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8

길 건너편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리스를 향해 핀치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그가 소스라치게 놀란 건 전직 CIA 요원의 은밀한 취미 생활이 되어버린 범죄성 사생활 침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거다. 핀치는「저를 또 미행한 거예요?!」소리를 지르는 대신 악귀처럼 화가 나서 고서점으로 돌진하려고 하는 미친 남자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기를 썼다.
『안 돼! 진정해요!』
힘을 잔뜩 준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자세로 리스가 핀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낮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벌개진 눈동자가 이성을 잃었음을 증명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녹록지 않은 경력의 마피아 단원도 절로 뒷걸음질할 살기다. 덕분에 핀치는 그를 붙잡아 세울 용기를 잃었다.
『존!』
그래도 이름이 불리워지자 리스가 움찔거렸다.
만약 그게 잘못을 나무라는 투였다면 그렇게 돌아보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핀치의 목소리는 여성처럼 높은데다 가냘프게 울리기까지 했다. 리스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고 숫자를 1에서부터 50까지 헤아렸다. 뭐, 실제로는 셋 밖에는 안 세었다.
불가항력적으로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는 그의 고용주는 얼굴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고, 콧잔등이 멍들었다. 피부 위로 피가 올라와 벌써부터 벌겋게 타들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보라색으로 멋지게 변색하리라. 양복 상의는 어깨까지 벌어졌다. 누군가와 드잡이라도 한 모양새다. 정교하지 않은 바느질의 싸구려 양복은 그 와중에 솔기가 터졌다. 매일 쓰고 다니던 두꺼운 테의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진 후다.
존은 인상을 찡그리고 유리알 너머로만 볼 수 있었던 핀치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눈부신 햇빛 아래서 동공이 바늘처럼 축소되어 있었다.
친구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결심이 밑둥부터 흔들렸다. 가게를 뒤엎어버리기 전에 병원으로 그를 데려가는게 먼저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속으로 1에서부터 50까지 숫자를 헤아렸다.
그래봤자 이번에도 실제로는 셋 밖에 안 세었다.
『들어가서 안경만 가지고 올게요. 금방 올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괜찮습니다. 여벌 안경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럼 그냥 갑시다.』
겨드랑이로 팔을 넣어 핀치를 부축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리스가 타고 온 승용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 대응을 할 수 없었어요.』
팔꿈치로 얻어맞은 건 이쪽인데 왜 변명하는 말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모른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핀치는 쓴 맛이 도는 혀를 억지로 구부렸다. 여기서 잘 설명해두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저 가엾은 서점 주인은 누군지도 모를 괴한에게 한바탕 린치를 당할 거다. 성격상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을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겠지만 이 골리앗 같은 남자는 손바닥을 싹싹 비는 희생자를 유리창 밖으로 내던질 거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못 하게끔 잘 다독거려야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로 핀치는 활활 달아오르는 아픔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신음소리를 흘릴 때마다 아버지 그리고 아들 커슨의 안전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핀치에게 직접적인 데미지를 날린 진주 목걸이를 한 여자는 결박되어 건물 옥상에 거꾸로 매달릴지도 모른다. 벗겨진 여자의 하이힐이 50층 높이에서 수직낙하 하는 광경을 상상한 핀치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나는 아프지 않다. 하나도 안 아프다. 세 사람을 위하여 어떻게든 참도록 하자.

『사려고 했던게 책이 아니고 무슨 KGB 암호 코드 같은 겁니까?』
악셀레이터를 마구 밟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하며 리스가 질문을 던져왔다.
젠장, 안경을 쓴 사람의 얼굴을 저렇게 때리다니.
다행히 눈을 다치진 않은 듯하다. 핀치는 느리게 눈까풀을 꿈뻑거렸다.
『설마. 절 때린 여자가 국토안보국 직원처럼 보이던가요.』
『글쎄요. 겉만 보자면 대학 조교수 분위기였지만 알게 뭡니까. 저는 이해가 안 가네요. 남들과 주먹질을 해가면서 책을 사는 사람도 있답니까.』
『인간의 탐욕이라는 건 그런 거지요. 그 사람들 눈에는 그 낡은 책 한 권이 진귀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을 겁니다... 크흑.』
『많이 아파요?!』
못 참고 신음했더니 리스가 펄쩍 뛴다.
핀치는 됐으니 운전에 집중하라며 손짓했다. 운전 중인 사람이 정면에서 눈을 떼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안색만 살피고 있음 심히 무서워진다. 실제로 옆 차선을 달리던 차가 빵빵 이러고 경적을 울리며 그들을 향해 주의를 보내왔다.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은퇴한다고 했을 적에 내놔라 하는 박물관장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런 건 애교에 불과하죠. 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박물관 관장은 자기네들에게 디스커버리호를 주지 않으면 직간접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복수할 거라고 나사 관계자들을 상대로 은밀히 협박까지 했으니까요. 그 협박 중엔 나사 직원 자녀들에게 박물관 입장표를 팔지 않겠다는 농담도 포함되어 있어요. 황당하죠? 모형의 가짜 엔진을 장착한 오래된 쇳덩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예... 그저 책 한 권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먹다짐도 불사하며 가지고 싶어합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하아... 부처님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든지 물욕이라는 건 있지요. 제가 10년만 더 젊었다면 어디 한 번 해보자 이러고 두 팔을 걷어붙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지치는군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안경이 없으니 사물은 전부 희멀겋게만 보일 뿐이다. 네모반듯하게 생긴 물체가 거리표지판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큼직한 글자 크기에도 불구하고 안경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리스?』
『병원이오.』
『오! 이 정도로 병원까지 가는 건 오버하는 거랍니다. 피가 나지도 않았고, 부러진 곳도 없어요. 그리고 난 병원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얼음찜질을 하고 잠시 쉬면 될 거예요. 도서관으로 갑시다. 응급처리 키트가 있어요.』
『하지만 심하게 부어오르고 있다고요.』
『저도 압니다, 미스터 리스. 아울러 이런 건 약을 바르거나 주사를 맞는다고 당장 좋아지는게 아니죠. 현대 의술이 만능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며 왼손을 뻗어 리스의 팔을 톡톡 쳤다.
『나는 병원이 싫어요.』
소독약 냄새가 나는 그곳을 핀치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병원은 그를 불행하게 만든다.
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수정했다.
그래도 협상의 여지는 남겨놓는 걸 잊지 않았다.
『못 참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지면 그때는 싫다고 해도 응급실로 데려갈 거예요.』
『알겠어요, 존.』
핀치는 순순히 그렇게 하마 약속했다.

『것보다 속도를 줄이는게 어떻겠습니까, 미스터 리스. 사고가 나서 우리 두 사람 모두 다치거나 죽으면 꼬락서니가 우습게 되지 않겠어요?』
『걱정 말아요. 제한속도를 준수하고 있습니다.』
예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리스는 진심으로 기뻤다.
멍은 들었지만 핀치는 핀치.
겁도 나고 화도 나던게 조용히 가라앉았다.
훨씬 침착해진 모습으로 리스는 부드럽게 핸들을 조작하며 차를 좌측으로 꺾었다.

Posted by 미야

2012/11/26 13:03 2012/11/26 13:0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46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479 : 480 : 481 : 482 : 483 : 484 : 485 : 486 : 487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0758
Today:
603
Yesterday:
1861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