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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공간에서의 육탄전에 임하면서 우리 셋은 저마다 굳게 입을 다문 채 거칠게 숨을 토했다.
언어로 의사표현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밀착이 된 상황이어서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를 쏘아보는 시선과 땀 냄새, 그리고 급격히 빨라지는 혈액의 순환 - 락연의 손가락은 깊숙이 베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잘려나갔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칼날을 손에 쥔 채로 힘을 줘서 타평을 계단 위로 밀어 올리려 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고통마저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힘겨루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락연은 자신의 가랑이를 최대한 좌우로 벌려, 눕다시피 한 내가 알까기 식으로 빠져나갈 공간을 만들려 했다.
「무리라고! 무리! 너무 좁아!」
어쨌든 그의 희망대로 어떻게든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고자 기를 썼다. 그래봤자 밟힌 형상이었다. 실제로 머리가 짓눌린 탓에 숨조차 쉬기 어려운 상태에선 마음만 굴뚝이고 움직임은 여의치 않았다. 나는 사실상 락연을 목마 태우고 있었다. 납작하게 짜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도망치려는 내 움직임을 눈치 챈 타평은 마음이 급해진 눈치다. 웃웃, 아앗, 이런 식의 괴음을 내지르며 락연의 손아귀에 잡힌 식칼을 강제로 비틀어 빼내려 했는데 흘러내린 체액으로 - 요괴의 피는 인간의 것보다 훨씬 묽었다 - 칼날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였다. 아차 하는 사이에 높게 들린 식칼이 락연의 목덜미를 향해 빠르게 내리꽂혔다. 퍽, 퍽 하고 살을 찢는 둔한 소리가 연거푸 두 번이나 들렸다.
사람이라면 그대로 숨이 끊어졌겠지만 락연은 요괴다.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바위처럼 버티고 서서 자리를 비키려 하지 않았다.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 점이 타평을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봤자 휘두르는 칼날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좌절감에 절규하던 그는 이번엔 락연의 배를 푸욱 찔렀다.

식칼이 꽂힌 마당에 락연은 나를 향해 눈짓했다.
의미는 분명해서 혼자라도 좋으니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라는 것이다.
「못해! 망할 놈의 100둔짜리 덩치가 저 밖에서 문을 막고 서있다고!」
손잡이를 잡고 좌우로 돌렸지만 덜컥거리며 반항했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으나 요지부동이다. 다급해진 나머지 어서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극 상은의 손님 맞는 법이라는 건 안쪽에서 칼부림이 나도 두 다리로 꽉 버티고 서서 그 누구든 못 나가게 막는 거였다. 어린애의 목소리로 명령해봤자 귓구멍을 막을 뿐이었다.
『망할!』
도로 문을 등지고 서서 앞을 보았다.
언제까지나 락연이 방패막이가 되어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점차 아래로 미끌어졌다. 타평의 눈이 퍼렇게 인광을 뿜어댔다. 나는 그대로 숨을 삼켰다.

『락연! 문제야. 문을 열 수가 없어.』
『이 자를 막으면서 동시에 제가 문까지 열 수는 없단 말입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짐승처럼 밀어붙이고 있는 타평을 막는 것도 한계였다. 찔리고 베인 상처는 이제 여덟 곳이 넘어가고 있었다. 각각의 상처는 매우 깊어서 등 뒤에까지 붉은 얼룩이 빠르게 번져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문이 열리지 않으니 힘 좀 써보라고 요구하는 건 옳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로막고 선 물렁살 덩치를 어떻게 설득하란 말인가.
주먹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잊고 문짝을 반복해서 때렸다.
설득이 안 된다면 쓰러뜨려야 했다. 하지만 무슨 재주로? 문짝 건너편의 사람을 나더러 무슨 수로 제압하라는 건가.
『락연! 문제야. 저 밖에서 물렁살 아저씨가!』
『뭐라도 좋으니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이쪽에서 살기를 최대한 내뿜어 건너편에 있는 사람을 제압하는 것이다. 가능은 하지만... 실행에 옮기고 싶지는 않다. 물렁살을 쓰러뜨리기 전에 요괴인 락연이 민감하게 반응할 거다. 그렇게 되면 나중까지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되어버린다. 아니, 그저 골치가 아팠다 - 라는 말로는 안 끝난다.
머뭇거리자 락연이 외쳤다.
『해요!』

