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방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내래 음란마귀에 빙의되어 보게써. 0.1% 정도만. ※
2008년, 그루지아 내전으로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여자의 애비된 자는 모아놓은 재산을 전부 털어 아들과 같이 안전한 친척집으로 달아났다.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갔다. 유엔이 임시로 세운 천막에 들어가 몸을 누이자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들었다. 눈물은 말라 나오지 않았다. 운명은 웃기게 돌아가 부친과 형제는 러시아군에게 죽임을 당했고, 할머니는 병사했다. 당시 17세였던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이른바 우편배달 신부가 되어 미국으로 들어왔다. 말이 신부였지 창부와 다르지 않았다. 서류상 남편이었던 미국인은 아내와 다른 남성과의 데이트를 주선하고 돈을 챙겼다. 그녀의 고향인 오세티아에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포주와 마찬가지였던 남편이 생판 모르는 남자를 끌어들여 세 명이 한 침대에서 잠자리를 가진 적도 있었다. 하나의 자궁으로 두 개의 페니스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웠다. 얼마나 거칠게 취급을 당했던지 하혈이 심해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야, 여보.》 기회의 땅이고말고.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남편의 목으로 칼을 들이댔다.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언제나처럼 여자를 제압하려 했지만 아담스 애플 바로 위쪽으로 칼날이 2cm정도 박히자 안색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과 그만 이혼하려고요.》 즈베스따는 괴력을 발휘, 남편 목에 박힌 나이프의 손잡이를 옆으로 강하게 밀며 움직였다. 성대와 경동맥이 동시에 절단되면서 입을 벙긋거리던 남편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수법이 지나치게 잔혹했거든요. 뼈까지 자르지는 못했어도 목을 거의 가로로 절단했다고요. 아내는 병원에서 막 퇴원한 몸이었는데다 몸집이 작고 약해보였어요. 처음부터 경찰은 여자를 용의자에서 제외시켰죠. 남편이 주먹질을 제법 하던 자라서 원한 관계로 수사가 진행이 되었고... 조직폭력 전담반에서 사건을 가져갔어요. 여기서 세 명의 용의자를 추려냈는데 안토니오 바랄레스는 두 달 뒤에 다른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고, 다른 두 명은 조직간 총격전에서 사망했다고 나오는군요. 흠...!』 《즈베스따는 어떻게 되었죠, 카터?》 질문하는 리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서 카터는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디보자. 국외로 추방되지는 않았고... 운전면허도 없고... 뭐지. 이 여잔 공기만 마시고 사나. 뭐로 생계를 유지하는 거지? 퀸즈에 주소지가 있군요. 그런데 번지수가 좀 이상하네.』 《다리 아래나 바닷가 한 가운데는 아닙니다. 세탁소더군요.》 『뭐예요, 존. 벌써 다 찾아본 거예요?』 《제가 하는 일이 그거잖아요. 그리고 카터? 여기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즈베스따는 더 이상 금발이 아니네요. 머리를 짙은 갈색으로 염색했...》 리스와의 통화는 거기서 돌연 끊어졌다. 찰나와 같은 순간에 비명을 닮은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카터는 인상을 쓰며「통화 종료」상태가 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런 거라면 버르장머리가 참으로 고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만나면 엉덩이를 뻥 걷어 차주마 화를 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그랬을까봐 염려가 되어서다. 『핀치나 존이나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서 잘도 버티고 있는 거군.』 싫어도 스트레스가 쌓인다. 혼잣말을 궁시렁대며 호주머니로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언뜻 보기엔 강도로 의심하기 쉬웠다. 즈베스따의 몸집은 작은 편이어서 후드를 눌러쓰고 껄렁껄렁 움직이자 마약에 중독된 10대 불량 청소년처럼 보였다. 『가방을 이리로 던져.』 줄리엣 프라이스는 강도의 요구대로 움직이며 두 손을 위로 들었다. 귀중품은 목숨보다 중하지 않다. 그래서 몸을 숙이고 강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목격자 진술이 없어도 경찰관들은 CCTV 녹화기를 가져가 강도의 인상착의를 확인할 것이다. 『지갑은 가방에 있어요. 가져가요.』 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지만 지갑 말고 다른 걸 가져가도록 하지.』 강도는 떨어진 가방을 줍는 대신 총을 꺼내어 줄리엣의 머리를 겨누었다.
