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점 주인 에드워드 커슨이 당황한 얼굴이 되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아니다, 그건 틀린 표현이다. 50대 이후부터 진행된 탈모가 2011년 무렵부터 빠르게 악화, 이제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릴 일이 없다. 더욱이 길게 길러 관습적으로 옆으로 넘긴 옆머리는 물을 바른 것처럼 두피에 착 달라붙었다. 그와의 거리는 꽤 멀었음에도 핀치는 자극적인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헤어왁스라고 하는 종류다.
『sir.』
땀으로 번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커슨이 짧은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는 평소와는 달리 날씨 관련이나 주식 관련 잡담을 일절 생략하고 곧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누로 문질러 닦듯이 비비적거리는 양손의 동작만 봐도 곤란한 문제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핀치는 예의 가식적인 미소를 안면 가득 채우고 서점 주인의 대머리와 정신없이 비벼대는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덕분에 대머리 사내는 더욱 황송해하며 더듬더듬 변명하느라 바빴다. 자고로 웃으며 화내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컴퓨터를 잘 몰라서 말이죠. 우리 아들은 그럴 일이 생길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손으로 직접 장부를 작성하던 시절만 해도 이런 불미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은 결단코...』
실례라는 걸 알면서 말을 잘랐다.
『무슨 일인가요.』
『저어. 거래가 중복되었습니다.』
레 티보 8부작 중 제1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 1922년 작.
열 네살 소년 티보 가문의 차남 자크와 그의 친구 다니엘의 교환 편지 형식의 글.
얇은 기름종이로 포장되어 테이블 위로 올려진 책은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운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켰다. 신성한 성배 - 에드워드 커슨의 장남이자 조만간 고서점을 물려받게 될 앤서니 커슨이 하얀 장갑을 끼고 기름종이의 4분지1을 벗겼다. 손동작만 보자면 이집트의 유물을 취급하는 박물관장 같았다.
『엄격하게 말해 이것은 초판본은 아닙니다. 1937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기념으로 미국에서 출판된 종류이며, 어떻게 보자면 흔한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속지에 있지요. 파리로 여행한 한 미국인 부부가 가난한 예술가를 위한 한 후원회의 밤에서 뒤 가르에게 싸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옆으로 뒤 가르와 친분이 두터웠던 알베르 카뮈가 마침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고, 이들 해터 부부의 열렬한 요청에 호응하여 글을 적어주었습니다. 작가인 로제 마르탱 뒤 가르와 알베르 카뮈가 한 책에 싸인을 한 겁니다.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이기도 했던 아믈라르 크라랏숑의 말을 빌려오자면 이는 진실로 흔치 않은 경우로...』
눈꼬리가 가파르게 올라간 여성이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며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그러한 동작은 리본 장식으로 치장한 개를 밖으로 데려가라고 집사에게 명령하는 엘리자베스 여왕 같았다. 고서점의 장남은 왕실 집사처럼 그녀의 의사에 고분고분 따랐다.
『카뮈가 뒤 가르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예요. 책장을 넘겨보세요.』
『마담.』
『해터 부부의 소유물이었던 그 책이 맞군요.』
그녀는 으스대는 얼굴로 좌중을 훑었다.
《이게 다 무슨 소동인게지. 난 그저 책을 사고 싶었을 뿐인데.》
이래서는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어 영문도 모르는 채 연극 무대로 올라가게 된 꼬락서니다. 힐끔거리며 핀치의 안색을 살피는 고서점 주인은 아내가 바람이 난 걸 까마득히 몰랐던 어리숙한 여인숙 주인장을 연상시켰다. 그의 장남은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인데 동시에 과하게 명랑하다. 바람둥이 광대 같다. 이름도 모르는 진주 목걸이의 여인은 사랑에 빠진 처녀를 닦달질하는 마귀할멈이었고... 서류가방을 꿰찬 핀치는 우물에서 떨어진 금화를 줍는 바보 역할이었다.
이런 건 질색이니 일단 무대 감독을 향해 조명을 끄라며 핀치가 요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게 말입니다, 선생님.』
아버지 커슨이 끙끙 앓았다.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문제의 책이 수중에 떨어지자 아버지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핀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아들은 디지털 방식으로 바이어를 찾았다. 핀치도 구매 의사를 밝혔고, 여자도 구매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중복 거래.
