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감각이 둔해졌다.
어쩐지 같은 자리를 반복하여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피로감 탓인지 이 나무가 저 나무처럼 보이고, 저 나무가 이 나무처럼 보였다. 특정 위치를 짐작하게 해줄 지표물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지속적으로 그 모양을 바꿔갔다. 덕분에 방금 전에 지나쳤던 상수리나무가 바로 앞에서 보이고 있다. 착각이라 여기면 그만이겠지만 다시 그 상수리나무가 옆에서 보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당혹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저 위에선 응축된 물방울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대신 회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뻘로 변해가는 진흙이 발을 삼키려 했고, 물을 배불리 먹은 수풀이 그 키를 한 뼘이나 더 높게 키우려 했다.

《흐, 흐, 흐.》
이 와중에 녀석의 키득대는 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른쪽에서 들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엉뚱한 방향으로부터 반사된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다.
『야! 이봐~!!』
내 목소리 또한 되울림이 심했다. 이 상태에서 소리만 가지고 방향을 짐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손등으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주위를 살폈다.
낭패다. 여전히 방향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번에는 어둠이 내려앉은 수풀 속에서 기이하게 반짝이는 짐승의 눈빛이 나타났다. 토끼나 사슴처럼 온화한 품성의 동물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해가 지고 나서, 그것도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풀을 뜯어먹으려고 어슬렁거리는 사슴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외궁의 한 부분인 이곳에서 사람을 헤치는 늑대 무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닐 리는 없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가끔씩 황궁 사냥터로 이용되는 주취에서 먹이를 찾는 멧돼지가 내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곰이 목격된 적도 있어서... 여기까지 이르자 잡생각이 싹 달아났다.
목표 하나만 바라보며 쫓다 사지 한 가운데를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다.

숨을 삼키며 일단 멈추어 섰다.
적손이 미쳤다 - 여기에 대한 사실 추궁은 나중이다. 뜀박질을 멈추자 잊고 있던 무릎의 통증이 잘 벼려진 도끼날처럼 피부를 사정없이 찍어댔다. 한숨인지 들숨인지 모를 호흡을 가쁘게 내뱉으며 붉게 핏물이 든 무릎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이런데도 나, 정말 무식하게 움직이고 있었구나. 손가락으로 조금만 눌렀을 뿐인데 비명이 나오려 했다. 자갈로 짐작되는 뭔가가 피부 안쪽에 박혀있다. 곪는 건 기정사실이겠다. 허나 지금은 바지를 걷어 올려 상처부위를 직접 볼 짬이 없다.
『제기랄.』
그보다는 피 냄새가 짐승을 가까이 부를까 걱정스러워졌다. 내리는 비가 냄새를 희석시켜 주겠지만 짐승의 코는 인간의 그것보다 몇 곱절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진흙을 들어 바지 위에 덧발랐다.

퉁-

기분 나쁘게 히히 웃는 소리와 같이하여 부러진 나뭇가지가 코앞으로 떨어졌다.
기왓장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큰 폭풍우가 부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굵은 나뭇가지가 멋대로 부러질 리가 없다. 사색이 되어 앉은 자세에서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그보다 더 굵은 조각이 또 떨어졌다. 재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깨를 맞았을 터, 일어서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늙은 원숭이의 얼굴이.
『당장 내려왓! 목을 졸라줄테니!』
《싫습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여기까지 올라와 보시던지.》
저 위에 자리 잡은 그것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재차 발을 굴렀다.
장난이 아니다. 범상치 않은 와지끈 소리가 들리자 나무로부터 허겁지겁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어른 허벅지 두께의 가지가 갈기갈기 찢긴 모양새로 낙하했다.

