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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31

※ 낙서 형식으로 짧게 이어가고 있는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일부 원작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취향이 아니신 분들은 얼른 도망가긔. ※


오후의 환한 햇빛은 림보의 내부까지는 닿지 않았다.
일부러 늘어뜨린 폴리에틸렌 가림막과 비닐포장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건물 외벽을 두드린 빛은 먼지가 두껍게 쌓인 유리창이라는 복병을 또다시 만나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렇게 분산된 빛은 따스하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밝지 않았고, 철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온 핀치는 그래서 습관적으로 조명등 스위치로 손을 가져갔다. 익숙한 윙- 소리가 울리면서 머리 위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낮임에도 어둑어둑한 실내로 인공적인 빛을 덧칠했다.
코로 먼지의 내음을 마시며 부드러운 갈색 캐시미어 겉옷을 벗었다.

며칠간 기계는 침묵했다.
셜록 홈즈의 불평이 절로 떠올랐다.
《범죄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애석하게도 모리어티 교수가 사망한 뒤에 런던은 유난히 지루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네.》
명석한 탐정의 말에 친우이자 조수인 존 왓슨은 이렇게 대꾸했었다.
《분별 있는 시민들 중에서 자네 말에 동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구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틀리다.
일단 뉴욕은 지루할 틈이 없다. 신문을 펼쳐보면 매일이 대형 사건과 사고의 나날이다.
뉴욕과 뉴저지 부근에서 판매된 우유 8천 갤런이 부적절한 살균 처리를 이유로 전량 회수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미들랜드 팜스와 저지 데이리 팜스 등의 인기 브랜드도 예외가 아니어서 텔레비전 아나운서들은 현재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우유가 어느 제품인지 꼭 확인하고 먹어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다.
테리 존슨 목사가 코란을 불태워버리겠다고 선언, 이번에도 오바마가 골치를 싸매고 있다. 대통령은 이 정신 나간 목사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때렸으면 하고 내심 바랄지도 모르겠다.
십대 청소년이 포함된 아동 포르노 유통업자가 발각되었다. 검찰은 증거물로 부적절하고 비윤리적인 성관계 동영상 1만여 건을 압수했다. 무려 1만 건이다.
핀치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작업용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뉴욕은 다섯 명의 모리어티 교수가 활약 중인 도시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침묵하는 건 애시당초 기계의 설계가《사전에 계획된 범죄》만을 찾아내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노숙자가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선량한 시민의 등을 떠미는 건 안타깝게도 솎아내질 못한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도 돕지 못한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에 관리자 로그인 암호를 입력했다.
