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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급자족용 글입니다. (한숨-)


사무월 축제는 분명 과열되고 있었다.
「일상적안 장기자랑에 불과할 터인데 어쩐지 다들 목숨을 걸고 있군.」
수업은 중지되었다. 그런데도 다들 평소보다 곱절로 바쁘다. 들려오는 악기들의 음색이 서로 얽혀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노래 연습을 위한답시고 목청껏 악을 쓰는 이까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가끔씩 손바닥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시를 읊는 좋은 글월도 저마다 떠들어대니 참기 힘든 소음이었다.
화려한 장신구라던가 이상한(?) 옷을 반입하려는 자들도 늘어났다. 내재원이 자리한 곳이 이름만 황궁 안이라 해도 외궁의 문을 통과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텐데 금전과 권력으로 얼마나 밀어붙였던지 각지에서 내놔라 하는 장사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몰려들었다. 완전히 난리법썩이다. 난색을 표하는 문지기들의 호주머니로 뭔가가 계속 찔러 넣어지고 있다. 그래서 더러는 쫓겨나고, 일부는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올해의 유행은 동대륙풍이라고 하더군. 저런 옷을 워닝 드레스라고 한다지.』
『워닝 드레스?』
그건 이브닝 드레스를 잘못 말한게 아닐까 싶다. 사전통보 여성복이라니. 동대륙어가 서툰 린청이 사촌누이의 설명을 아무래도 잘못 기억한 듯 싶다. 아니, 것보다 허리를 잘록하게 과장한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치마는 주름을 잔뜩 넣어 부풀게 만든 동대륙풍 의상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엄청난 고가의 수입품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데 신기하다거나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뭐랄까, 저건 비웃음을 닮았다.

『정신이 썩은 거야.』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끔 접으며 린청이 쓴 어조로 말했다.
『이국의 옹주인 휘사가 행여라도 우승을 하면 곤란하다며 가락지를 훔쳤다 도둑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한 것들이... 그런 주제에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나라의 옷을 가져다 입는다. 이게 말이 된다고 보나.』
어차피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다.
자포자기한 나와는 다르게 소년은 조용히 분노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가위를 들고 따라다니며 나에게 이사실의 관습을 강요하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기라도 했나. 짜증스러운 것들.』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데 꼭 더럽고 부정스러운 걸 봤다는 투다.

『짜증스런 것들이라는 말에 찬성. 하지만 이해해줘야 할지도 몰라. 자기네들 몇 년치 봉록을 전부 털어 저런 사치스런 의상을 닥치는대로 사들이는 것도 전부 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거니까. 그래봤자 천박한 돼지들 얼굴에 하얗게 분칠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린청의 이해를 구했다.
그런데 린청은 그걸 내가 말한 것으로 착각했다. 왜냐하면 주변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세차게 도리질했다.
『방금 뭐라고 말했잖아, 안즈.』
『아냐. 걔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말한 건 나.』
부드럽게 울리는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린청의 주의를 끌었다.

『푸커억!』
화들짝 놀란 린청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다가 곧바로 창백해져 빛을 잃었다. 일단은 흉한 소리를 냈다는게 창피스러웠던 거고, 그 다음으로는 바로 옆까지 사람이 접근했는데도 그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 경악한 나머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거였다. 어떻게 까마득히 모를 수가 있지. 설마, 대낮에도 유령이 나타날 수 있는 건가 - 의심하며 소년이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유령치고는 웃는 얼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신발도 제대로 신고 있다. 하여 유령이 아님을 확신하자 린청은 더욱 기겁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하늘에서 사람이 예고도 없이 뚝 떨어진다며 감탄하지만 일정 수준의 무예를 익힌 자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낄 터다. 이해한다. 아마도 송곳니를 드러낸 호랑이 앞에서 몸에 고소한 참기름 바르고 선 기분이겠지.

