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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쫓겨났다 - 라기 보다는 가는 방향이 엇갈려서 그만 내려야 했다.
『내려! 빨리 내려. 사람이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녀석은 순전히 나를 망신 주기 위해 마부석에 앉혀놓았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썩은 사과를 먹으라 주고 맛있었느냐 묻는 격이라 나는 망설임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너야말로 엿이나 먹어!』
그런 우리를 보고 락연은 기분 좋게 싱글벙글 웃었다.
『안즈 님 주변으로 친구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에엑? 친구?! 누가.』
『저 송주라는 도련님과 친구 사이가 아닙니까?』
요괴의 눈에는 심한 말다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우리들이 매우 친한 사이로 생각되었나 보다. 인간과 요물은 아무래도 서로 가치관이 달라서 적과 동지의 개념이 혼동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까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대화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그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격렬한 말싸움과 욕설이 엉뚱하게 우정의 과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녀석의 머리에 말똥을 올려놓았다는 걸 얘기해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요괴의 상식에 따라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한다 주장하진 않을까. 실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쳐다보는 이쪽의 심정도 모르고 락연은 포목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목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정성껏 배웅했다. 희미하게「죽어라, 안즈!」외침이 대답으로 돌아왔음에도 그는 저주의 외침을 애절한 석별의 정으로 착각하곤 좋아했다.
『활발해서 좋은 분 같아요. 다음에 만나면 단청과자라도 선물해야겠어요.』
『친구가 아니라는데 자꾸 그러네.』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쫓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빠르게 걷느냐고? 그야 이사실 사람들이 워낙에 성마르게 걷기에 서둘지 않으면 옆으로 밀쳐지게 돼서 그렇다. 게다가 호기심 많은 시선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뜨내기라고 생각하고 좋지 못한 것들이 달라붙게 된다. 호객꾼도 그러하고, 또한 장사치도 그러하고 잡꾼과 소매치기도 그러하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무리들이 락연과 내 주변을 포위하며 접근해오고 있는 중이다. 제일 앞줄로 막대과자와 튀긴 밀가루 빵을 파는 장사꾼이 나타나 고소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설탕을 가득 뿌린데다 참기름까지 바른 과자는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냄새가 났다. 자제력이 없는 어린애라면 이성을 잃은 채 덥썩 쥐고도 남았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입안으로 침이 돌았다. 하지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하며 걷는 보폭을 넓혔다. 하지만 락연은 걸려들었다.
『도련님. 하나 먹고 가죠.』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요괴인데도 단 맛의 간식에 침을 흘리다니. 게다가 살 수 없다 단칼에 잘라 말하자 섭섭한 표정까지 짓는다.
『다섯 개에 1전밖에 안 하는데.』
『거꾸로 들고 흔들어도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 안 나와. 미안해. 정 먹고 싶다면 돌아오는 길에 사줄게.』

