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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흥이 깨졌다.
오남은「귀양」운운하는 태영에게 구경거리를 적극 권하기가 난감해졌다.
예쁜 여자도, 맛난 풍토 음식도 그다지, 소년은 주체못할 지경으로 넘쳐나는 시간을 따분해할 뿐이다.
「난감하네.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데. 《미스트》로부터 연락도 없는 상태고.」
오히려 태영이 관심을 보인 건 미인대회가 아닌, 지나가는 삼색 뚱땡이 암컷 고양이였다.
『여기 고양이가 있어, 오남!』
그러더니 쭈쭈 소리를 내며 낯선 고양이의 턱을 만지려 들었다.
『쏘시지를 주고 싶다.』
태영에게 번쩍 들어 올려진 길고양이가 니아옹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이 임박하자 어느새 광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환호성이 터지고 공중에서 준비된 꽃가루가 뿌려졌다. 코앞으로 적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종루에서 종까지 치고 있다. 덕분에 귀를 막아도 시끄럽고, 막지 않아도 귓청이 떨어질 것처럼 얼얼하다.
마침내 미인이 탄 가마가 멀리서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소리가 한층 요란해졌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가운데 군중들이 가마를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앞에 선 사람을 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접근하지 말라며 행사 진행자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현장 통솔은 엉망이다. 개 껌을 씹겠다며 달려드는 강아지의 꼬리를 어린애가 힘겹게 잡아당기는 꼬락서니다. 덕분에 맨 앞줄의 가마가 너울을 만난 것처럼 좌우로 요동쳤다.
가마 위에 올라탄 미녀가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손잡이를 움켜잡는게 멀리서도 보였다. 당혹감을 감춘 채 애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마당에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소리가 사방으로 반사되어 더욱 웅장해졌다.

이런 식의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다. 내심 당황한 오남은 한 발 뒤로 빼려 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걸? 이래선 축제 어쩌고가 아닌데. 까딱하다간 깔려 죽겠군.』
『남의 일처럼 얘기할 때가 아니야, 오남. 우웃, 방금 발을 밟혔어!』
처음 이 두 사람은 골목 뒤쪽으로 자리를 잡고 남의 집에 불났다며 멀찍이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을 확 떠밀었다.
불쾌감에 뒤를 돌아보고 따지려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밀쳐졌다. 어, 어 하는 순간 어느새 100보 거리를 떠밀렸다. 휩쓸린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 틈새로 몸이 꼈다. 끼기만 했던가. 납작하게 눌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 상태에서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어딘가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버티고 서서 두 다리에 힘을 꽉 줬지만 격류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신발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사람의 얼굴이 휙휙 바뀌고 주변 건물의 모습이 휙휙 변해간다. 이대로는 멀미가 날 것 같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텐! 텐! 여기서 빠, 빠져 나가야 해.』
오남은 힘을 힘껏 팔을 뻗어 태영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태영의 손이 이렇게 굵고 포동포동했던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힘을 주어 끌어당기고 보니 가슴 풍만한 아줌마가 잔뜩 삐져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마당에 또 성추행이냐! 이 빌어먹을 옷 장사꾼아!』
고함소리는 뒤쪽에서 들렸다. 아니, 앞쪽이다. 아니면 그 옆이던가... 아무튼.
얼른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욕설이 들린 방향으로 헤엄쳤다. 하지만 태영이라 생각되는 머리통은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시야에서 계속 멀어져갔다. 잡힐 듯 말 듯, 이런 수준이 아니다. 거대한 힘이 그냥 확 채갔다.
『헐.』
의외로 포기는 빨랐다. 보호자가 필요한 코찔찔이 어린애가 아니니 어떻게든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것이다.
지금은 그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남은 자신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분명 시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앞뒤로 납작하게 눌린 시체. 그 전에 무리에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해야 한다.

