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 30 : Next »

빠르게 걷기와 천천히 뛰기를 몇번이나 반복하여 가까스로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생물 오징어처럼 어기적거리며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나를 향해 이라벽치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표정이 참으로 대견하구나 칭찬을 하는 것 같아 몸은 힘들었어도 기분은 좋았다. 이런게 아마 성취감일 것이다. 땀으로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녹초가 되었어도 상쾌했다. 달리자, 이대로 이라벽치에게 달려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 하?
기가 막히게도 이 미친 천둥 솥뚜껑은 갑자기 기합을 넣어가며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니, 시키는 대로 뜀박질을 한 사람에게 막판에 이르러 이런 식의 행패를 부리는 법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에서 신호가 번쩍번쩍 울렸다. 주먹이 커다란 수박처럼 확대되어 보였으나 그걸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솥뚜껑을 향해 제법 빠르게 돌진하는 중이었고, 뭐랄까. 튀어나온 기둥을 향해 머리를 깨부수고자 달려가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느리게 반응하는 둔한 몸은 여전히 달리기 자세를 유지했다. 한술 더 떠서 왼쪽 발목을 삐긋했다. 참 가지가지 하는 몸뚱이다. 하여 시선으로는 계속 이라벽치의 주먹을 쫓았지만 몸은 왼편으로 크게 쏠렸다.

『동체시력은 괜찮은데 역시 몸이 안 따라주는구나. 역시 체력이 문제군.』
꼭 때릴 것처럼 굴던 남자는 간발의 차이로 쥐었던 주먹을 도로 활짝 펴고 넘어지기 일보직전의 나를 붙들어줬다.
『잘 했다, 안즈.』
『허억, 허억! 지금 방금 뭐였습니까?!』
『뭐긴. 죽었다 살아난 거지.』
그렇게 말하며 별 거 아니라는 동작으로 발목을 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 남자의 완력은 장난이 아니라서 신발코로 가볍게 툭 치는 것만으로도 무릎 아래까지 찌르르 하는 통증이 번져왔다.
『아까 접지르던 것 같던데.』
『그걸 확인한답시고 제 뼈를 부러뜨릴 겁니까?! 살살 좀 해주세요.』
『아니 이놈아. 그 정도에 뼈가 왜 부러져. 말라붙은 개똥도 안 부러진다.』
항의했더니 엄살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투덜대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신을 벗고 왼쪽 발목의 상태를 살펴봤다. 엄지로 누르자 찌릿한 감이 들었다. 잘 됐네, 핑계를 대고 오늘은 더 못 하겠다 말해야겠다.

『그래도 눈이라도 좋으니 다행이다. 보여도 피하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그래도 눈으로 보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면 몸은 어떻게든 반응하기 마련이니까...』
『어떻게든 반응한다고요? 에이. 그럼 날아오는 화살도 눈으로 보면 피할 수 있게요.』
『나는 피해.』
『......』
『돌진하여 달려오는 멧돼지도 충분히 피할 수 있고말고. 몸을 계속하여 단련하면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말도 안 돼. 일반화가 너무 심각하십니다. 100년을 노력해도 저는 그런 경지에는 못 올라갑니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이라벽치는 그것으로 결론을 도출하여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려 했다.
『자! 그러니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부지런히 몸을 단련하도록 합니다!」우렁찬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픈 발목을 살살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길 포기하면 됩니다.』
『그래. 열심히 체력을 키우...... 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조차 살아남겠노라 각오했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라. 무기를 드는 건 그 다음이다. 에이드 체이스만 치토.』

이라벽치는 치토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누구냐.』
『이라벽치 님은 치토를 모르십니까?』
『그 기분 나쁜 말을 한 자가 누군데.』되물으며 그는 진심으로 불쾌해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북대륙 채턴 지방 사람이에요.』
『들어본 적 없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무척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요. 끔찍한 재해가 닥쳤을 적에 밀려오는 식인 요괴들로부터 길마론 북서부를 훌륭하게 지켜냈어요.』
『그럼 그 자식이 영웅이란 말이냐?!』
『인간임을 포기했는데 영웅일 리 없죠. 나중에 그의 시신은 여섯 토막으로 잘려나가 훼손되었어요.』
요괴들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도 움직임이 둔한 어린이와 여성을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발 빠르게 도망치곤 했다. 나중을 도모하기 위해 인구 2천의 마을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전략은 훌륭했지만 인간이 할 말한 짓은 아니어서 치토의 도움으로 명줄이 길어진 왕조차 감사 인사를 생략한 채 그를 산채로 씹어 먹고 싶어 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합니다 - 치토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증오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재해가 멎자 왕은 재빨리 그를 사형대 위로 올렸다.

