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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으로 그는 비싼 옷을 파는 장사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여느 장사치로는 안 보였다. 옷을 파는 자가 호랑이 기백으로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분식회계 금지법안을 코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모르는 부정부패한 대소신료들 앞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찧는 백발의 원로대신 비슷하달까... 혐오감에 실망감, 짜증으로 뒤범벅이면서 밖으로 말은 삼가고 대신 차갑게 미소를 짓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일진대 그 속은「한 마디만 떠들기만 해봐.」다. 이른바 폭풍전야다.
쉽게 말해 웃는 얼굴이면서도 어디로 칼날이 튈 지 믿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군. 그 남자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는 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지만 그거야 겉 표면에 불과하고. 바삭거리는 과자 껍질 안엔 부드러운 카스타드 크림이 아닌 맵고 톡 쏘는 고추냉이가 알차게 들어 있다. 모르고 실수로 베어 문 날엔 입안에서 붉은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관두자고 하거나, 도망치자고 할 적마다 옆에서 세 번 안 된다고 말하라고 그랬~다?』
『오남, 너 또 말투 바뀌었어. 이번엔 궁중 노인네 말투야.』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소년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하긴, 제국의 황제더러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남자, 이 남자 운운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게다가 그는 분식회계가 뭔지도 모른다. 앞에서 비난의 눈초리를 던져봤자 까마득히 모르는 걸 어쩌라고. 학교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적은 있어도 재무제표 만드는 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워, 아저씨. 지금 눈에 힘주고 날 노려보는 거야?』
그러니 위엄 넘치는 눈빛으로 겁주기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청년은 팔을 위로 올려 목 뒤에서 손깍지를 꼈다.
『애시당초 이 몸께서「안 돼」라고 말해봤자 무슨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여기서 뭐라 한다고 귀담아 들을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손을 들고 외칠 뿐, 안 돼. 그러니 너는 네 맘대로 하시라고요.』
식탁에 앉아 손이 닿지 않는 소금 병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황제는 딱 세 번만 저 사내를 말려달라고 했다. 중도에 포기하고 툭 하면 도망치기를 잘하는 자니 옆에서 자극을 좀 줘야 한다나 뭐라나.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여야 한다거나, 우물에 독을 풀어야 한다거나, 여염집 아가씨를 납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을 거야. 하지만 들어보니 별 거 아니더군. 네가 보따리를 들고 여기서 도망치겠다고 할 때마다 세 번 안 된다고 옆에서 말만 하면 된다는 거야.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그래서 못할 것도 없겠네요, 라고 대답했지.』
『하아?!』
『그게 전부였다고. 진짜야.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한다. 그러니 안심해라, 오남. 그 남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막으라는 주문은 하지 않았어.』

피로감이 드러난 맨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뭘 안심하라는 거야, 뭘! 포인트가 빗나갔다고! 망할! 일개 옷장사에게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누! 요는 돌멩이를 던져 두 마리 새를 동시에 잡겠다는 거잖아!』
중신관을 상대로 트러블을 일으킨 김 태영을 데리고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는 여행이라고 얕잡아 봤는데.
실수다. 란데가스의 황제씩이나 되는 위인이「가서 잘 놀고 오렴.」이러고 손수건을 흔들어줄 리가 없었던 거다.
뭔가 있다. 촉이 온다. 도망치겠다는 의지를 꺾어야 할 정도의 중요한 뭔가가 이곳에는 있는 것이다.
8년 축제가 벌어지는 이 땅으로 별 거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해서 그를 보내고,
「무슨 꿍꿍이인 거야, 그 사내는!」
김 태영을 끌여들여 무려 세 번씩이나 도망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겠단다.

『나는 여성복을 파는 옷장사야, 태영.』
『옷장사라굽쇼? 솔직히 말해 난 네가 스파이라고 생각해.』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튀오나온 대답에 오남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내가 스파이라고.』
『그래. 스파이. 이곳 말로는 세락이라고 한다며? 발리반이테 할아버지가 그랬어. 오남은 세락이라고.』
『인석아. 무늬만 귀족이라고 해도 공작 각하에게 할아버지가 뭐냐, 할아버지가!』
『어...? 그럼 곤란한 거야? 저번에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인사했는데 나더러 뭐라 하지 않았거든.』
『내가 못 살아.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행여라도 담벼락에 엿듣는 귀가 없는지 주의하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세락이 아니라 세작이겠지. 신분을 감추고 어떤 대상의 정보를 몰래 알아내어 자신의 편에 넘겨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세작이라고 한단다.』
억울하다는 뉘앙스지만 부정은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고 태영은 생각했다.