세 발의 총성은 보다 먼 곳에서 들려왔다. 기겁한 줄리엣 프라이스는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풀썩 앉았다. 즈베스따는 대응 사격으로 방아쇠를 두 번 당긴 뒤에 주차장 건물 방향으로 달아났는데 출구가 아닌 건물로 도주로를 잡았다는 점에서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번개처럼 달리던 강도는 왼손으로 철제 방화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던졌다. 「젠장. 미치겠군.」 총성이 들렸으니 경찰이 도착한다. 피해자인 줄리엣은 네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소지품을 되찾으려는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많아봤자 10분. 전력질주로 달려 주차장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추적해 올라가면서 계단 모서리 부분에서 일시적으로 멈춰서서 적의 위치를 확인했다. 귀로 듣고 냄새를 맡는다. 공기에서 니코틴 냄새가 난다. 암살범은 담배를 피운다. 그것도 골초다. 인기척이 들렸다. 시선을 위로 향했다. 즈베스따는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엉뚱하게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 「도주용 차량을 세워뒀을지도.」 4층까지 올라왔다. 코너를 돌기 전 습관적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 순간 사각에서 웅크리고 있던 즈베스따가 낮은 자세로 기습을 해왔다. 그녀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고깃간에서 지방과 살을 발라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그런 종류다. 스프링처럼 일어서면서 권총을 내밀고 있는 리스의 팔을 잡고 겨드랑이 부위로 칼집을 깊게 넣으려 했다. 약한 힘으로도 신경과 근육을 자르기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 - 하지만 즈베스따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 리스는 양손잡이다. 따라서 권총을 쥐고 있는 손만 아니라 다른 손도 멋지게 휘둘러댈 줄 알았다. 상대가 여자라고 봐주는 법도 없다. 오히려 그는 루트가 연상되는 탓에 젊은 여성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래서 아무런 연민도 갖지 않은 채 주먹을 단단히 쥐고 살기등등하게 덤벼드는 여자의 콧잔등을 향하여 펀치를 먹였다.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먹였다. 『윽!』 콧뼈가 부러지는 감각은 둘째고 코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출혈부위가 눈보다 아래라서 시야가 피로 가려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다량의 피는 비강을 넘어 목구멍으로 흘러내린다. 깔딱깔딱 침을 삼키는 요령으로 넘겨보지만 금세 호흡이 막힌다. 코는 불편하고, 입은 피로 가득하고, 당연한 신체반응으로 즈베스따의 동작이 박자를 잃고 흐트러졌다. 덕분에 나이프를 고쳐 쥐고 상대의 옆구리를 노렸지만 그럴 줄 알았다며 텅스텐으로 만들어진 총구가 방패처럼 칼날을 튕겨냈다. 『오세티아 출신이라면서 하는 짓은 체첸이군. 겨드랑이로 칼이 박혀 총을 떨어뜨리면 그걸 주워 수색 중이던 군인의 머리통을 일격에 날려버리지. 흥미롭군. 누가 당신을 가르쳤지?』 휘둥그레 벌어진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회색도 아니고 청색도 아닌, 냉혹한 빛깔의 눈동자였다. 『당신...』 『아아, 안심해. 죽이진 않아.』 비바 아메리카나. 리스는 방아쇠를 당겨 여자의 무릎을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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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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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너지만 행복해,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줄리엣 프라이스, 여성, 38세, 기혼, 자녀 없음. 화장품 수출업체 사무직 직원...》 푸스코에게 종주먹을 들이댔는데 엉뚱하게 카터가 과제물을 가져왔다. 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왜 나에게 연락을 해요?』 《글쎄요, 왜 그런 걸까요.》 머리통 커진 자녀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 카터는 이 새끼야, 저 새끼야 욕하지 않고도 상대방 기를 꺾는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지금처럼 카터가 주파수 낮은 목소리를 내면 그녀의 외동아들 테일러는 재빨리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뜨린 더러운 양말과 바지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한다. 오래된 속옷을 모아놓지 않고 그것들 전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리스 또한 반사적으로 엄마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을 그 무엇인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쓰레기통이 가득 찼다. 문서 세단기가 잘게 씹어 토해낸 작은 꽃종이들만 모아도 대형 비닐 백으로 두 개의 부피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잘 비우지 않는다고들 하지.」 쓰게 웃으며 뇌 어딘가에 들어가 있는「오늘의 일정」에 목록을 하나 추가했다. 쓰레기를 내다 버릴 것.
