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 28 : Next »

낙서-일상생활34

두 눈을 무겁게 꿈뻑거리더니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비기까지 한다.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아님...」
키보드를 정신없이 두드림과 동시에 곁눈질로 리스를 관찰했다.
옆에서 보니 흰자위가 새빨갛게 충혈된게 보인다. 정도로 짐작하자면 질병의 징후로 결막에 염증이 생긴 건 아니고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 희한하게도 오른쪽보다 왼쪽의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아 짝눈이 되었다. 덕분에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희극적으로 보였다.
「쯧쯧... 한쪽으로 엎드려서 잤나.」
가볍게 킁, 이러고 콧소리를 내자 리스가 거기에 반응하여 얼굴에서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도 아니건만 뻘쭘한 표정이다. 구석으로 얼굴을 감추고 몰래 손가락으로 코를 파다 걸린 것도 아닌데 제법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핀치의 머릿속으로 노란색 전구가 켜졌다.
『어젯밤 뭘 했나요? 미스터 리스.』
『호오, 제가 뭘 했는지 궁금한가요, 핀치.』
이것 봐라? 능구렁이처럼 웃는 리스의 대응에 좁은 세탁실을 밝히던 전구가 활주로를 밝히는 대형 헤드라이트 수준으로 확 불타올랐다.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안전요원이 미친 사람처럼 양팔을 휘젓고 있다. 위험, 위험, 위험. 당장 기수를 돌리시오. 그러나 미지의 개척지를 탐구하는 학자는 재앙의 경고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법이다. 폭발하려면 폭발하라지. 최근 들어 그는 파트너의 심기를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섰다. 침대 밑으로 더러운 양말을 숨겨놓은 거라던가, 서랍 속에 도색 잡지를 넣어둔 것 정도는 금방 건져 올릴 수준은 된다. 물론 리스는 세탁물을 바구니에 모아놓는 대신 그것들 전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으며, 여자들의 발가벗은 몸뚱이에 그다지 반응하는 일이 없다. 아무튼. 단단한 등껍질을 가면처럼 뒤집어쓴 전직 CIA 요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딘가에 있을 빵부스러기를 찾기 시작했다.

일단은 직구.
『눈이 충혈되었어요.』
의외로 리스는 핀치의 지적에 쉽게 수긍했다.
『그러게요. 속눈썹이라도 들어간 것 같아요. 아침부터 상태가 영 좋질 않네요.』
『흐르는 물에 씻어봤어요? 아님 식염수를 넣어보지 그래요.』
이리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키 큰 사내는 별 의심 없이 순진하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서자 핀치는 한 번 더 손짓했다.
리스는 고용주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다지 내켜하진 않았지만, 한 걸음 더 앞으로 움직였다.
고개만 돌리면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들이마시고 내쉬는 상대방의 숨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그대로 시선을 위로 하고 가만히 있어 봐요.』
『왜요.』
『속눈썹이 들어갔는지 찾아볼게요.』
『어, 그건.』
핀치가 제안에 리스는 싫습니다 - 이러고 재빨리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핀치는 왈츠의 스탭으로 재빨리 따라붙어 거의 몸을 밀착시키다시피 했다. 리스는 그걸 못 견뎌했다. 그러나 핀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빤히 한 곳을 쳐다보며 혹시라도 미세한 이물질의 그림자가 보이지는 않을까 주의를 온전히 거기로 집중시켰다. 그런 까닭으로 눈치를 못 챘다. 근사한 케이크를 눈앞에 둔 공룡의 뜨거운 콧김이 핀치의 피부에 닿아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말 그대로 남의 얼굴에 대고 잔뜩 거칠어진 숨을 뿜어대고 있다는 걸 깨닫자 리스는 발작이라도 일으킬 지경이었다. 호흡을 참아야 할까? 얼마나 참아야 하지? 이러다 질식해서 죽는 거 아니야? 질겁해서 뒤로 다시 몸을 뺐다.
『저도 거울을 보고 한참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어요, 핀치.』
『그러게요. 안 보이네요.』
『저어, 그만했음 좋겠는데.』
『물구나무서기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사람이 참을성이 없어요.』
여전히 핀치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시선을 입구 방향으로 돌리고 있어 봐요. 아뇨. 고개를 거기로 돌리라는게 아닙니다.』
나더러 어쩌라고!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코가 시원쌉싸름한 코롱의 냄새를 맡았다. 어쩌면 코롱이 아니고 고급 비누일 수도 있다. 그쪽으로는 문외한에 가까운 리스는 핀치가 애용하는 화장품의 종류가 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남들에게서는 잘 맡을 수 없는 종류라는 거, 그리고 적당히 달고 시원하다는 것만 알았다. 백화점의 고급 남성용 향수 코너를 수백 번 지나쳐도 맡을 수 없던 냄새다. 그리고 좋아하는 냄새다. 리스의 몸은 열성적으로 반응했다.
「이제 숨을 힘차게 뿜어대는 거에 그치지 않고 콧구멍까지 벌릉거리고 있겠군.」

