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맞인사" 뒤 이야깁니다. 올빼미~는 서관쪽에 정리해서 올려놓겠습니다.
자, 이제 상자 뚜껑을 덮자.
그 여자의 눈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자.
흐르는 것이 처리하도록 기다리자.
- 오래된 구전동요 NO 2124번
회색의 시에 (※ 원래는 승려들이 하는 가슴띠 장식을 일컬음. 후에 법복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뀜) 를 입은, 키가 훤칠한 청년이 걸어간다. 옆구리에는 포스터임이 분명한 커다란 종이뭉치를 꿰찼다.
장바구니 하나 들고 길을 지나가던 아낙이 존경을 담아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다 말고 승려의 다른 손에 쥐어진 풀 깡통과 붓을 눈여겨 바라본다.
선거철인가...
아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마을 읍장 선거는 겨우 6개월 전에나 이루어졌고, 보궐 선거가 실시될 정도의 커다란 정치 스캔들을 들은 기억은 없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읍장이 안동 간 고등어 세트를 뇌물로 받았다면 정치판이 들썩이기 전에 빨래터부터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바람둥이로 유명한 보돔 읍장이 미모의 비서와 바람이 났다고 해도 그렇다.
여자는 호기심 반, 걱정 반, 목적지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승려를 따라갔다.
사원에서 포스터를 붙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들 쉬피드의 위대한 대행자들은 인민을 향해 산불 조심, 개 조심, 뉴욕 카바레 2호점 오픈 등등의 하찮은 내용은 외치지 않는다. 보다 더 거국적이며 거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자는 기억을 더듬어「사원은 텔리아 국왕 라보도 12세에 반대한다」는 벽보 하나로 250년 역사의 왕조를 문 닫게 만든 일을 떠올렸다. 비록 그것이 지나친 정치 간섭 행위였다고 해도 - 사원은 그것이야말로 정당하다며 하느님(신)의 입장에서 인민의 일을 걱정해왔다.
아낙네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포스터를 쥔 승려를 보고 어느 틈엔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젊은 신관은「모르긴 해도 어디서 큰 난리가 났나 보다」하며 걱정을 담아 웅성거리기 시작한 군중들의 존재는 그리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경쾌한 동작으로 풀이 든 깡통에 붓을 담갔다.
들리지 않는 콧노래가 귀에 걸린다.
광고지 부착 아르바이트생이 형님~ 이라 칭송할 법한 익숙한 태도로 벽에다 풀을 바른다.
『엿차!』
그리고 종이를 붙였다.
- 제피리아의 여자 마법사, 가슴 무지 납작하다
벽보에 본 메시지를 읽어낸 이들의 표정이 다들 괴상해졌다.
리나 인버스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대며 카오스 워드를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황혼보다 더 어두운 것,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것.
평범한 마을 게시판을 무슨 공룡 마초단인양 송두리채 파괴하고자 하는 리나를 진정시키고저, 제로스는 재빨리 외쳤다.
『이건 암호예요, 암호. 왜 있잖습니까. 왕이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걸「사자가 우리 속에 갇혔다」고 은유적으로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표현은 이렇게 했어도 정작 그 내용은 내일 모레 운동회가 있으니 다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벽보에는 신소인(神所印), 신전 마크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다.「이 벽보는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인쇄하여 마을 게시판에 올바른 절차를 밟아 부착한 것입니다」라는 걸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놀라움은 시작된다.
세상 어느 천지에 신전에서「이 여자, 가슴 납작하다」라는 내용을 써서 붙이느냔 말이다. 관공서에서 일부러 세금을 들여가며「박돌쇠 바보」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돌리는 거 봤나. 하물며 신전이다. 비방과 모함은 배척해야 마땅한 부도덕함이라며 일반 대중에게 설교하던 그들이 이런 식으로 누워서 침뱉기 식의 행위를 보란 듯이 해보일 수 있을까.
『정말로 저치들이 리나님더러 가슴 작다고 하겠어요? 진짜로 그랬다면 죽으려고 환장한게지. 아녜요. 그럴 리가 없어요.』
『네 의견은 틀렸어, 제로스.』
『에? 어째서요?』
리나는 울음 섞인 표정으로 벽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제피리아 출신의 리나 인버스라고 딱부러지게 적어 놓았잖아. 만약 이게 네 생각대로 암호문 같은 거였다면 물레방앗간의 한스, 내지는 빵굽는 베이커 식으로 어중간하게 휘갈겼겠지! 그렇지만 이걸 봐. 제피리아 출신의 마도사 리나 인버스! 각지에 퍼져있을 14만 4천명의 빵굽는 베이커씨와는 얘기가 다르단 말이다. 제피리아 출신의 마도사, 그리고 이름이 리나 인버스인 사람은 어디를 뒤져봐도 나 한 사람밖에는 없어. 암호문을 작성하면서 특정인을 들먹거린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남?』
『그렇다는 건?』
『한마디로 쓰벌이라는 거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갔다. 쾅 소리를 내며 게시판이 요동쳤다.
『그렇게 비방은 아니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에 입각한...』
『가우리?』
가슴을 모아쥐는 제스츄어를 하는 소녀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검사는 움츠러들었다.