체면불구하고 옆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세게 밀었다.
산소부족으로 안색이 파랗게 변한 다부진 몸집의 사내가 통증을 느끼고 오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는 넋이 절반은 나가 왜 남의 옆구리를 찌르느냐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다만 무생물이 운동 에너지에 반응하는 것처럼 - 무거운 돌을 밀면 약간은 움직인다 - 땀을 비오듯 흘리며 옆으로 한 발자국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그것으로 오남 주변으로 여유가 생겼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남자가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하자 자신은 두 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자의는 아니다. 자꾸 뒤에서 밀어대는데 견딜 재주가 있나. 어느새 포옹하듯 밀착하여 뜨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내가 뿜는 콧김이 불쾌하게 얼굴에 닿았다. 마찬가지로 오남 또한 뜨뜻한 입김을 사내의 목덜미에 내뿜었다. 하여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몸을 비틀어댔다. 그럴수록 부딪치는 팔뚝과 비벼지는 허벅지의 느낌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끔찍했다. 시큰거리는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마의 행진이 인파에 밀려 광장 안쪽으로 쉽게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군중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가마를 노리듯 돌진한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 죽겠어~!』
오남의 비명은 환호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결국 산소부족으로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버린 그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이런 오남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건물 옥상으로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소동의 한 가운데를 내려다본 것이 아니다.
가마 위에 선 곱슬머리의 아가씨가 밀려오는 토기를 참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속으로 외치는 말은 사.람. 살.려. 느끼는 것은 동질감.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입가를 막는다. 동시에 뺨이 볼록해졌다.
아가씨의 위급함을 눈으로 본 것도 아니면서 가마를 메고 있는 가마꾼의 얼굴 또한 홀쪽하게 변했다. 이 마당에 그녀가 구토를 하면 뜨뜻미지근한 국물이 떨어질 장소야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가마꾼은 꾀를 낸답시고 어깨에 들쳐 멘 무거운 가마를 슬그머니 옆으로 기울였다.

몸무게가 옆으로 쏠리자 비틀거리는 여자의 동작이 더욱 커졌다.
이제 그녀는 필사적이다. 머릿속으로 경전을 암송하며 울렁거림을 진정시켜보고자 기를 쓰지만 파도치는 손바닥들이 가마를 쿵쿵 찍어대자 빠른 속도로 한계점에 이르렀다.
《안 됩니다, 안 되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멀미라도 해봐요, 당장 탈락입니다.》
확성기 소리에 반응하여 이제 여자는 자신의 손등을 피가 나도록 꼬집었다. 경전 대신 원주율을 외운다.

이것이 미인대회.
8년마다 도래한다는 비타아른의 명물 축제다.

『오남, 오남!』
절반은 정신을 잃어 고개를 뒤로 젖혔던 오남이 목소리에 반응,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고 몸을 추슬렀다.
그래봤자 의식이 가물가물한게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렇게 기절한 채 있을 때가 아니라고.』
『기절하지 않았어.』
『흰 눈깔 뒤집고 있었으면서 어디서 거짓말이야. 당장 거기서 나와. 아니면 너, 분명 후회한다.』
말이 쉽지. 나도 이런 곳엔 있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태영이 숨을 들이켰다.
『아... 저 여자, 토한다.』
탄식과 같이하여 얼굴로 뜨뜻한 것이 쏟아져 내렸다.

Posted by 미야

2015/10/04 19:15 2015/10/0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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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시선으로 날 보는데.』
『눼, 눼. 어련하시겠수.』
그렇게 비꼬는 까닭이 뭔데. 오남은 기분 나쁘다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세상의 모든 여인은 잠재적 고객이야, 텐. 아무렴, 내가 이상한 마음먹고 수작질이라도 할 거 같냐.』
기가 막힌 나머지 태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야, 이 좇밥아. 그게 수작질이 아니면 뭐냐. 3년 내내 기름에 닭을 튀겨 토기가 올라오도록 느끼한 아저씨가 어디서 상큼한 오이피클 흉내를 내고 앉았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너, 안경 필요한 거 아니야?』
『아이 넷을 낳은 아줌마를 상대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하트를 마구 날린 사람은 너라고, 너!』
『하트를 날리는게 어때서. 미래의 고객을 허투루 대할 수는 없지.』
『닥쳐. 그 아줌마가 한 푼도 안 쓰고 200년간 저축해야 살 수 있는 엄청난 옷을 파는 주제에.』
『너야말로 공짜로 얻은 스콘이 맛있다며 와구와구 먹어치운 주제에.』
『빵은 맛있었어.』
『그런데 뭐가 불만이야.』
『뭐가 불만이긴. 오남, 네놈의 존재 자체가 불만이다.』
오고가는 대화 자체는 살벌했지만 표정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벌어지는 외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말로 투닥거리며 싸우는 건 그만큼 서로가 익숙해서다. 우유를 마신 뒤에 내 입 냄새를 맡아봐라, 하아~ 이러고 애들처럼 싸우는 관계다.

팔을 깍지 껴서 머리 위로 올린 태영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언덕을 내려갔다.
배부른 상태에서 휴식도 취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노곤했다. 과잉 영양은 필연적으로 졸음을 불러 일으켰고, 그늘에 앉아 또 쉬고 싶어졌다. 축제? 미인대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그대로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팔을 높게 들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어깨에서 따악 소리가 났다.
오십견이 생길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시험 삼아 좌우로 팔을 빙빙 돌렸다. 그래봤자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상자를 나른 것도 아니니 근육을 풀어준다고 해봐야 쓸데없다.