『여어~』
발자국 소리는 고사하고 마음만 먹으면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남자다. 나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이게 누구야. 보리쌀이구나. 잘 있었어?』
밤톨, 도토리, 콩알에 이어 이번에는 보리쌀이다. 어쩐지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예를 올렸다. 이 상태라면 다음으로 불릴 내 이름은 분명 좁쌀이다. 어쩐지 우울해진다.
『천세, 천세, 천천세. 빈사국에서 온 지리가 가의 안즈가 위대하신 무한권능으로 하늘보좌에 올라 온 산하를 지배하시는 위대하신 적룡신의 만세자손 님을 뵈옵니다.』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데 인사가 그따위야.』
『나물반찬에 소고기를 끓여 만든 따뜻한 무국을 먹었습니다.』
술술 나오는 대답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영문을 모르겠네. 어째서 화를 내고 있지? 꼬맹아.』
『화를 내다니오.』
『시치미까지 잡아떼니 누구랑 똑 닮았네. 하지만 됐어, 아니라고 했으니 그만두자. 그래도 꼬맹아.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빈정거리는 건 그만두는게 좋아. 나는 그다지 아량이 넓지 않은 사내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방울에서 헤엄치는 이끼벌레 정도 크기야.』
『빈정거리지 않았습니다.』
『정정할게. 내 아량의 크기는 물방울에서 헤엄치는 이끼벌레의 심장 정도 크기야. 어느 정도인지 알겠어?』
그런 까닭에 나는 내 머리 위로 얹어진 손바닥을 치우지도 못하고 네, 네 공손히 대답만 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둘이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은 린청은 자세를 가다듬고 자손을 향해 예를 올리려 했다. 제국을 혐오하더라도 입장 상 제국의 황족에 대해 존경심을 보여야 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예당국 연 가의 장남 ㄹ...』
『너는 남자면서 머리카락이 무척 길구나.』
린청의 얼굴이 콰직 구겨졌다. 인사를 올리는 도중에 윗 사람이 아랫사람의 그 말을 끊은 건 너를 무시하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거기다 하필이면 소년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린청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것이다.
『자르라고 하셔도 자르지 않을 겁니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그냥 길다는 내 감상을 언급했을 뿐이야.』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서 하던 행동을 바꿔 내 뺨을 쭉쭉 잡아당기던 자손이 목소리를 낮춘 채 린청의 흉을 봤다.
『혹시 네 친구니? 친구를 잘 사귀라던 내 말은 흘려들었구나. 저런 성격 급한 녀석을 친구로 삼고.』
지금 남의 흉을 보고 그럴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도 네, 네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끼벌레의 심장 크기의 아량을 가진 이를 상대로 누가 잘 했고 잘 못했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다못해 내 이름조차 귀찮다며 기억을 안 하는 남자다. 방금 전 자신이 린청의 인사를 도중에 싹둑 잘라 먹었다는 것도 이미 기억 속에서 놓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린청더러 성격 급하다 나무란다. 참으로 제멋대로다.

『그나저나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여긴 내 집이야, 땅콩. 내가 어디로 가든 그건 온전히 내 자유야.』
이와 비슷한 말을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황족의 남성이 황궁을 일컬어「여기는 내 집」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이 궁궐에서 어디를 가든 그건 온전히 내 자유 - 그런 말을 황제가 아닌 황족의 남성이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냥 단순히 여기가 외궁이라서?
마음 구석에서 조그마하게 의문이 솟았다.
그게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돌연 자손이 불쾌해했다.
『뭐냐, 지금 그 표정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이상한 생각했지.』
『그럴 리가요.』
『아니야, 분명 이상한 생각했어.』
『별 생각 안 했는데요.』
『별 생각을 안 했다라... 그럼 달 생각을 했다는 거냐, 해 생각을 했다는 거냐.』
들판에 핀 꽃이 시들어 꼬부라질 지경으로 곱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 코를 부러져라 비틀어댔다.

