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걷기와 천천히 뛰기를 몇번이나 반복하여 가까스로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생물 오징어처럼 어기적거리며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나를 향해 이라벽치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표정이 참으로 대견하구나 칭찬을 하는 것 같아 몸은 힘들었어도 기분은 좋았다. 이런게 아마 성취감일 것이다. 땀으로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녹초가 되었어도 상쾌했다. 달리자, 이대로 이라벽치에게 달려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 하?
기가 막히게도 이 미친 천둥 솥뚜껑은 갑자기 기합을 넣어가며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니, 시키는 대로 뜀박질을 한 사람에게 막판에 이르러 이런 식의 행패를 부리는 법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에서 신호가 번쩍번쩍 울렸다. 주먹이 커다란 수박처럼 확대되어 보였으나 그걸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솥뚜껑을 향해 제법 빠르게 돌진하는 중이었고, 뭐랄까. 튀어나온 기둥을 향해 머리를 깨부수고자 달려가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느리게 반응하는 둔한 몸은 여전히 달리기 자세를 유지했다. 한술 더 떠서 왼쪽 발목을 삐긋했다. 참 가지가지 하는 몸뚱이다. 하여 시선으로는 계속 이라벽치의 주먹을 쫓았지만 몸은 왼편으로 크게 쏠렸다.
『동체시력은 괜찮은데 역시 몸이 안 따라주는구나. 역시 체력이 문제군.』
꼭 때릴 것처럼 굴던 남자는 간발의 차이로 쥐었던 주먹을 도로 활짝 펴고 넘어지기 일보직전의 나를 붙들어줬다.
『잘 했다, 안즈.』
『허억, 허억! 지금 방금 뭐였습니까?!』
『뭐긴. 죽었다 살아난 거지.』
그렇게 말하며 별 거 아니라는 동작으로 발목을 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 남자의 완력은 장난이 아니라서 신발코로 가볍게 툭 치는 것만으로도 무릎 아래까지 찌르르 하는 통증이 번져왔다.
『아까 접지르던 것 같던데.』
『그걸 확인한답시고 제 뼈를 부러뜨릴 겁니까?! 살살 좀 해주세요.』
『아니 이놈아. 그 정도에 뼈가 왜 부러져. 말라붙은 개똥도 안 부러진다.』
항의했더니 엄살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투덜대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신을 벗고 왼쪽 발목의 상태를 살펴봤다. 엄지로 누르자 찌릿한 감이 들었다. 잘 됐네, 핑계를 대고 오늘은 더 못 하겠다 말해야겠다.
『그래도 눈이라도 좋으니 다행이다. 보여도 피하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그래도 눈으로 보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면 몸은 어떻게든 반응하기 마련이니까...』
『어떻게든 반응한다고요? 에이. 그럼 날아오는 화살도 눈으로 보면 피할 수 있게요.』
『나는 피해.』
『......』
『돌진하여 달려오는 멧돼지도 충분히 피할 수 있고말고. 몸을 계속하여 단련하면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말도 안 돼. 일반화가 너무 심각하십니다. 100년을 노력해도 저는 그런 경지에는 못 올라갑니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이라벽치는 그것으로 결론을 도출하여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려 했다.
『자! 그러니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부지런히 몸을 단련하도록 합니다!」우렁찬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픈 발목을 살살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길 포기하면 됩니다.』
『그래. 열심히 체력을 키우...... 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조차 살아남겠노라 각오했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라. 무기를 드는 건 그 다음이다. 에이드 체이스만 치토.』
이라벽치는 치토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누구냐.』
『이라벽치 님은 치토를 모르십니까?』
『그 기분 나쁜 말을 한 자가 누군데.』되물으며 그는 진심으로 불쾌해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북대륙 채턴 지방 사람이에요.』
『들어본 적 없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무척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요. 끔찍한 재해가 닥쳤을 적에 밀려오는 식인 요괴들로부터 길마론 북서부를 훌륭하게 지켜냈어요.』
『그럼 그 자식이 영웅이란 말이냐?!』
『인간임을 포기했는데 영웅일 리 없죠. 나중에 그의 시신은 여섯 토막으로 잘려나가 훼손되었어요.』
요괴들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도 움직임이 둔한 어린이와 여성을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발 빠르게 도망치곤 했다. 나중을 도모하기 위해 인구 2천의 마을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전략은 훌륭했지만 인간이 할 말한 짓은 아니어서 치토의 도움으로 명줄이 길어진 왕조차 감사 인사를 생략한 채 그를 산채로 씹어 먹고 싶어 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합니다 - 치토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증오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재해가 멎자 왕은 재빨리 그를 사형대 위로 올렸다.