화가 치민 아버지 커슨이 아들을 향해「네놈의 잘난 컴퓨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려무나」원망하는 눈빛을 던졌다. 그런데 어랍쇼, 고개를 푹 숙인 아들 커슨은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척하며 실은 여자의 스커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 시선이 머무른 곳은 여인의 무릎이었다. 지나치게 끈적거리고 쓸데없이 집요한... 여기에 남녀 문제가 얽혔다고 추측하면 터무니없이 앞질러가는 것일까? 핀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편안해지고자 하는 마음에 서점 주인이 서둘러 운을 떼었다.
『이런 일에는 경험이 없어 어떻게 처리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아버지 커슨이 슬그머니 핀치 쪽으로 몸을 붙였다. 아마 책을 핀치에게 팔겠다는 뜻인가 보다. 맙소사. 그는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아들에게 한치의 양보도 하기 싫은 것이다.
여자가 발끈하며 허리와 등을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마스카라를 덧칠한 눈도 커졌다.
『웃기지 말아요. 이 책은 저에게 팔렸어요. 이 출력물을 봐주시겠어요? 900달러를 예약금으로 지불한 구매자로 제 이름이 적혀져 있잖아요.』
『예약금은 돌려드릴게요.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제 아들이 그만 실수로...』
『아아~뇨!! 실수는 당신이 했죠. 이미 팔린 책을 다른 사람에게 또 팔겠다고 구두로 가계약을 했다고요? 하지만 전 이렇게 종이에 인쇄된 증거를 가지고 있죠.』
『그렇지만 제 고객에 대한 오랜 신뢰와 명예는... 음. 그런 출력물과는 감히 비교가...』
여자의 목소리가 분노를 담아 한 옥타브 가파르게 올라갔다.
『정신 차려요! 당신은 저 대단한 책을 오랜 신뢰와 명예 운운하면서 월 마트 양복을 입은 절름발이 사내에게 덥썩 팔아치우겠다는 거예요? 나더러 그런 걸 용납하라고?!』
옆에서 가만히 관망만 하고 있던 핀치는 한 방 먹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와우. 이 양복을 월 마트에서 샀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리스도 그런 건 모를텐데.》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완벽하게 다림질이 되었으나 결코 고급은 아닌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IFT 하위의 문화재단 소속 계약직 직원답게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싸구려 냄새가 풀풀 충기는 종류였을지도. 글쎄다. 그러나 핀치가 알기에 문화재단 쪽의 임시직 직원들 월급은 무척 짜다. 핀치의 또 다른 위장용 직업인 손해사정사 쪽의 급여와 비교하면 이쪽은 병아리 눈물 수준으로 뉴욕시 평균 수준의 월세를 지불하고 나면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할 정도다. 따라서 가방은 나름 고급이라고 해도 양복은 절대로 싸구려.
『지금 무어라 했소. 월 마트 양복이 어떻다는 거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깔보는 그녀의 발언에 아버지 커슨의 표정이 달라졌다. 말투도 달라졌다.
『당신은 참 무례하구려. 그리고 천박하오.』
『지금 뭐라고요?』
『뭐라고 했긴! 당신 같은 여자에게 로제 마르탱 뒤 가르는 과분하단 말이닷!』
『뭐가 어쩌고 저째?!』
『으아아, 아버짓!』
『다들 저리 꺼져! 여긴 아직 내 가게고, 누구에게 어떤 물건을 팔지 결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
『이 양반이 지금 어디 가려고! 내놧! 그건 내꺼야!』
『아버짓!』
여자가 서점 주인의 팔을 잡았다. 아들이 그녀를 말리려 했다. 여자가 아들의 뺨을 때렸다. 발길질도 했다. 이때다 하고 서점 주인이 책을 껴안고 달아나려 했다. 어딜 달아나. 여자가 다시 아버지 카슨을 휘어잡았다. 엎치락뒤치락. 와중에 팔꿈치가 핀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윽!』
안경이 날아간 건 둘째고 하늘에서 별똥별이 반짝거렸다.
『그만해요! 사람 죽겠어요! 그만해!』
아들 카슨이 악을 썼다.
아프다고 느끼기 이전에 몸싸움 중인 두 사람의 체중이 고스란히 핀치를 덮쳤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낮도깨비가 된 여자가 슝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이게 다 무슨 날벼락인 건지.
속도가 붙은 몸뚱이가 무방비 상태의 핀치 가슴을 후려쳤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