핸드폰을 목과 뺨에 끼운 불편한 자세로 통화를 하고 있는게 분명한 카터가「아직 거기 있는 거 맞아요?」물어왔다. 바른 생활 사나이 존은 듣고 있다 착실하게 대답했다. 《핀치가 나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어요, 존.》 기분이 팍 상한다. 리스는 불쾌감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왜 당신에게 부탁을 합니까?』 《나도 그걸 묻고 싶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존. 누군가를 옥상 지붕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알고 있는 것 전부를 털어 놓으라 윽박지를 예정이라면 나 모르게 해줘요. 핀치는 내가 당신의 브레이크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는 눈치인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나도 알고, 당신도 알죠.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이 여자가 위험에 빠진 건가요?》 번호에 집중하라 요구한 핀치의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리스의 머릿속에는「해롤드가 카터에게 전화를 걸었어. 해롤드가 카터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어.」두 문장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반복만 되었던가. 짜증이 치솟았다. 다 팽개치고 메모리얼 병원으로 곧장 쳐들어갔음 좋겠다. 그러나 코푼 휴지조각이 되었을지언정 파편으로나마 흔적이 남은 이성이 그러한 태도를 비난했다. 위험에 처한 번호를 돕는게 먼저 - 위험을 조장하는 번호를 막는게 먼저 - 해롤드 버틀렛이라는 이름의 환자가 몇 호실에 입원했는지 컴퓨터로 찾는 건 이제 그만 - 현역 군인처럼 짧게 다듬은 머리통을 위아래 방향으로 쓸어내렸다. 번호에 집중하자. 『다시 연락할게요, 카터.』 《아, 아! 기다려요. 아직 끊지 말아요, 존.》 『달리 할 말이라도?』 《오른손을 들고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세요. 나, 존 리스는 사람을 건물 지붕에 거꾸로 매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존은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분명하게 말해 여기는 건물 지붕이 아니거든.』 『사, 살려줘요~!! 히이익~!!』 『떨어진다고 해도 15층 발코니에서 추락하는 거지, 옥상은 아니야. 내 말이 맞지?』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사람 살려~!!』 요즘 사람들은 진짜지 이혼을 과격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잘 살아 보겠다고 해놓곤 사랑이 식자마자 상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으니 모양이 우습다. 한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맹세를 했음 거짓이 없어야 하잖아. 바람까지 피워놓고, 정숙한 부인에게 몹쓸 성병까지 옮기고, 분노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거액의 위자료가 아깝다며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해? 이거 정말 나쁜 놈일세. 리스는 슬그머니 미스터 프라이스를 잡고 있던 팔에서 힘을 뺐다. 몸이 아래로 더 기울어진다 싶자 남자는 사색이 되었다. 이어 더러운 양탄자의 먼지를 터는 요령을 실습하자 맹렬하게 울부짖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꽤애액~!!』 『여기로 올라오고 싶음 네가 고용한 살인 청부업자에 대해 말해봐.』 『저기요! 이, 인터넷으로 고용했거든요!』 『그리고?』 『여자 목소리로 발신 제한 전화가 왔어요!』 『여자?』 『억양이 특이했어요. 젊었고! 기, 기억나는 건 하느님께 맹세코 그게 전부예욧! 꺄악~!』 일을 이렇게 간단하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데 핀치도 그렇고 카터도 그렇고 하지 말라 말리는 까닭을 도무지 모르겠다. 신이 나서 더러운 양탄자의 먼지 털기를 한 번 더 했다. 겁을 먹은 남자가 째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오줌이라도 지렸는지 암모니아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병원에선 소독약 냄새가 났다. 면회 사절 메시지를 무시함에 있어 양심의 가책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손잡이를 밀었다. 핀치는 겁에 질린 소년처럼 담요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채 자고 있었다. 평소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면제 처방이라도 받은 듯했다. 아니면 진통제 주사를 맞았을 수도 있다. 손등으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은 감긴 채였고, 호흡은 얕았다. 『보고 싶었어요, 핀치. 그런데 많이 아팠나 봐요.』 그는「허리를 실수로 삐끗했다」라고 설명했지만 의사는 급성디스크가 아닌 부상으로 야기된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의심하고 있다. CT-촬영에서 멈추지 않고 혈관 조영술이니 하는 여러 검사를 병행하는 건 다 까닭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자칫 깨어나게 만들면 지구 대 참사에 버금가는 악몽이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리스는 핀치의 뺨에서 쉬이 손을 거두지 못했다. 왼쪽 다리를 저는 건 리스로서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고 탓이다. 의료진들은 부러진 뼈를 특수한 핀으로 고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총상으로 짐작된 상흔들은...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 소곤거렸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해롤드.』
누가 당신을 이다지도 아프게 만든 건가요. 누구 짓인가요.
행여라도 체중이 실려 그의 몸을 누르는 일 없도록 주의하며 핀치의 뺨으로 자신의 뺨을 가져갔다. 피부 한 장 사이로 옮겨 붙는 따뜻함에 어쩐지 눈물이 나려 했다.
