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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엔 이 아가씨를 채용하는 것이 가장 괜찮은 것 같아, 오남. 암산 실력 뛰어나고 외국어 능통이래.』
『어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게 아니라고.』
핀잔에도 불구하고 태영은 혀를 장난스럽게 내밀었을 뿐이다.

「처음엔 엄마 오리를 잃어버린 새끼처럼 보였는데. 이젠 다 컸군.」
환상대륙에서 이곳으로 넘어오고 난 뒤에도 태영은 흡사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말을 잘 했다.
고대 마법의 영향을 받은 거라 짐작은 했지만 오남은 신관이 아니라서 자세한 이치라던가 방식이라던가 하는 건 알지 못했다. 다만 그거 참 편리하군,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래도 한계는 있어 대륙 표준어 이외의 방언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읽기와 쓰기가 불가능했다.
소년은 바짝 약이 올라 자신에게 반쪽자리 선물을 안겨준 신룡의 무신경함을 욕했다.
「내가 까막눈이라니!」
그리고 하얀 색은 바탕이고 검은 색은 글자인 책을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제기랄, 두고 봐. 선행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을 일만 년이나 해온 나에게 불가능은 없어.」
학구심과는 약간 다른 종류라고 생각되었다. 먹고 자고 씻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머리에 띠를 맨 채 하루에 열여섯 시간 이상을 온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입하더니 아동용의 읽고 쓰기 교재부터 시작해 맹렬한 속도로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읽기까지 2개월, 능숙하게 쓰는데 5개월 걸렸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빨랐음에도 그는 표기체계가 온전히 하나인 표음문자였음 딱 한 달이면 가뿐하게 해치웠을 거라며 자랑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병기하여 쓰는 일본도 아니고. 귀족 말쌈이 둥귁과 다른 것도 아니면서 평민들이 쓰는 표기법과 구분하여 쓰다니. 너희들 하는 행동은 참 이상하다. 그래도 뭐, 나름 재밌었어.」
소년은 으스대며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보았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승리를 의미하는 동작이란다.
그렇게 승리를 자축하는 동안 한쪽 코에서는 과로 탓에 시뻘건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오남은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일반 파베 문자로 적혀진 선전물을 대충 훑었다.
피곤에 찌든 경비원이 입에 담았던 두 사람, 에이딜렌과 안나의 이름도 보였다.
그중에서 외국어 실력이 탁월한 쪽이라면... 안나이던가. 에이딜렌이던가.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견과류를 앞으로 자주 먹어야겠다 다짐하며 태영에게 말을 걸었다.
『미인의 기준이 암산 실력과 외국어 능통은 아니지.』
『어쩔 수 없다고, 오남. 여기 적혀져 있는 건 하나같이 미인을 뽑는 내용들이 아닌 걸. 체중이나 가슴 사이즈 같은 신체 크기도 안 적혀져 있고.』
그러면서 태영은 자기가 아는 단위법을 이쪽의 단위법으로 고쳐가며 윗입술을 가만 깨물었다.
『1kg이 대략 2릭스. 1cm가 3시온. 그렇다면 169cm에 49kg 여성은 500so에 몸무게 98rx겠군.』

거기까지만 했음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영은 손짓으로 풍만한 가슴을 표현하며 둥글고 무거운 가슴을 위로 받쳐 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내 기준엔 이 정도가 딱 좋은데.』
『남이 볼까 무섭다, 인마.』
멜론처럼 큰 가슴을 묘사하는 음란한 손을 탁 소리 나게끔 쳐내며 정색했다.
환상대륙에선 비정상적으로 큰 가슴이 미인의 기준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몹시 기괴하다.
『큰 가슴이야 기괴한 쪽이 아니고 로망이지.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오히려 여기서 하는 짓이 더 기괴해.』
맞은 손등이 아프다며 입을 삐죽 내민 소년은 그렇게 주장하며「요리 잘함」이라 적힌 선전물 글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미인은 요리를 잘 합니다. 아무렴요. 특제 토마토 소스를 만들 줄 알아야 미인인 거에요.

