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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긋거린 부분들을 하나씩 수정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해요. 자급자족 취미로 시작했다가 슬슬 정신고문으로 발전하고 있음. 우엥, 설탕 잔뜩 집어넣은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 ※


비를 맞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대답했지만 늦은 시간에 내리는 여름의 비는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 닿는 물방울은 한 여름의 열기와는 상관없이 얼어붙는 듯하여 기이한 느낌이었다.
푸름을 키우고 곡식을 자라게 하는 반가운 소식이라기보다는 생물을 상하게 만드는 이질적인 냉기를 품었기에 나도 모르게 황제가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건 그저 자연현상일 뿐이다. 먹구름에 하늘의 뜻이 담겼겠는가, 폭우에 징벌의 의미가 담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게 젖어가는 어깨가 시렸다.
「그럴 리 없지. 그저 저녁 소나기일 뿐이야.」
의심을 털어내려는 찰라 먹구름 틈새에서 두 줄기 번개가 번쩍였다.
빗줄기가 보다 굵어지면서 물기에 닿은 피부가 순식간에 뱀의 것처럼 식어갔다.

고작 천둥번개에 평정심을 잃어버린 내 자신이 창피스러울 지경이지만 나는 그걸 애써 정당화 시켰다. 벽은국에서도 폭우가 퍼붓는 날엔 혹여 오래된 광산으로부터 토사가 쓸려 내려와 민가를 덮치진 않을까 염려하지 않았던가. 실제로도 사건 사고가 많았다. 그러니 비가 내리면 현명한 이는 내일을 걱정을 해야 하는 법이다.
고인 물을 참방거리며 뛰어가는 하수들 틈새로 나 또한 머리를 가리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또다시 천둥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허공을 찢어발겼다. 놀란 누군가가 탄식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 역시 흠칫 몸을 떨었다.

「억울해. 고작 열 살짜리인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그렇게 따지면 앞으로 작정하고 무슨 대형 사고를 치겠다고 예고하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한데... 아무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마냥 넋 놓고 있음 안 될지도. 나를 변호하지 않음 진짜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저쪽 분위기도 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이런 어린아이의 몸으로 마음대로 들쑤시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게 좋겠지. 어디 보자, 적당한 자가 누가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적임자가 있었다. 산 사람이 아니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데 이 작자를 어디서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지를 모른다는게 함정이군.」
당연한 얘기지만 상대는 귀신이라 늘 제멋대로다. 내 기억 속의 그는 한밤 중 숙직실을 곧잘 헤집어 놓았지만 정해진 날짜라던가 요일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반면에 날씨와 계절은 좀 탔다. 함박눈이 쌓였거나 꽃이 만개한 날에는 백발백중이었다. 지금처럼 비 오는 날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렸다. 대부분의 악기가 그러하듯 현금이라는 악기 역시 습기를 직접적으로 먹으면 소리가 나빠졌다. 완벽한 연주에 미련을 두어 성불을 못한 이가 지금처럼 비 내리는 날을 반색할 리 없었다.

그래도 해보는 거다. 될지 안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가운데 결심하고 돌아와 창고에 돌아다니는 오래된 결재 장부의 낱장을 찢었다. 그리고 그 위에 먹으로 큼직하게 글자를 적었다.
《연주를 청하나이다》
그러다 생각났다.
「누박기는 창고 지붕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들을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걸리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도 했었고.」
지긋이 천장을 올려다보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아무래도 기척을 읽기 힘들다.
모르겠다. 여전히 그것들은 저 위에 있을까? 누박기가 나타나면 정말로 찢어 죽이려 들까? 이미 죽은 사람을?
설령 그런다고 해도... 저어, 괜찮지 않아? 다리가 없어져도 팔과 손이 남으면 연주는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심한가. 심한 것 같은데. 아니, 그 이상인 것 같은데.
가만히 침을 삼킨 뒤, 문을 삐그덕 열고『누박기, 혹시 밖에 있는가?』소리를 내어봤다.
바람 소리만 들렸을 뿐, 귀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하여간 이 녀석은 필요하다 생각하면 코빼기도 안 보인다니까!』
소리를 질렀지만 누박기가 잘못한게 아니다. 순전히 내 욕심이다.