『그렇다면 얘야, 너도 살기 위해서라면 인간이길 포기하겠다는 거냐?』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눈을 있는대로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이라벽치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그렇지?』
『모두로부터 욕설을 들어가며 사형대에서 목이 잘리는 건 싫습니다. 전 늙어 죽는 것이 소원이라서요.』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나는「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기억했을 뿐이다. 치토는 사형대 위에 오르기 전 감옥에서 짧막한 수기를 썼다. 나는 인간이길 포기했었노라고. 요괴와 싸우기 위해 요괴보다 더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신을 고쳐 신고 아픈 발목을 좌우로 돌려보았다. 다행히 심하게 욱씬거리지는 않았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화기를 내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조심하면 기분 나쁜 이 감각도 곧 사라질 것이다.
『저라면 도망칠 겁니다.』
『음?』
『고난과 역경이 다가온다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칠 거에요.』
『그 다리와 그 체력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겠다며 마치 절을 하듯 상체를 구부렸다.
『사내답게 정면에서 맞서 싸우라고는 말하지 않겠어. 지금의 네 상황에선 무리라는 걸 잘 아니까. 허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 가봤자 쫓아오는 악당에게 금방 잡힐텐데?』
이라벽치는 다시 원래의 결론 - 맞춤형 결론에 무사히 도달했음에 온몸으로 기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한다?』
체력을 기르자. 아자.

『칼을 들고 네게 덤벼들었다던 남자 말이다. 소극 상은 사람 말로는 너와 같은 빈사국 사람이라던데.』
이라벽치의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곰 같은 덩치에게 뒤로 껴안긴 채 목조르기라는 것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공격하는 시늉만 해 보이는 거라고 했지만 그거야 곰의 판단에서나 그런 것이고, 곰의 펑퍼짐한 앞발에 당한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죽을 맛이었다.
『켁. 커억!』
『혹시 네가 보기에 얼굴이 낯익지는 않든?』
『그, 그게! 숨이 막! 켁!』
『그런데 그 남자의 주머니에 호패가 있더라니까. 빈사국 사람이 아니고 우리 이사실 백성이었다.』
어떻게든 조르기 공격에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쓰던 나는 잠시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몰래 훔친 걸까요?』
『하지만 호패의 원래 주인은 자기 걸 잃어버린 적도 없다고 그러던데.』
하여 나란히 놓고 보니 거짓말처럼 똑같이 생긴 호패가 두 개가 되었다.
직접 만든 두부를 팔던 장사꾼은 새파랗게 질려 쥐고 있던 손님 끌기용 딸랑이 방울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남에게 빌려준 적도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똑같이 생긴 걸 깎아 만든 적도 없다고 했다. 호패를 위조하면 그 형벌이 매우 무겁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사내는 겁에 질렸다.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정말 억울하옵니다! 나리, 진짜로 저에겐 죄가 없어요!」
이라벽치는 사내의 주장을 믿어주었다.
『설마, 두부 장수가 그랬을라고. 왜냐하면 그 장사꾼이 팔던 두부가 모양이 영 예쁘지가 않고 이상했거든.』
『......』
『상품으로 내놓은 두부도 그 꼴인데 그 실력으로 호패를 위조하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이 인간이 갑자기 자기가 만든 두부는 모양은 그래도 맛 하나는 기가 막힌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거야. 단골도 얼마나 많은지 한 번 보라면서 거래처 장부를 꺼내 오더군.』
언짢은 기억 때문일까, 목을 조르는 힘이 약간 세졌다.