하지만 오남의 눈에는 그보다 훨씬 기괴한 요소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이 없는 세계에서 자란 소년은 무엇이 이상한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오남. 내 세계에도 왕은 있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할머니 여왕도 있고, 대신관에 필적하는 교황이라는 분도 계셔. 귀족이라 부를만한 유산 계급 또한 존재하지.』
『하지만 텐. 넌 절대계급을 피부로는 그다지 못 느꼈던 것 같아. 그러니 이런 걸 눈으로 보고도 놓치지.』
『내가 뭘 놓쳤다고.』
『보라고, 그녀들은 보모에 과일가게 점원에다 보험사 직원일세.』
『그게 어때서.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오남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환영하오, 미지의 세계를 접하는 순진한 소년이여. 빙빙 돌려가지고는 네가 이해를 잘 못하는 눈치니까 그냥 이렇게 질문할게. 란데가스 제국에서 제1의 미녀는 누구지?』
뜬금 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그야 바르샬롯 황녀지.』
오남은 윙크를 했다.
『정답. 잘 맞추셨습니다. 그럼 제2의 미녀는 누굴까.』
『어... 그건 좀 어려운데. 레이나 카르튼 대공녀?』
『나는 개인적으로 일라이스 후작가의 영애가 더 미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너야 드레스와 장신구를 판답시고 커튼 뒤에서 귀족가의 영애들을 직접 만나보았겠지만 난 아니거든. 난 일라이스 후작가의 영애의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도 몰라.』
『그렇담 카르튼 대공녀는 직접 본 적은 있고?』
『멀리서 딱 한 번.』
『그런데도 그 빨간머리 왈가닥을 제국에서 손꼽는 미인이라 생각한 거야? 수상하군... 어쨌든 좋아. 그럼 제3의 미녀는 누굴까.』
『아~ 씨! 미인대회를 란데가스 제국에서 여는 것도 아닌데 질문이 왜 이따구야. 게다가 3등, 4등, 5등을 가려 어쩌려고. 그래봤자 우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무작정 달렸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남은 희극조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래. 전부 쓸데없어. 어차피 미인대회를 열어봤자 우승자는 무조건 황녀 전하야. 그런데 왜 그런지 아나?』
『그야... 황녀님이 제국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으니까?』
『허허허. 이리 오시오. 환영하오, 순진한 소년이여.』
오남은 재차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태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같은 남자가 어깨를 만지는 건 싫다. 혐오감을 드러내며 태영이 어깨 위에 닿은 오남의 손을 털어냈다.
『이제 알겠어. 그렇다는 건 그 사람의 지위가 곧 미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건가.』
『일반적으로는.』
『뭐야, 그게.』
태영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절대계급이 존재하는 이 세상의 법칙이다.
바르샬롯 황녀보다 더 아름다운 빵 굽는 파티쉐는 있을 수 없다. 일라이스 후작 영애보다 더 빼어난 미모의 가정교사는 있을 수 없다. 제국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어우, 좇 같아. 그렇담 미인대회에 직업이 보모인 평민 출신의 여성이 애써 참가를 해봤자 등수에 들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다는 얘기잖아.』
『맞아.』
그 생김새가 무척이나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태생적으로 그들은 미인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워. 네가 그걸 인정하지 못 하는 건 왕 없는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야.』
『쳇. 저쪽 세상에도 왕은 있다니까 그러네.』
불쾌감을 피력하며 소년이 있지도 않은 날벌레를 쫓는 시늉을 했다.

Posted by 미야

2015/09/21 21:53 2015/09/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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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차원이동물이면 주인공은 김태영이 되겠지만 정체는 괴기물이에요... ※


몇 년 전, 차가운 바다로 떨어진 충격으로 이후 태영의 기억은 뒤죽박죽으로 섞인데다 일부가 누락되어 버렸다.
자신에게 연년생 누이가 있다는 건 기억한다. 그런데 그 얼굴을 떠올리면 눈과 코가 없었다. 달걀형인 하얀 얼굴에 입술만 이물질처럼 떠올랐는데 특이하게 윗입술에 검게 점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여동생이 섹시하게 보인다며 자랑하던게 기억난다. 그런데 태영이 기억하는 동생의 얼굴은 섹시함과는 거리가 먼 달걀귀신이어서 유감이었다.
나머지도 죄다 흐릿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가족의 이름이 뭐였느냐 질문하면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중소기업 회사원이었다는 건 안다. 특허가 있는 정밀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어머니는 요리를 잘 못했다. 생일은 8월 12일, 당신이 태어난 날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부근으로 하수가 역류하여 홍수가 났었노라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다고... 그런데 어머니 이름 석 자가 기억 안 난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언젠가 전부 기억이 날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태영.」
「그 말을 들은지 벌써 4년이나 흘렀어.」
「평생이 흐른 건 아니잖니. 이제 겨우 4년이야.」
「...... 말 하는 꼬락서니하곤. 저주하는 놈 아니랄까봐.」