두 팔을 문짝에 대고 이를 악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암흑의 천지였습니다. 두 눈을 감아도, 떠도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눈으로 어둠이 천천히 내려왔다.
끝없이 펼쳐지는 건 죽음이 내려온 땅. 거기선 풀벌레마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귀에서 지잉, 이명이 울렸다.
생명 있음에 저주를 내렸으니 나의 외침을 뼈에 새기십시오. 무로 돌아간 민둥산. 잿더미가 되어버린 산하.
눈을 감아도, 떠도 암흑. 영혼의 껍질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려... 살아도 죽어도 안식은 없습니다.
이 어둠을 느낄 수 있습니까? 당신의 눈에 텅 비어버린 고요의 세계가 보이십니까?

강하게 생각하며 암흑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죽어가는 용. 죽음을 부르는 용. 멸망당한 대지. 생명을 잃은 고향.
그리고 나 자신도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이마와 눈두덩이가. 그리고 뺨이. 더 아래까지.
사악하고 불결한 것. 들불처럼 번져나가 저주는 계속하여 확산한다.
그렇게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검은색을 만들어 낸 나는 문 건너편으로 투사시켰다.

《그. 둬!》
락연의 몸뚱이가 펄럭펄럭 소리를 냈다. 그는 심히 괴로워했다. 상처 탓은 아니었다. 내가 심연에서 끄집어 올린 오랜 기억 속의 어둠 때문이었다. 그것은 맹독이었다. 숨 쉬기 어려울 지경으로 공기가 무거워지면서 그의 동공이 세로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뾰족하게 보이던 치아는 순식간에 맹수의 송곳니처럼 길게 자라났고 턱은 벌어져 큰 바위라도 삼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어둠은 불경스러운 것들의 머리 위에서도 권능을 행사했다.
이어지는 건 비명이다. 다만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타평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문 건너편에 있는 사내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지른 건지도 모른다. 죽음은 만물에 공평하다.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아이를 밴 여자와 사산한 여자, 새끼를 기르는 짐승과 어린 짐승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 그것들의 종착지.
불결하구나, 불결하구나.
무언가를 뱉어내듯 입을 벌렸다. 겨우 이 정도의 어둠에 머리가 몸뚱이에서 분리가 되는 기분이다. 죽음이 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영혼마저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그곳으로 끌려가려 했다. 중력 무중력 다시 중력. 심연에서 잠들어 있던 외눈박이가 눈을 뜨기 일보 직전이었다.
《깨어나선 안 된다.》
그 눈알에 손을 대어 서둘러 눈꺼풀을 닫았다.

체중을 실어 문을 쳤다.
《이 문에서 비켜나! 어둠에 닿고 싶지 않다면 비켜! 어둠이 삼키러 온다. 재앙이 온다. 비켜!》

내 뒤에 선 락연의 몸이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마냥 튕겨 올랐다. 그의 등이 혹처럼 부풀어 오르는게 보였다.
식칼을 쥔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더 이상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울부짖음은 이제 절규로 변한 상태다.
이 혼돈은 내가 저지른 것이다. 저들의 영혼에 생채기를 냈다. 오물을 뒤집어 쓴 타평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그의 눈은 흰자위밖에 남지 않았다. 침이 뚝뚝 흘러 탁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모든 백성을 참살한 왕이 있었다. 모든 생명을 전부 죽이려 한 용이 있었다.
나는 그 대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대들은 그 답을 알고 있다.