Posted by 미야

2015/09/11 22:14 2015/09/1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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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 모두 제국인이 아니라는 탓도 있었지만, 우리들이 자리를 함께 하자 여러모로 안 좋은 방향으로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릎을 다친 탓에 절룩거리는 나야 말똥 투척 사건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떠도는 소문이 극히 좋지 않았고.
린청은 고집을 부려가며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녀 사내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참이다. 짧게 자른 머리를 선호하는 이사실에서는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제국의 풍습에 따르기를 강요하며 가위를 들고 따라다니는 이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주먹질로 하나하나 제압하고「날 내버려둬!」주장하고 있으니 관계자 입장에선 아무래도 눈이 시릴 터, 최근에는 상급생들까지 끼어들어 모종의 압력을 계속하여 가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몸싸움을 하는 빈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길게 늘어진 뒷머리를 슬그머니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자를 거야.』
그런 까닭으로 이 무가 출신 소년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쁘다.
『죽을 때까지 길러봐. 저 황소고집을 누가 말려.』
그리고 여기, 소년의 동갑내기 사촌누이 휘사가 있다.

『바느질이 어렵진 않아? 도와줄까?』
『괜찮습니다. 할 만 합니다.』
내 요청을 듣고 흔쾌히 반짓고리를 빌려준 그녀는 찢어진 소매를 직접 수선하는 나를 조바심을 내며 지켜보았다. 자신과 달리 정식으로 수예를 배운 적이 없을 터이니 바늘에 찔릴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곤란하다 생각하며 느릿느릿 八자 형태로 실을 꿰었다. 내 비록 수예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도 전생의 부서고서리 시오재는 궁진한 살림살이에 헤어진 의복을 손수 고쳐서 입던 사내였다. 덕분에 생전 처음 해보는 바느질이었음에도 실의 매듭짓는 방식 같은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은 갖고 있다.
『윽!』
그렇다고 해도 손가락에 구멍을 내는 걸 피해갈 수는 없어 휘사는 어쩔 수 없군, 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역시 안 되겠어, 내가 꿰매줄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사양할 것 없어. 너는 그냥 영광으로 알아. 지아비가 아닌 자의 옷을 꿰매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테니.』
눈을 감고도 손수건 위로 한 떨기 모란꽃을 피우는 재주를 가진 사람에겐 이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내 손아귀에서 수선 중인 겉옷을 빼앗아갔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
『그러니까 너는 그냥 감사합니다. 태양을 가릴 지경으로 아름다운 분이여, 이러고 인사만 하면 돼.』
성격이 이렇다보니 그녀도 적이 제법 많은 편이다.

『듣는 내가 다 오그라든다! 그 말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냐.』
『내 말투가 어때서, 린청 오라버니.』
『낯간지럽잖아. 세상에 어느 여자가 태양을 가릴 지경으로 아름답다고 자화자찬하는 법이 어디에 있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육지전서 87장에 장군은 스스로 자만하여 눈이 흐려지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병법 이야기가 왜 나와!』
옥신각신하는 이 두 사람은 이종사촌지간으로 어머니끼리 자매다. 태어난 달이 다른 열 한 살 동년배이고, 휘사의 어머니가 예당국 왕의 다섯 번째 빈이라고 하니 신분으로 보자면 옹주인 휘사가 훨씬 높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가깝게 자란 탓인지 서로 간에 허물이 없고 반말도 예사롭지 않게 툭툭 던지곤 했다. 본인들 주장으로는 기저귀를 차고 있던 핏덩이 시절부터 앙숙 관계라는데 내가 볼 적엔 앙숙까지는 아니고 투닥거림이 좀 있는 남매처럼 보였다.