간혹 꿈을 꾸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전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과 지루하다 싶은 네모난 건물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 편의점에서 먹던 컵라면의 맛... 그리고 동시에 가루가 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알고 있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생소하다. 전부 착각인 것 같고, 찰흙으로 빚어진 가짜처럼 느껴지고, 과거에 그러한 풍경을 정말로 보았는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알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태영은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이러한 단편적인 기억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고 흡사 책을 읽어서 습득한 지식처럼 느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

『미인대회라는 걸 구경해본 적 있어? 텐.』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던 오남이 어둡게 그늘진 태영의 안색을 깨닫고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응. 본 적 있어.』
이번에도 기억이면서 동시에 지식처럼 느껴지는 파편들을 접한 태영은 가볍게 두통을 느꼈다.
그의 고향에서는 매년 미인대회를 열었다. 이미 대중적인 인기는 식었고 다들 식상해 하는 행사였다. 그 또한 흥미가 동하지 않아 그다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늘씬한 몸매의 후보들이 포즈를 취한 수영복 심사 사진만큼은 챙겨 본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한창나이인지라 훤히 드러난 가슴 굴곡이나 골반 라인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왕관을 쓴 드레스 차림새의 사진은 별로였다. 그보다는 단연코 수영복이 최고였다.

『수영복 심사?』
각지를 떠도는 장사치인 만큼 아는 지식은 많았지만 오남은 환상대륙에서 쓰이는 용어엔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태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그의 궁금증은 말 그대로 궁금증으로 끝났다.
대신 태영은 눈을 가늘게 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동대륙의 여성들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속옷과도 같은 의상을 입고 과연 무대 위로 오를 것인가.
글쎄다. 이곳은 수영복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다. 헤엄을 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물에 들어갔다가, 허겁지겁 도로 나와서, 젖은 옷을 벗고 새 걸로 갈아입었다.
「물속에 무서운 것들이 있으니까 물놀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
그렇다면 물놀이를 안 해도 좋으니 손바닥 크기의 천을 건네주며 입어보라 해보면 어떨까.
십중팔구 뺨을 맞을 것이다. 더러는 이런 남부끄러운 걸 몸에 걸치도록 요구하기 전에 가족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며 강한 어조로 항의할 것이다.
「수영복 심사는 무리군.」
실망하며 지나가는 마을 여인들의 옷차림으로 눈을 주었다.
허리를 조이고, 주름을 잔뜩 넣어 땅에 끌리도록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보자 왠지 모르게「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은 났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태영은 알 수 없었다. 뇌에는 저장이 되어 있는데 회로들이 다들 엉키고 꼬여 부르는 응답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남. 르네상스라는게 뭔지 알아?』
『르네상스? 아까 말했던 수영복 심사를 말하는 건가.』
두 사람은 멀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이건 아니잖아」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뭐야, 결론은 미인대회라는 걸 잘 모르는구먼.』
『안다니까 자꾸 그러네.』
『좋아. 그럼 텐, 자네가 아는 미인대회라는 걸 나에게 한 번 설명해보게.』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몸매 죽이는 예쁜 여자를 뽑는 거지 뭐. 그보다 오남. 너, 말투 바뀌었어.』
순간적으로 태영의 머릿속으로 다시「카멜레온」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지 성가시다. 이런 식으로 환상대륙에서 쓰던 단어라던가 이미지 같은 것들이 예고도 없이 툭툭 치고 나갈 적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그 또한 형태가 불분명한 유령이 된 느낌이다. 이곳에 속해 있으되 속해 있지 않다. 눈이 하나 뿐인 주민들 속에서 눈 두 개를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정상이지만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 하나를 뽑아 남들처럼 외눈박이가 되어야 할까. 쓸데없이 초조해진다.

돌아와서.
오남은 카멜레온 같은 자다. 빨간 나뭇잎 사이에선 자신의 빛깔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사내다. 파랗게 칠해진 모래밭에선 새파랗게 빛날 것이다. 말투라던가 표정,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주변 색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한다.
『그야 난 뼛속까지 장사꾼이니까.』
원래 그런 거라며 오남은 그런 자신의 버릇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태영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장사꾼들 중 이런 식으로 휙휙 변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
때로는 성격도 변하는 것 같다. 더하여 가끔은 외모도 달라진다 싶었다. 란데가스 제국의 황궁 안에서의 그는 자비심이라는 걸 모르는 냉혹한 귀족처럼 보였는데 그때의 그의 얼굴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품하는 평소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서 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랬어?』
『그랬다니까.』
『그보다 카멜레온이라는 걸 보고 싶군. 피부의 색이 자유자재로 바뀐다고? 어떤 동물일지 궁금해.』
『실제로 보면 실망할 걸? 눈이 빙글빙글, 이상하게 생겼거든. 게다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따로 놀아.』
『뭐야. 그건.』
상상해보니 웃겼던 것 같다. 오남이 큭큭 소리를 내어 웃었다.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부드러운 웃음소리여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덩달아 엄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태영 역시 마주보고 서서 웃었다.
『양쪽 눈이 짝짝이로 돈다고? 어쩐지 더 마음에 들었어. 진짜야. 기회가 닿으면 정말 보고 싶어.』
『무리야. 나도 텔레비전을 통해 본게 전부니까. 탄냐파나 코카처럼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텔레비전?』
『그런게 있어.』