드디어 문이 빼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겨우 두세 발자국 도망치고 바닥에 쓰러진 덩치가 보였다. 사내 또한 입으로 거품을 뿜고 있었다. 충격으로 심장이 멎은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나는 락연의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기를 쓰고 걸었다. 안 된다. 무리다. 락연의 왼 팔이 길게 늘어져 괴수의 커다란 앞발처럼 변해갔다. 무게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이 와중에 날이 부러진 식칼을 쥐고 타평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우리들 뒤를 따라 나왔다. 무릎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음에도 의외로 속도가 빨랐다.
「도망쳐야 하는데.」
락연의 몸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는 달리 손가락 하나 까딱이질 않았다.
최후를 예감하며 락연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틀렸어! 끝장이야!」

Posted by 미야

2015/07/28 10:13 2015/07/2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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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어 발바닥이 화끈거릴 무렵에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소극 상은은 그 명칭에 깨어날 소(蘇)에 이길 극(剋) 글자를 사용했는데 어쩐지 그 직관적 인상은 작을 소(小,) 적을 소(少,) 그것도 아니면 푸성귀 소(蔬) 글자와 많이 흡사했다.
간판만 컸지 건물은 세로로 길죽한 2층이었다. 과거에 동대륙에서 거래하던 오남 상회와 비슷한 걸 상상했다가 직접 눈으로 그 크기와 규모를 보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물론 나의 잘못이다. 사과를 손에 들고 자두의 맛을 상상해서야 쓰겠는가. 두 가지 과일 모두 붉은 껍질을 가졌지만 크기도 다르고 그 향과 달기도 차이가 있다. 값비싼 비단을 필두로 각종 장신구와 금붙이를 다루던 오남은 큰 배만 세 척을 소유한 거대 상회였는데 그 역사만 300년이 넘었다. 그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상회를 떠올리며 지역 상은의 번지르르함을 기대했으니 전부 나의 불찰이다.
『이곳인가요?』
『맞는 것 같아.』
나는 증서에 적힌 이름과 건물 규모와는 맞지 않는 덩치 큰 간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돈을 거래하는 장소인 만큼 출입구와 창문에는 단단한 쇠붙이로 두껍게 격자 장식을 만들어 달아 금품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내부를 지키고 있었다. 사설 경비원으로 짐작되는 자도 한 명 있었다. 다만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자는 아니어서 덩치만 컸지 물렁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자세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법이다. 경계하며 출입구 주변을 계속해서 왔다갔다 움직이는데 걸을 적마다 어깨가 크게 흔들거리고 보폭도 크기가 제멋대로다. 뒷꿈치를 끌고 걷는 버릇도 있었다. 건달이 달려들면 그럭저럭 힘으로 제압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이상은 무리다. 옆구리에 찬 검은 그저 장식이다. 뽑아서 실전으로 휘둘러본 적도 없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이쪽에서 먼저 눈인사를 하자 긴장하여 험악해졌다.
『무슨 용무요.』
그러면서 내가 아니라 락연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어떻게 요리하여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눈빛이었다. 이 자는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고객이 아닌 강도라고 가정하라 사전 지시라도 받았나? 그렇지 않고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의 옷차림이 거부감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락연은 아무리 봐도 귀족이 아니었고, 재산이 많은 중인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며, 나야 빌려 입은 옷이라 그 형상이 몹시 꾀죄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는 계속해서 락연을 물고 늘어졌다.
『무슨 용무라고 묻지 않았소! 대답하시오.』
『말씀하시는 대상이 틀렸습니다. 이자는 동행하는 입장일 뿐이고 용건이 있는 쪽은 접니다. 본가에서 맡긴 돈을 찾으려고요. 그러니 저를 보고 말씀하시지요.』
그제야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내 말을 전부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더러운 벼룩을 찾으려 했다. 그나마 손에 증서를 꺼내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후딱 내쫓으려 하였을 것이다.
『이름을 말하시오.』
여기서? 길바닥 한 가운데서? 그런 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니던가.
나는 의아해하며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지리가 가의 안즈라고 하는데요.』
가만가만 눈치를 보다 다음으로는 머리에 쓴 약식 하리건을 벗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찰라, 사내가 턱짓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라 시늉을 해보였다.
나와 락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좁게 솟은 건물의 2층을 주시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요? 엄청 갑갑하게 만들었네요.』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게 만들어진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비좁은 비탈 통로가 나타났는데 경사가 가팔라서 계단이라기 보다는 흡사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구조였다. 거기다 양팔을 조금 펼쳤을 뿐인데 양쪽 벽이 모두 만져졌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낭패다. 한 명은 벽에 코를 대고 서서 까치발을 한 뒤에 최대한 숨을 들이마셔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봤자 엇갈려서 지나간다는 건 무리다.
『돈 찾으러 왔다가 성질을 내고 다 부수고 가겠어요.』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안 좋아. 비움토에 있는 유명한 공성이 이런 구조를 하고 있었지.」
그곳은 공략이 불가능한 불패의 요새였다. 올라가는 통로가 비정상적으로 좁아터진 관계로 병사가 한 명씩 진입해야 했는데 방어하는 입장에선 올라오는 족족 기다란 창으로 찌르기만 하면 되었으니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나중엔 쌓인 시체 때문에라도 내부 깊숙한 곳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나가려면 동료의 시신부터 치워야했다. 그러다 뒤에서 출입문이 닫기기라도 하는 날엔 좁은 통로에 낀 병사들은...
『덫 안에 갇힌 쥐 신세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예의 물렁살 경비원이 등 뒤에서 쿵 소리가 나게끔 출입문을 걸어 잠궜다.
《빈사국에서 온 손님이다! 손님 맞아라!》
락연이야 사람이 아니니까 얼굴색이 변할 일이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달라서 그 즉시 하얗게 질려버렸다.