그는 오남상회의 상단주다. 여러 번 말했지만 그의 가게에선 귀족이나 왕족들이 입을법한 매우 비싼 여성복을 판다. 사라사 비단 같은 원단과 보석들도 같이 취급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완제품인 옷을 판다.
그렇다면 드레스가 전시된 가게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동대륙 그 어디에도 옷을 걸어둔 가게가 없다.
일보 양보하여 엄선된 주문제작 방식이라 쇼 윈도우 룸이 달린 공간이 딱히 필요 없다고 치자.
무슨 놈의 상단주가 시장조사를 한다면서 맨손으로 돌아다니느냔 말이다.
그 흔한 종업원도 곁에 없고.
대신 옆에 붙은 건 검은 머리카락의 이단아에, 더하여 정체불명의 미스트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그들 주위로 작은 새가 날았다.
종류는 멥새나 참새 비슷한 종류일 거라 생각한다. 굉장히 작은데다 갈색의 털이 소박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뭇가지 위로 앉은 새의 모습에서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참새의 목덜미 뒤쪽으로 등 부위에 작은 혹이 달렸다. 그런데 평범한 혹이 아니다. 가만 보면 짐승의 눈을 닮았다. 눈꺼풀까지 달려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기까지 하고 있다.

《주인님.》
참새가 사람의 말을 뱉었다.
태영은 머리 위에 앉은 참새를 흘깃 쳐다본 뒤에 노골적으로 혐오의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니다. 저것은 그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으로 주인인 오남의 명령에 따르는 정령 같은 거라고 들었다.
하지만 투명한 날개를 가진 쭉쭉빵빵의 미녀를 상상하던 태영은 반발했다. 저런 흉악한 것을 정령이라 부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끈적거리고 껄끄러운 존재다. 미스트는 정해진 형태가 딱히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것에 기생한다. 때로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몸에 달라붙은 채 나타나 기겁한 적도 있다.
「정령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차라리 요괴라고 할 것이지.」
본능적으로 그는 소리가 들린 부분으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무서워서 피한게 아니다. 더러워서 피한 거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어쨌든 여기는 보는 눈이 많아.』
《그럼 장소를 옮길까요.》
미스트의 목소리는 어린 소년의 것과 흡사했다. 변성기를 맞지 않은 아주 어린애 말이다.
오남은 그러자고 하며 인적이 드믄 적절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10/22 16:19 2015/10/2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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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런단 말이오 - 상대방이 하소연을 하고 있지만 루안은 간질이며 들려오는 소리를 알아서 차단했다. 단추를 누르면 기계장치가 움직여 저절로 문이 닫히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문이 닫히면 듣고 싶은 것만 선별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신박한 재주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화병을 얻어 명줄이 짧아졌을 것이다.

그럼 일단 증거품인 신발을 보자.
높은 굽에 은도금을 한 리본 모양의 금속 장식이 달렸고 색은 부담스러운 핏빛 빨강이었다.
빨간색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베인 자국으로 흘러나온 듯한 선명한 핏빛에 가까웠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이런 건 잔칫날에도 신기 어려운 종류다. 구두의 주인공은 어지간히 튀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흉기와도 같은 뾰족하고 기다란 굽에 깨진 사탕 부스러기가 어지럽게 묻어 있다.
설탕 가루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발 냄새에 진한 설탕의 향이 더해져 의도치 않게 콧구멍이 실룩 움직였다.
『아유, 왜 더럽게 신발 냄새를 맡고 그러세요. 보는 사람 민망하게.』
다 그럴 만한 의도가 있어서 하는 일인데 짜증나게 사람을 변태로 몰고 있다. 루안은 더 이상 허튼 소리 말라는 의미로 오남을 쏘아본 뒤, 증거물용 봉지 주둥이를 밀봉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봅시다. 광장으로 들어오는 가마 옆에 서 있다가 머리에 토사물을 뒤집어썼다, 당신 머리 위로 구토한 여자는 당신이 가마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댄 범인일 거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까. 하여 흔들리던 가마에서 잘 익은 감처럼 떨어진 여자가 가만두지 않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당신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신은 상대가 여자인지라 아무래도 맞서 싸우기가 민망하여 그대로 달아났다, 그랬더니 여자가 뒤통수를 향해 신발을 벗어 던졌다... 맞습니까?』
『어우야. 요점 정리 엄청 잘하시네.』
오남은 원하던 물건을 10% 할인가격으로 팔겠다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해야만 한다면 경비원의 소매를 뜯어먹기라도 할 기세다.
하지만 루안은 거의 까무룩 잠들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만큼 피곤했고 짜증이 났다.
『그렇군요.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세상에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그러나 경비원 루안은 오히려 왜 화를 내느냐며 반문했다.
『악담이 아니에요. 이건 엄연히 현실적인 겁니다.』

