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그걸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거라 여긴 내가 바보다. 머리를 흔드는 단순한 몸짓을 취하는 대신 자세한 설명을 해줬어야 했다. 최소한 머리 위를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주던가, 주위를 둘러보라고 권하던가.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건 맹해빠진 나와는 달리 기척에 예민했고, 거기에 반응하는 몸동작 또한 기민했다는 거다. 갑자기 몸을 빙글 돌리더니 들고 있던 우장을 반쯤 접었다가 우리가 대체적으로 눈 깜짝할 사이로 인식하는 속도의 대략 다섯 배 빠르기로 접었던 우장을 도로 펼쳤다. 그냥 펼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우매한 내 눈에도 기라는 걸 흘려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장 표면에 소복이 내려앉았던 빗물이 삽시간에 작은 폭탄이 되어 빠르게 튕겨나갔는데 그걸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입장에선 빠르게 날아오는 무수히 많은 돌조각에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들었을 거다. 나무 표면에 생채기가 생겼을 정도다.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었을 그.것.이 끼에엑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저건 뭐지. 털 빠진... 원숭이?』 어두워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 관계로 린청은 처음엔 그것을 원숭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곧 의문이 생겼던 것 같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이라고 하기엔 그 기척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던 까닭이다. 이마를 찌푸린 소년은 접은 우장을 흡사 검처럼 겨누며 어둠을 응시했다. 그것의 정체가 요괴일지 모른다는 가정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산에서 내려온 들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종류라는 건 제대로 인식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놈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서서히 뒷걸음질 했다.
『이거 영 살벌하군. 저런 거에 쫓기고 있었던 거야?』 『후반엔.』 『그랬구... 응? 지금 뭐라고. 후반?』 그럼 전반엔 네가 저것을 쫓고 있었다는 거냐 - 힐끔 돌아보는 소년의 눈초리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해도 확실히 하자. 어느 쪽이야, 네가 저걸 노리는 거냐. 아님 저것이 너를 노리는 거냐.』 답변이 곤란했다. 『그게... 음. 그러니까. 처음엔 내가 먼저 쫓고 있었던 건 맞는데... 암튼 복잡해.』 『이 녀석 봐라. 여기서 어떻게 복잡해질 수가 있어!』 어쨌든 멀리 물러나는 것이 우선이다. 버럭 대마왕이 고함을 질러대든 말든 계속해서 머리 위를 조심하며 길을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빠르게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절룩거리며 정신 사납게 각기춤이나 추었다. 『틀려. 그쪽은 여학생부로 가는 길이야. 여인네들 숙소로 가서 어쩌려고. 이쪽이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없이 우장을 완전히 접은 그는 턱짓으로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부축의 의미로 내 팔을 안으로부터 감싸 쥐었다.
이제 린청은 저것의 종류가 과연 야생동물이 맞는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는 않았으나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멀리서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을 피해 도망쳐야 옳다. 거기다 이쪽은 혼자가 아니고 일행이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리는 기세다. 그렇다면 ① 녀석의 배가 어지간히 고팠거나, ② 품고 있던 새끼를 사람이 건드려 화가 단단히 났거나, ③ 그것도 아니면 동물로서의 본능이 망가진 경우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굶주렸다고 가정하긴 좀 그렇다. 사람을 먹거리로 삼아야 할 정도로 천재지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린청은 나에게 다짜고짜「원숭이 새끼를 건드렸느냐」따져 물었다.
