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이라는 짧았을 인생을 살아오면서 독 발린 붉은 사과의 존재를 처음 깨달아서 그런 것일까, 린청은 입을 한 일자로 다문 채 의자에 앉은 자세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창고에 처박혔던 의자다. 애초부터 다리가 부실하여 똑바로 앉으려 해도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앉은 몸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그의 심기 불편함과 혼란한 상태를 잘 드러내 주었다.
한 가족이라 의심치 않았는데 그 믿음을 배반당했다, 자상하기 그지없었던 사촌 형님의 진심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중에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건가, 어째서, 왜, 무슨 까닭으로. 꼬리를 물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생각들은 소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인간은 서로를 배반하고 물어뜯지.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의심하고 먼저 이용해 먹는게 좋아.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 말을 한 자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새카맣게 얼룩져 눈이나 코 같은 생김새가 죄다 뭉개지고 말았다. 헌데 그 자의 옷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두꺼운 흰색 비단에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을 은사로 수를 놓아 매우 화려했다. 소매통은 좁았고 옆으로 늘어지는 허리띠는 눈에 띄는 붉은 빛깔이었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들어 얼굴을 보려 하자 역시 얼굴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공들여 기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었거나, 끔찍하게 싫어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린청이 손을 들어 맨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인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맙소사, 안즈.』
『꼭 믿어야 할 까닭도 없지.』
『그렇지?』
약간의 희망을 담아 린청이 말했다.
하지만 그가 믿어도, 믿지 않아도 어차피 진실은 하나밖에 없다. 진실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친절한 사촌 형님의 속내를 이해해 보겠다며 주관적 해석으로 덧칠해봤자 어차피 진실은 하나다.
하지만 병들고 비뚫어진 심성을 가진 나는 그걸 아이에게 솔직히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좋은 낯짝을 하고 안심해도 된다 미소를 지을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다. 진실은 하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말하는 투가 마치 악당에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텐데. 잡아떼면 그만인데. 속았노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은사로 덮힌 사내의 옷자락이 걷는 동작에 따라 인위적으로 펄럭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호쾌한 동작이었다.
그러니 견디기 힘들다면 아니라고 부정해버려. 그깟 진실, 하등 도움도 안 되는구먼.
역시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사람의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자! 이리 오너라. 귀여운 노예야. 오늘도 내 심부름을 해줘야겠다.
그 옆에서 사내의 부름을 받고 조르르 뛰어가는 어린애가 있었다. 보기좋게 살집이 있고 손발이 통통했다. 피부는 씻지 않은 것처럼 검었는데 햇빛 탓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원래 그런 빛깔이었다.
오늘도 둘째 도련님에게 설탕과자를 가져다 드리렴. 네가 가져가면 도련님은 무척 기뻐하실 거다. 도련님은 널 무척 귀여워하시니까. 맛있어 보인다고 가져가는 길에 몰래 집어먹지 말고... 그럼 단단히 벌을 받게 될 거다. 신께서 보시고 너에게 창자가 썩는 병을 내리실테니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허튼 짓은 하지 않도록.
내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생각났다. 아이는 친절하신 도련님으로부터 과자를 절반이나 나눠 받았다. 그리고 허락을 받아 도련님 앞에서 나눠받은 과자를 게걸스럽게 전부 먹어치웠다. 설탕이 뿌려진 과자는 부패하기 직전의 과실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어 노예는 감동하여 울먹였다. 그깟 진실, 소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하여 신께서 소년의 말대로 행하사 살집 검던 아이는 급체 증상으로 고생을 하다 보름 뒤에 죽었다.
사인이 무엇이더냐. 혹시 독은 아니더냐.
주인된 자가 얼굴색이 변해 물었어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가엾게도 맹장에 탈이 났사옵니다. 사인은 그 때문인 줄 아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내 앞으로 설탕으로 버무린 당과가 놓여졌다.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절로 났다.