Posted by 미야

2015/08/12 13:45 2015/08/12 13:4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75

Leave a comment

소방 안쪽을 기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사람을 찾는다고 말을 걸자 열 명 모두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것도 얼마나 신속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던지 이쪽에서 찾는 이의 이름을 대기도 전이었다.
『아닐세. 뭘 항의하거나 따지려고 그러는게 아니고, 단순히 물어볼 것이 있어 그래.』
저자세로 읍소를 하자 구석에서 야채를 다듬던 하수가 눈을 비스듬히 치켜떴다. 양파가 아무래도 매운지라 눈가가 붉었는데 얼마나 이력이 났던지 도마와 칼을 보지도 않고 갖은 야채를 재주껏 잘게 토막내고 있었다. 저러다 손가락을 자를 것 같아 보는 사람은 무서웠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난 또 누구라고. 얼굴을 보니 창고 도령이구먼.』
내 별명이 또 늘어났다... 도토리, 다람쥐, 팥알, 깨알, 빈사국 거렁뱅이에 창고도령.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자니 하수가 칼날에 묻은 자질구레한 야채 조각을 행주로 닦아내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작업용 식칼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채여서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생선용 식칼에 찔려 죽을 뻔한 것이 바로 어제다. 날 선 쇠붙이는 사절이다.

