빛깔의 위장을 쓰리게 만드는 사악한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샤워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한 리스는 이젠 살았다는 투로 뜨거운 커피를 벌컥거렸다. 맛과 향을 음미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먼, 말 그대로 기계에 기름칠을 하는 동작이었다. 핀치는 측은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 속쓰림에 삼가 묵념을 - 또 다른 컵을 꺼내 슬그머니 그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나서 한 3초? 이래도 과연 괜찮은 걸까 고민하는 눈치로 다른 컵 하나를 추가로 옆에 놓았다.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 하긴 싫어요.』
타박하는 말에 핀치는 자신의 과잉 서비스를 철회했다. 쉽게 말해 남은 커피 컵을 치웠다.
『새벽 무렵에나 귀가한 버터워스는 아침이 되자 학교로 일하러 갔어요, 핀치. 수업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잠시 눈도 붙일 겸 림보로 돌아왔는데 생각보다 오래 잤군요.』
『그러지 말고 호텔에라도 가서 침대에 눕지 그랬어요. 불편하게 새우잠을 자면 피곤이 안 풀려요.』
『불편한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잠을 자는 조건은 편안함 보다는 안전이니까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리스가 말했다.
『그보다 뭐라도 알아냈습니까?』
만약에 핀치가 열 세 살 어린애였다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핀치는 이제 열 세 살의 어린이가 아니었기에 흐흐흐, 이러고 웃을 수는 없었다. 토끼눈이 되어버린 눈가를 문지르며 리스가 볼 수 있도록 모니터 각도를 조정해 주는게 전부.
『리스 씨가 버터워스 씨의 집에서 복사해온 개인 컴퓨터 자료를 분석해봤습니다. 삭제된 파일 몇 개를 복구했고요, 특히 암호화되어 숨김 속성으로 감춰져 있던 압축 파일이 제 관심을 끌더군요. 그래서... 풀어봤죠.』여기까지 말하고 핀치는 잠시 숨을 골랐다.『이게 폴더 내용입니다. 토기가 올라올 정도의 무척 흉측스런 것들이죠. 폴더의 제목을 먼저 보지 않았더라면 리스 씨에게 저 개새끼의 머리통을 산 채로 불살라 버리라고 요구했을 겁니다.』
리스는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첫째, 폭력을 혐오하는 핀치가「상대의 머리를 산채로 불태워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둘째, 핀치가「개새끼」라고 욕을 했다. 셋째, 핀치가 얼굴을 붉히며 삿대질을 했다. 가만 있자... 지금 두 가지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화면 가득 벌거벗은 어린 아이들의 사진이 떠올랐다. 아이의 나이는 열 살이 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리스는 모니터를 외면하며 어금니를 뿌드득 깨물었다.
『아동 포르노인 겁니까.』
『악어 밥으로 던지고 싶어지지요. 하지만 악어 밥이 될 인간은 버터워스 씨가 아니라 따로 있습니다. 압축 폴더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증거물」이었습니다. 버터워스 씨가 개인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아동 포르노를 모은 건 아니라는 거지요. 것보다는 아동 포르노 수집자나 판매자를 개인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사조직을 꾸려서요. 앨런 싱어, 마이클 슬러셔, 브라이언 맥노거, 위노나 도든, 메히아스, 맥팔레인...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이들 전부가 아동 성범죄자 추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리더가 버터워스 씨로 추정되고요... 매우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이 일을 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리스는 팔짱을 낀 상태에서 셀로판 테이프로 벽에 부착된 수많은 사진들을 응시했다.
기계가 뽑아낸 사회보장 번호의 주인들이다.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죽어버린.
그는 저 저주받은 판넬 위로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는 걸 결코 바라지 않았다.
『아동 포르노 업자는 매우 위험한 사람들이죠. 지금까지는 행운이 뒤따랐다고 해도 조만간 생명이 위태롭게 될 겁니다.』
말을 끝마친 리스는 양복 상의를 움켜쥐었다.
공복의 위장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나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