답답한 기분에 한 자리에서 한참동안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다 구석에서 칠이 벗겨진 낡은 사다리를 가져왔다.
남의 도움따위 안 바란다. 내가 직접 지붕으로 올라가서 주장할 거다.
비 내리는 날에, 젖은 몸으로, 옆에서 사다리를 잡아주는 사람 없이, 시야가 방해를 받는 어두운 저녁에, 높은 지붕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건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청소용 사다리를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시험 삼아 좌우로 흔들어봤다.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나무 사다리는 위험천만하게 요동쳤다. 정말이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한 발 위로 딛고 올라섰다. 체중이 실리자 기우뚱 옆으로 쏠리는 느낌이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 칸을 더 올라갔다. 솔직히 말해 겨우 그 정도에 용기가 반으로 뚝 꺾였다.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지. 내리는 소낙비가 얼음처럼 차가워서 - 까닭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차라리 미인이 웃어 성벽이 무너졌다고 할 것이지.
벌벌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올라온 것도 아닌데 아찔해지려 했다. 나도 몰랐던 상황 한 가지, 지리가 안즈에게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열다섯 칸 정도를 더 올라가자 다리가 정신없이 후들거렸다. 게다가 비에 젖은 손바닥이 기름을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미끄러웠다. 마침내 지붕 표면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사다리를 벗어나 그 위로 발을 올린다는 건 운동신경이 둔한 나에겐 또 다른 문제였다.
『아유... 미치겠네.』
일단 숨을 가다듬으며 가까이로 보이는 부분을 눈으로 훑었다. 글쎄다, 썩어가는 낙엽이라던가 자잘한 나뭇가지들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지붕 곳곳을 덮고 있었다. 그 외 수상한 거?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지만 빗물이 방해했다. 아무래도 더 가까이 접근해봐야 할 듯하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체중을 의지할만한 것을 찾아 팔을 휘적거려 보았다. 갈라진 판자 끝에 닿아 손가락이 쓰라렸을 뿐, 있지도 않은 밧줄이나 기둥 따위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망할, 빌어먹을, 얼어 죽을, 저 혼자 열을 내며 사다리 한 칸을 더 밟았다. 순간 몸뚱이가 크게 휘청거렸다.

『젠장! 붙잡아줘! 붙잡아 달라고! 사람 죽는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냐!』
도움을 청하자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가까이 다가왔다.
상대는 맨발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지! 너희들,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악을 쓰자 찰박찰박 소리를 내는 맨발이 약간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발목 위는 그냥 새카맣게 흐렸다.
《잡아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있었기에.》
『잘 났어 진짜!』
《위험하니 사다리를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시지요. 사다리는 붙잡아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지붕 끝자락에 매달린 꼬락서니로 악을 써봤자 먹혀들어갈 리 만무했으나 어쨌거나 소리는 질러야 했다.
『네 주인이 누구냐. 혹시 황제 그 녀석이냐.』
《무엄하십니다. 당신에게는 그렇게 물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는 말을 네놈 주인에게 전해줄 수는 있겠지? 응?』
《어렵습니다.》
『뭐가 그렇게 징그럽게 까다로워! 그냥 가서 한 마디만 전해! 시오재는 이미 죽었다. 여기에 있는 건 지리가 안즈다. 나 같은 어린애가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건 고양이가 알을 낳는다는 식의 헛소문이고, 내게는 케케묵은 원망따윈 없다. 걱정하지 않아도 얌전히 살다 죽을테니 그딴 식으로 장난치지 말...』
《한 마디가 아니잖습니까.》
『야!』
《사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됐고! 락연은 어떻게 되었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를 알지 못합니다.》
『나와 같이 상은에 갔다가 칼 맞은 요괴다.』
《아.》
『알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겠다. 그래, 어떠하냐. 무사하냐?』
《멀쩡합니다.》
『멀쩡... 젠장, 속이 다 쓰리네. 괜히 걱정했잖아. 것보다... 좀 잡아줘~!!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안 됩니다.》
『.......... 이 자식, 두고두고 원망할테.』
다, 라고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순간 다리가 주룩 미끄러졌다.