『함정이었어! 락연! 도로 내려가야 해!』
『에?』
내 뒤에 선 락연은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도련님, 저 위에서 용무를 보셔야 하잖아요.』
『함정이라니까!』
망할 놈의 아버지. 역시 내 편지를 읽고 거기에 대한 답장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덫으로 유인하고는 날 잡으려 한 거였어 - 뒤돌아서 락연의 머리와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서둘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악, 악! 서둘지 말아요, 그러다 넘어진다니까요.』
『불평할 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서둘지 않으면 죽어!』

빈사국에서 온 손님이라는 말을 듣고 2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가 통로의 끝자락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 탓에 새카만 윤곽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오른손에 식칼을 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식칼?!」
이 상황에서 식칼은 또 뭐냐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가 식칼을 쳐들고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쿵쾅거리며 계단이 울리는 소음과 신음, 심장이 뛰는 소리, 삐이 하고 울리는 이명 - 찰라와도 같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삼킨 채 어둠 속에서도 반짝임을 보이는 금속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생선을 다듬는 칼이다. 시장에서 싼 가격으로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허접한 물건이었다. 단, 사용한 적이 없는 새 칼이었다. 손잡이에서 나무향이 진하게 났다. 그건 비릿한 생선기름이 묻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의미했다.
여전히 식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어둠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잔뜩 일그러지고, 눈은 크게 벌어졌고, 잔뜩 주름이 졌고... 소금기가 번져 입술은 타버렸다.
『타평... 너냐.』

한심한 기분이었다.
왜 도망치지 않은 거냐. 어째서 그 숲에서 숯을 굽는 마을을 향해 도망치지 않은 거냐.
여전히 너에게 사명이 남았느냐.
아버지의 명령 따위가 뭐라고. 종놈이면 종놈답게 다 내려놓고 도망쳐도 되는데. 왜 너는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야. 지리가 가문에서 넌 쓰고 버리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아버지도, 핏방울 하나 섞이지 않은 어머니도, 배다른 동생도 네게 이걸 강요할 권리는 없어.

하지만 넌 기쁜 마음이겠지.
주인나리께 충성을 바치는 네 자신을 그토록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쓸.데.없.어.