『으으.』 『굿모닝, 핀치.』 『으?』 『꽤 힘들어 보이네요. 제가 대신 간호사를 불러줄까요.』 『아으?!』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엉금엉금 기고 있는 핀치를 향해 리스는 경쾌하게 웃음을 날렸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잠든 핀치를 지키며 선잠을 잤지만 피곤함도 잊었다. 『당신의 찡그린 얼굴이 많은 걸 말해주는군요. 일단 제멋대로 설명하자면 프라이드 부부의 일은 전부 해결하고 온 겁니다. 그러니「넌 해고야!」표정은 치워요.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랍니다.』 남편을 발코니에 매달았다는 건 쏙 빼먹곤 으쓱거리며 자랑이었다. 하지만 핀치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더 어두워졌다. 『그런게 아니라.』 어쩐지 다급해졌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에 피가 묻었어요, 미스터 리스. 다쳤어요?!』
Posted by 미야
2012/12/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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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쥐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부근에서 공중전화가 울렸다. 신호를 받고 길을 건너려다 도중에 멈춰섰다. 1초, 2초, 3초. 반복하여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입술에 종이컵을 가져갔다. 과거지향적인 소음이 귀를 따갑게 만들었지만 저마다 개인 휴대폰을 소지한 행인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여자는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메고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간다. 배달 중인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심지어 시끄럽다 눈썹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택시 운전기사가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경적보다 취급이 더 형편없다. 근방의 CCTV 카메라를 흘깃 바라보던 리스는 장갑을 낀 손으로 수화기를 냉큼 집어 올렸다. 《자연과학, ㄹㅗ미오, ㅇㅏㄹ파. 삐익 - 요리. ㅋㅏ메라, ㅇㅗ스터...》 이쪽에서「시작!」을 외치지도 않았건만 기계의 음색을 띈 목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날아들었다. 리스는 주의 깊게 들은 정보를 재빨리 암기하곤 손때가 묻은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빨간색 불이 점멸하는 CCTV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핀치가 납치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을 적부터 기계는 리스에게 연락을 취해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전에 입력된 매뉴얼인 듯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돕도록 -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혈관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기계는 프로그램 된 내용대로 냉정하게 움직였다. 망할 쇳덩이는 핀치의 안전을 우선시하지 않았다. 쓰고 버리는 헌신짝도 그렇게 취급하지 않는다며 리스는 격분했지만 이진법으로 구축된 프로그램이라는 건 태어날 적부터 온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체온이 없는 녀석이 인간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마음이 없었고, 영혼이 부재된 괴물이었다. 『너, 정말 마음에 안 든다.』 핀치가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부터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가, 리스는 늘 이 점이 고민이었다. 그를 구했다. 제자리를 찾았다. 루트로부터 기인한 비상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런데 기계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는 마치 기계가 핀치의 귀환을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 작전 중 죽어버린 사람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런 몹쓸 기분이 든다. 아니면 기계는 누구와는 다르게 핀치의 생사에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핀치?』 서둘러 도착한 도서관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옷걸이는 텅 비었고, 의자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화장실에 간 겁니까. 베어?』 허리를 구부려 베어가 애용하는 깔개에도 손을 대고 온기를 확인했다. 이 또한 차가웠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한 사람과 개 한 마리는 최소한 30분 이전부터 출입을 하지 않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공중전화가 귀 따가운 따르릉 소리를 내고난 뒤로부터 대략 20여분이 흘렀다. 연락은 아마 비슷한 시간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니, 0.1초도 안 틀리고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하는 일이니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초침을 응시하며 잔 흠집이 가득한 시계의 유리판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면 때마침 핀치는 먼 곳에 있었고, 나는 근방에 있었다고 판단해도 되는 걸까? 만에 하나 그런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시쳇말로 염통이 쫄깃거렸다.
