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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28

길 건너편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리스를 향해 핀치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그가 소스라치게 놀란 건 전직 CIA 요원의 은밀한 취미 생활이 되어버린 범죄성 사생활 침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거다. 핀치는「저를 또 미행한 거예요?!」소리를 지르는 대신 악귀처럼 화가 나서 고서점으로 돌진하려고 하는 미친 남자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기를 썼다.
『안 돼! 진정해요!』
힘을 잔뜩 준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자세로 리스가 핀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낮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벌개진 눈동자가 이성을 잃었음을 증명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녹록지 않은 경력의 마피아 단원도 절로 뒷걸음질할 살기다. 덕분에 핀치는 그를 붙잡아 세울 용기를 잃었다.
『존!』
그래도 이름이 불리워지자 리스가 움찔거렸다.
만약 그게 잘못을 나무라는 투였다면 그렇게 돌아보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핀치의 목소리는 여성처럼 높은데다 가냘프게 울리기까지 했다. 리스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고 숫자를 1에서부터 50까지 헤아렸다. 뭐, 실제로는 셋 밖에는 안 세었다.
불가항력적으로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는 그의 고용주는 얼굴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고, 콧잔등이 멍들었다. 피부 위로 피가 올라와 벌써부터 벌겋게 타들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보라색으로 멋지게 변색하리라. 양복 상의는 어깨까지 벌어졌다. 누군가와 드잡이라도 한 모양새다. 정교하지 않은 바느질의 싸구려 양복은 그 와중에 솔기가 터졌다. 매일 쓰고 다니던 두꺼운 테의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진 후다.
존은 인상을 찡그리고 유리알 너머로만 볼 수 있었던 핀치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눈부신 햇빛 아래서 동공이 바늘처럼 축소되어 있었다.
친구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결심이 밑둥부터 흔들렸다. 가게를 뒤엎어버리기 전에 병원으로 그를 데려가는게 먼저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속으로 1에서부터 50까지 숫자를 헤아렸다.
그래봤자 이번에도 실제로는 셋 밖에 안 세었다.
『들어가서 안경만 가지고 올게요. 금방 올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괜찮습니다. 여벌 안경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럼 그냥 갑시다.』
겨드랑이로 팔을 넣어 핀치를 부축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리스가 타고 온 승용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 대응을 할 수 없었어요.』
팔꿈치로 얻어맞은 건 이쪽인데 왜 변명하는 말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모른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핀치는 쓴 맛이 도는 혀를 억지로 구부렸다. 여기서 잘 설명해두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저 가엾은 서점 주인은 누군지도 모를 괴한에게 한바탕 린치를 당할 거다. 성격상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을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겠지만 이 골리앗 같은 남자는 손바닥을 싹싹 비는 희생자를 유리창 밖으로 내던질 거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못 하게끔 잘 다독거려야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로 핀치는 활활 달아오르는 아픔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신음소리를 흘릴 때마다 아버지 그리고 아들 커슨의 안전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핀치에게 직접적인 데미지를 날린 진주 목걸이를 한 여자는 결박되어 건물 옥상에 거꾸로 매달릴지도 모른다. 벗겨진 여자의 하이힐이 50층 높이에서 수직낙하 하는 광경을 상상한 핀치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나는 아프지 않다. 하나도 안 아프다. 세 사람을 위하여 어떻게든 참도록 하자.