『그렇다면 얘야, 너도 살기 위해서라면 인간이길 포기하겠다는 거냐?』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눈을 있는대로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이라벽치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그렇지?』
『모두로부터 욕설을 들어가며 사형대에서 목이 잘리는 건 싫습니다. 전 늙어 죽는 것이 소원이라서요.』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나는「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기억했을 뿐이다. 치토는 사형대 위에 오르기 전 감옥에서 짧막한 수기를 썼다. 나는 인간이길 포기했었노라고. 요괴와 싸우기 위해 요괴보다 더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신을 고쳐 신고 아픈 발목을 좌우로 돌려보았다. 다행히 심하게 욱씬거리지는 않았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화기를 내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조심하면 기분 나쁜 이 감각도 곧 사라질 것이다.
『저라면 도망칠 겁니다.』
『음?』
『고난과 역경이 다가온다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칠 거에요.』
『그 다리와 그 체력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겠다며 마치 절을 하듯 상체를 구부렸다.
『사내답게 정면에서 맞서 싸우라고는 말하지 않겠어. 지금의 네 상황에선 무리라는 걸 잘 아니까. 허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 가봤자 쫓아오는 악당에게 금방 잡힐텐데?』
이라벽치는 다시 원래의 결론 - 맞춤형 결론에 무사히 도달했음에 온몸으로 기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한다?』
체력을 기르자. 아자.
『칼을 들고 네게 덤벼들었다던 남자 말이다. 소극 상은 사람 말로는 너와 같은 빈사국 사람이라던데.』
이라벽치의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곰 같은 덩치에게 뒤로 껴안긴 채 목조르기라는 것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공격하는 시늉만 해 보이는 거라고 했지만 그거야 곰의 판단에서나 그런 것이고, 곰의 펑퍼짐한 앞발에 당한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죽을 맛이었다.
『켁. 커억!』
『혹시 네가 보기에 얼굴이 낯익지는 않든?』
『그, 그게! 숨이 막! 켁!』
『그런데 그 남자의 주머니에 호패가 있더라니까. 빈사국 사람이 아니고 우리 이사실 백성이었다.』
어떻게든 조르기 공격에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쓰던 나는 잠시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몰래 훔친 걸까요?』
『하지만 호패의 원래 주인은 자기 걸 잃어버린 적도 없다고 그러던데.』
하여 나란히 놓고 보니 거짓말처럼 똑같이 생긴 호패가 두 개가 되었다.
직접 만든 두부를 팔던 장사꾼은 새파랗게 질려 쥐고 있던 손님 끌기용 딸랑이 방울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남에게 빌려준 적도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똑같이 생긴 걸 깎아 만든 적도 없다고 했다. 호패를 위조하면 그 형벌이 매우 무겁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사내는 겁에 질렸다.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정말 억울하옵니다! 나리, 진짜로 저에겐 죄가 없어요!」
이라벽치는 사내의 주장을 믿어주었다.
『설마, 두부 장수가 그랬을라고. 왜냐하면 그 장사꾼이 팔던 두부가 모양이 영 예쁘지가 않고 이상했거든.』
『......』
『상품으로 내놓은 두부도 그 꼴인데 그 실력으로 호패를 위조하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이 인간이 갑자기 자기가 만든 두부는 모양은 그래도 맛 하나는 기가 막힌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거야. 단골도 얼마나 많은지 한 번 보라면서 거래처 장부를 꺼내 오더군.』
언짢은 기억 때문일까, 목을 조르는 힘이 약간 세졌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