『아무튼 스스로 예쁘다, 예쁘다, 이러는 건 적을 만드는 행위라고.』
『하지만 난 어디를 봐도 미인인데 어쩌라고. 입에 침 바르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이 미모에 시기, 질투가 따라붙는 건 내 탓이 아닌 걸.』
『네 탓 맞거든? 이 추녀야!』
쏘아붙이자 소녀는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채 툴툴거렸다.
그런데 찐빵이 되었음에도 못 생겼다는 느낌은 없고 같은 여자인 내 눈에도 정말 예뻤다.
『휘사 님은 미인이에요.』
『그거 봐, 오라버니. 안즈도 인정하잖아.』
『그거야 저 녀석 눈이 삐어서 그렇고.』
턱을 괸 삐딱한 자세로 삐딱한 발언을 개의치 않게 내뱉은 소년은 둘이서 편먹었다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저게 미인이면 세상의 모든 미인의 씨가 마른 거야.』
린청의 기준에 따르려면 그 눈을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성벽을 무너뜨려? 그건 미인이 아니라 괴력의 소유자잖아.』
고사를 잘 모르는 소년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무튼 린청의 말에 일리는 있어요. 자고로 여인들의 시기 질투는 칼보다 무섭다고 하니까.』
바느질을 하다 말고 휘사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안즈. 내가 질투를 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닌데. 피이~ 게다가 치사하잖아. 그깟 가락지, 아무리 비싼 보석을 박았다고 해도 길게 가냘픈 내 손가락을 우아하게 만들지도 못할텐데 내가 왜 그런 걸 훔쳐서까지 가지려 들겠어. 그걸 설명을 하는데도 귀가 막혔는지 못 알아듣는 거야. 하도 기가 막혀서 내 손을 보여줬지. 그딴 가락지가 없어도 내 손은 너무나 고와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답니다, 이러고.』
저런 반응이니까 상대방도 감정이 상해 머리채를 잡으려 한 거다.
『평범하게 그냥「내가 안 가져갔습니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냐, 누이야.』
『말했어요. 평범하게 말했다고요, 오라버니.』
『세상의 모든 평범이 목을 매달고 죽었다든?!』
『알게 뭐야.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은 아무도 안 믿어주던데. 어떻게 생긴 가락지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발끈해서는 내 방을 뒤지겠다고 윽박지르더라. 그래서 거절하겠습니다, 숙녀라면 방문 전에 약속을 잡아주세요, 그게 예의잖아요? 라고 말해줬지. 그랬더니 찌그러진 양동이처럼 생긴 여자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날 뒤로 확 밀쳤다니까.』
『듣자하니 밀쳐지기 전에 네가 먼저 뺨을 때렸다던데.』
『아닐 걸? 모르긴 몰라도 내가 먼저 때리진 않았을 거야.』
『거기서 왜 추측형이야.』
『내 기억으로는 거의 동시였거든ㅇ... 핫!』
거기까지 말한 휘사가 돌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무슨 일인데.』
『아, 아무 것도. 진짜 별 거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는데 별 거 아니라는 말을 우리가 믿겠니? 뭔데 그래.』
『음... 그러니까 그게.』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꿰매던 내 옷을 짐짓 뒤로 감추려 했다.
아무래도 속으로 짐작했던게 맞았나 보다.
신분 높은 소녀가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제대로 해낼 리 없었다. 방틀 위로 팽팽하게 잡아당긴 명주 천에 나비와 꽃을 수놓을 줄은 알겠지만 상한 옷을 수선하는 건 어디까지나 딴 세상 일이다. 정확하게는 아래 것들의 일이다. 하여 그녀는 소매를 한 장으로 이루어진 천으로 생각하고 위아래를 촘촘한 박음질로 꿰매버리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가운데로 팔을 꿸 공간을 없애버린 거였다.
『크크크푸훕!』
참지 못하고 웃었더니 휘사의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기괴한 소리로 웃을 건 없잖아, 안즈.』
『푸, 푸흡! 크핫핫핫~!』