궁여지책으로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걸 핀치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했다.
『어제 술 마신 건가요, 미스터 리스. 알코올 냄새는 안 나는데.』
덥지도 않은데 땀이 날 지경이다.
『그럴 리가. 혼자서는 마시지 않아요.』
『저번처럼 형사님들과 같이 마시러 간 거 아녜요?』
『안 마셨다니까요. 카터나 푸스코는 요즘 바빠서 제가 전화하면 화부터 내요.』
이번에는 핀치의 콧구멍이 벌릉거렸다. 그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순간 리스는 오늘 아침 비닐포장을 뜯은 새 셔츠를 꺼내 입고 나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동시에 자신에게서는 어떤 체취가 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걸 핀치가 좋아해줄지도 궁금했다.
그러다 퍼득 깨달음이 왔다.
좋아할 리 없지. 먼지와 화약 냄새가 날 테니.
손으로는 코와 입을 막았고, 체온은 1도 정도 가파르게 상승했고, 동시에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사내는 다시 한 번 더 뒷걸음질 쳤다.
이번에는 핀치가 그의 움직임을 좇아 따라오지 않았다.

『속눈썹은 없어요, 미스터 리스.』
핀치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어째서 - 이유를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는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화가 났다라기 보다는 속상했다. 까닭은 모른다. 어쩐지 우울했고, 가슴이 답답했다.
핀치가 그의 냄새를 싫어할 거라는 걸 깨달아서? 그건 너무 웃기는 변명이다.
그런게 아니라.
뭐랄까.
설명이 난감하다.
리스는 감정기복이 심한 사춘기 소년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벽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그 증상은.』
고용주는 어쩐지 산만한 몸짓을 보이는 리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필요하다면 주의를 끌기 위해 물결에 흔들리는 해초처럼 손도 흔들었을 거다.
『안구 건조증이에요.』
『네? 지금 뭐라고요?』
『안구 건조증이라고요, 미스터 리스. 밤새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뭘 했던 거예요? 고백해 봐요. 인터넷 도박을 했어요, 아님 나 몰래 무슨 조사라도 하고 그랬나요. 어느 쪽이든 내 맘에는 안 드는데.』
찡그린 표정으로 핀치가 팔짱을 꼈다.

Posted by 미야

2012/12/04 12:15 2012/12/04 12:1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66

낙서-일상생활33

예전에는 성인 남자가 공원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펼치고 읽는 모습이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그렇게 했다간 사람들 눈총을 받는다. 젊은 여자들은 천연두 병균이라도 발견했다는 투로 슬금슬금 피한다. 뿐만 아니라 순찰 중인 정복의 경관이 거동이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며 긴장을 한다. 어깨에 달린 무전기로 425A (코드 : 거동 수상자) 이러고 순찰차량에 보고를 하는데 거 참, 테러리스트 잡겠다고 엉뚱한 사람을 막 의심하고 그런다.
『좋은 세월은 다 지나갔다니까.』
50대 후반의 사내는 불평하며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메일을 확인하는 척했다.
오전 늦게부터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가 있어 성가시다.
어디까지나 가명 - 로버트는 어깨에 총을 맞은 적이 있어 습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근육을 조이며 갉아대는 쓰라린 통증이 벌써부터 엄습하는 기분이다.