8년에 한 번, 그들은 성대한 축제를 열어 천하제일의 미인을 뽑는다.
『여기서 우승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행자인 당신은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말이죠... 그냥 꽃다발에 우승 트로피만 받고 끝날 것 같아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남은 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음... 아마도 엄청난 상금도 받겠죠?』
그래서 그 여자는 그렇게도 화를 냈을 것이다. 힐끔 곁눈질하며 속으로 이거다 싶은 구체적인 금액을 떠올렸다.
『혹시 우승 상금이 저택 다섯 채를 한꺼번에 구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가요?』
『집 다섯 채는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아니라는 얘기에 다시 이거다 싶은 구체적인 금액에다가 궤짝으로 금은보화를 덧셈했다.
『그럼 지방 영주님의 1년치 봉납금 정도가 되나요.』
『돈 문제가 아니라는데 자꾸 그러시네.』

우승자는 모두로부터 엄청난 축하를 받으며 왕궁으로 입궁한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공왕과 포옹을 한 뒤에 그 우편에 서게 된다. 다음 축제가 열릴 때까지 계속.

처음 반응은 허탈하게 웃는 것이다.
『공왕 우편에? 다음 축제가 열릴 때까지 쭈욱~?』
왕의 좌편에 서는 건 여왕, 혹은 왕비다. 그 우편에 서는 건 총리대신이고.
국정운영을 총괄하는 총리대신을 제치고 일개 축제 미인대회 우승자가 8년씩이나 왕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는다?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키득 소리를 내며 웃던 오남은 장난을 치듯 루안의 어깨를 톡 때렸다.
하지만 루안은 그게 농담이었다는 식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더하여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해졌다.
덩달아 오남의 얼굴도 뜨거운 화덕에 눌러 붙은 탄 냄비처럼 변해갔다.

『알겠다. 그렇다면 미인대회 우승자가 왕의 첩이 되는 건가요.』
질문을 던진 건 태영이다. 그는 아직 미숙한데다 경험이 없어 왕의 오른편에 선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다. 왕이 없는 세계에서 왔으니 거기엔 총리대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일개 첩과 총리대신의 위치를 나란히 놓는 우를 범했다.
당황한 오남이 소년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목소리를 낮추어 타박했다.
『야. 네가 살던 너희네 나라에선 첩이 왕의 오른편에 서있냐.』
『아니.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야.』
엉뚱하게 답변한 태영은 자신의 말실수를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그래봤자 루안은 너무나 졸린 나머지 판단력이 흐려져 태영의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뭐, 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라고는 해도 다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하고 있죠. 아무래도 공왕님께서 늘그막에 예쁘장한 손녀 같은 아이를 옆에 두고 귀여움을 보고자 하시는 것 같다고...』
『손녀!』
『실제로도 왕족처럼 우대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는 말을 들었어요.』
『왕족!!』
『그러니 상금 따위는 문제도 아닌 거죠. 이제 아시겠어요?』

이러니 우승후보에서 탈락한 여인이 그 원흉이라 짐작되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자 할 법도 했다.
그런 까닭에 루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든 빨간 구두 한 짝을 피 묻은 손도끼처럼 인식했다.
이 구두의 주인은 과연 계속해서 복수에 집착할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디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오남은 루안의 경고가 농담 따먹기가 결코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로 그는 죽을 수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그 여자가 우승 후보였나요?!』
『유력한 후보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제법 순위가 높았죠.』
『성격은요? 착하다던가, 순진하다던가... 아니면 모두에게 친절하다던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그들은 속으로 같은 내용을 생각했다.
그녀는 피처럼 붉은 구두를 신는 여자다. 그리고 그 구두를 흉기로 휘두를 줄 안다.