『어쩜. 시원하게 웃어버리니 더 얄밉네.』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는 나를 향해 색동의 실패가 날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08 13:58 2015/09/0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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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빠질 거라 했다.
어린애처럼 별똥별에 대고 소원을 빌기를 원래대로 감쪽같이 붙기를 희망했지만 아무래도 새 손톱이 자랄 때까지 아픔을 참는 수밖에 없나 보다.
『소문의 도련님이시죠?』
그게 어떤 소문이냐 묻고 싶었다. 어쨌거나 좋은 쪽은 아니어서 의원은 치료에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무릎의 상처는 물로 깨끗이 씻은 뒤 별다른 소독도 없이 통증을 완화시켜 준다는 약초즙만 슥슥 발랐다. 내가 봐도 꽤나 엉성한 치료였다. 공인된 자격이 없는 동네 돌팔이 의원도 이보다 더 정성스럽게 치료해준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들은 소문이라는 것이 돈 한 푼 없는 거지라는 내용이었나 보군.」
상처가 덧나도 결코 내 책임은 아닙니다 - 수중의 약병을 주섬주섬 챙기던 사내는 이것으로 자신의 의무는 끝났다며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끝났습니다.』
『저어, 의원님. 붕대라도 감아주셔야...』
『싫은데요. 달리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정식으로 다른 의원에게 제대로 보이십시오.』
차갑다. 냉정하다. 귀신 같으니라고.
하지만 나는 저 남자를 이해해줘야만 했다. 의술 행위는 어디까지나 공짜가 아니다. 좋은 효과를 보이는 약초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그 가격이 결코 싸지 않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의원의 옷자락을 붙잡고 저 남자가 그렇게나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해줘야 했다.
『치료비 때문이라면 내일 숙희 숙사감대부에게 청구하시면 되요.』
『호오~ 그분이 학부생의 치료비를 대신 내주실 거다?』
안 믿는 눈치다. 뿐만 아니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며 야단을 치는 시선이 되어버렸다.
『저런! 비용을 그분에게 돌리다니. 도련님은 숙희 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잘 모르시나 보네요.』
『그게 아니라...』
숙희가 보관하고 있는 내 몫의 금전을 설명하려던 찰나, 의원이 의자에 다시 앉았다.
『나도 모르겠다... 좋아요. 어지간히 쓰리고 아픈 모양이니 일단은 속아드리죠. 이번 딱 한 번 만입니다. 그럼 바지를 다시 걷어보세요. 무릎의 상처를 보도록 할까요.』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지 한숨과 함께 다시 내 상처를 봐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중에 미끄러져 넘어진 겁니까?』
방금 전까지 쌩 소리 나게끔 매몰차게 굴던 인간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느냐며 관심을 보여 왔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냥 넘어져서 이렇게 되긴 힘들텐데.』
멍들고 찢어진 부위를 차분하게 만져보고, 눌러보고, 가만히 주물러도 보았다. 피부가 찢어져 껍질이 들고 일어난 부분엔 불투명한 회색의 고약도 발랐다. 싸한 느낌의 독특한 냄새가 나는 약이었는데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향이었다. 계속 코를 대고 있으면 기침이 나는 종류다.
『꿰매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나쁜 피가 고인 곳으로 침을 몇 대 놓죠.』
침을 다 놓자 이번엔 약을 조제해줬다. 별 건 아니고 진통제 종류라고 했다.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절반을 드시고, 남은 건 내일 오후에 드십시오. 다소 어지럼증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고 식사는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약이 더 필요하면... 아시죠?』
『정식으로 다른 의원에게 제대로 보여라?』
『정답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약포를 받는데 삼킨 것도 없이 입안이 매우 썼다.