그리 정색하여 말하고 큰 대로에서 좁은 골목을 끼고 도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상은에 간다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책방 골목으로 들어와 버렸다. 잠재의식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길을 따라 예전에 다니던 단골 가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락연은 눈에 들어오는 간판을 하나하나 관찰하다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 좁은 골목으로 상은이 있나요?』
있을 리가. 쓰게 웃으며 그 길로 돌아 나오려는데 그늘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로 방풍 중인 책들을 보자 이성이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해벌죽 웃으며 달라붙으니 오랜만에 물건 좀 팔아보겠구나 분위기 알아차린 주인이 한걸음에 달려 나와 흥정에 들어갔다.
『보는 눈이 있으시구먼. 50전만 내시게, 도령.』
전문가를 비웃는 거냐, 이 서면악달숙 궤보는 아무리 쳐도 30전이면!
『그럼 48전만 내고 가져가. 이거 보라고. 상태가 엄청 좋아요.』
쓰윽 훑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에 젖은 얼룩이 있는데 상태 좋긴. 42전!
『과자 사먹을 동전 한 닢조차 없다는 양반이 어느 주머니에서 42전이 나옵니까. 정신 차려요~!』
뒤에서 락연이 손바닥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 안즈가 아닌 시오재가 단골로 다니던 책방은 이미 상호가 바뀌어서 모르는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 있었다.
저번에도 노인이었는데 이번에도 주인은 노인이었다. 나는 찾아가야 할 소극 상은의 위치를 묻는 척하다 예전 주인의 안부에 대해 넌지시 물어봤는데 노환으로 몸져눕고 치료비가 다급해 결국 가게를 팔았다는 것 정도만 겨우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슬슬 흐려지기 시작한 기억을 힘겹게 더듬다가 결국 회색의 두터운 벽에 가로막혔던지 나에게 해줄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가 마흔 두 살 되던 해에 이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이야기네요.』
『먼저 주인에게 재처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죠. 남편이 죽자 재산을 정리하고 동네를 떠났어요.』
『손님이 주문해놓고 찾아가지 않은 책이오? 글쎄... 안 찾아갔다면 결국 다른 사람이 구입해서 가져갔겠지.』
『도령께서 뭘 찾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 집은 그렇게 비싼 고서는 취급을 안 해요.』
『그러고 보니 먼저 주인이 북대륙이나 동대륙에서 온 귀중한 책들을 소량 취급하긴 했지. 지금은 한 권도 없다우. 그런 책은 요즘 팔리지도 않아요.』
『것보다 도령, 이거 안 살래요? 싸게 드릴게. 다른 세계에서 온 모험자의 여행을 다룬 소설책이야.』
현기증이 생기려 했다. 이들 전부가 언제까지고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일상을 반복하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결국 모든 건 제자리에 그다지 머물지 못한 채 어디론가 움직여 사라지고 만다. 아름답던 나무는 썩어 밑둥만 남는다. 처녀는 노파가 되고, 번영하던 도시는 몰락한다. 물이 솟던 샘은 어찌하여 마르느냐, 초원은 왜 사막으로 변하느냐, 안타까움에 현을 튕겨 음률을 연주하지만 그런들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빛바랜 과거, 그리고 낯선 얼굴들. 나는 그 안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

『혹시 예전 주인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게우?』
슬슬 눈치를 보는 주인장을 향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기억하는 이가 없다면 그 사연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미심장에게 한 마디 툭 던져놓고 간단히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좀 천천히 걸어요. 그러다 넘어집니다.』
『서둘지 않으면 늦어, 락연. 소극 상은은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다고.』
『그럼 또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면 되죠.』
『이야... 락연, 넌 성격이 느긋하구나.』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법이죠.』
실언이나 마찬가지다. 살아온 햇수만 계산하면 내 쪽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피식 웃는 나를 보고 락연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그 죽었다던 노인장과 친구였습니까?』
나는 계속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인위적으로 입 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려니 근육이 얼얼하니 아파왔으나 이런 경우 별 걸 다 궁금해 한다며 짜증을 내봤자 상대방에게 먹혀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충 둘러대고 애매하게 매듭을 지는 것이다.
『그냥 단골손님이었어.』
『그래도 일부러 찾아와서 그 사람에 대한 안부를 물었잖아요.』
어쩐지 그 목소리에 날카롭게 가시가 돋았기에 나는 짐짓 걷는 속도를 줄이며 건물 벽으로 붙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야. 굳이 일부러 라고는...』
『어쩌다보니?!』
여전히 나는 가면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뭘 묻고 싶은데, 락연.』
『당신은 폐하와 친구잖아요. 그렇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폐하의 안부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아요? 어떻게 책방 주인에 대한 궁금증이 폐하에 대한 궁금증보다 더 클 수가 있죠.』
『자손과 친구였던 건 시오재, 나는 안즈.』
『그래서 하나도 안 궁금하다?』

이제 우리는 제자리에 멈추어 선 상태였다.
『당신... 전생했다며. 죽었다가 예전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그러면 이전 생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많이 있었을 거 아녜요. 아내가 나중에 어찌 되었는지 확인해봤어요? 자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해봤냐고요.』
『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단칼에 잘라 말하자 락연의 표정이 나빠졌다. 아마도 저건 비난의 의미이리라.
『냉정하네요.』
『현실적인 거지.』
『전혀요. 당신은 요괴보다 더 요괴 같아. 그것도 질 나쁜 요괴!』
매섭게 쏘아붙인 락연은 기분이 상했던지 나를 그대로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Posted by 미야

2015/07/21 12:59 2015/07/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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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7/21 14:01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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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키보드가 급한 상황이라 만원짜리 삼보 키보드를 가격만 보고 덥썩 주문했는데 키감이 노트북... 아놔. 이런 실수! 모양은 무척 예쁜데 자판이 납작해서 계속 잘못 누르고 있네요. ※