팔뚝 소매에 재주껏 땀방울이 솟은 코를 문지른 하수는「그래, 누구를 찾는다고요?」확인하며 물어왔다.
생사를 확인해보려 한다 말할 수는 없어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락연의 이름을 언급했다.
『락연이라는 이름의 자를 찾고 있네. 혹시 오늘 일하러 왔나?』
『글쎄요. 집에 일이 있다고 며칠 쉬기는 했는데... 잠시만 기다려봐요. 락연~!! 안에 있냐?! 락연!』
귀청 울리는 천둥 부름에 대답하며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이는 체격부터 내가 알던 자와 전혀 달랐다. 나이도 훨씬 많아 이쪽은 40대 후반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노화된 피부 위로 검버섯이 약간 피었다. 눈동자는 평범한 밝은 갈색이었다. 손에는 연료로 사용할 숯을 하나 가득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날 찾수?』
『이쪽 도련님이 물어볼 것이 있다길래.』
락연은 다소 불온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이는 어려도 내 신분이 높았기에 겉으로 올리지는 않았지만「뭘 물어보러 온 것이 아니라 요구하러 왔겠지」불평하는게 훤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소방 하수들이 높으신 도련님들이 자신들을 개인 하인 취급을 한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걸 본 기억이 났다. 부탁이야 뻔했다. 개인 취향에 맞는 간식을 대령하라, 오늘 국은 너무 짰다, 혹은 싱거웠다, 재료에서 당근을 빼라, 접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타등등. 이번엔 또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나 싶어 락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뭘 따지려는게 아니라니까. 일을 며칠 쉬었다고 들었네.』
『아, 예예. 과년한 딸아이가 시집을 가게 되었기에... 애비된 노릇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습니다.』
예상치 않은 질문에 락연은 동료들을 흘끔거렸다.
「나 없는 동안에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없었어.」
입 뻥긋으로 의사소통을 간단히 해결한 그는 그 즉시 안도하며 다시 나와 눈을 맞춰왔다.
『그런데요? 도련님.』
『어제도 이곳에서 일을 했나?』
『그랬습니다만.』
『혹시 락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하수가 자네 말고 또 있는가.』
『글쎄요, 어지간한 사람들 이름은 알고 있지만 소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들까지는 아닙니다. 제 이름이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니니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아닐세. 일을 방해해서 미안허이.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야.』
락연은 별 싱거운 일 다 봤다며 꾸벅 인사를 한 뒤 일하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신원을 도용했나 보군.」
자리에 없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 행색을 하며 암시를 걸어두는 건 중급 이상의 요괴들에겐 쉬운 일이다. 이름마저 빌려왔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곳 소방에서 딸의 결혼식으로 정신없이 바빴을 진짜 락연 대신 톱니 모양 치아를 드러내며 더러워진 그릇을 치웠을 거라 생각하니 기가 찼다.
「난감하군. 나와 같이 저자 거리로 나가도 된다 허락한 자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중문으로 나가 칼에 찔린 시체 모습으로 들어온 자가 있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무엇보다 진짜 이름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다. 그런 자의 생사를 내 힘만으로 확인한다는 건 유령을 산 사람으로 부활시키는 것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행방불명된 자를 찾습니다 - 특징 : 톱니 이빨」벽보를 써 붙일 것도 아니었기에 포기했다.
「하는 수 없다. 어딘가에서 무탈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그 기도가 (가짜)락연이 아닌 나를 위한 기도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다 지나면 나는 과연 무사히 숨 쉬고 있을까... 뺨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려 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연무장을 한 바퀴 뛰고 옵니다. 실시.』
『허허허... 농담도 잘 하시네요, 이라벽치 님은.』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거부하자 이라벽치는 정색했다.
『농담 아니야. 네 친구는 벌써 다섯 바퀴째 뛰고 있는 걸.』
『그야 린청은 저와 달리 강철 체력의 소유자니까요. 하지만 전 그렇게 오래 달리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 정도쯤 근육의 근 자도 보이지 않는 네 물렁거리는 팔뚝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일단 한 바퀴만 뛰고 오라는 거 아니겠니. 빠르게 뛰지 않아도 좋으니까 완주하겠다는 목표만 노려.』
이라벽치가 우리를 데려온 곳은 적룡군이 훈련하는 연무장이 아닌 일반 체력 단련장 - 곰보자국이 선명한 화살과녁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궁술을 연습하는 장소인 듯했지만 어쨌든 그 규모가 건물 열 채는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그걸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것도 아니고 바깥으로 돌아 한 바퀴를 뛰라니. 아이고, 오늘 그냥 제삿날이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무리라니까요!』
『도중에 정 힘들면 걸어도 좋다. 일단 뛰고 보자.』
『저어, 배가 살살 아파서... 잠시 뒷간에. 그럼 다녀오겠습니닷!』
『이 넓은 풀밭 전체가 야성의 화장실이야. 어디를 간다는 거니.』
『아! 깜빡 잊어먹고 있었는데 곧 수업 시간이에요.』
『지리가 안즈가 수업이라는 걸 전혀 듣지 않는다는 걸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다.』
결국 뺨 가득히 공기를 가득 집어넣은 채「힘 내라」응원까지 받아가며 풀밭을 뛰어야 했다.
달리기라니, 달리기라니! 내 취미는 어디까지나 인쇄된 글자를 읽는 것이지 몸을 쓰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숨만 쉬고 살던 소녀는 햇빛을 보는 일이 적어서 그랬는지 또래에 비해 체격이 작았다. 운동량 부족으로 팔다리는 부러질 것처럼 가냘팠다. 제공되는 식사가 끊어진 적은 없지만 기름진 밥상을 받았던 건 손가락에 꼽는다. 영양 불균형은 결국 저질 체력으로 돌아왔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이 곤란해지고 말았다. 그새 땀이 솟은 이마를 닦으며 출발지점을 돌아다보았더니 이라벽치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리가 무겁다. 종아리가 당긴다. 폐가 안쪽에서부터 짜부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호흡이 뚝뚝 끊겨져 코와 입으로 뿜겨 나왔다.
『입은 벌리지 말고.』
충고를 듣고 벌어진 입을 닫았지만 그 즉시 질식사의 위기가 닥쳤다.
『지금처럼 팔을 크게 흔들면 나중에 힘들어져. 상체에 바짝 붙여!』
흔들리는 팔이 어디에 있다고. 내 몸뚱이에 그런 거 안 달렸다. 인식 가능한 신체 부위는 발바닥과 심장, 그리고 허파 정도다. 거추장스러운게 더 있는 것도 같다만, 머리와 몸이 죄다 따로 놀았다.
『턱을 당겨.』
그 말을 오해한 나는 입을 벌렸다.
『아니, 입은 다물고 턱을 당기라고.』
그거나 이거나 같은 말 아니었어? 이래라 저래라 헷갈리게 만들고. 미워 죽겠다.

이제 여섯 바퀴 째를 맞이한 린청이 뛰는 속도를 줄여 내 옆으로 붙었다.
『안즈, 눈은 뜨고 뛰어.』
『노력 중이야.』
더위 먹은 개처럼 헐떡대느라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 대꾸는 했다.
그 모습이 안스러웠는지 린청은 한참동안 소리 없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여기서 소리가 없었다는 건 말을 걸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나처럼 크억, 크억, 쇳소리를 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녀석은 나보다 몇 곱절 오래 달렸음에도 잠자는 아기처럼 편안하게 호흡했다.
『처음부터 너무 욕심 부리지 않아도 돼.』
『욕심?! 그런 거 전혀 없거든요?!』
나 같은 건 무시하고 어서 가라 짜증냈더니 그제야 원래대로 속도를 올려 저만치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8/11 14:25 2015/08/11 14:2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74