또 돌아와서.
광장에는 미인대회 우승 후보자에 대한 선전물이 어지럽게 사방에 걸려 있었다.
전신 초상화는 헉 소리 나올 정도로 고가인 관계로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자비를 들여 얼굴 초상화를 그려온 후보자는 몇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은「꾀꼬리와도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라느니,「겨울의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무결점 하얀 피부」식의 내용을 글로 적어 선전을 꾀하고 있었다.
태영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말로 하는 건 그다지 효과가 없을텐데.
그래서 후보들은 높은 가마 위에 올라타 군중들 사이로 다니며 자신을 뽐내는 것으로 인지도를 높이려 했다.
『물어보니 아직 행렬 시간이 아니라고 하는군.』
『보통 몇 시에 하는데.』
『오전 11시, 그리고 오후 3시. 하루에 두 번. 오늘은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어.』
고개를 끄덕거린 태영은 벽에 덕지덕지 붙은 선전 문구에 다시 집중했다.
비단과도 같은 머리카락. 사슴과도 같은 눈동자. 치유의 힘을 가졌어요, 감기 정도는 치료할 수 있어요. 2개 국어 자유자재로 사용. 사과와도 같은 뺨. 앙증맞은 발. 다섯 자리 숫자의 암산 가능.
이래서는 미인대회가 아니라 흡사 취업 박람회 같다는 것이 그 첫인상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8 15:22 2015/09/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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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왕국에서 8년이라는 긴 주기를 가진 축제를 언제부터 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진 않다.
말단 경비원 루안의 나이는 올해 스물 아홉이다. 다섯 살 시절에 사람이 꽉 들어찬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신나게 뛰어놀던 추억이 있으니 최소 3회는 넘었다. 다섯 살 무렵, 열세 살 무렵, 스물한 살 무렵. 그리고 올해.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내가 젊었을 시절엔 이런 지랄 맞은 행사는 없었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연하인 잡화상 주인 토마스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 100년 전통을 가진 축제는 분명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 루안은 없던 축제를 새로 만든 계기가 있지 않았느냐 어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무릇 축제라는 건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함이니 하다못해 왕비님의 입덧도 좋은 핑계가 된다. 아니면 단순히 연못에서 독특한 무지개 빛깔의 잉어를 잡아 올렸던 것을 기념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잉어? 무지개 빛깔의?」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왕비님 입덧은 분명 아니야. 그분의 머리카락이 이미 오래 전에 하얗게 새셨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긁었을 뿐, 이렇다 할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럴듯하게 풍년 기원이라던가, 왕족의 만수무강 기원이라던가, 지역 경제 활성화 같은 내용을 이유로 내세웠을 뿐, 그저 날씨 좋은 계절에 흥청망청 놀자 판을 벌리는게 진솔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는 주당들이 비가 와서 한 잔, 울적해서 한 잔, 여종업원 얼굴이 이상하게 예뻐 보여서 한 잔, 이러며 각각의 술잔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러니 오늘에 이르러 8년 축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건 쓸데없다.

『왕국 제일 미인을 뽑는 대회라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렇죠.』
분명 미인대회이긴 하다. 그래도 루안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옆으로 비킨 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미인대회에선 아름다운 아가씨를 뽑는 법인데 비타아른 공왕국에선 이게 약간 달랐다.
그들은 미녀(女)가 아닌 미인(人)을 뽑는다. 즉, 아름다움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다. 하여 우승자는 남자일 수도 있다.