『사려고 했던게 책이 아니고 무슨 KGB 암호 코드 같은 겁니까?』
악셀레이터를 마구 밟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하며 리스가 질문을 던져왔다.
젠장, 안경을 쓴 사람의 얼굴을 저렇게 때리다니.
다행히 눈을 다치진 않은 듯하다. 핀치는 느리게 눈까풀을 꿈뻑거렸다.
『설마. 절 때린 여자가 국토안보국 직원처럼 보이던가요.』
『글쎄요. 겉만 보자면 대학 조교수 분위기였지만 알게 뭡니까. 저는 이해가 안 가네요. 남들과 주먹질을 해가면서 책을 사는 사람도 있답니까.』
『인간의 탐욕이라는 건 그런 거지요. 그 사람들 눈에는 그 낡은 책 한 권이 진귀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을 겁니다... 크흑.』
『많이 아파요?!』
못 참고 신음했더니 리스가 펄쩍 뛴다.
핀치는 됐으니 운전에 집중하라며 손짓했다. 운전 중인 사람이 정면에서 눈을 떼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안색만 살피고 있음 심히 무서워진다. 실제로 옆 차선을 달리던 차가 빵빵 이러고 경적을 울리며 그들을 향해 주의를 보내왔다.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은퇴한다고 했을 적에 내놔라 하는 박물관장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런 건 애교에 불과하죠. 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박물관 관장은 자기네들에게 디스커버리호를 주지 않으면 직간접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복수할 거라고 나사 관계자들을 상대로 은밀히 협박까지 했으니까요. 그 협박 중엔 나사 직원 자녀들에게 박물관 입장표를 팔지 않겠다는 농담도 포함되어 있어요. 황당하죠? 모형의 가짜 엔진을 장착한 오래된 쇳덩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예... 그저 책 한 권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먹다짐도 불사하며 가지고 싶어합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하아... 부처님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든지 물욕이라는 건 있지요. 제가 10년만 더 젊었다면 어디 한 번 해보자 이러고 두 팔을 걷어붙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지치는군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안경이 없으니 사물은 전부 희멀겋게만 보일 뿐이다. 네모반듯하게 생긴 물체가 거리표지판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큼직한 글자 크기에도 불구하고 안경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리스?』
『병원이오.』
『오! 이 정도로 병원까지 가는 건 오버하는 거랍니다. 피가 나지도 않았고, 부러진 곳도 없어요. 그리고 난 병원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얼음찜질을 하고 잠시 쉬면 될 거예요. 도서관으로 갑시다. 응급처리 키트가 있어요.』
『하지만 심하게 부어오르고 있다고요.』
『저도 압니다, 미스터 리스. 아울러 이런 건 약을 바르거나 주사를 맞는다고 당장 좋아지는게 아니죠. 현대 의술이 만능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며 왼손을 뻗어 리스의 팔을 톡톡 쳤다.
『나는 병원이 싫어요.』
소독약 냄새가 나는 그곳을 핀치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병원은 그를 불행하게 만든다.
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수정했다.
그래도 협상의 여지는 남겨놓는 걸 잊지 않았다.
『못 참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지면 그때는 싫다고 해도 응급실로 데려갈 거예요.』
『알겠어요, 존.』
핀치는 순순히 그렇게 하마 약속했다.

『것보다 속도를 줄이는게 어떻겠습니까, 미스터 리스. 사고가 나서 우리 두 사람 모두 다치거나 죽으면 꼬락서니가 우습게 되지 않겠어요?』
『걱정 말아요. 제한속도를 준수하고 있습니다.』
예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리스는 진심으로 기뻤다.
멍은 들었지만 핀치는 핀치.
겁도 나고 화도 나던게 조용히 가라앉았다.
훨씬 침착해진 모습으로 리스는 부드럽게 핸들을 조작하며 차를 좌측으로 꺾었다.

Posted by 미야

2012/11/26 13:03 2012/11/2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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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27

고서점 주인 에드워드 커슨이 당황한 얼굴이 되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아니다, 그건 틀린 표현이다. 50대 이후부터 진행된 탈모가 2011년 무렵부터 빠르게 악화, 이제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릴 일이 없다. 더욱이 길게 길러 관습적으로 옆으로 넘긴 옆머리는 물을 바른 것처럼 두피에 착 달라붙었다. 그와의 거리는 꽤 멀었음에도 핀치는 자극적인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헤어왁스라고 하는 종류다.
『sir.』
땀으로 번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커슨이 짧은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는 평소와는 달리 날씨 관련이나 주식 관련 잡담을 일절 생략하고 곧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누로 문질러 닦듯이 비비적거리는 양손의 동작만 봐도 곤란한 문제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핀치는 예의 가식적인 미소를 안면 가득 채우고 서점 주인의 대머리와 정신없이 비벼대는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덕분에 대머리 사내는 더욱 황송해하며 더듬더듬 변명하느라 바빴다. 자고로 웃으며 화내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컴퓨터를 잘 몰라서 말이죠. 우리 아들은 그럴 일이 생길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손으로 직접 장부를 작성하던 시절만 해도 이런 불미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은 결단코...』
실례라는 걸 알면서 말을 잘랐다.
『무슨 일인가요.』
『저어. 거래가 중복되었습니다.』

레 티보 8부작 중 제1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 1922년 작. 
열 네살 소년 티보 가문의 차남 자크와 그의 친구 다니엘의 교환 편지 형식의 글.