Leave a comment

11년이라는 짧았을 인생을 살아오면서 독 발린 붉은 사과의 존재를 처음 깨달아서 그런 것일까, 린청은 입을 한 일자로 다문 채 의자에 앉은 자세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창고에 처박혔던 의자다. 애초부터 다리가 부실하여 똑바로 앉으려 해도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앉은 몸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그의 심기 불편함과 혼란한 상태를 잘 드러내 주었다.
한 가족이라 의심치 않았는데 그 믿음을 배반당했다, 자상하기 그지없었던 사촌 형님의 진심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중에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건가, 어째서, 왜, 무슨 까닭으로. 꼬리를 물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생각들은 소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인간은 서로를 배반하고 물어뜯지.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의심하고 먼저 이용해 먹는게 좋아.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 말을 한 자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새카맣게 얼룩져 눈이나 코 같은 생김새가 죄다 뭉개지고 말았다. 헌데 그 자의 옷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두꺼운 흰색 비단에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을 은사로 수를 놓아 매우 화려했다. 소매통은 좁았고 옆으로 늘어지는 허리띠는 눈에 띄는 붉은 빛깔이었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들어 얼굴을 보려 하자 역시 얼굴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공들여 기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었거나, 끔찍하게 싫어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린청이 손을 들어 맨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인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맙소사, 안즈.』
『꼭 믿어야 할 까닭도 없지.』
『그렇지?』
약간의 희망을 담아 린청이 말했다.
하지만 그가 믿어도, 믿지 않아도 어차피 진실은 하나밖에 없다. 진실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친절한 사촌 형님의 속내를 이해해 보겠다며 주관적 해석으로 덧칠해봤자 어차피 진실은 하나다.
하지만 병들고 비뚫어진 심성을 가진 나는 그걸 아이에게 솔직히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좋은 낯짝을 하고 안심해도 된다 미소를 지을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다. 진실은 하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말하는 투가 마치 악당에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텐데. 잡아떼면 그만인데. 속았노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은사로 덮힌 사내의 옷자락이 걷는 동작에 따라 인위적으로 펄럭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호쾌한 동작이었다.
그러니 견디기 힘들다면 아니라고 부정해버려. 그깟 진실, 하등 도움도 안 되는구먼.
역시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사람의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자! 이리 오너라. 귀여운 노예야. 오늘도 내 심부름을 해줘야겠다.
그 옆에서 사내의 부름을 받고 조르르 뛰어가는 어린애가 있었다. 보기좋게 살집이 있고 손발이 통통했다. 피부는 씻지 않은 것처럼 검었는데 햇빛 탓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원래 그런 빛깔이었다.
오늘도 둘째 도련님에게 설탕과자를 가져다 드리렴. 네가 가져가면 도련님은 무척 기뻐하실 거다. 도련님은 널 무척 귀여워하시니까. 맛있어 보인다고 가져가는 길에 몰래 집어먹지 말고... 그럼 단단히 벌을 받게 될 거다. 신께서 보시고 너에게 창자가 썩는 병을 내리실테니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허튼 짓은 하지 않도록.
내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생각났다. 아이는 친절하신 도련님으로부터 과자를 절반이나 나눠 받았다. 그리고 허락을 받아 도련님 앞에서 나눠받은 과자를 게걸스럽게 전부 먹어치웠다. 설탕이 뿌려진 과자는 부패하기 직전의 과실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어 노예는 감동하여 울먹였다. 그깟 진실, 소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하여 신께서 소년의 말대로 행하사 살집 검던 아이는 급체 증상으로 고생을 하다 보름 뒤에 죽었다.