그 즉시 엄청난 속도로 화면이 바뀌면서 사전 프로그램 된 데이터들이 홍수처럼 닥쳤다.
핀치는 푸가를 연주하려는 피아니스트처럼 자판 위에 열 개의 손가락을 가만히 가져갔다.
『..........』
그러다 자판에서 손을 떼어내곤 어느새 흘러내린 안경을 콧잔등 위로 도로 올려세웠다.
오늘은 번호가 없는 날.
멍한 느낌으로 텅 비어버린 유리 보드판을 쳐다보았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날에도 도서관 출입을 열성적으로 하던 존은 오늘따라 소식이 없다. 고용주의 권고에 따라 오늘 하루는 그만의 사생활을 즐기기로 작정을 한 듯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10분을 살짝 넘긴 시각,「날씨가 참 좋습니다, 핀치.」이러며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아울러「같이 브런치를 먹으러 갑시다.」이럴 리도 없다. 브런치를 먹기엔 너무 늦어서 차라리 굶고 말지 이러고 끼니를 포기한 사람들 빼고는 대다수가 식사를 끝마쳤다.
초침이 온전히 한 바퀴를 다 도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앉았던 의자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넋 놓고 있을 틈이 어디 있다고. 의외로 할 일은 많다.
『어디보자... 읏샤.』
게을렀던 자신을 나무라며 꺼내왔던 책들을 도로 서가에 꼽는 일을 시작했다.
병적인 정리벽이 있는 리스와는 달리 그는 책들을 읽고 제자리에 잘 치워두지 않는 편이다. 젊었던 시절엔 벽돌이 아닌 것들로 바벨탑을 쌓으려 한다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더미가 아장아장 기어다니던 윌리엄 잉그램을 덥쳤던 적도 있어「나중에 다시 읽어야지」이러고 주변으로 책들을 배치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습관이나 버릇이라는 건 잘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지금도 작업 테이블 주변으로 책으로 만들어진 고분이 다섯 개쯤 생겼다. 서둘러 치우지 않으면 베어가 씹는 장난감으로 착각하고 아작을 내게 된다. 취향이 고급인 개는 꼭 비싸고 희귀한 종류만 골라 이빨로 씹었다.
아시모프를 보내버렸을 적엔 눈물도 안 나왔다. 핀치는 끙끙거리며 품안에 다섯에서 여섯 권의 책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끌어안은 자세에서 허리를 펴자 등뼈가 우두둑거렸다.
『운동부족이야. 반성해야 해.』
혼잣말하며 서가를 향해 뒤뚱거리며 걸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기분이다. 겨우 책을 들고 왕복을 했을 뿐인데 그새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죽어버린 공간은 어떠한 소음도 내지 않는다. 그 고요함은 스산함을 넘어 공포감까지 자아낸다. 제각각의 키를 가진 책들을 보다 가지런히 보이게끔 정돈하던 그는 일부러 팡팡 소리가 나도록 책의 표지를 두드렸다. 이렇게 하지 않음 무음(無音)에 질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 주변을 흘끔거리고 돌아보았다.
유령들, 유령들, 유령들. 그리고 또 유령들.
갑자기 뒷통수가 싸늘해졌다. 부랴부랴 몸을 돌려 그는 체온을 빼앗아가는 허깨비들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호흡이 한층 가파진다. 크게 상처를 입었던 과거를 가진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언제부터였을까.
혼자인게 마음 편하지 않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정하게 그를 바라봐줄 사람. 기쁘게 웃어줄 사람.