『넵.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겠다. 리나는 알레르기 반응과 소화불량, 갑작스런 위경련 및 발열, 생리통이 한꺼번에 버무려진 듯한 찡그린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문제의 벽보가 붙기 시작한 건 지난 일주일 전이다. 목격자들의 멱살을 잡고 이실직고를 권유(?)한 끝에 알아낸 바에 의하자면 온화한 표정의 사제 둘이서 은화 닷냥을 들고 나타나 게시물 부착을 허가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남동쪽부터 시작해 서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단 사흘 만에 무려 마을 스물 아홉을 방문하여「결코 사실이 아닌 - 과연 그럴까」내용을 성공적으로 유포시켰다.
선전물은 동네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결계 밖 동네에선 제피리아가 어딘지도 모른다. 실제로 있는 지명인지조차 확인 불능이다. 제대로 된 대륙 지도는 아직 민간인들 사이로 유통되지 않았다. 이들이 사용하는 지도는 결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골동품이다. 제피리아 공화국이 자리엔 로그웨타 왕국이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왕국이 표기되어 있을 정도이고, 성왕국 세일룬도 세일루네 평원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나타나 있기 일수다.
그 와중에 승려가 제피리아 출신의 마도사에 대해 신나게 악담을 퍼부었으니.
주민들 입장에선 이만한 화젯거리도 없다.
- 우리는 화룡왕님의 새로운 신탁(농담)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봤어요.
- 나라가 멸망한다는 이야긴 아니니까 신경 안 써요. 그치만 왜 여자 가슴 이야길까나.
- 소문으로는 그 마도사가 사원에 거금을 떼먹고 도망쳐서 저주하는 거래요.
- 겉모양에 속으면 안되요. 그 벽보에 불을 비추면 숨겨진 글씨가 나타난대요. 그 글씨는? 드.라.군!
- 요즘 경기가 하도 좋질 않으니까 사람들 보고 웃으라고 그냥 붙인 거래요.
리나는 다시 이앓는 소리를 냈다.
추측은 많았으되 사실로 생각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번에 오래된 유적터를 단방에 날렸잖습니까. 그래서 화내는 거 아닐까요.』
『그치만 제로스? 증거를 안 남겼다구. 안 들켰어.』
『확실히... 네. 안 들켰죠. 그럼 그거 아닐까요. 일전에 가짜 승려짓 하는 사기꾼들을 잡아선 녀석들이 갖고 있던 현금을 죄다 챙겼잖습니까. 알고 봤더니 가짜가 아니라 진짜 승려이고, 그 돈도 선량한 주민들에게서 갈취한 것이 아닌 진짜 교회 기부금...』
『진짜 중이 도박판에서 포커치고, 술집에서 여자랑 놀아나든? 사기꾼 맞아.』
『허어, 그렇다면 화룡왕이 진짜로 농담했나.』
『화룡왕이 장난했다면 이참에 너희들 마족편에 붙어주지.』
『정말로? 나중에 취소하기 없기~♡』
『붙어, 붙어. 취소 안 해. 그러니까 계약서를 찾는다고 벌써부터 촐랑대지 좀 마라. 그리고 가우리? 지금 뭘 확인하고자 하는 겨?』
그녀는 벽보에 코를 박고「드.라.군」이라는 숨겨진 글씨를 찾고자 애쓰는 가우리의 머리통을 세차게 후려갈긴 뒤, 서북쪽 방향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승려들의 움직임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어제 10리를 걸었다면 오늘은 20리 길을 걷는 식이다. 어쩐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군사 작전 같다. 마차나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그 가정은 맞을 것이다. 거기다 이동하는 방향은 수상쩍을 정도로 일정하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선을 그리면 아마도 일직선이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쫓아가는 사람 쉬우라고 일부러? 하하하... 어서 나 잡아봐라, 이건가.
『좋아. 여기서 서북쪽으로 계속 가면 다음 마을은 어디지.』
『지도를 꺼내 확인을 해보지요. 가만 있자... 음? 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겠는데요. 덩치가 커요.』
『도시냐.』
『제미나미스, 일명 탑의 도시랍니다.』
제로스는 언제나처럼 눈웃음치며 지도의 한쪽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도에는 하얀 물감으로 날씬한 원통형의 탑이 그려져 있었다.
탑?
그리고 제로스의 말대로 덩치가 컸다. 축적으로 그려진 사이즈로만 봐선 도시가 아니라 나라 같다 - 라는 것이 리나의 첫 번째 감상이었다. 이상히 여겨 지도를 빼앗아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래봤자 중간 생략, 이하 생략을 이념으로 삼은 듯한 싸구려 지도에는 한 줄짜리 설명조차 빠져 있다. 마치 그게 전부라는 듯, 허멀건 땅에 흰색으로 탑만 그려 놓았다.
너마저 수상하기냐. 리나는 인상을 썼다.
『냄새가 나.』
『미안합니다. 머리를 감은지 사흘이라.』
『내 말은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거다!』
하여 본능은 외쳤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가라고.
하지만 게시판 벽보가 발목을 힘껏 움켜잡았다.
제피리아 출신의 여자 마도사, 가슴 납작하다.
그래서 때로는 알면서도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