오남은 그 즉시 옷자락을 펄럭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겠다, 텐.』
『어째서? 생각보다 여기 축제라는게 보기와는 달리 참 재밌기만 하구먼. 지루하다 생각했던게 싹 사라졌어.』
『남의 집에 불 났냐?! 인석아!』
당연히 남의 집에 불 났다. 태영은 한가롭게 휘파람이나 불어댔다.
『에이, 화내지 말라고, 오남. 게다가 나에겐 그. 남.자.로부터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일이 있다고. 네가 관두자고 하거나, 그만두자고 하거나, 피하자고 말할 때마다 나는 세 번 안 된다고 말해야 해. 반드시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래서 부탁받은 그대로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줘.』
『지금 뭐시라.』
『그럼 말할게. 도망치겠다고? 안 돼.』
『......』

여기서 태영이 말한 그 남자는 란데가스 제국의 제1인자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이시다.

Posted by 미야

2015/10/15 21:03 2015/10/1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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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짬나는 대로 끄적이는 자급자족 습작입니다. 연재주기는 불규칙합니다. ※

미인은 그 발을 소제한 물도 달다더니... 순 공갈.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사고가 정지했다. 몸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미나가스트의 산적떼로부터 도끼로 머리를 찍어 죽이겠다 살해 위협을 받았을 적에도 손가락 하나 떨지 않던 그였지만 토사물 공격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뭐, 지금도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긴 하다만...

미인의 입에서 쏟아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악취가 진동하는 토사물을 머리위로 잔뜩 뒤집어쓴 탓일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등을 떠밀리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치우듯 광장 바깥쪽을 향해서 말이다.
완전히 귀신 장난이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거짓말처럼 행렬 뒤편으로 너무나 쉽게 밀려났다. 어, 어,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누가 안아들었다가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광장에서 밀려나 한적한 골목 어귀 부근으로 안착했다.

『오남!』
태영은 오남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뛰어 왔 - 다가, 코를 움켜쥐고 두 발자국 물러섰다.
여전히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인 그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 괘씸하게도 태영은 저 남자는 자기 일행이 아니라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고양이에게 줄 쏘시지를 사러 가야지.』
『야!』
비타아른 공왕국에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생겼다.

『동티가 났구먼.』
더러워진 머리를 닦으라며 수건을 건네던 마을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동티가 났다고 할 수 있을까.
동티란 원래 예부터 건드려선 안 되는 걸 잘못 건드려 스스로 재앙을 사는 걸 일컫는다. 쉽게 예를 들자면 마을 어귀의 수호 목을 잘못 베고 나무꾼이 열을 내며 앓아누우면 그걸 가리켜 동티가 났다고 한다. 여신에게 바쳐진 공물을 탐을 내던 사제가 은전에 손을 대자마자 신전 대들보가 빠지면 그게 바로 동티다.
『미인대회에 출전한 가마 가까이 서있었던게 전부인데 제가 재앙을 샀단 말인가요.』
『그러니까 동티지.』
일흔 살은 족히 넘겼을 것처럼 보이던 노인이 별안간 심각한 표정으로 이 빠진 입을 안으로 오므렸다.
오목하게 홀쪽 들어간 노인의 뺨을 보자 오남은 지레 겁을 먹었다. 재앙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건 아닐지 염려스러웠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번갯불에 튀겨지기라도 하나.
그런 속도 모르고 노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응? 손을 마주 잡자고? 그건 아닐텐데.
무슨 의미로 내민 손인가 싶어 오남은 잠시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심하네!! 새 수건도 아니잖아요. 헤어져 구멍도 뚫렸는데 물건 값을 달라고요?! 그냥 재수 옴 붙은 나그네에게 공짜로 친절을 베풀면 안 됩니까. 영감님... 진짜지 그렇게 각박하게 살면 안 돼요.』
『야 이놈아.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딨누. 늙은이 저승길 노잣돈에 보탠다고 생각하고 수건 값을 내.』
요즘 세상엔 친절에도 값을 매긴다.
입을 앙 다물고 동전을 건네주자 인상을 구기고 있던 노인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돈으로 손주에게 과자라도 사줄 생각인가 보다. 싱글벙글 웃으며 노인이 안주머니 깊숙이 돈을 찔러 감췄다.
그 망할 호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뻥 뚫려라, 속으로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눈을 흘 -
겼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럴 짬도 없었다. 그 동티라는 거, 아무래도 제대로다. 이번에는 삿대질을 하는 여자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저놈 잡아라, 쩌렁쩌렁 울리는 대사가 판에 박힌 듯 전형적이었다.