얇은 기름종이로 포장되어 테이블 위로 올려진 책은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운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켰다. 신성한 성배 - 에드워드 커슨의 장남이자 조만간 고서점을 물려받게 될 앤서니 커슨이 하얀 장갑을 끼고 기름종이의 4분지1을 벗겼다. 손동작만 보자면 이집트의 유물을 취급하는 박물관장 같았다.
『엄격하게 말해 이것은 초판본은 아닙니다. 1937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기념으로 미국에서 출판된 종류이며, 어떻게 보자면 흔한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속지에 있지요. 파리로 여행한 한 미국인 부부가 가난한 예술가를 위한 한 후원회의 밤에서 뒤 가르에게 싸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옆으로 뒤 가르와 친분이 두터웠던 알베르 카뮈가 마침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고, 이들 해터 부부의 열렬한 요청에 호응하여 글을 적어주었습니다. 작가인 로제 마르탱 뒤 가르와 알베르 카뮈가 한 책에 싸인을 한 겁니다.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이기도 했던 아믈라르 크라랏숑의 말을 빌려오자면 이는 진실로 흔치 않은 경우로...』
눈꼬리가 가파르게 올라간 여성이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며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그러한 동작은 리본 장식으로 치장한 개를 밖으로 데려가라고 집사에게 명령하는 엘리자베스 여왕 같았다. 고서점의 장남은 왕실 집사처럼 그녀의 의사에 고분고분 따랐다.
『카뮈가 뒤 가르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예요. 책장을 넘겨보세요.』
『마담.』
『해터 부부의 소유물이었던 그 책이 맞군요.』
그녀는 으스대는 얼굴로 좌중을 훑었다.

《이게 다 무슨 소동인게지. 난 그저 책을 사고 싶었을 뿐인데.》
이래서는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어 영문도 모르는 채 연극 무대로 올라가게 된 꼬락서니다. 힐끔거리며 핀치의 안색을 살피는 고서점 주인은 아내가 바람이 난 걸 까마득히 몰랐던 어리숙한 여인숙 주인장을 연상시켰다. 그의 장남은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인데 동시에 과하게 명랑하다. 바람둥이 광대 같다. 이름도 모르는 진주 목걸이의 여인은 사랑에 빠진 처녀를 닦달질하는 마귀할멈이었고... 서류가방을 꿰찬 핀치는 우물에서 떨어진 금화를 줍는 바보 역할이었다.
이런 건 질색이니 일단 무대 감독을 향해 조명을 끄라며 핀치가 요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게 말입니다, 선생님.』
아버지 커슨이 끙끙 앓았다.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문제의 책이 수중에 떨어지자 아버지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핀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아들은 디지털 방식으로 바이어를 찾았다. 핀치도 구매 의사를 밝혔고, 여자도 구매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중복 거래.
화가 치민 아버지 커슨이 아들을 향해「네놈의 잘난 컴퓨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려무나」원망하는 눈빛을 던졌다. 그런데 어랍쇼, 고개를 푹 숙인 아들 커슨은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척하며 실은 여자의 스커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 시선이 머무른 곳은 여인의 무릎이었다. 지나치게 끈적거리고 쓸데없이 집요한... 여기에 남녀 문제가 얽혔다고 추측하면 터무니없이 앞질러가는 것일까? 핀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편안해지고자 하는 마음에 서점 주인이 서둘러 운을 떼었다. 
『이런 일에는 경험이 없어 어떻게 처리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아버지 커슨이 슬그머니 핀치 쪽으로 몸을 붙였다. 아마 책을 핀치에게 팔겠다는 뜻인가 보다. 맙소사. 그는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아들에게 한치의 양보도 하기 싫은 것이다.
여자가 발끈하며 허리와 등을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마스카라를 덧칠한 눈도 커졌다. 
『웃기지 말아요. 이 책은 저에게 팔렸어요. 이 출력물을 봐주시겠어요? 900달러를 예약금으로 지불한 구매자로 제 이름이 적혀져 있잖아요.』
『예약금은 돌려드릴게요.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제 아들이 그만 실수로...』
『아아~뇨!! 실수는 당신이 했죠. 이미 팔린 책을 다른 사람에게 또 팔겠다고 구두로 가계약을 했다고요? 하지만 전 이렇게 종이에 인쇄된 증거를 가지고 있죠.』
『그렇지만 제 고객에 대한 오랜 신뢰와 명예는... 음. 그런 출력물과는 감히 비교가...』
여자의 목소리가 분노를 담아 한 옥타브 가파르게 올라갔다.
『정신 차려요! 당신은 저 대단한 책을 오랜 신뢰와 명예 운운하면서 월 마트 양복을 입은 절름발이 사내에게 덥썩 팔아치우겠다는 거예요? 나더러 그런 걸 용납하라고?!』

