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긋거린 부분들을 하나씩 수정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해요. 자급자족 취미로 시작했다가 슬슬 정신고문으로 발전하고 있음. 우엥, 설탕 잔뜩 집어넣은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 ※
비를 맞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대답했지만 늦은 시간에 내리는 여름의 비는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 닿는 물방울은 한 여름의 열기와는 상관없이 얼어붙는 듯하여 기이한 느낌이었다.
푸름을 키우고 곡식을 자라게 하는 반가운 소식이라기보다는 생물을 상하게 만드는 이질적인 냉기를 품었기에 나도 모르게 황제가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건 그저 자연현상일 뿐이다. 먹구름에 하늘의 뜻이 담겼겠는가, 폭우에 징벌의 의미가 담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게 젖어가는 어깨가 시렸다.
「그럴 리 없지. 그저 저녁 소나기일 뿐이야.」
의심을 털어내려는 찰라 먹구름 틈새에서 두 줄기 번개가 번쩍였다.
빗줄기가 보다 굵어지면서 물기에 닿은 피부가 순식간에 뱀의 것처럼 식어갔다.
고작 천둥번개에 평정심을 잃어버린 내 자신이 창피스러울 지경이지만 나는 그걸 애써 정당화 시켰다. 벽은국에서도 폭우가 퍼붓는 날엔 혹여 오래된 광산으로부터 토사가 쓸려 내려와 민가를 덮치진 않을까 염려하지 않았던가. 실제로도 사건 사고가 많았다. 그러니 비가 내리면 현명한 이는 내일을 걱정을 해야 하는 법이다.
고인 물을 참방거리며 뛰어가는 하수들 틈새로 나 또한 머리를 가리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또다시 천둥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허공을 찢어발겼다. 놀란 누군가가 탄식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 역시 흠칫 몸을 떨었다.
「억울해. 고작 열 살짜리인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그렇게 따지면 앞으로 작정하고 무슨 대형 사고를 치겠다고 예고하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한데... 아무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마냥 넋 놓고 있음 안 될지도. 나를 변호하지 않음 진짜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저쪽 분위기도 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이런 어린아이의 몸으로 마음대로 들쑤시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게 좋겠지. 어디 보자, 적당한 자가 누가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적임자가 있었다. 산 사람이 아니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데 이 작자를 어디서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지를 모른다는게 함정이군.」
당연한 얘기지만 상대는 귀신이라 늘 제멋대로다. 내 기억 속의 그는 한밤 중 숙직실을 곧잘 헤집어 놓았지만 정해진 날짜라던가 요일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반면에 날씨와 계절은 좀 탔다. 함박눈이 쌓였거나 꽃이 만개한 날에는 백발백중이었다. 지금처럼 비 오는 날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렸다. 대부분의 악기가 그러하듯 현금이라는 악기 역시 습기를 직접적으로 먹으면 소리가 나빠졌다. 완벽한 연주에 미련을 두어 성불을 못한 이가 지금처럼 비 내리는 날을 반색할 리 없었다.
그래도 해보는 거다. 될지 안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가운데 결심하고 돌아와 창고에 돌아다니는 오래된 결재 장부의 낱장을 찢었다. 그리고 그 위에 먹으로 큼직하게 글자를 적었다.
《연주를 청하나이다》
그러다 생각났다.
「누박기는 창고 지붕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들을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걸리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도 했었고.」
지긋이 천장을 올려다보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아무래도 기척을 읽기 힘들다.
모르겠다. 여전히 그것들은 저 위에 있을까? 누박기가 나타나면 정말로 찢어 죽이려 들까? 이미 죽은 사람을?
설령 그런다고 해도... 저어, 괜찮지 않아? 다리가 없어져도 팔과 손이 남으면 연주는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심한가. 심한 것 같은데. 아니, 그 이상인 것 같은데.
가만히 침을 삼킨 뒤, 문을 삐그덕 열고『누박기, 혹시 밖에 있는가?』소리를 내어봤다.
바람 소리만 들렸을 뿐, 귀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하여간 이 녀석은 필요하다 생각하면 코빼기도 안 보인다니까!』
소리를 질렀지만 누박기가 잘못한게 아니다. 순전히 내 욕심이다.