『멧돼지?』
불경하게도 오남은 일직선으로 공격해오는 빠르고 강한 날짐승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떠올렸다. 부릅뜬 눈에 눈물로 번진 화장, 땀으로 젖은 의상, 산발한 머리카락에 신경질적인 걸음걸이... 그런데 얼굴 생김새가 어디서 봤던 것처럼 익숙하다. 가만 헤아려보니 가마 위에서 그의 정수리 위로 토사물을 쏟아낸 바로 그 여자다.
이름 같은 건 모른다. 다만 어째서인지 저 여자가 판매사원으로 일한다는 사소한 것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고객들에게 새로 입고된 물건을 보여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상품을 선전하는 아가씨를 상상하긴 힘들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멧돼지다. 게다가 맛도 약간 갔다. 뒤집힌 눈이며 하얗게 거품이 올라온 입가가 아무래도 싱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멧돼지에 싱싱하다는 표현을 써? 보통은 생선 아니야?』
태영의 질문은 과감히 씹었다.
아무튼 잡히기만 하면 오도독 소리를 내며 한 입에 씹어 먹겠다며 그 기세가 매우 흉흉하다.

『뭐 하나 젊은이. 안 도망쳐?』
헌 수건을 새 수건 값으로 팔아치운 노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싱글벙글 웃었다. 오남에겐 재앙이었어도 그에겐 놓치기 힘든 여흥거리다.
『제가 왜 도망을 쳐야 합니까?』
『그럼 여기서 저 여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 먼지 휘날리도록 얻어터지던가.』
『그러니까 어째서 제가 얻어맞는다는 겁니까.』
『참말로 답답한 사람일세. 동티라고 했잖는가. 동티가 났다고. 그러니 달려. 어서 달리게!』
정말 모르겠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일단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고 보았지만 영문을 몰라 답답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다는 기분만 들었다. 축제라고 했는데. 미인대회라고 하던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흥분한 멧돼지에게 쫓기며 미로형의 골목길에서 행인들을 밀치며 전속력으로 달리기라는 걸 하고 있다.
『너! 거기 안 서!』
이제 멧돼지 여자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양손에 쥐었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어떤 각오로 왔는데!』
뾰족한 여성 구두가 돌멩이처럼 날아들었다.

『화가 났을 법도 하죠. 일생일대의 기회가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갔으니.』
나름 증거물이랍시고 구두를 들어 구분된 봉지에 담던 경비원이 쓴 웃음을 지었다.
구두는 노리던 오남의 머리통을 박살내지는 못했다. 멀리 던지기에는 여자의 팔뚝 근육의 힘이 한참 모자랐다.  
목표물을 빗나간 흉기는 대신 엉뚱한 행인을 맞췄는데 하필이면 사탕을 먹는데 열중해있던 여섯 살짜리 어린애였다. 정확하게는 아이가 먹던 큼직한 막대사탕을 명중시켰다. 애는 통곡했지만 하늘이 도왔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아이 엄마가 화가 단단히 났기에 구두의 주인은 소환당해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또 당신입니까.』
경비원 루안은 시커멓게 빛깔이 죽은 눈자위를 문질렀다.
좁은 침상에 누워 쪽잠을 즐기던 중 어린아이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놀라 눈곱도 떼지 않고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왔더니 피해자는 막대사탕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데 목격자는 아는 얼굴이다. 게다가 식초를 쏟기라도 한 것처럼 시큼한 냄새도 풍기고 있다. 악취는 루안의 참을성을 바닥으로 만들었다.
『듣자하니 가마를 마구 흔들어 우승 후보였던 여자를 떨어뜨려 탈락시켰다면서요.』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말입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악당을 잡아들였는데 말이죠. 그때마다 빼먹지 않고 듣는 말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바로 그 말이었어요. 오늘도 변함없이 듣게 되네요. 거 참.』
치솟는 짜증을 감추지 않은 채 루안이 쏘아붙였다.

Posted by 미야

2015/10/12 15:31 2015/10/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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