옆에서 가만히 관망만 하고 있던 핀치는 한 방 먹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와우. 이 양복을 월 마트에서 샀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리스도 그런 건 모를텐데.》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완벽하게 다림질이 되었으나 결코 고급은 아닌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IFT 하위의 문화재단 소속 계약직 직원답게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싸구려 냄새가 풀풀 충기는 종류였을지도. 글쎄다. 그러나 핀치가 알기에 문화재단 쪽의 임시직 직원들 월급은 무척 짜다. 핀치의 또 다른 위장용 직업인 손해사정사 쪽의 급여와 비교하면 이쪽은 병아리 눈물 수준으로 뉴욕시 평균 수준의 월세를 지불하고 나면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할 정도다. 따라서 가방은 나름 고급이라고 해도 양복은 절대로 싸구려.

『지금 무어라 했소. 월 마트 양복이 어떻다는 거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깔보는 그녀의 발언에 아버지 커슨의 표정이 달라졌다. 말투도 달라졌다.
『당신은 참 무례하구려. 그리고 천박하오.』
『지금 뭐라고요?』
『뭐라고 했긴! 당신 같은 여자에게 로제 마르탱 뒤 가르는 과분하단 말이닷!』
『뭐가 어쩌고 저째?!』
『으아아, 아버짓!』
『다들 저리 꺼져! 여긴 아직 내 가게고, 누구에게 어떤 물건을 팔지 결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
『이 양반이 지금 어디 가려고! 내놧! 그건 내꺼야!』
『아버짓!』
여자가 서점 주인의 팔을 잡았다. 아들이 그녀를 말리려 했다. 여자가 아들의 뺨을 때렸다. 발길질도 했다. 이때다 하고 서점 주인이 책을 껴안고 달아나려 했다. 어딜 달아나. 여자가 다시 아버지 카슨을 휘어잡았다. 엎치락뒤치락. 와중에 팔꿈치가 핀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윽!』
안경이 날아간 건 둘째고 하늘에서 별똥별이 반짝거렸다.
『그만해요! 사람 죽겠어요! 그만해!』
아들 카슨이 악을 썼다.
아프다고 느끼기 이전에 몸싸움 중인 두 사람의 체중이 고스란히 핀치를 덮쳤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낮도깨비가 된 여자가 슝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이게 다 무슨 날벼락인 건지.
속도가 붙은 몸뚱이가 무방비 상태의 핀치 가슴을 후려쳤다.

Posted by 미야

2012/11/23 11:21 2012/11/2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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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생생활26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핀치.》
푸스코와 카터가 그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기쁘다는 뜻 이면으로「만세! 이젠 우린 살았어!」라는 환호성이 숨어 있었다. 늘 사람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탓에 사소한 감정 변화까지 예민하게 감지하는 핀치는 점잖게 포장된 인사말에 쉽사리 속지 않았다.

리스를 곁눈질하여 쳐다보았다.
나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글쎄요.
미스터 리스? 부탁이니 안나 카레리나는 그만 내려놓고 절 봐주시겠어요? 게다가 그 책은 리스 씨가 싫어할만한 종류라고요.
그래요? 생각만치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요.
책의 두께를 말하는게 아녜요. 됐으니 파탄 난 결혼 이야기는 그만 쳐다보고 여기를 주목하세요. 부탁합니다.
흐음, 오늘 당신이 맨 넥타이는 못 보던 종류네요.
리스는 꾸중 듣기 싫어하는 소년처럼 굴었다. 그러니까 짐짓 딴청을 부렸다는 얘기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핀치는 카터와 푸스코를 동료로 생각 안 한다. 그들은 리스의 현지 자원이다. 물론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소모성 인간관계라기보다는 훨씬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핀치와 그들과의 거리는 가깝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꼬치꼬치 물어야 할까? 그래야 하나?
이야기를 시도하기에 앞서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이성은 그러지 말라 말렸지만 호기심이 고양이의 목을 졸랐다.

《몰라요, 선생. 알게 뭡니까. 내가 왜 이런 반응이냐고요? 왜 그럴 것 같수.》
푸스코가 액땜을 한답시고 허공에 십자가를 그려보였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8번서의 CCTV를 해킹하여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사는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복도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핀치는 고무지우개가 달린 연필로 단축키를 눌러 동선을 따라갔다. 각도가 바뀌자 이제 푸스코는 상한 햄버거를 먹고 배앓이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주름지고, 구겨지고. 찌그러지고.
『전 그저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겁니다.』
《됐수. 소름끼치니까 과거 일은 그냥 묻어두고 언급하지 맙시다. 괜찮겠지요?》
형사의 표정이 영 좋지 않으니 정복을 입은 경관이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핀치가 듣지 못하도록 핸드폰을 손바닥으로 막고 형사가 대답했다.
《이혼한 마누라야.》
졸지에 푸스코의 전부인이 되어버린 핀치는 훔쳐보고 있던 감시 카메라 화면을 꺼버렸다.