『사직서만 제출하고 끝나는게 아닐세. 50페이지가 넘어가는 비밀 유지 각서에 하나하나 서명을 하고,「약속을 어길 시에는 배를 째고 죽겠습니다」이러고 동의를 해야 하거든. 그리고 꾸준히 감시를 받지. 이게 참 독해. 농담이 아니라니까. 중국 쓰촨으로 관광을 가겠다고 비행기 표를 구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는 거야. 머리 위로 투명한 감시 카메라라도 달린 것 같다니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네도 잘 알 것 같은데... 이라크에도 다녀왔었지?』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벤치에 동석한 수트 차림새의 남자는 로버트의 빈정거림에 쓰게 웃었다. 특히「투명한 감시 카메라」부분에 반응, 공원 어딘가에서 그들을 촬영하고 있을 렌즈를 찾아 가로등 위를 흘끔거렸다.
『그래서 쓰촨 여행은 포기한 겁니까.』
『그걸 왜 포기를 하나? 이 친구야.  비뚫어질테다, 구호 한 번 외치고 가족들과 같이 날랐지. 난 반역질하러 간게 아니고 관광하러 간 걸세. 떳떳하게 굴어야지.』
『여행은 좋았나요.』
『좋기는 개뿔. 과일 주스를 잘못 먹고 배탈이 단단히 났어. 일주일에 3kg나 체중이 줄었다니까. 일하러 간게 아니고 놀러갔는데 화장실을 들락거린게 추억의 전부야. 거기다 그쪽 관리 말이 만약 이질에 걸린 거라면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잖아? 순간 누구를 저주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더군.』
개인적인 수다는 여기까지.
핸드폰 액정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직 시절에도 쓸데없는 말이 많다 지적을 들어왔던 그다. 나불거리는 가벼운 입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고쳐지는게 아니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내가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을 했다는 걸 이해해주게.』
일찌감치 선부터 긋는 로버트를 향해 리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비밀 유지 각서 어쩌고는 어디까지나 핑계고.
모르는 건 모른다는 얘기를 화려한 수식어로 돌려 말한 거에 불과하다. 물어봤자 아는게 없음 어차피 말을 못해주는데「미안하지만 잘 모르겠소」이러는 것보다「정부로부터 입 다물라는 압박을 받았소. 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애국자요.」이러는게 훨씬 능력 있어 보이는 법이다. 정부 요원의 타이틀을 벗고 프리 마켓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능력을 민간 고객에게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은 그는 일찌감치 엉덩이에 공작새 깃털 꽂는 방법을 능숙하게 익힌 듯했다.
「말로만 유능하고 허풍만 센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갬브럴은 왜 이런 사람을 소개했지.」
리스는 로버트의 점수를 왕창 깍아내렸다.

그렇게 올리버 갬브럴이 사기를 쳤나 의심을 품기 시작하려던 찰나, 나뭇잎의 음영을 구경하던 로버트가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곁눈질로 리스를 바라보는데「자네가 뭘 생각하는지 나도 다 알아」라는 표정이었다.
『방금 나로부터 얻을 수확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지 말게. 나도 아주 바보는 아냐. 게다가 내 고용주가 자기로부터 계속 월급 받고 일하고 싶으면 당신에게 사실대로 말하라고 넌지시 압력을 주더군.』
『...』
『있잖아. 100년 묵은 늙은 구렁이를 어떻게 요리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
리스는 깍지를 낀 자세로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들고 있던 커피도 장식품으로, 로버트와 나란히 벤치에 안고부터는 음료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걸 보고 로버트가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하시게. 아무렴 어때. 난 이제 국가를 위해 일하는 몸도 아닌데.』
그는 만사 지겹다는 투로 등을 구부렸다. 덕분에 그는 은행에 집을 빼앗긴 가엾은 모기지론 희생자처럼 보이고 있다. 이런 사내가 전직 CIA 요원이었다고 하면 믿어는 줄까. 그런데 의외로 현장 수습 요원들은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겼다. 눈에 띄는 타입은 간첩질에 불리하다.