《약해.》
그것이 중얼거렸다.
《약해빠진 주제에.》

궁정악사 누박기가 겁을 집어먹은 것도 다 까닭이 있었다. 저 정도의 괴력이라면 유령이 아니라 산 사람의 다리도 어렵지 않게 몸통에서 떼어낼 수 있을 터, 나도 모르게 히익 소리를 내며 현실을 직시했다.
무슨 생각에 빈손으로 저것을 쫓아왔는지 모르겠다. 마냥 소리를 지른다고 제압이 될 종류도 아닌데. 막연하게「나를 헤치지 않을 것이다」믿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위로부터「손을 대지 마라」명령이 있었다지만 요괴의 부족한 이해력으로는 그 명령을 단순 무식하게「손만 대지 않으면 괜찮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지금처럼 부러진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는데 어쩌다보니 그만 인간이 머리를 맞았습니다, 이러면 속수무책이다. 깨닫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그만해! 이곳 루은에서 신룡의 의지 없이 인간을 죽인 요괴는 큰 벌을 받는다! 그저 실수였다고 해도 말이다!』
위를 흘끔거리며 그렇게 외쳐 나를 보호하려 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안도감이 드는 대신 망했다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수풀을 좌우로 헤치고 길을 찾았다. 진흙에 발이 주룩 미끄러져 걷는 속도가 아까보다 더 느려졌다. 비웃는 목소리는 코앞으로까지 따라붙었고, 덕분에 안 하던 실수까지 저질러 동서남북 위치를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북쪽이라 함은 언덕의 높은 곳을 의미하던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늠하여 동쪽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저게 건물의 불빛일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미칠 노릇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았다고 가정하고 현재의 내 위치를 상상해봤다. 이쪽으로 계속 걸으면 아마도 현선당이 나올 것이고... 아니다. 이 언덕의 기울기는 그 짐작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파르기가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
영문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 왼편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동시에 큰 돌이 떨어졌다. 아니, 단단한 돌이라고 생각했지만 흙속에 파묻힐 적에 내는 소리가 달랐다. 돌처럼 무게가 있으나 표면이 단단하지 않고 물렁거린다. 적당히 탄력이 있고, 떨어지는 순간 넓게 퍼졌다는 느낌이다. 흡사 동물의 사체와도 같은... 에잇, 돌아볼 때가 아니다. 떨어진 것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움직이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언덕을 오르는게 끝나고 이제 막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뛰어서 저 아래까지 내려갈 자신은 없다. 신발을 벗어 두 손에 쥐고 일부러 미끄럼을 탔다. 모양은 흉하지만 이 방법을 쓰는게 속도가 더 붙는다. 물론 안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처음에는 분명 똑바로 앉아 미끄럼을 탔는데 어느 순간 엎드린 모습으로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옆으로 몸을 비틀었더니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숨을 삼키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팔을 위로 뻗어보았다. 그러자 튀어나온 뭔가에 엄지손톱이 걸리면서 손톱이 절반쯤 위로 들떠버렸다.
『아아악!』
겨우 손톱인데 비명이 나온다. 눈물도 나왔다. 인간의 몸은 참으로 약해빠졌다.

울음을 삼키며 언덕을 전부 굴러 바닥까지 당도하고 보니 드디어 자갈이 깔린 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모르겠다. 숨넘어갈 것 같은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좌우방향이 아닌 위쪽을 먼저 살폈다. 더 이상 묵직한 뭔가가 떨어지는 건 사양이다. 그렇게 위쪽을 흘끔거리며 아픈 다리를 질질 끄는데 누군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구냐!』
남성용 우장을 든 자의 체구는 작았다. 주변이 어두워 여기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내 또래라고 짐작할 뿐이다. 어둠은 상대적으로 공평했기에 상대 또한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경계의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정체를 밝혀라. 사람이냐, 아님 짐승이냐!』
심한 말이다. 길이 아닌 곳으로부터 불쑥 나타났다고 해도 두 다리로 서있는데 나더러 짐승이냐 묻다니.
『사람이다.』
그래도 흙투성이 몰골이니 짐승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혹시 또 아나, 저 소년은 안경이 필요할 정도로 시력이 나쁠 수도 있다.

『응? 이게 누구야. 안즈?』
예상 외로 소년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어? 누구?』
『나야, 린청. 나라고. 도대체... 이런 시각에 무슨 일이야?!』
『린청?! 너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어!』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여학생부에 잠시 그곳에... 아니, 것보다. 너, 그 누더기 몰골은 뭐야.』
소년이 보폭을 크게 하여 빠른 속도로 나에게로 다가왔다.

Posted by 미야

2015/08/31 20:15 2015/08/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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