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미친 짓이었다.
비 오는 날 늦은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저 혼자 지붕으로 올라가려다 실족하여 죽다, 향년 열 살.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이 돌연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눈 깜빡하는 순간이었음에도 - 실제로는 눈 깜빡일 새도 없었다 - 여러 가지 잡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중 하나는 이대로 죽으면「너무나 바보스러운 사인(死因)」으로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회자될 거라는 거. 그리고 머리가 먼저 떨어질지, 아니면 다리가 먼저 떨어질지에 대한 여부였다. 아무래도 머리보다는 다리부터 떨어지는 쪽이 살아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니, 것보다 이러면 떡을 잘못 삼켜 죽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와아아앗?!』
외마디 비명과 같이하여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기적처럼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렸... 아니, 나를 잡아챈 건 나뭇가지가 아니고 기다랗게 생긴 손가락이었다. 손등으로는 짙은 갈색의 털이 소복하게 돋았고 손톱은 짧았다. 손의 주인이 원숭이라고 하면 그런가 하고 수긍할 것 같다. 그런 것이 내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 어, 어!』
안심하기엔 일러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물 먹은 천의 바느질 부위가 뜯어지는 소리를 냈다. 옷이 찢어진 길이만큼 내 몸도 아래로 축 처졌다. 위로 당겨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을 질끈 감았다. 충격이 잠시 유예되었을 뿐, 진짜로 떨어진다 - 낮에 달리기를 하다 삔 발목이 낫지도 않았는데 종아리 위에까지 화끈거리는 충격이 삽시간에 번졌다.
『컥......!!』
시커먼 흙탕물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최고로 멍청한 죽음」으로 알려지는 걸 면했다는 안도감은 둘째고 하반신이 활활 타는 모닥불에 통째로 던져진 것 같았다. 신음을 삼켜가며 몸을 똑바로 뒤집으려 했지만 당장은 무리다. 무릎부터 닿아서일까, 바지에 붉게 피가 비쳤다.

《이럴 거라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맨발인데다 원숭이와 유사하게 생긴 손을 가진 정체불명의 그것이 쯧쯧 혀를 찼다. 목소리는 머리 위 높은 장소에서 들렸다. 그것은 바닥으로는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저 위에서 나뭇가지를 밟고 쉬지 않고 이동을 하는지 잎사귀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도 머리를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머리를 다쳤다면 지금보다 더 바보 멍청이가 되었을 테니 그랬다면 정말 슬펐을 겁니다.》
『심하군. 아파 죽겠는데 사람 약 올리는 거냐?!』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먼저 놀렸던 건 그쪽 아닙니까.》
야유하며 그것이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어댔다. 어쩌면 분을 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았던 빗방울이 일시에 좍 쏟아져 내렸다. 사방이 물이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차가운 물이다.

《방금 전 뭐라 하셨죠. 케케묵어 낡은 원망 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뭔가 단단히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쪽이 왜 원망합니까? 원한을 가진 건 이쪽입니다.》
코와 입으로 흙탕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는 걸 알아도 입을 얌전히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과거에 살해당한 건 나다. 엄연히 따지면 내 쪽이 피해자다. 병력을 동원해 건물에 불을 놓고, 무수히 많은 책들과 같이 안에 갇힌 사람들을 전부 불태웠다. 그런 주제에「아직까지 원망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이러는 가해자가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뼛속까지 차가웠음에도 타고 남은 재의 냄새를 맡았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의 환영을 보았다.
불길에 휩싸인 도서관 한 가운데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 곳에 나를 던져놓고. 그 주둥이로 나를 원망한다 하였나.

『네 놈, 생긴 것도 이상한데 머리 또한 정상이 아니구나.』
《말씀하신 그대로 돌려드리죠. 당신... 머리를 얼마나 크게 다친 겁니까?》
그것의 목소리는 졸린 것처럼도 들렸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장가처럼 달콤하진 않았다. 반대로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젠 반병신 취급이구나. 악에 받쳐 나도 이죽거렸다.
『그래. 무너져 내리는 대들보에 맞아 머리가 절반은 날아가긴 했다. 하지만 기억이 잘못되진 않았다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있으시군요. 누가 누구를 불태워 죽였다고요?》
『너희들이 나를!』
원숭이의 손을 가진 것이 큭 소리를 냈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건 나쁜 짓입니다. 적손께서 늘 말씀하셨죠. 당신은 거짓말을 참 잘 한다고.》
『나 말고도 증인은 많아! 적룡군이 벽은국 수도까지 쳐들어와서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는 건 사실이다!』
《국경을 멋대로 넘은 건 사실입니다. 그걸 부정하지 않아요. 인정합니다. 허나 그들은 적손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던 겁니다.》
『보호?! 건물에 불을 지르는게 보호 행위라는 거냐!』
《그러니까 당신 머리가 잘못되었다는 거에요. 불은 밖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끔찍한 속도로 번졌죠. 제대로 기억해내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군 채 불을 지른 건 누구였습니까.》
『뭐?』
무릎이 저리고 아팠다. 그런데 왜 나는 가슴을 손으로 쥐고 있는 걸까.

불. 화재. 불바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짐승의 목소리가 낮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기억에 혼란이 온 모양이군요. 뭐, 이해합니다. 그 정도로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겠죠.》
그럴 리 없다. 결코 그럴 리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온전히 제정신이다.
《미친 사람이 스스로 미쳤다고 인정하는 거 봤습니까.》
원숭이를 닮은 그것이 흐흐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당신은 그저 그게 사실이겠거니 싶은 걸 믿고 있을 뿐이죠. 말로는 케케묵은 원한 따위 전부 다 잊었다고 하면서... 그리고 없었던 일인양 행동하죠.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서. 그러고 죽어버렸어. 그리고 제멋대로 다시 돌아왔어.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말짱하다는 얼굴로 주장해. 본인은 피해자라고.》
기분 나쁘게 키득대며 웃는 목소리는 나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럼 내가 가해자라는 얘기냐!』
제발 이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이러다 빗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 것 같다.
《당연하지. 당신 탓에 적손이 미쳤으니까.》
『지금... 뭐라고?』
《미쳤다고. 껄껄. 한참 전에 사단이 나버렸지. 완전히 돌았어. 신룡이 화를 냈고 대전 한 가운데로 벼락이 내렸다. 여기서 누가 제정신일 수 있지? 너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깔깔. 원한이 없다고? 원념 덩어리인 주제에. 아니다, 내가 원념 덩어리지. 그렇군. 그랬군. 다들 사이좋게 미쳤구나. 그거 좋네. 깔깔.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잘 됐네, 진짜 잘 됐어. 아하하! 그대도 알고 있겠지? 황제가 미쳐 날뛰는데 적룡 외에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 덕분에 아랫것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필사적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후우.》
『돌아와! 이리 돌아와서 날 보며 똑바로 말해, 이 미친 것아!』

하늘을 찢으며 번개가 쳤다.
저 섬광 속에. 저기에.
갑자기 시야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그것의 얼굴이 똑바로 드러났다.

고통을 참으며 어떻게든 일어났다. 이를 악물고 찌르르 울리는 다리를 끌며 웃음소리를 따라갔다. 제대로 쫓아가고 있다는 확인 같은 건 없었지만 이대로 저것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이 아닌 곳을 걸으며 꺾어지려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15/08/28 21:21 2015/08/28 21:2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8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275 : 276 : 277 : 278 : 279 : 280 : 281 : 282 : 283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9381
Today:
1087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