Posted by 미야

2015/08/26 13:39 2015/08/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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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 숙희와 달리 엉망으로 얽인 실타래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피로감에 이리저리 몸을 맡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증서 말인데요... 아까도 말씀드렸죠? 절반만 진짜라고. 직인은 진짜입니다. 그런데 미묘하게 서식이 잘못되어 있어요. 혹시 안즈 님은 알아 보셨나요. 그러지 말고 좀 들여다 보시구랴. 수수께끼라고요, 수수께끼. 진짜 흥미 없어요? 에이... 재미 없게. 어디가 달랐냐 하면 취급자와 상은의 책임자 이름이 틀리게 나와 있더군요. 사람이 바뀌었는데 이를 위조한 사람은 그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도장은 진짜라서, 어떻게 이런게 가능했는지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 그런 마당에 용케 돈이 지불되었군.
죽어도 삼키면 삼켰지 뱉을 리 없는 돈 귀신들이 차라리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항복을 선언했을 정도라면 알아 볼 조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숙희 숙사감대부의 안색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언제나처럼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지만 오늘따라 그의 존재 자체가 한층 더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 그가 짤랑 소리를 내는 색동 주머니를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안에는 아마도 법종 통화용 대륙 금화가 들었을 것이다. 이걸 다시 동으로 바꾸면 부피가 상당하겠지만 이렇게 압축된 모양새로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간 돈은 악의적인 주술을 사용해가면서까지 강도 상해를 벌인 원흉이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작은 느낌이었다. 주머니의 늘어진 모양으로 짐작하자면 겨우 여덟에서 열 개 정도다. 누구에게는 보석이 가득 달린 최신 유행의 비단옷 한 벌 가격이고 가난한 누구에게는 온 식구의 목숨 값이다.
그리고 누군가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금액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야말로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 속뜻을 모르지 않은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되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빈사국에서 온 지리가 가의 안즈입니다.』
아마도 지금 내 얼굴은 답답할 지경으로 바보스럽고 두드리면 텅 빈 소리가 날 정도로 멍청해 보였을 거다.
이에 반응하여 숙희는 손등으로 책상을 콩콩 두르렸다.
『그런 걸 질문 드린게 아닙니다, 안즈 님. 혹시... 빈사국의 숨겨진 왕자나 왕족의 사생아 비슷한 거우? 생각해보니 이사실로 오는 도중에도 안즈 님만 습격을 받았었지요? 강도에게 두 번 당하는 운세라는 거, 전 안 믿어요. 비슷한 일이 두 번 반복되면 우연이 아닌 법이죠. 하여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라도?』
단칼에 부정했다.
설마. 불알도 안 달렸는데 내 신분이 숨겨진 왕위 계승자일 리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아, 소리를 내고 이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 말씀에 제 친모의 신분이 천민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그것도 출생의 비밀에 속할까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에 있느냐며 숙희 숙사감대부가 한 뼘 두께의 장부를 내 모가지 대신 쥐고 흔들어댔다. 손등에 파랗게 핏줄도 도드라졌다.
『이거, 이거. 불알이 없는게 아니라 배알이 없구먼! 이보쇼, 답답해 미치겠네. 지금 이웃집에 불났소?!』
죽을 뻔한 상황을 겪었으면서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냐고 비난을 받았지만 사정의 심각함은 이쪽에서도 잘 인지하고 있다. 다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정신이 옷 갈아입고 멀리 산 너머까지 외출을 나간 듯한 이 멍한 표정은 순전히 버릇이다.

쥐고 있던 장부를 먼지 휘날리게 집어던진 그가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건 제 개인 의견인데 차라리 국적을 포기하는 걸 고려하는 건 어때요.』
『그런게 가능해요?』
『까다롭지만 아주 불가능하진 않아요. 여기서 누군가의 양자가 되는 거에요.』
『누구의?』
『그거야... 일단. 길거리에서 새 아버지 구함, 광고라도 해봐야 알겠죠.』
남의 집에 불났다는 투로 말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야! 이마를 접으며 파리를 내쫓는 시늉을 해보였다.
게다가 그다지 좋은 생각도 아니다. 내가 이사실 제국에 눌러 앉겠다고 하는 순간 모르긴 몰라도 난리가 날 거다.
그걸 모르는 숙사감대부는 오늘 당장 결정해야될 문제는 아니니 천천히 고민을 더 해보라고 조언해줬다.