문득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저 자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궁금해졌다.
밝은 햇빛 아래 선 락연은 그림자마저 옅었는데 이상하게도 마부는 그와 매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기까지 하였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말들이 민감하게 굴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앞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며 연신 푸르륵 푸르륵 콧구멍을 떨어 소리를 내었다.
말이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자 마부는 말의 목덜미를 반복하여 문질러 달래려 했다.
『이놈아, 오늘 아침 밥도 많이 먹었잖느냐. 왜 배가 고픈 척하고 그래.』
마부는 그걸 다른 방향으로 착각했다. 먹보로 착각당한 말은 심히 억울할 것이다.
『아무튼 사정은 잘 알아들었수다. 허나 우리 도련님이 허락을 하실지 모르겠군요.』
『일단 소주인께 여쭈어 주시겠습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저어, 송주 도련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마차의 주인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내가 화급히 외쳤다.
『송주라고? 안 돼!』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마차 주인도 나에게 지지 않으려 애쓰며 크게 외쳤다.
『안즈잖아. 안 돼!』
마부와 락연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헤에, 서로 잘 아는 사이십니까? 묘하게 두 분이서 죽이 잘 맞는데요.』
『내가 버선이냐? 죽이 잘 맞게.』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락연의 팔을 끌어당기며 마차에서 떼어냈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송주의 마차를 얻어 타자는 거냐. 이쪽에서 사절이다. 차라리 오래 걸어 물집 잡힌 발바닥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편을 선택하겠다.
『왜 그러십니까?』
『알 필요 없고. 이리 와.』
『혹시 마부석이라서 싫으신 겁니까. 그래도 그 먼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좋을텐데요. 지금 체면이니 창피니 하는 걸 가릴 때가 아니라고요. 정 부끄러우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면 되잖아요.』
우리가 하는 대화를 마차 안에서 고스란히 엿들은 송주는 콧대를 세우며 재빨리 외쳤다.
『좋았어! 허락한다! 마부석에 타도 좋다!』
남의 불행을 즐기며 깔깔 웃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제기랄, 망했어요. 나는 손바닥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쓸어내렸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마부석에 나까지 포함하여 세 명이 나란히 앉으려니 좌불안석이었다.
락연은 내 몸을 번쩍 들어 가운데 앉히고 자신은 엉덩이를 극히 일부만 걸쳤는데 그러고도 힘들거나 불편하다는 시늉도 없이 그저 편안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대단히 기이한 모습이었으리라. 체중을 걸칠 의자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사람이었다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다 단 2분도 못 버티고 무너졌을 것이다. 허벅지 굵기가 아가씨 허리만큼 두꺼운 무관들도 기마 자세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몰래 훔쳐보는 내 시선을 느끼고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안즈 님.』
『불편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감수해야지요, 뭐.』
이를 드러내며 웃는데 뾰족뾰족하게 튀어나온 이빨이 부담스럽다. 나는 무릎의 천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내문의 경계를 지나기에 앞서 마부가 질문했다.
『혹시 도련님도 새 옷을 구하러 외궁 밖으로 나가시는 겁니까?』
『옷?』
『사무월 축제에서 입을 옷이요.』
오호라, 그렇게 된 거였군...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날씨가 더운 탓에 마차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어 마부석에서도 송주의 얼굴이 잘 보였다. 녀석은 흥흥 콧김을 내뿜으며 마부의 말을 부정했다. 심지어 손바닥을 폭풍 속 갈대처럼 흔들어댔다.
『저 녀석이 새 옷을 사러 갈 리가 있겠냐. 저 녀석은 내재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알거지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낯 두껍게 남에게 빌려 입은 거라고.』
『아이고, 작은 주인님. 그래도 배움을 같이 하는 친우분께 그런 말씀은...』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변방국 출신 거지와 친분을 쌓아 무엇에 써먹겠다고. 차라리 부뚜막 집게와 친구를 하겠다. 집게는 타고 남은 숯이라도 치워주지. 저건 그야말로 아무 쓸모도 없다고.』
그러면서 나 보라며 고개를 픽 돌린다. 우와, 무지 얄밉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아무 쓸모없어 정말 미안하다! 귀신대부 무섭다며 북어포를 내던지고 줄행랑을 친 누구처럼 간이 큰 것도 아니어서 나란 녀석은 그야말로 휴지통의 쓰레기! 잡동사니 쓰레기여서 미안하구나! 사과하마!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내 사과의 말에 송주는 놋그릇을 부러진 수저로 긁어대는 듣기 싫은 목소리로 야단을 했다.
『야! 그때 일을 지금 왜 끄집어내! 시끄러워!』
『그 북어포는 잘 처리했니? 제대로 못하면 반대로 부정 탄다.』
『시끄럽대도!』
머리를 마차 밖으로 내민 채 아웅다웅 싸우고 있자니 다리를 지키고 선 수문장이 도깨비처럼 인상을 썼다. 신원을 확인하고 마차를 통과시키는 건 나중이다. 큰 소리를 낸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문제가 있음에도 다리를 그대로 통과시킨다는 건 업무상 큰 실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을 들어 제자리에 서라는 신호를 보냈고 명령에 따르던 마부는 짧게 다듬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련님들, 이제 그만 좀 진정하시죠.』
마부가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음에도 마차 뒷좌석에서 송주는 허공 발차기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덕분에 마부석까지 좌우방향으로 들썩들썩... 붙잡을 것이 마땅치 않아 나는 눈앞에 보이는 줄을 잡아당겼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줄에 매인 말이 보내진 신호를 착각하고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헷갈려 하는 말을 다시 조정하면서 마부는 식은땀을 흘렸다.
『에라이, 그만들 하시라니까요!』
머리 나쁜 말을 다시 똑바로 걷게 만드는 일에는 수문장까지 손을 걷어붙여야 했다.