『나를 뭐로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막 쓰다듬고 그랬던 거 아니야?』 『이 몸에게도 상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에게 멋대로 접근하거나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선 얘기가 틀려지잖아. 네가 먼저 저 동물을 쫓고 있었다며.』 분명 그랬긴 하다. 『그래. 처음엔 내가 저것을 쫓았지.』 『어째서? 저것 옆에 붙어 있는 새끼 원숭이가 귀여워서는 아닐테고.』 『새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나도 알아.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그러면서 린청은「새끼는 둘째고 저게 암컷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
『그게... 확인을 해야 했어.』 『무엇을?』 『복잡하다고 했잖아. 설명하자면 길어.』 맙소사. 자초지종을 전부 털어놓기엔 장소가 너무 부적절했다. 그러니 이를 어쩐다, 신음하며 허리를 구부정히 했다.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선 린청은 무릎을 심하게 아파하는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 어둠을 확인했다. 느껴지는 기척이 있는지 소년의 표정이 심각했다. 무의식중에 허리춤에 달렸을 검을 더듬어 찾았지만 이사실로 와서 검이라는 걸 소지한 적이 없으니 불필요한 동작이었다. 『쳇.』 비를 피하는 용도로 제작된 우장은 겁을 줘서 야생동물을 쫓기에 쓸모가 있긴 하다. 돌진해 오던 멧돼지도 활짝 펼쳐진 우장 앞에선 덩치가 큰 상대를 보았다고 착각하고 멈칫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덤벼드는 것이 야생동물이 아니라면 이런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본능이 아닌 것을 따르고 있다면 얘기가 한참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청화국 같은 나라에서 특수한 목적을 갖고 개를 훈련시킨다고 하더군. 그와 비슷한 걸까?』 나는 차마 저것의 정체가 동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제국에서 저런 걸 키우다니...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되었군 그래.』 계속 들고 있어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라고 판단한 소년은 우장을 땅바닥에 버렸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저걸 멀리 떼어 버리는게 우선이니까.』 주먹을 쥐고 공격 자세를 취한 린청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의 날숨, 후읍. 두 번째 들숨, 후읍, 그리고는 들입다 나무기둥 한 가운데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기세가 제법 흉악했기에 녀석의 손이 망가지거나, 아니면 나무줄기에 주먹 모양으로 구멍이 뚫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큰 북의 가죽을 때리는 팡,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나무를 어떻게 다뤘기에 북처럼 울렸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속하여 가냘프게 울리는 진동이 이어졌고, 그 떨림은 가지 윗부분까지 곧장 뻗어나갔다. 위로 뻗어갈수록 진동의 폭이 커졌는데 제법 높은 부위까지 이르자 잔가지들이 미친 돌바람을 맞은 양 마구 요동을 쳤다. 그리고 줄기는 마침내 휘어짐을 견디다 못해 반으로 짝 갈라져 - 《케엑!》 그 위에서 맨발로 앉아있던 것이 기겁을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마침 비가 내렸기에 망정이지.』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린청?』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지? 그것과 비슷한 거야. 나무가 젖어 있어서 다행이었어.』 내가 봤을 적엔 그것과 이것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지만 본인 입으로 비슷하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릴 뿐이다. 『저러고도 끝까지 안 달아나면 어째야 하나 걱정했는데.』 집어 던졌던 우장을 도로 주우면서 이 정도로 끝나 천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보아하니 놀라서 멀리 튄 것 같군.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 다시 돌아온다는 가능성이 아주 없지 않으니까. 이대로 얌전히 떨어져 나가면 좋으련만...』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 안즈. 우장을 쓰면 시야가 가려지니 주변을 경계하려면 이걸 쓸 수 없겠다. 미안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아.』 『난 상관없는데.』 『네 안색이 영 괜찮지가 않아 보이니까 하는 말이야.』 이 마당에 내 얼굴색 따위가 뭐가 문제람. 그보다 그것으로부터 이세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점이 뭇내 아쉬울 뿐이었다.