카터는 생각했던 것처럼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무엇을 상상했던지 유감스럽게도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핀치. 하지만 아무렴 어때요?》
전직 군인의 동질감 때문일까. 그녀는 리스의 여러 만행을 이미 용서한 뒤였다.
《존에게 전해줘요. 보스를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라고요.》
이어 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라고, 카터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담당자로서 핀치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던졌다.
《에디 메시의 시체를 그렇게나 빨리 찾아낼 수 있었던 방법이 뭔지 물어보고 싶...》
모르는 척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말이지.
존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은 잘 들을 거라는 생각은 당신들 착각이거든.

핀치는 거의 애원했다.
『여기서 그런 거 안 했음 좋겠어요, 리스.』
고용주의 잔소리에 리스는 입을 뾰족하게 말았다.
핀치에게 불만을 표현할 적에 그는 버르장머리 없는 10대 소년처럼 군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서 맛있는 멸치를 빼앗긴 고양이와 매우 흡사해진다.
『공원 벤치에서 이걸 점검할 수는 없잖아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거예요.』
『것보다 라이플이 왜 도서관에 있는 건가요, 미스터 리스. 좀비 떼라도 쳐들어 올까봐 그래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 창문에 라이플을 걸쳐놓고 조준 사격이라도 할 작정이에요?! 그런 거예요?』
『그런 바보짓을 왜 합니까. 그 전에 당신을 데리고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탈출해야죠.』
자신이 그렇게 무능력해 보이냐며 리스가 화를 냈다. 동시에 그는 머리로 안전한 탈출경로를 검토하는 듯했다. 약간 멍한 눈빛은 생각이 복잡해졌음을 암시한다.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해롤드의 불편한 왼쪽다리를 재빨리 훑었다. 엉덩이로 누르고 앉은 의자도 보았다. 순간 리스의 입술이 진정 못 하고 씰룩거렸다.
설마, 날 바퀴달린 의자에 묶어 전속력으로 밀고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안 돼.
핀치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당혹스러워하는 가운데 리스는 여자의 속살을 쓰다듬는 동작으로 총신을 천으로 문질러 정성스레 닦았다.
『이러면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게 당신에게는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거군요.』
그렇다, 아니다 대답은 뒷전이고 돌연 리스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으로 못 보던 컵이 있던데요.』
『아... 집에서 안 쓰는 종류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세 개짜리 세트였는데 하나는 부주의로 깨뜨렸지요.』
『그럼 두 개가 남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만 가지고 왔어요?』
『아뇨. 두 개 모두 가지고 왔습니다. 그치만 리스 씨는 티백 차를 잘 안 마시잖아요.』
『대신 인스턴트 커피는 잘 마시죠. 그 남은 하나를 제가 가져도 되는 거죠?』
핀치는 이해가 안 갔다.
『당연하죠. 그건 그냥... 뭐랄까. 컵이라고요. 씻어서 화장실 세면대 위에 두었습니다.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일부러 제 허락을 구하지 않으셔도 되요.』
『좋아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제가 주전자로 물을 끓이죠.』

두 사람은 같은 모양의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 각각 인스턴트 차와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저기. 책장에 숨겨둔 수류탄들을 치웠으면 좋겠는데.』
『그것들은 소음탄입니다, 핀치.』
『저번보다 숫자가 늘어났더군요.』
『많이 안 늘었어요. 누군가 도서관에 강제로 침입하려고 하면 혼쭐이 날 겁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해요?』
리스는 엉뚱한 방향을 쳐다보며 뜨거운 커피를 후룩 소리를 내어 마셨다.

그러니까 말이지.
존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 하나는 잘 들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핀치는 정말 이렇게 나올 거냐며 찌푸린 표정으로 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봤자 간이 튼튼한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컵의 모양이 똑같아서 헷갈리겠는데요.』
『제가 쓰는 컵의 바닥으로 빨간색 스티커를 붙여놨어요.』
『그래요? 흐음.』
『왜요.』
『내 컵에는 스티커 안 붙여줄 겁니까. 파란색이나 초록색이면 좋겠는데요.』
『존.』
핀치의 타박에 그는 어린애처럼 씨익 웃었다.

Posted by 미야

2012/11/22 10:27 2012/11/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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