『그건 그렇고 이 금화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머무는 창고에는 금화를 숨겨둘만한 은밀한 장소가 없다. 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귀중품을 숨긴다고 해도 배고픈 쥐가 썩은 고구마 대신 물어 가면 그만이었다. 은밀히 속주머니로 만들어 허리춤에 차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귀찮은 짓이다. 움직일 때마다 짤랑 소리를 내면 놀림거리밖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금화는 당분간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괜찮겠지요? 혹시 특별히 쓰고 싶은 일이 있다던가... 예를 들자면 무지무지무지 비싼 고급 강좌에 등록을 한다던가... 옳커니. 일단 필기구라도 주문할까요?』
그동안 얼마나 알차게 잘 놀았으면「공부 좀 시켜보자!」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사친으로 와서 제대로 된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공부를 징그럽게 안 하세요 - 얼굴색 퍼런 궁정악사 귀신 누박기도 그렇고 락연도 그 말을 했었다. 귀신도 염려할 정도로 놀았으면 끝장이지... 나는 쓰게 웃으며 새 필기구 구입에 동의했다. 대신 너무 비싼 것은 필요 없으니 최대한 실용적인 것으로 가져다 달라 못 박았다. 그러다 생각났다.
『혹시 붓 말고 펜을 구할 수 있을까요.』
『호오, 이거 참. 안즈 님은 요즘 유행하는 가늠붓에 대해 잘 아십니까. 그거 의외네.』
『가늠붓이라뇨.』
『그게 펜이에요, 펜. 그럼 은촉으로 멋드러진 걸로 하나. 아니다, 둘. 먹물 대신 잉크.』
하지만 필기구에 대한 글자벌레의 흥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아서 헛기침을 하며 누군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숙사감 중 한 명이었다. 낯이 익지 않은 자였는데 소매장식의 띠가 밝은 귤색이었다. 흰색, 귤색, 파랑, 자주색 순서이니 말단직이라고 보면 되었다.

『왜.』
『죄송합니다. 도움이 필요해요. 싸움이 났습니다.』
『어디서.』
『여학생부에서.』
『어째서.』
『비싼 가락지가 없어졌다네요. 네가 가져갔네 안 가져갔네 이러면서 서로 머리채를 잡고 있습니다.』
숙사감대부의 어금니로 썩은 양파가 끼었다.
『콩가루 비지떡 같으니라고, 망할 계집애들!』
거칠게 욕설을 내뱉다 말고 흠칫해서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쓸었다. 그러나 본심은 신분 높은 숙녀들을 밧줄로 묶어 공중에 매달아놓고 지붕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기를 반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여자를 상대로 대륙어 표준 사전으로 사타구니 한 가운데를 찍는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입맛을 쩝쩝 다신 후 흉기 - 대륙어 표준 사전으로부터 시커멓게 색이 죽은 눈을 휙 돌리는 걸 봐선 내 짐작이 맞다.
투덜대며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허리가 노인네처럼 구부정하다.
『빌어먹을, 여기가 권력암투로 얼룩진 궁궐 한 가운데야?! 아니잖아. 그런데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군.』

내가 보기엔 비교가 잘못되었다.
제국 이사실은 다른 나라와 달리 궁중암투가 그다지 극적으로 피어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제국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그 위와 다시 그 위로 올라앉은 용신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반역을 모의하고 황제를 퇴위시켜봤자 신룡이 콧방귀를 뀌면 그 순간부터 여름 햇살에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신세다. 스스로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붓겠다며 앙탈을 부려봤자 역정을 내는 적룡에겐 한 입 꺼리다. 실제로 그런 까닭으로 비명횡사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 세 명 정도?
「잠깐만. 그 중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고 백성을 대신해서 정신 나간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려던 자도 있었지. 결말이 꽤 입맛 쓰게 끝났는데. 그 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하하, 까먹었다.」
금광의 소유권을 두고 재상 두 명이서 박 터지게 싸울 수는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장군 둘이서 칼부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저 높은 곳으로부터 적룡이 친히 내려와 이 세계는 언제까지나 평화롭다.