이세(理勢). 젖은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가운데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녀석의 이름이었다. 나를 하나뿐인 친구라고 치켜세웠으면서 동시에 불살라 죽이고 싶으리만치 증오했다. 이사실 제국의 272대 황제. 신룡의 적손이라고 불리는 지고의 존재. 나는 그런 존재로부터 맹목적인 증오를 닮은 사랑을 받았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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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감각이 둔해졌다. 어쩐지 같은 자리를 반복하여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피로감 탓인지 이 나무가 저 나무처럼 보이고, 저 나무가 이 나무처럼 보였다. 특정 위치를 짐작하게 해줄 지표물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지속적으로 그 모양을 바꿔갔다. 덕분에 방금 전에 지나쳤던 상수리나무가 바로 앞에서 보이고 있다. 착각이라 여기면 그만이겠지만 다시 그 상수리나무가 옆에서 보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당혹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저 위에선 응축된 물방울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대신 회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뻘로 변해가는 진흙이 발을 삼키려 했고, 물을 배불리 먹은 수풀이 그 키를 한 뼘이나 더 높게 키우려 했다.
《흐, 흐, 흐.》 이 와중에 녀석의 키득대는 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른쪽에서 들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엉뚱한 방향으로부터 반사된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다. 『야! 이봐~!!』 내 목소리 또한 되울림이 심했다. 이 상태에서 소리만 가지고 방향을 짐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손등으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주위를 살폈다. 낭패다. 여전히 방향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번에는 어둠이 내려앉은 수풀 속에서 기이하게 반짝이는 짐승의 눈빛이 나타났다. 토끼나 사슴처럼 온화한 품성의 동물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해가 지고 나서, 그것도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풀을 뜯어먹으려고 어슬렁거리는 사슴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외궁의 한 부분인 이곳에서 사람을 헤치는 늑대 무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닐 리는 없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가끔씩 황궁 사냥터로 이용되는 주취에서 먹이를 찾는 멧돼지가 내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곰이 목격된 적도 있어서... 여기까지 이르자 잡생각이 싹 달아났다. 목표 하나만 바라보며 쫓다 사지 한 가운데를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다.
숨을 삼키며 일단 멈추어 섰다. 적손이 미쳤다 - 여기에 대한 사실 추궁은 나중이다. 뜀박질을 멈추자 잊고 있던 무릎의 통증이 잘 벼려진 도끼날처럼 피부를 사정없이 찍어댔다. 한숨인지 들숨인지 모를 호흡을 가쁘게 내뱉으며 붉게 핏물이 든 무릎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이런데도 나, 정말 무식하게 움직이고 있었구나. 손가락으로 조금만 눌렀을 뿐인데 비명이 나오려 했다. 자갈로 짐작되는 뭔가가 피부 안쪽에 박혀있다. 곪는 건 기정사실이겠다. 허나 지금은 바지를 걷어 올려 상처부위를 직접 볼 짬이 없다. 『제기랄.』 그보다는 피 냄새가 짐승을 가까이 부를까 걱정스러워졌다. 내리는 비가 냄새를 희석시켜 주겠지만 짐승의 코는 인간의 그것보다 몇 곱절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진흙을 들어 바지 위에 덧발랐다.
퉁-
기분 나쁘게 히히 웃는 소리와 같이하여 부러진 나뭇가지가 코앞으로 떨어졌다. 기왓장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큰 폭풍우가 부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굵은 나뭇가지가 멋대로 부러질 리가 없다. 사색이 되어 앉은 자세에서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그보다 더 굵은 조각이 또 떨어졌다. 재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깨를 맞았을 터, 일어서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늙은 원숭이의 얼굴이. 『당장 내려왓! 목을 졸라줄테니!』 《싫습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여기까지 올라와 보시던지.》 저 위에 자리 잡은 그것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재차 발을 굴렀다. 장난이 아니다. 범상치 않은 와지끈 소리가 들리자 나무로부터 허겁지겁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어른 허벅지 두께의 가지가 갈기갈기 찢긴 모양새로 낙하했다.