『안즈 도련님!』
나를 보호하기 위해 락연이 내 몸뚱이를 밟고 뛰어넘으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의치 않자 락연은 팔을 길게 뻗어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그걸 나로부터 밀어내려 기를 썼다.
『안즈 님!』
사람의 체중까지 실린 칼날이었다. 근육과 신경이 잘려 순식간의 락연의 손은 너덜너덜해졌다.
체액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머리와 얼굴을 향해 확 흩뿌려졌다.
『넋 놓고 있지 마! 넋 놓고 있지 말라고! 안즈 님!』
그곳은 이미 훌륭한 개미지옥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25 11:07 2015/07/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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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보드 A/S 마치고 돌아옴. 지화자! ※

요괴보다 더 요괴 같다...라.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로 당겨진 미세한 근육이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쑤셔왔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확실히 요괴다. 혈관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도 이래선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인 어린아이의 얼굴은 흡사 솜씨 뛰어난 장인이 나무를 깎아 만든 훌륭한 가면처럼 보였는데 입가에 그럴 듯한 미소가 걸렸음에도 따스함은 쌀알 한 톨 만큼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그럴 듯하게 흉내를 내고 있을 뿐, 얇은 껍질을 벗겨보면 그 내용물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마음도 없고, 감정도 없으며, 오롯이 남은 것은 모방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장난치듯 활짝 펴보았다.
순식간에 미소가 지워지고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나타났다.
내렸던 손을 움직여 다시 얼굴을 가렸다가 또 한 번 활짝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웃고 있는 안즈가 유리창에 비쳤다.
어느 쪽이 나일까.
어쩐지 둘 다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나조차 모르는 어딘가에 있는 걸까.

가게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종업원이 하던 일을 멈춘 채 이쪽을 응시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것으로 보아 헷갈려하는 눈치다. 잘 만들어진 두 개의 가면을 빠르게 바꿔 쓰는 사람이 밖에 서있는데 키를 보면 어른도 아니고 어린애다. 피로함에 허깨비를 보았다고 여겼던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손으로 주물러댔다.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사내는「아무래도 잠이 부족했었나봐」혼잣말했다.

그 길로 가게를 지나쳐 큰 길을 향해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락연은 내가 따라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며 제자리에 서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의외였다. 저 혼자서 가버릴 기세였음에도 그가 움직인 거리는 실제 얼마 되지도 않았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 탓일까,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나를 뭘로 보는 거에요. 나는 친구를 혼자 두고 가지 않아요.』
이제는 눈을 휘둥글 뜰 차례였다. 친구라니. 설마, 말다툼 비슷한 걸 했으니 친구가 된 건가.
『친구? 너와 내가?』
『친구죠.』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최소한 인간의 관점에선 지금의 너와 나의 관계를 친구라고 하기 어렵다고 본다만.』
『그런가요?』
『요괴의 관점이라면 잘 모르겠어. 네가 말해봐. 너와 나는 친구인 거냐?』
락연은 여전히 불쾌한 감정인 것 같아 이런 질문을 던지는게 매우 불편했다.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 입에 꿀꺽 삼켜진다거나... 아니면 야밤에 습격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일지도. 동무가 되자 말을 꺼내는 순간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상대는 요괴니까.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리는 징검다리를 지팡이로 쿡쿡 찔러보는 기분이다. 잘못 쳤다가 뒤집어지는 날엔 골탕을 먹는 건 온전히 내가 될 터인데 - 샛강은 건너가야 하고, 징검다리의 품질은 의심스럽고. 차라리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첨벙대며 들어가는 편이 속편하려나.