『어이, 오남. 것보다 미인대회가 다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야?』
『얘는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8년 축제를 즐기러 왔는데 맛도 보기 전에 마을을 떠나자고 하는 법이 어디에 있나.
앞으로 5일 남았다. 그동안 볼거리에 산해진미 먹거리가 넘쳐날 텐데 벌써부터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반칙 아닌가.
『예이, 예이. 즐겨야겠지요.』
『진짜지 뭐냐고, 야단맞은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진 표정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사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질색이라.』
태영은 캐묻는 오남의 시선을 피해 일부러 광장 부근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건 더 질색이고.』
게다가 애초부터 축제 어쩌고를 즐기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
뒷말을 삼킨 태영은 이번에는 걷는 속도를 빠르게 하여 언덕을 내려갔다.

애초부터 축제를 즐기려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사건의 발단은 중신관 이돌란이 나이 어린 소녀를 심하게 매질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는 도벽이 있다고 했다. 신전에서 향초를 훔쳐 시장에 몰래 내다 팔았다니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렇게 챙긴 돈으로 어려운 부모나 동생을 몰래 돕고자 한 것도 아니다. 소녀는 그저 자신의 이득을 챙겨 화장품이나 고가의 장신구를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애의 옷을 찢고 채찍으로 후려치는데 합당한 이유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젖가슴이 드러나는 수치를 입고, 등가죽에 흉터가 남도록 매를 맞는다.
그리고 그 벌을 내리는 신관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쾌락에 들떠 묘한 표정으로 흥분하고 있다.
그것이 성행위를 할 적에나 보이는 흥분이어서 태영은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는 다짐을 잊고 그만 체벌을 내리던 중신관을 옆으로 세게 밀치고 말았다.

「이 사디스트 변태 영감탱이. 어린애를 벗긴 것으로도 모자라 때리면서 흥분하고 있어.」
「지금 뭐라고?!」
「이따위로 하려면 신관 당장 때려 쳐. 어디서 좇을 세우고 어린애를 때리고 지랄이야. 네가 모시는 신의 정체가 사드의 신이라도 되냐, 이 변태야. 그게 아니라면 더러운 채찍을 가지고 여기서 썩 꺼져!」

죄인을 체벌 중인 중신관을 책망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발언 자체도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일을 수습하고자 불려나온 무늬만 공작 발리반이테 대공은 쓰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디스트라는 말의 뜻은 이돌란도 잘 몰랐을 거야. 저쪽에서 - 그러니까 환생대륙에서 쓰는 말이니까 말일세. 그 뜻을 알았으면 문제가 더 커졌지. 위대한 용신을 이상성욕자의 신으로 몰아세웠다고 신전 전부가 뒤집어졌을 걸. 그러니 사디스트에 대한 건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절대로 함구하도록 합세.」
그래봤자 은퇴한 노인네의 얼굴색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테이블을 주먹으로 콩콩 찍으며 공작은 난처하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영감탱이라고 한 것도 문제지. 이돌란 중신관 나이가 올해 겨우 서른둘이거든.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걸세... 게다가 그의 집안 내력엔 일찍부터 머리숱이 빠지는 문제가 있으니까... 뭐랄까, 자격지심에 울컥한달까.」
「대머리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다행이지. 거기까지 말했음 이미 전쟁이야. 자네는 어찌된게 입이 그렇게 험한가. 응?!」

모두로부터 쏘이는 듯한 시선을 받은 태영은 짐짓 뒷통수를 문질렀다.
「알았어요. 내키진 않지만 사과하면 되잖아요.」
「당연히 사과해야지. 하지만 이돌란 중신관은 프라이드가 높은 자라서 쉽게 사과를 받아주진 않을 거야.」
「그럼 아예 하지 말죠. 어차피 그딴 변태 자식에게 사과를 할 생각따윈 요만큼도 없었는데 뭐.」
「사과해야 한다니까! 심지어 신관을 때려치우라고 했다며. 그거 위험 발언이야.」
「아, 씨이! 그럼 어쩌라고. 중신관 그 자식에게 새로 가죽 채찍이라도 선물할까요?!」
「이보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가 아닐세. 자네 덕분에 황실과 신전 사이가 틀어지게 생겼는데!」

그래서 나온 결론은,
중신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먼 곳까지 가서 바람이나 실컷 쐬고 돌아오라는. 이른바 추방령이었다.