『리스.』
갑작스런 연락에 존은 반사적으로 물어왔다.
《번호가 나왔나요, 핀치.》
『어... 아뇨.』
번호가 나온 건 아니라는 말에 존은 제법 놀란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핀치는 잡담이나 하자고 전화를 걸어올 인간이 아니다. 리스는 말 못할 곤란에 처한 고용주를 상상한 것 같았다.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리고 급박해졌다.
《혹시 다쳤어요?》
『어. 그건 아니고요.』
《핀치?》
숨을 길게 들이마신 그는 변명조로 거짓말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번호를 실수로 잘못 눌렀어요. 미안합니다.』
《핀치? 왜 그래요. 무슨 일...》
다 듣지 않고 허겁지겁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핏기가 싸악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내가 방금 전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화끈거리며 귀가 달아오른다.
안경을 벗고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Posted by 미야

2012/11/29 10:41 2012/11/2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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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30

둘이서 같이 맥주를 마시러 나온 건 이번으로 세 번째다.
이유는 멋대로 가져다 붙였다. 3개월간 데이트도 못 해본 노총각들의 셀프 위로 모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핀치는 낄낄거리고 웃는 소음을 병풍처럼 두른 이곳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결코 싫지 않았다. 대화가 짧게 끊겨도 어색하지 않다. 둥근 얼굴의 동양인 바텐더는 맛있는 양파링도 가져다주었다. 취기가 적당히 오르자 몸도 따뜻해졌고, 뺨도 붉어지고, 긴장도 풀렸다. 덕분에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약간 졸립기까지 했다. 핀치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깜빡 잊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려 들었다. 그 실수에 반응, 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해요?』
『아뇨. 것보다 이것저것 주워 먹었더니 배가 부르네요.』
『술집에 왔으면 술을 마셔야지 그러면 어떻게 해요, 핀치.』
『것보다 그 올리브는 절 주셨으면.』
『아~ 하고 입 벌리면 드리오리다.』
『응? 지금 뭐라고?』
냅킨을 접으며 손장난을 하던 리스는 어느새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업종을 변경, 예의 무뚝뚝한 얼굴이 대들보가 무너져버린 낡은 오두막처럼 그 고유한 형태를 잃어갔다. 평소의 주량을 감안하자면 있을 수 없는 얘기인데 장난치며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의 술친구는 오늘따라 상태가 좀 안 좋다.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올리브를 직접 먹여주겠다니.
갑자기 의식을 잃고 테이블에 꼴까닥 고개를 박을까봐 겁이 났다. 핀치는 정색하고 재빨리 빈 유리잔의 개수를 헤아렸다. 그런데 에게, 겨우 세 개다.
『존. 당신 괜찮아요?』
『그럼요. 말짱합니다.』
그러나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대화의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리스는 한참 전부터 제정신이라는 녀석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게 분명했다.
음.......... 그러니까 리스는 어젯밤 꿨던 꿈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40대의 남성이 꾸고 나서 기분 좋았다고 말할만한 종류라면 보통은 섹시한 속옷을 입은 스칼렛 요한슨이 침대에 누워있다던가, 체중이 증가하기 전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누드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던가, 제시카 앤 심슨이 가슴을 몽땅 드러낸 채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던가... 대략 그런 것들일 거다. 결혼을 하여 자녀를 둔 가장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남자는 그렇게 생겨먹은 동물이다. 뭐, 취향이 그쪽이라면 골반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브래드 피트가 추파를 던져왔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남자가 품는 판타지라는 건 그 나물에 그 반찬이라는 거다.
하지만 존 리스라는 인물의 판타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상당히 괴상했다.
『정말 어렵게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니까요, 해롤드. 마침내 찰칵 소리가 나자 얼마나 신이 나던지 체면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답니다.』
『미안합니다만, 리스. 저는 그게 왜 신이 나는 일인지 납득이 가질 않는데요.』
『그 좋은 머리로 이해가 왜 안 가요. 마침내 제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니까요.』
맥주잔을 입에 대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은 핀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스는 횡설수설 떠들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어댔다. 입은 귀에 걸렸다.
『곳곳에 책장이 있었어요. 책이 잔뜩 있더라니까요. 천장부터 바닥까지 가득이오. 마루가 무게로 꺼질 것 같았어요.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많은 책은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죠. 왜냐하면 꿈에선 글자가 안 보이잖아요. 제목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어요.』
『거기까지는 이해를 했어요. 그 다음이 문제인데.』
『알고 봤더니 그게 책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찾아낸 건 색깔별로 구분된 트렁크 팬티였어요. 이것 봐라, 끝내주네 이러면서 그걸 한 아름 챙겨서 품에 안았답니다.』
『하아?』
『깨끗한 세제 냄새가 났어요. 정말 근사했어요.』
리스는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제멋대로 감동했다.

그러니까 남의 집에 도구를 사용해 자물쇠를 해체하고 들어가 귀금속이나 현찰이 아닌 남의 트렁크 팬티를 약탈하는 꿈을 꾸면서 (아마도 성적으로) 흥분했노라 말하는 건 문제가 심각한 거 아니냐고.