오남은 정색했다.
『여성이 아닌 남자가 미인대회 우승자로 뽑힌 적도 있습니까?』
『있는 걸로 압니다.』
『출전자들이 우승자를 죽이겠다며 이를 갈았겠군.』
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다.
『오남. 너네 가게에서 남성복도 취급해?』
『그게... 커프스 단추 정도는 팔긴 하는데. 음.』
『안 판다는 거구나. 그럼 이참에 남성복 영역까지의 확장을 고려하는 건 어때.』
『싫어!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싫어! 그랬다간 하루가 멀다하고 맨날 --- 에게 불려다니게 될 테니까.』
삐--- 로 처리된 자의 이름은 루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남이 알아듣지 못하게끔 입술을 벌리지 않은 채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오남이 우물거린 이름을 잘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 남자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허나 매출이 껑충 뛸 걸? 돈이 궤짝으로 쌓일 걸 상상하면 기쁘지 않아?』
『매출 이전에 신경성 위염으로 죽을 거다.』
『엄살은. 고깔광대 독버섯을 삼켜도 멀쩡하게 소화 다 시키고 트림만 잘하는 주제에.』
『내가 언제! 이 몸은 섬세하고 예민해! 독버섯을 와구와구 씹어 먹는 무식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리고 자칭 델리케이트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리듬에 맞춰 톡톡 건드렸다.

『저어... 나리. 올해는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어떻긴. 초조함을 한껏 담아 묻는 질문에 루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매회 그래왔듯 이번 축제에도 내놔라 하는 미소년들이 여성들과 어깨를 겨루며 출전했다. 루안의 판단으로는 참자가 중 여성이 60%면 남성은 40% 가량 된다. 하지만 군중은 목젖 튀어나오고 수염달린 족속에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편이라 우승후보를 추리고 추려 인원수를 10명 내외로 좁히고 나면 여성의 비율은 90%로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그 중에서 누가 최종 우승을 거머쥐느냐고?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고.

포만감으로 노곤해지자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에이딜렌 케이틀린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유력한 우승 후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벌꿀처럼 부드러운 금발에 보석과도 같은 푸른 눈, 잘록한 개미허리, 직업은 보모. 외국어 실력도 출중한 재주꾼이라고 하더군요.』
『호오~』
『안나 레머튼도 꼽을 수 있다죠. 쭉 뻗은 미끈한 다리,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 노래실력이 뛰어남. 사머튼 지방에서 보험사 직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힐머른 중앙 광장으로 나가시면 우승 후보들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아직은 한가할텐데 오전 10시 넘으면 사람으로 꽉 차요. 이따 가보시구려.』

언제 초조해했느냐며 오남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왜냐하면 그 말인 즉, 유치장 철컹철컹은 지금부터 안녕이란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손을 모아가며 확인을 해본다.
『엄훠, 그러면 계속 이곳에 남아 즉석재판을 안 기다려도 되는 겁니까? 나리.』
『그럼 지금 당장 유치장 안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오?』
『아니오.』
『즉답이구먼. 그러면서 뭘 되물어요.』
뭐, 괜찮지 않을까. 이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일 뿐이다. 소매치기도 아니고, 강도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거리 한 복판에서 검을 빼어들고 - 되짚어 보니 검집에서 칼을 빼지도 않았다. 그저 혼을 내주겠다 말로 위협한게 전부다. 이전에 장부를 조작하고 투숙객을 내쫓은 여관집 주인의 잘못이 있으니 전후사정을 들은 판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은 뒤, 이런 건 재판할 꺼리가 되지 않는다며 기각 조처를 할 것이다.

『재판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시니 감사한 노릇입니다만, 저어. 그래도 짐은 여기다 놓고 가면 안 될까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다 놓았더니 보따리를 내놔라 한다던가.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며 경비원 루안은 뺨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방을 구할 때까지만. 네?』
『이보시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루안이 화를 내는 와중에 오남은 포기하지 않고 제안을 더했다.
『물품 보관료를 따로 낼게요.』
『어차피 시장 조사차 나온 거라 가지고 있는 짐이 많지도 않아요.』
『유류품이라고 딱지를 붙여 그냥 물품 보관소에 며칠만 넣어주시면.』
『폭탄이나 음란물 같은 거 안 들었어요. 네?』
쿵쿵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관 앞에서 사기를 당했다 소리소리 지를 적에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지나칠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데 쐐기를 박겠다며 오남이 자기 가방을 챙겨 루안의 품에 넘겨주었다.

『귀중품이 없어져도 나는 모르오.』
『그 안엔 양말과 속옷밖에 없어요.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루 보관료는 3세겔로 치지요.』
『3세겔?! 애들 과자 값도 그보단 비싸!』
『쳇. 그럼 5세겔. 그럼 오늘의 보관료를 받으시지요, 나리.』
무르기는 없다며 그가 루안의 손바닥 위로 짙은 갈색이 도는 작은 동전 하나를 올려놓았다. 포효하는 드래곤이 양각된 진짜 작은 동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7 15:47 2015/09/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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