《약해.》 그것이 중얼거렸다. 《약해빠진 주제에.》
궁정악사 누박기가 겁을 집어먹은 것도 다 까닭이 있었다. 저 정도의 괴력이라면 유령이 아니라 산 사람의 다리도 어렵지 않게 몸통에서 떼어낼 수 있을 터, 나도 모르게 히익 소리를 내며 현실을 직시했다. 무슨 생각에 빈손으로 저것을 쫓아왔는지 모르겠다. 마냥 소리를 지른다고 제압이 될 종류도 아닌데. 막연하게「나를 헤치지 않을 것이다」믿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위로부터「손을 대지 마라」명령이 있었다지만 요괴의 부족한 이해력으로는 그 명령을 단순 무식하게「손만 대지 않으면 괜찮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지금처럼 부러진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는데 어쩌다보니 그만 인간이 머리를 맞았습니다, 이러면 속수무책이다. 깨닫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그만해! 이곳 루은에서 신룡의 의지 없이 인간을 죽인 요괴는 큰 벌을 받는다! 그저 실수였다고 해도 말이다!』 위를 흘끔거리며 그렇게 외쳐 나를 보호하려 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안도감이 드는 대신 망했다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수풀을 좌우로 헤치고 길을 찾았다. 진흙에 발이 주룩 미끄러져 걷는 속도가 아까보다 더 느려졌다. 비웃는 목소리는 코앞으로까지 따라붙었고, 덕분에 안 하던 실수까지 저질러 동서남북 위치를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북쪽이라 함은 언덕의 높은 곳을 의미하던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늠하여 동쪽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저게 건물의 불빛일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미칠 노릇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았다고 가정하고 현재의 내 위치를 상상해봤다. 이쪽으로 계속 걸으면 아마도 현선당이 나올 것이고... 아니다. 이 언덕의 기울기는 그 짐작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파르기가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 영문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 왼편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동시에 큰 돌이 떨어졌다. 아니, 단단한 돌이라고 생각했지만 흙속에 파묻힐 적에 내는 소리가 달랐다. 돌처럼 무게가 있으나 표면이 단단하지 않고 물렁거린다. 적당히 탄력이 있고, 떨어지는 순간 넓게 퍼졌다는 느낌이다. 흡사 동물의 사체와도 같은... 에잇, 돌아볼 때가 아니다. 떨어진 것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움직이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언덕을 오르는게 끝나고 이제 막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뛰어서 저 아래까지 내려갈 자신은 없다. 신발을 벗어 두 손에 쥐고 일부러 미끄럼을 탔다. 모양은 흉하지만 이 방법을 쓰는게 속도가 더 붙는다. 물론 안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처음에는 분명 똑바로 앉아 미끄럼을 탔는데 어느 순간 엎드린 모습으로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옆으로 몸을 비틀었더니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숨을 삼키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팔을 위로 뻗어보았다. 그러자 튀어나온 뭔가에 엄지손톱이 걸리면서 손톱이 절반쯤 위로 들떠버렸다. 『아아악!』 겨우 손톱인데 비명이 나온다. 눈물도 나왔다. 인간의 몸은 참으로 약해빠졌다.
울음을 삼키며 언덕을 전부 굴러 바닥까지 당도하고 보니 드디어 자갈이 깔린 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모르겠다. 숨넘어갈 것 같은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좌우방향이 아닌 위쪽을 먼저 살폈다. 더 이상 묵직한 뭔가가 떨어지는 건 사양이다. 그렇게 위쪽을 흘끔거리며 아픈 다리를 질질 끄는데 누군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구냐!』 남성용 우장을 든 자의 체구는 작았다. 주변이 어두워 여기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내 또래라고 짐작할 뿐이다. 어둠은 상대적으로 공평했기에 상대 또한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경계의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정체를 밝혀라. 사람이냐, 아님 짐승이냐!』 심한 말이다. 길이 아닌 곳으로부터 불쑥 나타났다고 해도 두 다리로 서있는데 나더러 짐승이냐 묻다니. 『사람이다.』 그래도 흙투성이 몰골이니 짐승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혹시 또 아나, 저 소년은 안경이 필요할 정도로 시력이 나쁠 수도 있다.