손이 시린 것도 아니면서 로버트가 손바닥을 좌우로 싹싹 비볐다.
『나는 총을 쏘아대며 전쟁터를 누비진 않았어. 뒷구멍 작전이 내 장기였단 말일세.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책을 해왔던 탓에... 지금도 인맥이 좀 있는 편이라 현장 요원이 행방불명이 되면 워싱턴에서 은밀히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있지. 그들이 국가를 배반한 건지, 아님 적에게 노출되어 희생된 건지,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잠수를 탄 건지 궁금해 하는 거지.』
잠시 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버트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하는데... 최근 두 명의 CIA 요원에 대한 은밀한 문의가 있기는 있었어. 이름이 스노우와 에반스였지. 마크 스노우는 이름이 익숙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 스노우는 일종의 쓰레기 청소반인데 급이 다른 청소 요원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지저분한 걸 엄청 많이 알아서 위쪽에서 그냥 놔주진 않았을 거고... 특이하게도 근래엔 외국에서 안 놀고 여기에 있었어. CIA가 뉴욕에서 어슬렁거렸단 말일세. FBI쪽에서 엄청 신경을 곤두세웠지. 이게 뭘 의미하느냐. 뻔하지! 다리 건너 아는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그들은 AAA급 무단 이탈자를 쫓는 중이라고 했네. 이거 상당히 느낌이 안 좋지. 아니나 다를까 한쪽이 호텔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한참 분위기 타고 있는데 말꼬리를 불쑥 자르는 건 리스의 좋지 않은 버릇 중 하나다.
『행방불명된 여성 요원에 대한 워싱턴 쪽의 문의는 없었습니까.』
『뭐? 여자?』
『네.』
말꼬리가 잘린 건 둘째다. 로버트는 진정으로 놀란 눈치였다.
『남자가 아니고 여자? 여자는 없었는데.』
『그렇군요.』

턱을 만지는 그의 동작이 느려졌다.
『여자라고? 흠. 다음 질문을 멋대로 추측해서 대답하자면 우리 쪽으로 접근해온 여성 요원도 없었어. 그리고 미스터 갬브럴은 현장에 여자를 배치하는 걸 안 좋아한다네. 물론 고객 맞춤으로 여성 보디가드가 필요한 경우가 반드시 있어. 그런 경우 갬브럴은 전직 경찰이나 체육관 출신의 여자들을 고용하지. 다시 말해 여자는 반드시 남자의 지휘를 받으라는 거야. 나이가 있는 만큼 우리 보스는 성차별 의식이 쩔어. 잠자리 테크닉으로 알라의 추종자들을 후리려면 전화 몇 통으로 고급 매춘부를 사면 그만인데 CIA 출신의 전직 여자 요원을 골라 위험수당을 주고 싶어 하진 않아. 우리 보스는 그런 사람이야.』
『알겠습니다.』
『갬브럴 어망에 안 걸렸다면 햇빛 있는 쪽으로는 안 나타났다고 봐도 됨세. 지하로 빠졌다고 봐야겠지... 저어, 죽지 않은 건 맞고?』
『공식적으로 그녀는 작전 중 실종 상태입니다.』

로버트는 눈치가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나는 비공식 루트로 잠적한 여성 요원을 알아봐야 하나?』
『이름을 알려드리죠. 카라 스탠튼입니다.』
『알겠네. 조사를 해보지. 다만 많이 위험한 거라면 협력 못할 수도 있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면서 리스는 또 한 번 쓰게 웃었다.
『이해합니다. 당신은 50페이지가 넘는 국가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을 했으니까요.』