『할아버지 공작 각하께선 분명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했지만, 그 의중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 이른바 귀양이라고 하는 거겠지.』
『귀양?』
『옛날에 우리나라에선 높은 관직이나 신분을 가진 자가 죄를 지으면 먼 섬이나 지방으로 보내서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는 형벌을 내리곤 했어. 그걸 귀양이라고 해.』
듣고 있던 오남이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그 제스츄어는 긍정도, 부정의 의미도 아니었다.
『귀양이 그런 의미라는 걸 이해했어, 텐. 하지만 자네는 이곳으로 귀양 보내진 건 아니야. 왜냐하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란데가스로 돌아갈 수 있...』
도중에 말을 끊었다.
『이 멍청아. 돌아갈 수 없어. 할아버지 공작 말대로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면 신전과 황제가 대립하게 되니까. 신전에서 얼씨구나 기회로다 이러며 황제의 체신을 깎아내리려 할텐데 나더러 그걸 지켜보라고?』
태영이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갈 수 없어. 지금은 아니야.』
『태영.』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축제를 즐기고 싶은 기분인 것도 아니야. 이해하겠어?』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등을 구부정히 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9/29 21:26 2015/09/2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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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연휴가 코앞인데 심란하네요. 이모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검사 결과 폐암 말기라서 아무래도 퇴원이 어려우실 듯하다고... 원래 몸이 안 좋으셨는데 위암이나 유방암도 아니고 폐암이라 해서 다들 놀랐어요. ※


이후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몫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가게에 앉아 과일이 들어간 음료수를 주문했다.
비탈진 언덕 중간에 위치한데다 테이블에 앉아서 밖을 보면 높게 쌓은 축대밖에 보이지 않는 갑갑한 전경 탓인지 손님으로 미어터지는 다른 가게와 달리 앉을 자리가 넉넉했다.
다만 메뉴판에 적혀져 있는 가격은 예상보다 비쌌다. 짐작한 거에 두 배 가격이라 이 또한 바가지 상술이구나 의심을 품었는데 의외로 입안에 든 음료수 맛이 제법 괜찮았기에 태영은 불평하던 걸 금방 관뒀다.
사과 맛이 진하게 나면서도 달지 않았다. 감미료를 넣지 않은 100% 진짜다. 한 입 두 입 마시다보니 어느새 금방 절반 이상을 다 먹어버렸다.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는 건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에티켓을 가르치던 선생이 지금의 그를 보았다면 철부지 어린애처럼 그게 뭐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영은 애초부터 형식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는 타입이었고, 지금처럼 마음에 드는 맛있는 걸 손에 쥐었을 적엔 심리적으로 조급해져서 그런지 손으로 음식을 직접 잡아 뜯거나 밖으로 흐른 내용물을 스스럼없이 핥기도 했다.
지금도 물방울을 혀로 핥았다.