쭉 뻗어나간 오대문로를 향해 마차를 돌리기가 무섭게 송주와 나는 다시 영양가 없는 입씨름을 시작했다.
『네 얼굴에 보라색이 어울릴 것 같냐. 절대로 무리!』
『내 피부는 하얗단 말이다. 고귀한 색이 절대로 어울리고말고! 게다가 최신 유행!』
『차라리 연두색 옷을 입지 그러냐. 축농증에 걸린 썩은 콧물 색이라고 다들 좋아할 거다.』
『미친. 그러니까 네놈의 미적 감각은 촌놈의 단계를 넘어 구제불능이라는 거야. 진짜지 변방인들의 감각은 형편없다니까. 지금 뭐라고 했냐. 연두색 옷? 진심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보라색은 어둡고 연두색은 밝다는 거야. 그리고 네 얼굴에는 어두운 색이 안 어울려.』
『그래서 밝은 색 옷으로 골라라? 그걸 조언이랍시고 거기 마부석에 앉았냐. 야, 인마. 공짜로 태워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당장 여기서 내리거나 아님 삯을 내.』
송주가 다시 발차기를 해보였다. 자기 소유의 마차이니 그 내부를 발로 걷어찬다고 해도 내가 무어라 할 수는 없는데 등받이 부분이 충격을 받으니 마부석에 앉은 입장에선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너한테 상담한 내가 병신이지. 당장 안 내려?』
『물어봐놓고 왜 자기가 성질이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든, 넌 결국 보라색 옷을 고를 거잖아!』
『물론이지. 그 색이 가장 나에게 어울릴 테니까.』
『두고 볼 것도 없다니까, 송주. 진짜지 보라색은 아니야.』
『멋대로 지껄여. 사무월 축제임에도 새 옷도 못 지어 입는 거렁뱅이 주제에. 흥!』
이젠 나도 못 참는다. 작정하고 뒤돌아 앉아 송주를 노려봤다. 노려보기만 했던가, 그 좁은 창으로 팔을 집어넣고 녀석의 옷깃이라도 잡으려고 기를 썼다. 물론 마차 내부는 의외로 넓어 속으로 짧은 팔을 뻗어봤자 허공에서 물갈퀴질이나 할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었다면 마차가 다시 심하게 요동을 쳤다는 거랄까, 송주가 꽥 소리를 지르며 팔걸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덕분에 락연이 마부석 밖으로 튕겨나갔으니 더하기 빼기 남는 거 아무 것도 없음.
요괴는 여전히 차분한 몸가짐이었지만 오른쪽 다리만 가까스로 걸쳤을 뿐, 몸 전부가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Posted by 미야