사인이 무엇이더냐. 혹시 독은 아니더냐.
주인된 자가 얼굴색이 변해 물었어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가엾게도 맹장에 탈이 났사옵니다. 사인은 그 때문인 줄 아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내 앞으로 설탕으로 버무린 당과가 놓여졌다.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절로 났다.
『이, 이건?』
『사촌 누이가 준 과자야. 너와 나눠먹으라고 단단히 일러두더군. 하여 그리 하겠다 휘사와 약속했다.』
『하얀 가루가...』
『이곳 사람들은 설탕 귀한 줄을 몰라. 설탕물에 조리고 다시 그 위로 설탕물을 끼얹다니.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것 같은데 여자들 입맛엔 맞는 모양이지. 그 하얀 가루도 설탕이야.』
과자는 얇은 속지로 낱개로 포장되어 상자에 모두 다섯 개가 들어가 있었다. 기름기를 잔뜩 흡수한 포장지를 벗기자 짙게 색을 낸 꽈배기 모양의 과자가 모양을 드러냈다. 설탕 가루가 눈송이처럼 뿌려졌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검정깨도 솔솔 뿌렸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 부스럼처럼 튀어 오른 모양새로 설탕을 가득 묻혔다. 손가락으로 툭툭 털자 덩어리져 떨어졌다. 진짜지 이 나라 사람들은 설탕 귀한 줄을 모른다.

『이걸 나 주려고 여태 기다린 거야?』
『휘사의 부탁이었으니까.』
『그거 참... 감, 감사한.』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차마 손이 가지 않는 까닭은 배 앓다 죽은 소년이 오늘에 이르러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한 음식을 잘못 집어먹은 것처럼 배가 꼬이고 아파왔다. 설사는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찬 물을 벌컥 들이켜서 그런 거라며 야단치고 배를 따뜻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사흘 뒤 노예 소년은 구부린 다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많이 아파했지만 열은 없었기에 다들 꾀병이라 했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항문에서 피가 흘러내리다 잠시 뒤 멈췄다. 옷을 벗겨보지 않은 어른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이튿날 아이가 반짝 눈을 떴다. 여전히 배가 아프다 했고 밥을 먹지 못했다. 죽을 먹였으나 토했다. 그래도 스스로 뒷간에 다녀올 수는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기에 나 외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증상이 다시 악화되었다. 아이는 배가 아프다며 쉬지 않고 울었다. 당황하여 약을 구해다 먹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새벽부터는 아예 의식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주변에서 불평했다. 또다시 이틀 뒤에 가까스로 눈을 떴으나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물을 먹이려 하자 삼키지 못했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기에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있잖아. 나, 결국 죽는 거야?」
「단순 배탈로 사람은 안 죽어. 내일이면 멀쩡해질 거야. 걱정할 것 없어.」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만 자렴. 내일이면 건강해질 거야.」
거짓말을 속삭이는 내 목소리엔 아무런 떨림이 없었다.

믿고 싶은 걸 믿어. 보고 싶은 걸 봐. 진실은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당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자는 달콤했다.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자 린청이 쓰게 웃었다.
『휘사도 아마 쉽게 먹을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우리더러 먹으라고 양보했겠지. 받는 사람 입장도 생각을 해줘야지, 내가 볼 적엔 이건 그냥 독극물이야. 아니.., 진짜로 독이 들었다는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내 말은 우리 같은 사람의 입맛엔 안 맞는다는 거야.』
소년은 팔을 휘저으며 얼른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사무월 행사가 가까워지니까 여자애들 사이에는 꿀을 넣은 과자나 그림이 그려진 손수건 따위의 간소한 선물을 돌리는게 유행이라나봐. 서로 잘 봐달라는 거겠지. 동시에 상대방 전력을 염탐하기도 하고... 앞에서는 호호 웃으면서 뒤로는 발톱을 갈고 있다며 휘사가 흉을 보더라.』
『그렇구나.』
내 동작을 따라 당과를 입에 문 린청은 찬 바람을 맞았다는 식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고. 신 맛의 과일보다 이쪽이 몇 곱절 괴롭다.

『그나저나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즈.』
『그게... 주문하고 찾아가지 않는 옷을 거저 준다는 곳이 있다길래 어렵게 숙희 님께 허락을 받아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곳에서 그만 물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실수로 사람을 밀쳤어.』
『저런! 그래서? 상대방이 화가 나서 널 때린 거야?!』
『화가 날 만도 했지. 사실 내가 많이 놀라서 제대로 사과를 못 했어.』
즉석에서 거짓말을 술술 지어내며 바닥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얼룩이 흡사 배 아프다 우는 아이의 비명을 닮아 보여 나는 무심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분명히 단편이었는데... 아무리 자잘하게 잘랐다고 해도 저 숫자는 도대체 뭐냐굿! 다음이 60회구놔. 얼씨구놔.

Posted by 미야

2015/08/10 15:53 2015/08/10 15:5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73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 30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4968
Today:
32
Yesterday:
110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