『이, 이건?』
『사촌 누이가 준 과자야. 너와 나눠먹으라고 단단히 일러두더군. 하여 그리 하겠다 휘사와 약속했다.』
『하얀 가루가...』
『이곳 사람들은 설탕 귀한 줄을 몰라. 설탕물에 조리고 다시 그 위로 설탕물을 끼얹다니.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것 같은데 여자들 입맛엔 맞는 모양이지. 그 하얀 가루도 설탕이야.』
과자는 얇은 속지로 낱개로 포장되어 상자에 모두 다섯 개가 들어가 있었다. 기름기를 잔뜩 흡수한 포장지를 벗기자 짙게 색을 낸 꽈배기 모양의 과자가 모양을 드러냈다. 설탕 가루가 눈송이처럼 뿌려졌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검정깨도 솔솔 뿌렸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 부스럼처럼 튀어 오른 모양새로 설탕을 가득 묻혔다. 손가락으로 툭툭 털자 덩어리져 떨어졌다. 진짜지 이 나라 사람들은 설탕 귀한 줄을 모른다.
『이걸 나 주려고 여태 기다린 거야?』
『휘사의 부탁이었으니까.』
『그거 참... 감, 감사한.』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차마 손이 가지 않는 까닭은 배 앓다 죽은 소년이 오늘에 이르러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한 음식을 잘못 집어먹은 것처럼 배가 꼬이고 아파왔다. 설사는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찬 물을 벌컥 들이켜서 그런 거라며 야단치고 배를 따뜻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사흘 뒤 노예 소년은 구부린 다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많이 아파했지만 열은 없었기에 다들 꾀병이라 했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항문에서 피가 흘러내리다 잠시 뒤 멈췄다. 옷을 벗겨보지 않은 어른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이튿날 아이가 반짝 눈을 떴다. 여전히 배가 아프다 했고 밥을 먹지 못했다. 죽을 먹였으나 토했다. 그래도 스스로 뒷간에 다녀올 수는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기에 나 외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증상이 다시 악화되었다. 아이는 배가 아프다며 쉬지 않고 울었다. 당황하여 약을 구해다 먹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새벽부터는 아예 의식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주변에서 불평했다. 또다시 이틀 뒤에 가까스로 눈을 떴으나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물을 먹이려 하자 삼키지 못했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기에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있잖아. 나, 결국 죽는 거야?」
「단순 배탈로 사람은 안 죽어. 내일이면 멀쩡해질 거야. 걱정할 것 없어.」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만 자렴. 내일이면 건강해질 거야.」
거짓말을 속삭이는 내 목소리엔 아무런 떨림이 없었다.
믿고 싶은 걸 믿어. 보고 싶은 걸 봐. 진실은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당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자는 달콤했다.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자 린청이 쓰게 웃었다.
『휘사도 아마 쉽게 먹을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우리더러 먹으라고 양보했겠지. 받는 사람 입장도 생각을 해줘야지, 내가 볼 적엔 이건 그냥 독극물이야. 아니.., 진짜로 독이 들었다는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내 말은 우리 같은 사람의 입맛엔 안 맞는다는 거야.』
소년은 팔을 휘저으며 얼른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사무월 행사가 가까워지니까 여자애들 사이에는 꿀을 넣은 과자나 그림이 그려진 손수건 따위의 간소한 선물을 돌리는게 유행이라나봐. 서로 잘 봐달라는 거겠지. 동시에 상대방 전력을 염탐하기도 하고... 앞에서는 호호 웃으면서 뒤로는 발톱을 갈고 있다며 휘사가 흉을 보더라.』
『그렇구나.』
내 동작을 따라 당과를 입에 문 린청은 찬 바람을 맞았다는 식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고. 신 맛의 과일보다 이쪽이 몇 곱절 괴롭다.
『그나저나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즈.』
『그게... 주문하고 찾아가지 않는 옷을 거저 준다는 곳이 있다길래 어렵게 숙희 님께 허락을 받아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곳에서 그만 물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실수로 사람을 밀쳤어.』
『저런! 그래서? 상대방이 화가 나서 널 때린 거야?!』
『화가 날 만도 했지. 사실 내가 많이 놀라서 제대로 사과를 못 했어.』
즉석에서 거짓말을 술술 지어내며 바닥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얼룩이 흡사 배 아프다 우는 아이의 비명을 닮아 보여 나는 무심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분명히 단편이었는데... 아무리 자잘하게 잘랐다고 해도 저 숫자는 도대체 뭐냐굿! 다음이 60회구놔. 얼씨구놔.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