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목표물을 뒤에서 껴안고 목을 조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라벽치의 가정은 잘못되었다. 후끈거리는 팔뚝이며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며 하는 느낌은 차라리 처녀를 겁탈하는 치한에 가까웠다.
그래도 뭐라도 해보라며 부추기니까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해본다. 그럼 잘근잘근 밟아볼까, 하지만 뒤로 끌어당겨진 탓에 나는 지금 한껏 까치발을 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치한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신체는 뒷발질을 하기엔 최적화가 안 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계속했다. 덕분에 애초부터 목적이 이쪽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었다.
『그 남자가 널 상대로 강도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도 수상해. 무슨 재주로 폐쇄적인 영업을 하는 소극 상은으로 네가 돈을 찾으러 온다는 걸 알았을까.』
밀착된 자세에서 속삭이며 묻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은의 직원이 증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렸을 수도 있죠.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다면서... 욧!』
이번에는 팔꿈치로 뒤를 힘껏 찍었다. 그래봤자 이라벽치는 약간만 반응했다. 근육이 두꺼운 탓에 유리를 박아 넣어도 개의치 않아할 사내다. 그럼 맨손인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밀착은 더 심해져 목덜미에 닿는 콧김이 덥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뭐,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그런데 넌 아까부터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얘기하는구나.』
대답은 둘째고 일단 살아야겠다. 끙끙대며 팔을 최대한 위로 뻗어 말랑거리는 귀를 잡고 세게 비틀었다.
『아이쿠!』
귀가 떨어질 지경이 되자 이라벽치가 슬그머니 결박을 풀어주었다. 아싸, 성공.
『이게 정말로 안즈에게 도움이 되는 겁니까. 내 판단엔 전혀 아닌데.』
정해진 달리기를 다 마친 후, 제법 거리를 두고 서서 우리 두 사람의 엉겨 붙음을 계속 못 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린청이 그 즉시 쏘아붙였다. 애초부터 제국인인 이라벽치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던 아이다. 그의 눈에는「커다란 짐승 같은 놈이 애를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로 보였던 것 같다. 하긴, 커다란 거울이 옆에 있었다면 나 역시 거울에 비친 우리들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보자보자 하니 아까부터 뭡니까. 팔을 잡아당기거나, 다리를 걸거나, 뒤에서 끌어안거나!』
아직 변성기를 맞지 않은 소년의 성대는 말도 안 되는 영역의 고음처리가 가능했다.
『어쩔 수 없잖아, 호신술을 배우는게 처음이라는데.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한다고. 가벼운 몸싸움부터 시작해 점차 고급 기술로 넘어가야지, 첫 술에 물 위를 걷는 법부터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구차한 변명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그런 식으로 몸싸움을 가르칩니까! 왜 끌어안는 건데요.』
추행범으로 몰린 이라벽치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끌어안은 거 아니다. 가상의 적으로 셈치고 공격한 거야.』
『제가 봤을 적엔 희롱하는 것으로밖엔 안 보이던데요.』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다. 오해야!』
그래도 린청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더하여 면박까지 줬다.
『어쨌든 당신은 그렇게 썩 좋은 스승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방식은 영 글러먹었어 - 메기수염처럼 하얗게 탈색된 이라벽치가 산소를 갈구하며 입을 뻐끔거리자 린청은 얼른 내 손목을 붙잡았다.
『목검을 들 수 있게 되기 전까진 저 남자에게서가 아니라 차라리 나에게 배워. 예당국 련 가의 장남 린청, 다듬어지지 않은 무예 실력이지만 너에게 기초 정도는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다.』
『아니, 일부러 그럴 필요까지는...』
나는 진짜로 이런 걸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린청은 나의 우유부단한 거절을 다르게 이해했다.
『미안해할 거 없어. 신세진다고 생각지 마라. 단지 내가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니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손까지 휘저었지만 이미 안 듣고 있다.