낮게 깔린 구름이 한층 더 짙은 먹색으로 변하면서 물방울이 창틀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이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군요. 우장이 있으십니까.』
가락지를 두고 싸운다는 애들을 맨손으로 잡으러 가는 도중에 숙희가 빈손인 나를 걱정했다.
그래봤자 지나가는 여름 소나기다. 쾅쾅 울리며 가깝게 다가오는 천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 무척 오랜만입니다. 별 내용 없는 비축분 공개... ※

Posted by 미야

2015/08/23 16:54 2015/08/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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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목표물을 뒤에서 껴안고 목을 조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라벽치의 가정은 잘못되었다. 후끈거리는 팔뚝이며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며 하는 느낌은 차라리 처녀를 겁탈하는 치한에 가까웠다.
그래도 뭐라도 해보라며 부추기니까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해본다. 그럼 잘근잘근 밟아볼까, 하지만 뒤로 끌어당겨진 탓에 나는 지금 한껏 까치발을 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치한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신체는 뒷발질을 하기엔 최적화가 안 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계속했다. 덕분에 애초부터 목적이 이쪽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었다.
『그 남자가 널 상대로 강도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도 수상해. 무슨 재주로 폐쇄적인 영업을 하는 소극 상은으로 네가 돈을 찾으러 온다는 걸 알았을까.』
밀착된 자세에서 속삭이며 묻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은의 직원이 증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렸을 수도 있죠.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다면서... 욧!』
이번에는 팔꿈치로 뒤를 힘껏 찍었다. 그래봤자 이라벽치는 약간만 반응했다. 근육이 두꺼운 탓에 유리를 박아 넣어도 개의치 않아할 사내다. 그럼 맨손인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밀착은 더 심해져 목덜미에 닿는 콧김이 덥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뭐,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그런데 넌 아까부터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얘기하는구나.』
대답은 둘째고 일단 살아야겠다. 끙끙대며 팔을 최대한 위로 뻗어 말랑거리는 귀를 잡고 세게 비틀었다.
『아이쿠!』
귀가 떨어질 지경이 되자 이라벽치가 슬그머니 결박을 풀어주었다. 아싸, 성공.