걱정을 담은 두 번째 신호음이 끝나자마자 고용주가 반응했다. 《네, 미스터 리스.》 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행이다. 납치당한 건 아니다. 그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는「스코티, 나를 전송해줘」라고 안 해요?』 스타트렉 농담 따먹기에 핀치는 어중간하게 대응했다. 《미안합니다. 그리로 당장 워프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어디에요?』 《그게...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뇨. 그게 무슨 뜻이죠.』 순식간에 나쁜 쪽으로 상상력이 발동하려 한다. 그는 의자에 결박당해 있다. 손목이 케이블타이로 단단히 묶여있고, 목덜미에는 진정제가 주사된 흔적이 있다. 리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도로 펴는데 애를 먹었다. 『당신, 괜찮아요?』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너무 앞지르지 말자. 아무 일 없다. 그럴 리 없다. 핀치의 목소리엔 약에 취한 떨림 증상이 없다. 긴장한 건 확실하지만 모종의 위험인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럴 거라 짐작한다. 아아, 젠장. 알게 뭐람. 펴졌던 손바닥이 도로 오그라들었다. 목소리만 가지고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장이 뱃가죽 안쪽에서 파도치며 출렁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왼손이 권총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녔다. 『핀치. 설명을 해요.』 그 요구에 고용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지는 건 엉뚱한 해명이다. 《번호가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도움을 드릴 형편이 되질 않네요. 이 상황이 당혹스러울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리스 씨... 이번에는 혼자서 번호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아, 그리고 베어는 동물병원에 맡겼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틀렸습니다. 그건 제가 들어야 할 답이 아닙니다, 핀치.』 당신 지금 어디야, 누구와 있어, 무슨 일이야, 도대체 나 몰래 뭘 하려는 거야. 비명을 닮은 고함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걸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정분이 나서 도망간 마누라를 추궁하려는 것도 아닌데 참 잘 하는 짓이다 - 몸을 빙글 돌려 가상의 적을 세차게 노려보았다. 그래보았자 그가 마주한 벽에는 오래된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제작된 세계지도가 걸려 있는게 전부다. 『설명해요.』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이 방금 전 아메리카 대륙을 불살랐다. 『설명해요!!!』 이성의 끈이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잡아당겨졌다.
그게 뚝 끊어지기 전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제3자가 힌트를 제공해줬다. 《선생님, 여기서 핸드폰 통화를 하심 안 됩니다. 다른 환자분들께 좋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중요한 업무 관계 때문에...》 《것보다 그렇게 혼자 일어서서 돌아다니심 안 돼요. 통증이 악화될 겁니다.》 《곧 자리로 돌아갈게요.》 핀치는 리스가 아닌 간호사로 추측되는 여성에게 미안하다 얼른 사과하고 눈치껏 전화를 끊었다. 『다른 환자? 병원?』 맥이 풀린 리스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간호사가 태도 불량한 환자의 핸드폰을 강제로 압수한 모양이다. 공중전화로 추측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다시 걸려온 건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뒤였다. 『어느 병원이죠, 핀치.』 그의 고용주는 취조를 닮은 질문을 대단히 싫어한다. 질문에 대답하기 싫으니까 속사포처럼 자기 할 말만 떠들었다. 《당신은 번호에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입원한 병원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진 마세요, 미스터 리스.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았고, 지갑을 요구하는 거한에게 얻어맞지도 않았습니다. 창피하게도 음. 카프카가... 아니, 카프카는 무시하세요. 실수로 허리를 삐끗했는데 증상이 나빠요. 4-5번 추관판 탈출증 같다면서 수술을 받아보는게 어떻겠느냐 의사가 겁을 어찌나 주던지 검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구요, 일단은 사흘 예정으로 입원했습니다. 미리 경고하는데 번호를 구하는게 먼저입니다. 내 상태를 확인하러 오기만 해봐요. 해고 통지서를 코앞에서 날려버릴 겁니다. 그러니 빨리 가서 그들을 도와요. 아울러 몸조심해요. 당신이 다칠까봐 걱정하기 싫군요. 형사님들께 적극 도움을 구하세요. 여기서 덧붙이자면 퇴원할 때까지 리스 씨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겁니다. 도움이 될 것도 아닌데 제 호기심과 가치도 없는 외로움을 이유로 당신의 시간을 빼앗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명심하세요. 가서 번호를 도와요.》 그의 수중에 동전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지폐와 동전은 종류가 다르니까. 핀치는 이쪽에서 네, 아니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자기 마음대로 휙 사라졌다. 『맙소사, 핀치...』 쓰게 웃으며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무서워 죽겠다. 미스터 전자사전은 어디로 갔는데 나에게 묻고 그래. 설마?!》 『아니야, 그는 무사해.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이번엔 나 혼자 움직이게 되었어. 그러니까 라이오넬? 방금 내가 불러준 SSN 번호는 받아 적었나.』 땅딸보 형사는 실수로 뜨거운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댁 혼자 움직인다고?! 그럼 나도 빠지겠습니다. 라이오넬 푸스코에게 전화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들어가세요!》 『어이.』 《싫단 말이오~ 싫다고!》 앙탈(?)을 부리는 형사의 울부짖음은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우울한 얼굴로 혼잣말했다.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친구야.
Posted by 미야
2012/12/10 19:01
2012/12/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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