2015/07/17 20:21 2015/07/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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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 망가짐... 5월 9일에 구입한 녀석인데 F8키가 자동으로 눌려짐... 한글에서 F8키가 눌려진다는 건 자동 맞춤법 검사 진행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망했어요? ※

더위를 식혀줄 한줄기 시원한 비 소식을 기다리는 와중에 집에서 소식이 당도했다.
속으로 가만히 손가락을 헤아린 나는 짐작했던 것보다 무려 엿새나 빨리 도착했음에 깜짝 놀랐다. 에둘러 협박하기가 그렇게도 효과적이었던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버지 성격과는 안 맞는다. 아무래도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이 아니라 엇갈려서 먼저 소식하였다 여기는게 옳을 것 같았다. 더욱이 받는 사람이 지리가 안즈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평범하지 않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신 춘부장께서 자식 놈에게 보내야 할 걸 왜 이렇게 보낸답니까.』
정확하게는 자식 놈이 아니고 내재원 부석상위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런데도 숙희 숙사감대부는 그걸 멋대로 뜯어보고 개인 사생활 보호라는 걸 멋지게 뭉개버렸다. 어차피 내 신분이 빈사국에서 보낸 인질이라 할 수 있으니 내재원 담당 관리가 편지를 검열하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었지만 부석상위보다 급이 두 단계 낮은 숙사감이 이를 멋대로 뜯어본다는 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들 항의할 입장이 아닌 나는 짐짓 뒷짐을 진 자세에서 고개를 길게 빼어 내 앞으로 왔다는 편지를 구경했다.
편지는 연두색 고급 비단지에 포장되어 흡사 높이신 이가 처녀에게 보낸 연서처럼도 보였다.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화려한 걸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봉투만 봤음에도 낯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외관이 화려하다고 구색을 갖췄다고 할 수는 없는데 이 양반은 무릇 귀족이라면 이 정도의 사치가 당연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내용이 뭔지 읽어보셨어요?』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이 지리가 안즈님 앞이 아니었다니까요.』
숙희 숙사감대부는「내 탓이 아님!」을 느낌표 붙여 강조한 뒤에 나에게 편지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삐죽삐죽 수염이 튀어나온 아래턱을 쓸었다. 변비에 걸린 표정 또한 빼먹지 않았다. 이는 곧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읽지 않고 무작정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숙희의 눈썹이 꿈틀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손을 휘저어 주머니에 넣으려는 날 말렸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읽으라고요?』
『아무래도. 받는 이가 안즈 님이 아니라서요.』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뺨 위에 돋아난 거스라기를 손톱으로 뜯었다.