『응? 이게 누구야. 안즈?』 예상 외로 소년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어? 누구?』 『나야, 린청. 나라고. 도대체... 이런 시각에 무슨 일이야?!』 『린청?! 너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어!』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여학생부에 잠시 그곳에... 아니, 것보다. 너, 그 누더기 몰골은 뭐야.』 소년이 보폭을 크게 하여 빠른 속도로 나에게로 다가왔다.
Posted by 미야
2015/08/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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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미친 짓이었다. 비 오는 날 늦은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저 혼자 지붕으로 올라가려다 실족하여 죽다, 향년 열 살.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이 돌연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눈 깜빡하는 순간이었음에도 - 실제로는 눈 깜빡일 새도 없었다 - 여러 가지 잡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중 하나는 이대로 죽으면「너무나 바보스러운 사인(死因)」으로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회자될 거라는 거. 그리고 머리가 먼저 떨어질지, 아니면 다리가 먼저 떨어질지에 대한 여부였다. 아무래도 머리보다는 다리부터 떨어지는 쪽이 살아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니, 것보다 이러면 떡을 잘못 삼켜 죽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와아아앗?!』 외마디 비명과 같이하여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기적처럼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렸... 아니, 나를 잡아챈 건 나뭇가지가 아니고 기다랗게 생긴 손가락이었다. 손등으로는 짙은 갈색의 털이 소복하게 돋았고 손톱은 짧았다. 손의 주인이 원숭이라고 하면 그런가 하고 수긍할 것 같다. 그런 것이 내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 어, 어!』 안심하기엔 일러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물 먹은 천의 바느질 부위가 뜯어지는 소리를 냈다. 옷이 찢어진 길이만큼 내 몸도 아래로 축 처졌다. 위로 당겨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을 질끈 감았다. 충격이 잠시 유예되었을 뿐, 진짜로 떨어진다 - 낮에 달리기를 하다 삔 발목이 낫지도 않았는데 종아리 위에까지 화끈거리는 충격이 삽시간에 번졌다. 『컥......!!』 시커먼 흙탕물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최고로 멍청한 죽음」으로 알려지는 걸 면했다는 안도감은 둘째고 하반신이 활활 타는 모닥불에 통째로 던져진 것 같았다. 신음을 삼켜가며 몸을 똑바로 뒤집으려 했지만 당장은 무리다. 무릎부터 닿아서일까, 바지에 붉게 피가 비쳤다.
《이럴 거라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맨발인데다 원숭이와 유사하게 생긴 손을 가진 정체불명의 그것이 쯧쯧 혀를 찼다. 목소리는 머리 위 높은 장소에서 들렸다. 그것은 바닥으로는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저 위에서 나뭇가지를 밟고 쉬지 않고 이동을 하는지 잎사귀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도 머리를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머리를 다쳤다면 지금보다 더 바보 멍청이가 되었을 테니 그랬다면 정말 슬펐을 겁니다.》 『심하군. 아파 죽겠는데 사람 약 올리는 거냐?!』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먼저 놀렸던 건 그쪽 아닙니까.》 야유하며 그것이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어댔다. 어쩌면 분을 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았던 빗방울이 일시에 좍 쏟아져 내렸다. 사방이 물이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차가운 물이다.
《방금 전 뭐라 하셨죠. 케케묵어 낡은 원망 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뭔가 단단히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쪽이 왜 원망합니까? 원한을 가진 건 이쪽입니다.》 코와 입으로 흙탕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는 걸 알아도 입을 얌전히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과거에 살해당한 건 나다. 엄연히 따지면 내 쪽이 피해자다. 병력을 동원해 건물에 불을 놓고, 무수히 많은 책들과 같이 안에 갇힌 사람들을 전부 불태웠다. 그런 주제에「아직까지 원망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이러는 가해자가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뼛속까지 차가웠음에도 타고 남은 재의 냄새를 맡았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의 환영을 보았다. 불길에 휩싸인 도서관 한 가운데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 곳에 나를 던져놓고. 그 주둥이로 나를 원망한다 하였나.