Posted by 미야

2012/12/03 14:23 2012/12/03 14:2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64

낙서-일상생활32

※ 낙서 형식으로 짧게 이어가고 있는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잘 모르는 내용들은 어슬렁 지어냅니다. 그러니 언냐 옵화들은 이게 진짜야 그러지 말긔. ※


만남의 장소를 별이 세 개 붙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정한 건 뜻밖이었다.
남의 이목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나 - 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일단 별이 붙은 호텔은 보안이 철저하다. 도둑을 예방한답시고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붙어 있다. 기계에만 의존하지 않고 정장 차림새의 보안 요원이 곳곳을 돌아다닌다. VIP 고객이 투숙하는 날엔 똥파리처럼 달려드는 파파라치를 솎아내기 위해 검색을 강화한다. 덕분에 양복 안쪽으로 권총집을 차고 다니는 위험분자들은 정문을 뚫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카메라를 숨기고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인간을 단숨에 채어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는 실력자들은 당연히 불법 반입 무기에도 반응한다.

『그래도 선생은 뒷주머니에 베레타 한 자루는 차고 있을 거라 믿고 있소만.』
『아니라고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리스는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식탁 정 중앙에 올려놓았다.
앞면은 순수한 백지. 뒷면 또한 순수한 백지.
백발이 성성한 신사의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이거 참. 이런 명함은 제법 오랜만에 보는데. 한 8년 만인가?』
신사는 지금 누구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거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앞뒤로 뒤집어보던 백지 명함을 양복 안주머니에 곱게 집어넣곤 상징적인 의미로 심장이 뛰는 부위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재밌게도 남자의 그러한 행동에 반응을 보인 건 식탁 반대편에 앉은 리스가 아니라 이웃한 테이블에 앉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었는데 보디가드가 분명한 그들은 테이블보 아래로 감추어둔 소음총을 거두고 그 즉시 주의 및 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자, 그래서 존 스미스 씨?』
『존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어차피 가명이니 상관없다 이건가요. 뭐, 좋아요. 존이라고 불러드리죠. 하지만 선생은 나를 미스터 갬브럴이라고 불러줬음 하오. 나보다 스무 살 연하의 사내가 친한 척하며 올리버, 올리버 이러고 부르는 건 용납할 수 없거든.』
『알겠습니다, 미스터 갬브럴.』리스는 좋을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올리버 갬브럴은 영국인이다. 하지만 국적과는 아랑곳없이 유럽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의 집은 - 가족이 살고 있다는 의미로 보자면 싱가폴에 있다. 나이는 예순 일곱, 아직 은퇴하지 않은 베테랑 무역 상인이다.
하지만 무역 상인이라는 건 국가에 납세를 하기 위한 위장 신분이고, 실제로는 다국적군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테면 특정 지역으로 비밀 요원을 보내는데 필요한 민간 항공편을 제공한다던가, 불법으로 체포된 특정 인물이 수용된 컨테이너를 배편으로 부친다거나, 부패한 장군과 짜고 분해된 전투기를 다른 국가로 빼돌린다거나... 근래에는 전직 군인들과 비밀요원들을 고용해 여론을 의식하는 정부를 대신하여「작전 대행」서비스 팀을 파견, 공개적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일들을 일사분란하게 해치우고 있다.
이른바 그는「검은 정부, 검은 군대」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렇지 뭐. 앞구멍이 점잖은 표정으로 밥을 먹으면 뒷구멍은 똥을 싸고 치워야 하지 않겠는가. 나 같은 사람이 없으면 세계가 붕괴해버려.』
갬브럴은 세상이 내리는 평가에는 큰 관심이 없다며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창백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로 리스를 꼼꼼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봐선 오랫동안 밀리터리 훈련을 받은 건 분명하고... FBI? 글쎄.』
『제가 누구인지 궁금합니까. 미스터 갬브럴.』
『사실 그렇게 많이 궁금하지는 않다네. DIA(국방정보국) 직원이라고 해도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만 오랫동안 내가 알고 싶어 하던 정보를 가지고 있다며 접촉을 시도했다는게 중요하지.』
그렇게 말하고 갬브럴이 가래 끓는 비참한 소리로 목을 울려댔다.
『그래서 그건 누구였던 거지.』