『그럼 첫 수업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기술 한 가지를 가르쳐 주마, 안즈. 적이 멍청하게 굴면서 머뭇거리면 주저하지 말고 눈을 찔러.』
소년은 예고도 없이 검지를 들어 이라벽치의 눈을 푸욱 건드렸다.
『악~! 내 눈!』
『봐, 효과 좋지? 상대가 그 유명한 멸락 장군이라도 꼼짝을 못 하게 된다고.』
남의 눈을 찔러놓고도 속 시원해하는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한참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황금을 입힌 종이로 뒤를 닦을 정도의 갑부는 아니었지만 땡전 한 닢 없던 어제와 비교하자면 부자가 맞았다.
『증서에 적혀진 금액을 받아왔습니다. 것보다... 이 화상아.』
숙희 숙사감대부는 사건 이후 왜 자기부터 찾아오지 않았느냐며 성질을 부렸다. 한가롭게 놀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던 건 아닌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내 모습을 보더니 상황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몰아붙이며 벌컥 화를 냈다.
『안즈 님이 처한 상황이 어떻다는 건 알고 계시는 거 맞습니까? 지금까지 어디서 누구랑 놀고 있었던 겁니까.』
『안 놀았는데요.』
『아이고, 잘도 그랬겠다... 쯧쯧.』
안 놀았다는데 더 화를 낸다. 진짜지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성격 급한 사람만 모이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증서는 절반만 진짜였지만 소극 상은에서 일이 커지는 걸 꺼려했던지 손실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재원 부석상위 앞으로 왔던 편지와 증서를 다시 꺼내와 내 앞에 펼쳐놓았다. 염연히 사건 증거물일 텐데 어떻게 그게 일개 숙사감대부인 숙희 손아귀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먼저 봤던 그 편지가 맞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것들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사납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 여기 놓인 편지의 필체가 아버지의 것이 맞느냐 물어도 대답은 곤란했다. 신분 높은 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은 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있고, 유려한 필체로 대필을 해주는 걸로 밥 먹고 사는 중인도 있는 마당에... 한때 나도 대필을 하는 걸로 생업을 가진 적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다.
『본국에서 가져온 아버님이 주신 글자가 있으시지요?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게 과연 나에게 있던가, 가만 생각했다가 자개 장식이 된「자결 상자」존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물품의 존재를 제3자가 정확히 꿰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숙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 남자라면 쌈지통에 든 바늘 개수까지 전부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양을 봐도 이 남자는 결코 얕잡아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 물건이 숙사감대부의 책상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리고 있자니 숙희가 보일락 말락 고개를 숙였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개인 숙소에서 꺼내온 점을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들겠지만 이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굳이 숨겨야 할 물건도 아닌데요, 뭐.』
『그거 참, 하해와 같은 이해심. 그렇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뚝뚝 끊어지는 이상한 문장으로 양해를 구한 그는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나란히 펼쳐놓고 보니 오싹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부석상위 앞으로 도달한 것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획의 삐침과 기울어짐, 올라감. 줄의 간격과 크기까지 판박이라서 일부러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도출된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숙희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점이 보이는가 보다.
『먼저 부석상위 앞으로 온 편지를 볼까요.』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이 간략한 문장에서 그는 필요한, 이라고 적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자에서 꺼낸 편지에도 운 좋게 같은 단어가 적혀져 있더군요. 여기 이 부분이죠.「네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너의 부족함을 먼저 인식하고 이를 채워줄 이에게 존경심을 보여...」자, 그럼 같이 나란히 두고 비교를 해볼까요. 어때요, 안즈 님이 보기에는.』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았으니까.
『똑같죠. 똑같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마치 습지에 비치는 모양대로 정성껏 그려 넣은 적은 것처럼.』
숙희는 재차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듬지 않은 수염의 까끌거리는 촉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재밌어요, 이건. 마치 도전해 봐라, 주장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