하염없이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자니 길게 늘어진 휘장을 걷으며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린청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젊은 숙사감이었다.
학부생이 다쳤다는 말에 확인 차 보러 온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그는 당사자인 나를 쏙 빼놓고 처치를 끝마친 의원과 말을 나눴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겁니까?』
『본인 입으로는 넘어졌다고 하더군요.』
『상처는?』
『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위에 보고는 해야 하겠죠.』
그리고 의원과 숙사감 두 명은 무슨 골동품 도자기 감정하듯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싶어 끼어든 건 린청이었다.
『원숭이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네? 원숭이요? 말도 안 돼. 그런 것이 어디에 있다고.』
의원이 거짓말을 그렇게 지어내면 곤란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사실인데요.』
『이래서 변방인들은... 쯧. 이 부근엔 원숭이 같은 건 살고 있지 않아요.』
졸지에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몰린 린청은 주먹을 쥐고 분노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분명 원숭이로 보이는 뭔가가 안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하세요. 그런게 존재할 리가 없잖습니까. 아니면 올빼미를 잘못 보았겠지요.』
『올빼미가 살기를 드러내고 일부러 사람 가까이 접근하는 법도 있답니까?』

따지듯 고집스럽게 주장하자 듣고 있던 숙사감의 한쪽 눈썹이 좋지 않은 의미로 활처럼 구부러졌다. 허리에 손도 얹었다. 경험으로 보자면 저건 사람을 윽박지를 적에 보이는 태도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근깨 숙사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경 없인 사물의 모습이 흐리게 보인다며 때 아닌 근시 타령을 했다.
『그러니까, 어디보자.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예당국에서 오신 도련님이죠? 분명 련 가의...』
그리고 묘한 어조로 비웃었다.
『오늘 저녁 여학생부에서 가락지가 없어졌다고  한바탕 소동이 났을 적에도 예당국에서 온 분이 그 가운데 있으셨는데. 그거 참.』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말을 들은 녀석이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휘사 님이셨죠? 그렇게 기억하는데. 두 분이서 같은 나라에서 오셨으니 사촌이신가요?』
『시끄러워! 녀석은 결백하다.』
혈연관계냐고 물어봤는데 듣는 사람이 대답하길, 죄가 없단다. 뭔가 안 맞는 것 같다.
『오,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엉뚱한 걸 잘못 보시고 오해를 하는 버릇이 있는 듯하여.』
린청이 분노하자 주근깨 숙사감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듣는 입장에서 조롱을 당했다 격분하면 말단 관리 입장에서 맞닥뜨리기가 곤란할 것이다. 너무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의원 또한 숙사감의 옆구리를 조용히 찔러댔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여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이 참, 다들 왜 그러시나. 별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보는 눈이 있는 관계로 주근깨 숙사감이 건성으로 사과했다.
『그래도 말씀드리는데 원숭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주십쇼.』
하여 공식적으로 오늘 밤 일지에는 미끄러져 넘어져 부상당한 학부생 한 명이 치료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말단 관료인 두 사람은 그렇게 입을 맞추고 어려움 없이 평상시처럼 상황을 정리했다.

『단호하게 그런 건 없었다고 부정을 해버리는 군.』
꼬물거리고 있는 내 발가락 위로 예고도 없이 수건을 휙 집어 던지면서 소년은 넌더리를 냈다.
맨발이 문제였던 걸까, 수건으로 발을 가리고 난 뒤에야 린청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저들은 말단 관료들이야, 린청. 일이 복잡해지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하지.』
『하지만 나는 내가 보고 겪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어.』
『알아.』
다친 건 나인데 왜 린청을 달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가 변방인 출신이라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내가 아니라 송주가 원숭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면 저들의 반응이 아까와는 달랐겠지?』
한 3초 정도 생각하고 대답했다.
『음... 그렇지 않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
『하!』
『관료라는 건 그런 법이니까... 그보다 휘사 님께 무슨 일이 있었어?』
『녀석이 가락지를 훔쳤다고 누명을 뒤집어썼어. 그래서 여학생부에 가봤던 거야.』
『허어.』
그러고 보니 비싼 가락지가 없어졌다며 여자들끼리 머리채를 잡고 있다고 했다.
숙희 숙사감대부는 콩가루 비지떡에 망할 계집애들이라고 욕을 했고. 그게 휘사 님이었던가. 아이고.

Posted by 미야

2015/09/06 20:53 2015/09/0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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