오래전 이야기다.
아직 그의 사업이 제 궤도에 올라가지 않았던 무렵, 몸값을 요구하는 인질범들이 그의 딸과 아내를 파리에서 납치했다.
『마누라는 내놔라 하는 유명 모델 출신으로 나에겐 세 번째 재혼한 여자였다네. 스텔라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냐. 그래도 납치범들에게 손가락이 잘린 정도로는 내 마음이 동하지 않았지. 하지만 어린 내 딸은... 이야기가 달라. 달라도 아주 다르지.』
딸이 납치되자 갬브럴은 눈이 뒤집혔다. 아내는 맘대로 해도 좋으니 딸은 무사히 돌려달라고 구걸했다. 덕분에 이야기가 대단히 지저분하게 돌아갔다. 아내의 손가락이나 귀를 잘라봤자 협박이 되지 않는다는 걸 학습한 그들은 대신 어린 딸을 강간하며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아버지에게 보냈다.
호흡이 흐트러진 신사는 가만히 자신의 중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씹었다.
『평생을 그놈을 잡기 위해 애썼지.』
갬브럴이 전직 군인들과 우수한 국가 요원들 수집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도 이것이 방아쇠였다.
정당한 수단만 가지고는 범인을 과녁으로 매달아놓고 총질을 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자세를 약간 바꿨다.
『나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제보를 해오고 있네.』
『하지만 여전히 범인을 찾지 못하셨죠.』
『이제는 지겨울 정도야. 그러니까 존, 경고하는데 현상금을 노리고 거짓부렁으로...』
『말을 도중에 끊어 죄송하지만 저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미스터 갬브럴.』
『음?』
『제가 필요한 건 정보입니다.』
『정보?』
『당신이 고용한 전직 CIA 요원 중 베타 팀이었던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요. 특히 현장 수습 쪽으로 소개를 해주셨음 합니다.』
『알파 팀도 아니고 베타?』
되물었다가 도중에 멈추고 항복의 의미로 손바닥을 활짝 펴보였다.
이런다고 대답이 돌아올까. 그가 상관할 일이던가.
게다가 듣자하니 소문으로는 AAA급 알파 팀은 자기 맘대로 은퇴도 못 한다고 한다. 뒷일을 두려워한 국가에서 몰래 죽여 버린다나. 그래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현장에서 빠져나오는 요원들 전부가 베타라는 말이 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갬브럴 수하의 전직 CIA 요원들은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된 이력과는 달리 전부 B급이라는 얘기다.

『잘 나갔던 현장 수습 요원이었던 자를 안전한 장소에서 몇 명 인터뷰하게 해주겠네.』
『감사합니다, 미스터 갬브럴.』
무표정한 얼굴의 리스는 이것이 답례라며 사진 한 장을 백발의 신사에게 내밀었다.
주름지고 검버섯이 핀 손이 그 즉시 굶주린 짐승처럼 사진을 낚아챘다.
『그런데 이게 진짜라는 건 어떻게 알지.』
『어렵지 않죠. 붙잡아 그의 입안을 면봉으로 긁어보면 되니까요.』
『..........』
『당신이 딸의 몸에서 범인의 체모를 찾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음.』
『그리고 따님이 자살한 건 정말 유감입니다, 올리버.』
정정하던 노인의 몸에서 기력이 전부 빠져나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11/30 10:38 2012/11/30 10:3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56

« Previous : 1 :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 28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4403
Today:
65
Yesterday:
106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