『네 놈, 생긴 것도 이상한데 머리 또한 정상이 아니구나.』 《말씀하신 그대로 돌려드리죠. 당신... 머리를 얼마나 크게 다친 겁니까?》 그것의 목소리는 졸린 것처럼도 들렸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장가처럼 달콤하진 않았다. 반대로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젠 반병신 취급이구나. 악에 받쳐 나도 이죽거렸다. 『그래. 무너져 내리는 대들보에 맞아 머리가 절반은 날아가긴 했다. 하지만 기억이 잘못되진 않았다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있으시군요. 누가 누구를 불태워 죽였다고요?》 『너희들이 나를!』 원숭이의 손을 가진 것이 큭 소리를 냈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건 나쁜 짓입니다. 적손께서 늘 말씀하셨죠. 당신은 거짓말을 참 잘 한다고.》 『나 말고도 증인은 많아! 적룡군이 벽은국 수도까지 쳐들어와서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는 건 사실이다!』 《국경을 멋대로 넘은 건 사실입니다. 그걸 부정하지 않아요. 인정합니다. 허나 그들은 적손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던 겁니다.》 『보호?! 건물에 불을 지르는게 보호 행위라는 거냐!』 《그러니까 당신 머리가 잘못되었다는 거에요. 불은 밖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끔찍한 속도로 번졌죠. 제대로 기억해내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군 채 불을 지른 건 누구였습니까.》 『뭐?』 무릎이 저리고 아팠다. 그런데 왜 나는 가슴을 손으로 쥐고 있는 걸까.
불. 화재. 불바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짐승의 목소리가 낮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기억에 혼란이 온 모양이군요. 뭐, 이해합니다. 그 정도로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겠죠.》 그럴 리 없다. 결코 그럴 리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온전히 제정신이다. 《미친 사람이 스스로 미쳤다고 인정하는 거 봤습니까.》 원숭이를 닮은 그것이 흐흐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당신은 그저 그게 사실이겠거니 싶은 걸 믿고 있을 뿐이죠. 말로는 케케묵은 원한 따위 전부 다 잊었다고 하면서... 그리고 없었던 일인양 행동하죠.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서. 그러고 죽어버렸어. 그리고 제멋대로 다시 돌아왔어.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말짱하다는 얼굴로 주장해. 본인은 피해자라고.》 기분 나쁘게 키득대며 웃는 목소리는 나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럼 내가 가해자라는 얘기냐!』 제발 이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이러다 빗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 것 같다. 《당연하지. 당신 탓에 적손이 미쳤으니까.》 『지금... 뭐라고?』 《미쳤다고. 껄껄. 한참 전에 사단이 나버렸지. 완전히 돌았어. 신룡이 화를 냈고 대전 한 가운데로 벼락이 내렸다. 여기서 누가 제정신일 수 있지? 너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깔깔. 원한이 없다고? 원념 덩어리인 주제에. 아니다, 내가 원념 덩어리지. 그렇군. 그랬군. 다들 사이좋게 미쳤구나. 그거 좋네. 깔깔.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잘 됐네, 진짜 잘 됐어. 아하하! 그대도 알고 있겠지? 황제가 미쳐 날뛰는데 적룡 외에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 덕분에 아랫것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필사적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후우.》 『돌아와! 이리 돌아와서 날 보며 똑바로 말해, 이 미친 것아!』
하늘을 찢으며 번개가 쳤다. 저 섬광 속에. 저기에. 갑자기 시야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그것의 얼굴이 똑바로 드러났다.
고통을 참으며 어떻게든 일어났다. 이를 악물고 찌르르 울리는 다리를 끌며 웃음소리를 따라갔다. 제대로 쫓아가고 있다는 확인 같은 건 없었지만 이대로 저것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이 아닌 곳을 걸으며 꺾어지려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15/08/28 21:21
2015/08/2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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