가만히 코를 문질렀다.
『친구가 뭐라고 생각하지? 락연.』
『글쎄요... 관심이 가는데 먹고 싶다는 충동은 생기지 않는 거랄까.』
나도 모르게 숨을 엇박자로 쉬고 말았다. 야, 인석아! 그렇다면 선택지는 걍 하나로 정해져 있는 거잖여!
엉뚱한 방향의 벽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우린 친구인 거겠지. 그래, 우린 친구야.』
『분명 친구인 거에요. 이렇게 안즈 님 얼굴을 보니 식욕이라는게 싹 없어지니까.』
이봐. 그건 재수 밥탱이라는 표현이라곳! - 인간은 보통 그런 말을 친구가 아니라 왕 싸가지에게나 한단 말이다!
속으로는 난리법썩 아우성을 쳤으나 겉으로는 평온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래. 이제부터 우린 친구다.』
안즈로 태어나 처음으로 - 반강제적으로 친구 선언을 하고 있음에도 차마 락연의 눈을 볼 용기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벗이라는 건 뭘까. 
「마음이 닿는 거겠지. 아니면 닿고 싶어 하는 거라던가...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벗은 달과 같은 것이다. 환하게 저 하늘에 떠있으니 가슴이 떨리지. 닿고 싶어 애절해지고.」
시오재의 친구였던 인간은 그렇게 정의했다.
「미묘하게 틀린 것 같은데요. 그건 연인이잖습니까, 폐하.」
「뭣이?! 너는 달을 보며 애인을 떠올린다는 거냐?」
「보통은 그렇지요.」
「괘씸하군. 그렇다면 시오재, 오늘부터 넌 달을 보는 거 금지다. 이건 명령이다.」
늦은 저녁, 술을 마시면서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과음으로 이미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는 꼿꼿해서 지금까지 마신 것이 술이 아니고 우물에서 떠온 맹물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억지가...」
「잔이 비었다. 따라라! 불충!」
나는 무릎걸음으로 슬그머니 술상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이때 녀석이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벌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 미묘한 간격에 착오가 생기면 후환이 두려워진다.
「적손. 오늘은 그만 드세요. 건강에 나빠요.」
「너는 내 친구잖아! 그럼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지! 안 그래?!」
「송구하옵니다.」
「이 불충아! 거기서 왜 사과하는 거야. 너와 내가 진실로 친구 사이가 맞느냐?!」
「최근에는 저도 헷갈리고 있사옵니다. 제가 폐하의 친구가 맞나요?」
친구. 우정. 사람의 마음.
나는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관절 친구란 무엇이옵니까. 폐하가 생각하시는 벗이라는 건 어떤 것인지요.」
그는 울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술잔을 쥔 손이 어느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를 찌푸렸다.
「자꾸 묻지 마. 그딴 거 몰라! 알게 뭐람.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지금부터 나중까지 내 옆에 있어주는 거야.」
「멀리 있어도 저는 폐하의 친구입니다.」
「하지만 닿지가 않아... 닿지가! 벽지 산간 골짜기에 처박혀서, 날 만나러 와주지도 않는데, 차라리 저 하늘의 달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 이렇게 어렵게 만났는데 술을 따르라는 소소한 청도 단칼에 거절하고, 가면 같은 얼굴로 웃기만 한다... 불충아, 답하여라. 너는 왜 웃느냐. 이런 내가 재밌느냐?!」
「설마요. 술주정 구경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호오, 그럼 지금 내가 술주정을 하고 있다는 뜻?」
말실수를 했음에 혀를 깨물었다. 벽은의 일개 관리가 대제국의 황제더러 술주정을 하고 있다 탓했다.
가늘어지는 눈매에 긴장하며 가만가만 말을 골랐다.
「술주정이라니오. 비슷은 하지만 아닌 듯하옵니다. 그냥 뭐랄까, 약간만. 그러니까 요만큼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 닥쳐.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술주정을 해 보일테다. 그러니 각오하라고?」
「아이고, 적손. 살려주세요.」
「손바닥 싹싹 빌어도 늦었어.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는 날이다. 그렇게 알고 내가 주는 잔을 받아라. 이 또한 명령이다. 그러니 쭈욱 들이키고... 옳지.」
진실로 벗이라는 건 뭘까. 어떤 관계일까.
대낮에도 달은 하늘에 떠있다. 하지만 햇살이 강한 탓에 사람의 눈으로는 한 낮의 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봤자 닿지 않는 건 마찬가지. 어둠 속에 떠오른 보름달이나, 보이지 않는 대낮의 달이나... 우정이라는 건 결국 높은 장소에 걸린 허상에 불과하다.
흔들리는 술잔 속으로 달이 떠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도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23 15:25 2015/07/2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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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7/23 18:42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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