『이게 정말로 안즈에게 도움이 되는 겁니까. 내 판단엔 전혀 아닌데.』
정해진 달리기를 다 마친 후, 제법 거리를 두고 서서 우리 두 사람의 엉겨 붙음을 계속 못 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린청이 그 즉시 쏘아붙였다. 애초부터 제국인인 이라벽치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던 아이다. 그의 눈에는「커다란 짐승 같은 놈이 애를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로 보였던 것 같다. 하긴, 커다란 거울이 옆에 있었다면 나 역시 거울에 비친 우리들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보자보자 하니 아까부터 뭡니까. 팔을 잡아당기거나, 다리를 걸거나, 뒤에서 끌어안거나!』
아직 변성기를 맞지 않은 소년의 성대는 말도 안 되는 영역의 고음처리가 가능했다.
『어쩔 수 없잖아, 호신술을 배우는게 처음이라는데.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한다고. 가벼운 몸싸움부터 시작해 점차 고급 기술로 넘어가야지, 첫 술에 물 위를 걷는 법부터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구차한 변명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그런 식으로 몸싸움을 가르칩니까! 왜 끌어안는 건데요.』
추행범으로 몰린 이라벽치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끌어안은 거 아니다. 가상의 적으로 셈치고 공격한 거야.』
『제가 봤을 적엔 희롱하는 것으로밖엔 안 보이던데요.』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다. 오해야!』
그래도 린청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더하여 면박까지 줬다.
『어쨌든 당신은 그렇게 썩 좋은 스승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방식은 영 글러먹었어 - 메기수염처럼 하얗게 탈색된 이라벽치가 산소를 갈구하며 입을 뻐끔거리자 린청은 얼른 내 손목을 붙잡았다.
『목검을 들 수 있게 되기 전까진 저 남자에게서가 아니라 차라리 나에게 배워. 예당국 련 가의 장남 린청, 다듬어지지 않은 무예 실력이지만 너에게 기초 정도는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다.』
『아니, 일부러 그럴 필요까지는...』
나는 진짜로 이런 걸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린청은 나의 우유부단한 거절을 다르게 이해했다.
『미안해할 거 없어. 신세진다고 생각지 마라. 단지 내가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니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손까지 휘저었지만 이미 안 듣고 있다.
『그럼 첫 수업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기술 한 가지를 가르쳐 주마, 안즈. 적이 멍청하게 굴면서 머뭇거리면 주저하지 말고 눈을 찔러.』
소년은 예고도 없이 검지를 들어 이라벽치의 눈을 푸욱 건드렸다.
『악~! 내 눈!』
『봐, 효과 좋지? 상대가 그 유명한 멸락 장군이라도 꼼짝을 못 하게 된다고.』
남의 눈을 찔러놓고도 속 시원해하는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한참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황금을 입힌 종이로 뒤를 닦을 정도의 갑부는 아니었지만 땡전 한 닢 없던 어제와 비교하자면 부자가 맞았다.
『증서에 적혀진 금액을 받아왔습니다. 것보다... 이 화상아.』
숙희 숙사감대부는 사건 이후 왜 자기부터 찾아오지 않았느냐며 성질을 부렸다. 한가롭게 놀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던 건 아닌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내 모습을 보더니 상황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몰아붙이며 벌컥 화를 냈다.
『안즈 님이 처한 상황이 어떻다는 건 알고 계시는 거 맞습니까? 지금까지 어디서 누구랑 놀고 있었던 겁니까.』
『안 놀았는데요.』
『아이고, 잘도 그랬겠다... 쯧쯧.』
안 놀았다는데 더 화를 낸다. 진짜지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성격 급한 사람만 모이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증서는 절반만 진짜였지만 소극 상은에서 일이 커지는 걸 꺼려했던지 손실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재원 부석상위 앞으로 왔던 편지와 증서를 다시 꺼내와 내 앞에 펼쳐놓았다. 염연히 사건 증거물일 텐데 어떻게 그게 일개 숙사감대부인 숙희 손아귀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먼저 봤던 그 편지가 맞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것들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사납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 여기 놓인 편지의 필체가 아버지의 것이 맞느냐 물어도 대답은 곤란했다. 신분 높은 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은 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있고, 유려한 필체로 대필을 해주는 걸로 밥 먹고 사는 중인도 있는 마당에... 한때 나도 대필을 하는 걸로 생업을 가진 적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다.

『본국에서 가져온 아버님이 주신 글자가 있으시지요?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게 과연 나에게 있던가, 가만 생각했다가 자개 장식이 된「자결 상자」존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물품의 존재를 제3자가 정확히 꿰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숙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 남자라면 쌈지통에 든 바늘 개수까지 전부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양을 봐도 이 남자는 결코 얕잡아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 물건이 숙사감대부의 책상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리고 있자니 숙희가 보일락 말락 고개를 숙였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개인 숙소에서 꺼내온 점을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들겠지만 이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굳이 숨겨야 할 물건도 아닌데요, 뭐.』
『그거 참, 하해와 같은 이해심. 그렇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뚝뚝 끊어지는 이상한 문장으로 양해를 구한 그는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나란히 펼쳐놓고 보니 오싹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부석상위 앞으로 도달한 것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획의 삐침과 기울어짐, 올라감. 줄의 간격과 크기까지 판박이라서 일부러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도출된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숙희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점이 보이는가 보다.
『먼저 부석상위 앞으로 온 편지를 볼까요.』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이 간략한 문장에서 그는 필요한, 이라고 적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자에서 꺼낸 편지에도 운 좋게 같은 단어가 적혀져 있더군요. 여기 이 부분이죠.「네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너의 부족함을 먼저 인식하고 이를 채워줄 이에게 존경심을 보여...」자, 그럼 같이 나란히 두고 비교를 해볼까요. 어때요, 안즈 님이 보기에는.』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았으니까.
『똑같죠. 똑같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마치 습지에 비치는 모양대로 정성껏 그려 넣은 적은 것처럼.』
숙희는 재차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듬지 않은 수염의 까끌거리는 촉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재밌어요, 이건. 마치 도전해 봐라, 주장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Posted by 미야

2015/08/14 19:26 2015/08/1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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