『그럼 읽겠습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었기에 안부를 묻는 내용은 당연히 한 줄도 섞여 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무적인 말투였는데 내용 또한 팥 알갱이로 죽을 쑨 것처럼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뒷장에 글자가 더 적혀져 있지 않을까 싶어 뒤집어 보았다. 그러고도 소득이 없자 봉투를 거꾸로 들고 흔들어 혹시라도 남아있을 내용물의 추가를 기대하였다. 허나 돌조각이나 먼지 알갱이도 아닌데 글자가 봉투 속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간결하네요.』
『그러게요.』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으며 질문했다.
『여기에 적힌 소극 상은이라는 건 뭔가요.』
『소극은 상호명이에요, 안즈 님. 루은에선 그다지 큰 상은은 아닌데... 그 전에 먼저 안즈 님에게 상은이라는 걸 설명드려야 하겠군요. 상은은... 뭐랄까. 많은 금전을 직접 품에 넣고 먼 길을 가야하면 강도에게 빼앗길 염려가 있잖아요? 그래서 갑이라는 마을에 있는 상은에 돈을 맡기고 대신 증서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목적지인 을이라는 마을에 들려 거기에 있는 상은에서 소정의 수수료를 물고 맡긴 돈을 찾고. 이해가 가죠? 원래는 대규모 무역 상인을 상대로 은화를 사고파는 거래로 시작하다가 점차 돈을 예치하는 서비스로... 아! 여기서 서비스라 함은 사람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걸 상품으로 판매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거 참, 더 헷갈리겠군. 서비스라는 건 머리에서 지워버리세요.』
동대륙에서 은행이라 불리우는 것과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종류다.
『그렇군... 대금업이군요.』
『맞습니다. 헌데 여기 증서에 대리인을 가정하지 않았기에...』
『제가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직접 가서 돈을 찾아오게 시키다니. 벽서국 인간들은 지독하구먼, 숙희는 혼잣말을 하며 장부를 뒤적거렸다. 나 혼자 내재원 밖으로 내보낼 수 없으니 동행을 시킬 시간이 남는 숙사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월 축제가 코앞이라 손수건을 흔들며 오늘 나는 무진장 한가해요, 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종이의 낱장을 뒤적거리던 그는 끙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내 눈치를 읽으려 했다.
『이거, 당장은 어렵겠는데. 안즈 님.』
『하지만 이 증서에는 유효 날짜가 적혀져 있어서.』
『미친.』
이런 경우는 없다며 숙희는 화를 냈다.
『사람 일이 그렇게 일사천리로 흘러갈 줄 아는 감! 오늘 당장, 내일 당장, 이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같은 말을 그대로 되갚아주고 싶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외출 준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얼굴을 깨끗하게 씻고 약식 하리건을 모자처럼 머리에 쓰는게 전부, 신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는데 숙사감대부의 명령을 받았다며 내 시중을 들 하수가 문설주를 두드렸다.
『락연이라 하옵니다. 오늘 하루 동행을 명 받았습니다.』
『낯익은 자로군. 그대는 소방의 직원이지 않은가. 밥 준비는 어쩌고.』
저번에 나에게 물이 든 죽통을 건네주었던 자였다. 이빨이 뾰쪽뽀족, 톱니처럼 생겨 아무래도 사람 같지 않은 인상을 처음부터 남겼던지라 나는 그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이지 않고 밖에 세워둔 채로 그와 대화했다. 창고라고 해도 엄연히 잠자리로 쓰는 공간인데 그 안으로 요괴라 추정되는 이를 들이기는 죽어도 싫었다.
사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손했다.
『식사 준비는 안 해도 됩니다. 원래 제가 하던 일도 아니었고요.』
『원래 하던 일은 뭐였는데.』
락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수호(守護)입니다.』
『야! 너, 나에게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거 아냐?! 그런 건 좀 숨겨! 암살자가「제가 원래 하는 일은 암살이에요」이러는 거 봤어? 봤냐고! 이럴 적엔 세탁물을 담당합니다, 이러는 거야. 변명할게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냥 심부름을 합니다, 이래도 되잖여!』
이쪽에서 버럭 고함을 질러대자 락연은 그런가요, 이러며 시치미를 잡아뗐다.
망할 요괴 같으니. 이놈은 나에게 정체가 들켜도 큰 문제가 없다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나를 감시하라고 명 받았냐.』
탈 것을 구할 수 없었던 우리는 내재원 밖으로 나가기 위해 두 다리를 이용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다면 오래 걸어야 한다는 내 말에 불만을 표현했겠지만 상대는 요괴라서 무어라 야단하지 않았다. 한 달 내내 걸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자며 수긍했을 것이다. 인간과 요괴는 체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감시까지는 아니고...』
『왜? 듣자하니 장차 내가 이사실 제국을 멸망시킬 거라던데. 이 소악당이 무슨 작당을 하는 건 아닌가,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제국 멸망이요? 음... 그 전에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남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울컥 감정이 솟구친다.
『게다가 맨날 땡땡이를 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락연은 걸음을 멈춘 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정색하며 이리 말했다.
『안즈 님은 요괴인 저보다 거짓말을 참 잘 하시네요.』
『이놈이!』
『사람은 원래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거라고 하지만.』
『누가 그딴 말을 하든!』
『누가 그 말을 했는지가 중요합니까?』
내 질문을 회피한 그는 출입구 앞에 선 사물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사물 마차라는 건 귀족이 사용하는 개인 마차다. 마침 내재원에서 허가를 받아 외출을 하려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물어보고 방향이 같으면 태워달라고 합시다.』
요괴는 나보다 요령이 좋아 얼른 마부가 있는 곳으로 바삐 움직였다.

Posted by 미야

2015/07/15 17:41 2015/07/1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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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7/15 18:07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7/16 11:08 # M/D Permalink

      그러게 말예요... 뽑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일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A/S 접수는 해놨지만 업체 신용이 팍 깎이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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