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급자족용 글입니다. (한숨-)


사무월 축제는 분명 과열되고 있었다.
「일상적안 장기자랑에 불과할 터인데 어쩐지 다들 목숨을 걸고 있군.」
수업은 중지되었다. 그런데도 다들 평소보다 곱절로 바쁘다. 들려오는 악기들의 음색이 서로 얽혀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노래 연습을 위한답시고 목청껏 악을 쓰는 이까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가끔씩 손바닥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시를 읊는 좋은 글월도 저마다 떠들어대니 참기 힘든 소음이었다.
화려한 장신구라던가 이상한(?) 옷을 반입하려는 자들도 늘어났다. 내재원이 자리한 곳이 이름만 황궁 안이라 해도 외궁의 문을 통과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텐데 금전과 권력으로 얼마나 밀어붙였던지 각지에서 내놔라 하는 장사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몰려들었다. 완전히 난리법썩이다. 난색을 표하는 문지기들의 호주머니로 뭔가가 계속 찔러 넣어지고 있다. 그래서 더러는 쫓겨나고, 일부는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올해의 유행은 동대륙풍이라고 하더군. 저런 옷을 워닝 드레스라고 한다지.』
『워닝 드레스?』
그건 이브닝 드레스를 잘못 말한게 아닐까 싶다. 사전통보 여성복이라니. 동대륙어가 서툰 린청이 사촌누이의 설명을 아무래도 잘못 기억한 듯 싶다. 아니, 것보다 허리를 잘록하게 과장한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치마는 주름을 잔뜩 넣어 부풀게 만든 동대륙풍 의상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엄청난 고가의 수입품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데 신기하다거나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뭐랄까, 저건 비웃음을 닮았다.

『정신이 썩은 거야.』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끔 접으며 린청이 쓴 어조로 말했다.
『이국의 옹주인 휘사가 행여라도 우승을 하면 곤란하다며 가락지를 훔쳤다 도둑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한 것들이... 그런 주제에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나라의 옷을 가져다 입는다. 이게 말이 된다고 보나.』
어차피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다.
자포자기한 나와는 다르게 소년은 조용히 분노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가위를 들고 따라다니며 나에게 이사실의 관습을 강요하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기라도 했나. 짜증스러운 것들.』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데 꼭 더럽고 부정스러운 걸 봤다는 투다.

『짜증스런 것들이라는 말에 찬성. 하지만 이해해줘야 할지도 몰라. 자기네들 몇 년치 봉록을 전부 털어 저런 사치스런 의상을 닥치는대로 사들이는 것도 전부 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거니까. 그래봤자 천박한 돼지들 얼굴에 하얗게 분칠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린청의 이해를 구했다.
그런데 린청은 그걸 내가 말한 것으로 착각했다. 왜냐하면 주변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세차게 도리질했다.
『방금 뭐라고 말했잖아, 안즈.』
『아냐. 걔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말한 건 나.』
부드럽게 울리는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린청의 주의를 끌었다.

『푸커억!』
화들짝 놀란 린청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다가 곧바로 창백해져 빛을 잃었다. 일단은 흉한 소리를 냈다는게 창피스러웠던 거고, 그 다음으로는 바로 옆까지 사람이 접근했는데도 그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 경악한 나머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거였다. 어떻게 까마득히 모를 수가 있지. 설마, 대낮에도 유령이 나타날 수 있는 건가 - 의심하며 소년이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유령치고는 웃는 얼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신발도 제대로 신고 있다. 하여 유령이 아님을 확신하자 린청은 더욱 기겁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하늘에서 사람이 예고도 없이 뚝 떨어진다며 감탄하지만 일정 수준의 무예를 익힌 자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낄 터다. 이해한다. 아마도 송곳니를 드러낸 호랑이 앞에서 몸에 고소한 참기름 바르고 선 기분이겠지.