답답한 기분에 한 자리에서 한참동안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다 구석에서 칠이 벗겨진 낡은 사다리를 가져왔다.
남의 도움따위 안 바란다. 내가 직접 지붕으로 올라가서 주장할 거다.
비 내리는 날에, 젖은 몸으로, 옆에서 사다리를 잡아주는 사람 없이, 시야가 방해를 받는 어두운 저녁에, 높은 지붕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건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청소용 사다리를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시험 삼아 좌우로 흔들어봤다.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나무 사다리는 위험천만하게 요동쳤다. 정말이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한 발 위로 딛고 올라섰다. 체중이 실리자 기우뚱 옆으로 쏠리는 느낌이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 칸을 더 올라갔다. 솔직히 말해 겨우 그 정도에 용기가 반으로 뚝 꺾였다.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지. 내리는 소낙비가 얼음처럼 차가워서 - 까닭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차라리 미인이 웃어 성벽이 무너졌다고 할 것이지.
벌벌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올라온 것도 아닌데 아찔해지려 했다. 나도 몰랐던 상황 한 가지, 지리가 안즈에게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열다섯 칸 정도를 더 올라가자 다리가 정신없이 후들거렸다. 게다가 비에 젖은 손바닥이 기름을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미끄러웠다. 마침내 지붕 표면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사다리를 벗어나 그 위로 발을 올린다는 건 운동신경이 둔한 나에겐 또 다른 문제였다.
『아유... 미치겠네.』
일단 숨을 가다듬으며 가까이로 보이는 부분을 눈으로 훑었다. 글쎄다, 썩어가는 낙엽이라던가 자잘한 나뭇가지들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지붕 곳곳을 덮고 있었다. 그 외 수상한 거?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지만 빗물이 방해했다. 아무래도 더 가까이 접근해봐야 할 듯하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체중을 의지할만한 것을 찾아 팔을 휘적거려 보았다. 갈라진 판자 끝에 닿아 손가락이 쓰라렸을 뿐, 있지도 않은 밧줄이나 기둥 따위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망할, 빌어먹을, 얼어 죽을, 저 혼자 열을 내며 사다리 한 칸을 더 밟았다. 순간 몸뚱이가 크게 휘청거렸다.
『젠장! 붙잡아줘! 붙잡아 달라고! 사람 죽는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냐!』
도움을 청하자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가까이 다가왔다.
상대는 맨발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지! 너희들,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악을 쓰자 찰박찰박 소리를 내는 맨발이 약간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발목 위는 그냥 새카맣게 흐렸다.
《잡아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있었기에.》
『잘 났어 진짜!』
《위험하니 사다리를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시지요. 사다리는 붙잡아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지붕 끝자락에 매달린 꼬락서니로 악을 써봤자 먹혀들어갈 리 만무했으나 어쨌거나 소리는 질러야 했다.
『네 주인이 누구냐. 혹시 황제 그 녀석이냐.』
《무엄하십니다. 당신에게는 그렇게 물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는 말을 네놈 주인에게 전해줄 수는 있겠지? 응?』
《어렵습니다.》
『뭐가 그렇게 징그럽게 까다로워! 그냥 가서 한 마디만 전해! 시오재는 이미 죽었다. 여기에 있는 건 지리가 안즈다. 나 같은 어린애가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건 고양이가 알을 낳는다는 식의 헛소문이고, 내게는 케케묵은 원망따윈 없다. 걱정하지 않아도 얌전히 살다 죽을테니 그딴 식으로 장난치지 말...』
《한 마디가 아니잖습니까.》
『야!』
《사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됐고! 락연은 어떻게 되었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를 알지 못합니다.》
『나와 같이 상은에 갔다가 칼 맞은 요괴다.』
《아.》
『알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겠다. 그래, 어떠하냐. 무사하냐?』
《멀쩡합니다.》
『멀쩡... 젠장, 속이 다 쓰리네. 괜히 걱정했잖아. 것보다... 좀 잡아줘~!!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안 됩니다.》
『.......... 이 자식, 두고두고 원망할테.』
다, 라고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순간 다리가 주룩 미끄러졌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