『맜있어?』
『끝내줘.』
『그거 다행이군.』
그 반대편에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파묻은 오남은 다리를 꼰 채 유료 판매되는 6장짜리 인쇄물을 펼쳤다.
이것은 파보(波報)라고 하는 것이다. 태영은 그걸 신문이라고 부른다. 허나 일간지라고 하기엔 그 성격이나 인쇄 상태가 매우 조잡하다. 화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 발행되고 있고 유익한 정보를 얻기엔 기대치가 낮은 편이다. 차라리 술집에 가서 마을 주민들의 술주정을 귀담아 듣는 편이 낫다 - 말버릇처럼 그리 말했지만 그래도 오남은 기꺼이 지갑을 열고 파보를 구입해서 읽곤 했다. 불쏘시개로밖에는 쓸모가 없다 치를 떨며 욕하는 주제에 실제로는 열렬한 구독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태영이 질문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15년 전통의 르랑르 양품점이 내부 공사를 마치고 다시 개업했다는 군. 열 다섯 명 한정으로 기념품을 제공,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입고 당신의 우아함을 뽐내세요... 라고.』
『경쟁자의 등장인가. 큰일 났네.』
호들갑스런 말투에 오남은 읽던 종이에서 흘끔 눈을 들었다. 그래봤자 태영은 음료수를 홀짝홀짝 맛보는 일에 여전히 열중해 있다. 단순히 기분 탓인가 헷갈려하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이래서 파보라는 거다. 공왕의 치세를 찬양하는 요란하고 지루한 글이 지면의 절반을 뒤덮었고 그 덕에 비타아른 공왕국은 하품이 나오도록 평화로웠다. 이곳의 왕은 똥도 안 싸고 방귀도 안 뀌나 보다. 자세히 읽지도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특별한 소식은 없고 밀의 수확량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는 예측이 나왔다. 그래도 8년만의 축제 탓에 물가가 크게 올랐다. 특히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며 시장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는지 여기 재정부는 물가 통제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좋은 태도는 아니다. 공급과 수요가 틀어지면 고통 받는 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다.
이후의 지면에선 성공적인 축제를 기원하며 여러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실었다. 신관부터 소젖 짜는 아낙네까지 한 목소리로 설레는 감정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 목소리들에 개성이 없다. 실제로 발품을 팔아 사람의 의견을 하나하나 귀로 듣고 지면으로 옮겼다는 느낌이 아니다. 목장의 여주인 안나의 정체는 실제로는 인쇄소 활자공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파보에 글을 적는 자들은 반드시 참 말만 하진 않았다.
그런데 특이하게 딱딱해진 빵을 스프로 만들어 먹는 요리법도 하나 실렸다. 뜬금없는 주제라 오남의 눈썹이 비틀렸다.
『웬 요리법?』
그래도 끝 무렵에 이르러 편집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굳어버린 빵을 활용하는 요리법은 황급히 마무리가 되고 근처 바린 가에서 도로 일부가 함몰되어 주저앉았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덕분에 지나가는 마차가 옆으로 굴러 사상 사고로 이어졌다. 변을 당한 마부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세 명이 크게 다쳤다. 다친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나 규모가 큰 잡화점 가게의 주인과 상속자인 아들, 그리고 동행한 하인이라 했다. 도로에 구덩이가 파였을 뿐인데 가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손님.』
다 읽은 파보를 접으려는데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곱슬머리 종업원이 다가와 오남과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계산을 마치고 그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인가 싶어 나름 긴장했다.
허나 꼭 그런 의미는 아닌가 보다. 눈치를 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말을 걸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콘을 새로 구웠는데요... 저어. 따뜻할 적에 드시면 맛있어요.』
귀여움을 강조하는 분홍색 앞치마를 걸친 종업원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태영이 마냥 신기했던지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했다. 그 모습이 과자를 굽고 있는 엄마를 훔쳐보는 어린애처럼 보여 오남은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거 맛있나요?』
『당연하죠. 제가 직접 반죽해서 오븐에 구웠답니다. 맛있어요. 저어... 그런데.』
새로 구웠다는 따끈따끈한 스콘은 확실히 핑계였다.
곱슬머리 여자는 자신의 귀밑머리를 손가락에 감고 빙빙 돌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결심했다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곳에선 후보자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거든요. 앞의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아서.』
여행자들에게 나름 친절을 베풀고 싶었던지 그녀는 뺨을 붉히며 사정을 설명했다.
『멀리서 축제를 보러 오신 거 맞죠?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우리 가게는 축제 행렬을 구경을 하기엔 자리가 나빠요. 목을 길게 내밀어봤자 올려 쌓은 축대밖에 안 보이니까요. 제대로 구경을 하려면 역시 광장으로 나가야할텐데 인파가 많은 까닭에 미리 자리를 잡지 않으면 힘들 거예요. 모르고 계신 것 같아 알려드리는 거에요. 구경을 놓치면 속상하실테니까요.』
『그렇군요.』
오남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여자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다시 말해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손등에 당장에라도 입맞춤을 하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손을 감싸쥐었다는 얘기다.
그 즉시 태영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여자를 대하는 오남의 목소리는 꿀이 잔뜩 발린 것처럼 미끄덩거렸다.
『친절하시기도 하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엽고 상냥하신 분.』
『어머나, 뭘 이 정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여자를 대신하여 태영이 테이블 아래서 얼른 발길질을 했다.
「짜증나, 이 성추행범.」
아무튼 걷어차인 정강이가 아파 붙잡은 여자의 손을 놓아준 건 결코 아니라는 말씀.

『그런데 꼭 광장으로 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제 눈앞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 계신데.』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테이블 아래서 태영은 다시 목표물을 노리고 발길질했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노려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살기를 내뿜는 황제폐하와 독대하면서 태연하게 과자를 주워먹던 사내다. 이 남자를 굴복시키려면 보다 강하고 다른게 필요하다. 이를테면 항아리에 든 독충 100만 마리 같은 거.
오남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당장 모시고 광장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어때요. 저와 같이 축제에 참가해 보는 건?』
『아유, 빈 말이라도 참 잘 하시네. 아이 넷을 낳은 나 같은 아줌마보고 예쁘다고 말해줘서 참 고마워요.』
『그런 말씀 마세요. 진심이니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았다. 포동포동한 살집의 여자는 기뻐하며 몸을 꼬았다.

Posted by 미야

2015/09/23 21:50 2015/09/2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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