『여어~』
발자국 소리는 고사하고 마음만 먹으면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남자다. 나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이게 누구야. 보리쌀이구나. 잘 있었어?』
밤톨, 도토리, 콩알에 이어 이번에는 보리쌀이다. 어쩐지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예를 올렸다. 이 상태라면 다음으로 불릴 내 이름은 분명 좁쌀이다. 어쩐지 우울해진다.
『천세, 천세, 천천세. 빈사국에서 온 지리가 가의 안즈가 위대하신 무한권능으로 하늘보좌에 올라 온 산하를 지배하시는 위대하신 적룡신의 만세자손 님을 뵈옵니다.』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데 인사가 그따위야.』
『나물반찬에 소고기를 끓여 만든 따뜻한 무국을 먹었습니다.』
술술 나오는 대답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영문을 모르겠네. 어째서 화를 내고 있지? 꼬맹아.』
『화를 내다니오.』
『시치미까지 잡아떼니 누구랑 똑 닮았네. 하지만 됐어, 아니라고 했으니 그만두자. 그래도 꼬맹아.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빈정거리는 건 그만두는게 좋아. 나는 그다지 아량이 넓지 않은 사내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방울에서 헤엄치는 이끼벌레 정도 크기야.』
『빈정거리지 않았습니다.』
『정정할게. 내 아량의 크기는 물방울에서 헤엄치는 이끼벌레의 심장 정도 크기야. 어느 정도인지 알겠어?』
그런 까닭에 나는 내 머리 위로 얹어진 손바닥을 치우지도 못하고 네, 네 공손히 대답만 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둘이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은 린청은 자세를 가다듬고 자손을 향해 예를 올리려 했다. 제국을 혐오하더라도 입장 상 제국의 황족에 대해 존경심을 보여야 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예당국 연 가의 장남 ㄹ...』
『너는 남자면서 머리카락이 무척 길구나.』
린청의 얼굴이 콰직 구겨졌다. 인사를 올리는 도중에 윗 사람이 아랫사람의 그 말을 끊은 건 너를 무시하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거기다 하필이면 소년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린청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것이다.
『자르라고 하셔도 자르지 않을 겁니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그냥 길다는 내 감상을 언급했을 뿐이야.』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서 하던 행동을 바꿔 내 뺨을 쭉쭉 잡아당기던 자손이 목소리를 낮춘 채 린청의 흉을 봤다.
『혹시 네 친구니? 친구를 잘 사귀라던 내 말은 흘려들었구나. 저런 성격 급한 녀석을 친구로 삼고.』
지금 남의 흉을 보고 그럴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도 네, 네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끼벌레의 심장 크기의 아량을 가진 이를 상대로 누가 잘 했고 잘 못했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다못해 내 이름조차 귀찮다며 기억을 안 하는 남자다. 방금 전 자신이 린청의 인사를 도중에 싹둑 잘라 먹었다는 것도 이미 기억 속에서 놓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린청더러 성격 급하다 나무란다. 참으로 제멋대로다.

『그나저나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여긴 내 집이야, 땅콩. 내가 어디로 가든 그건 온전히 내 자유야.』
이와 비슷한 말을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황족의 남성이 황궁을 일컬어「여기는 내 집」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이 궁궐에서 어디를 가든 그건 온전히 내 자유 - 그런 말을 황제가 아닌 황족의 남성이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냥 단순히 여기가 외궁이라서?
마음 구석에서 조그마하게 의문이 솟았다.
그게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돌연 자손이 불쾌해했다.
『뭐냐, 지금 그 표정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이상한 생각했지.』
『그럴 리가요.』
『아니야, 분명 이상한 생각했어.』
『별 생각 안 했는데요.』
『별 생각을 안 했다라... 그럼 달 생각을 했다는 거냐, 해 생각을 했다는 거냐.』
들판에 핀 꽃이 시들어 꼬부라질 지경으로 곱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 코를 부러져라 비틀어댔다.

Posted by 미야

2015/09/11 22:14 2015/09/1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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