한손으로 턱을 괴고 삐딱한 자세로 리스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어.......... 제가 이상한 건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하지만 핀치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안주로 서비스된 땅콩 하나를 집어 입속에 넣고 씹었다.
입안에 음식이 들어가 있으면 예의범절을 이유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편법으로 핀치가 입을 다물자 영 못마땅했던 것 같다. 리스는 뿌루퉁한 얼굴을 했다.
『핀치는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보는 꿈은 안 꿔요?』
『모르는 장소에 가서 길을 잃어버리고 개고생 하는 꿈은 자주 꿉니다만.』
그렇지 그렇지 이러며 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비슷한 꿈을 꿔요. 그럴 적엔 핀치는 어떻게 하나요?』
『똑바로 걷습니다.』
『그게 해결책인가요.』
『어쩌겠어요. 꿈에선 택시를 부를 수가 없더라고요.』
『말 되는군.』
『다들 비슷할 걸요. 당신도 꿈속에서 경찰은 안 나오지 않던가요.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했어도 싸이렌 소리나 경보기 알람은 안 울렸죠?』
『그게 말입니다, 해롤드. 약간 틀려요.』
리스가 돌연 그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스산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기계가...』
『기계?』
『당신이 만든 기계요.』
『그게 왜요.』
『나에게 화를 내요.』
『뭐?』
『가지고 있는 물건을 도로 내려놓고, 열었던 방문을 도로 잠구고, 왔던 길로 얌전히 나가지 않으면 후회하게 만들어 버리겠다면서 짜깁기 된 여러 남자 여자 목소리로 경고를 해요.』
『잠깐.』
『그래도 책은 마음껏 가져가도 된다고 단서를 달지요.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콰지모도와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가 나오는 레 미제라블을 추천한다면서 기계가...』
『그건 노틀담의 꼽추. 레 미제라블은 자베르와 코제트.』
『어라. 둘이 같은 거 아니었습니까.』
『작가만 같아요. 것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 같은데요. 리스 씨가 꿈에서 들어 가봤다는 집이 그러니까 제가 사는 집이었던 겁니까?』
『문패엔 해롤드 렌이라고 씌여져 있더구먼. 그게 당신 집이에요?』
『아뇨! 저는 문패를 달지 않아요!』
핀치가 불쾌하다며 잔을 번쩍 들어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그렇구나, 리스는 몰래 메모를 해두었다. 핀치는 문패를 달지 않음.
『왜 그렇게 제가 사는 장소에 집착하는 겁니까. 그건 집(home)이 아니고, 동시에 집(house)일 뿐이라고요. 당신이 그렇게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단 말입니다.』
술 취한 사람에게 화를 내봤자 소용없지만 핀치는 떽떽거렸다.
『그리고 당신은 의외로 상상력이 부족하군요. 제가 일반 주택엔 살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나요.』
『저런. 호텔방을 장기 임대해서 살고 있다고요? 아니면 창고?』
『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들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건 꼭 기억해둬야 한다.
일반 주택이 아닐 수 있음.
리스는 혀가 풀린 어눌한 발음으로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창고에서 살면 정말 불편하겠어요, 핀치... 가엾게도.』
『으이그! 이 술주정뱅이!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힘들면 우리 집에 와도 됩니다. 전 욕실에서 잘게요. 침대는 당신이 써요.』
『네, 네. 명심하겠사옵니다.』
이제 그만 마시자며 핀치가 리스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꺼풀을 꿈뻑거리던 그의 술친구는 언제나처럼 바른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끔거리며 쳐다보니 얼굴도 그다지 붉지 않다.
순간 아차 싶었다.
핀치는 값을 계산하는 남자의 뒷통수에 대고 고함을 꽥꽥 질러댔다.
『나쁜 사람! 취한 척하고 날 떠본 거예요?! 이젠 당신과 다시는 술 안 마실 겁니다!』

Posted by 미야

2012/11/28 13:36 2012/11/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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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29

그들이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적에 리스는 당연하다는 투로 핀치의 손을 붙잡았다.
가까운 곳에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등교하는 코흘리개 어린애가 되어버린 그의 보스는「이게 지금 무슨 짓이죠?」따지며 화를 냈다.
화만 냈던가, 불쾌감을 피력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럴수록 리스의 손아귀 힘이 세졌다는게 문제였지만.
『안경이 없으니 앞이 잘 안 보일 거 아닙니까.』
『그야 전부 희뿌옇게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시력을 잃어버린게 아니라서 저쪽이 계단이고 이쪽이 복도라는 것쯤은 구분할 수 있... 아이쿠!』
『그것 봐요.』
림보의 1층은 폭탄 맞은 꼬락서니다. 내부 리모델링 중이지만 자금이 없어 공사가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탓에 버려졌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고, 쓰레기 천지고, 먼지가 솜뭉치처럼 뭉쳐져 사방에 굴러다니고, 하여 결론, 여기엔 사람 인기척 따윈 없다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청소를 하지 않는다. 짓밟힌 책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녀도 치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구둣발에 뭔가 걷어차이게 된다는 말씀. 혼자 걷겠다고 고집을 피운 핀치가 돌부리에 걸렸다는 식으로 비틀거린 것도 다 까닭이 있다. 평소 돗수 높은 안경을 쓰고 다니던 사람이 맨눈으로 다니기엔 펄프로 만들어진 지뢰가 사방에 널린 것이다.
『여기서 넘어져 다치면 진짜지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을 거예요.』
체중을 자신에게로 옮기라며 리스가 핀치의 팔을 바짝 잡아당겼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에게 기대어 걸어요, 핀치.』
다시 한 번 자존심이 와르르 붕괴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건물 3층에 위치한 그들의 작업실에서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이나 하고 있던 베어는 익숙한 발자국소리와 체취에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이제들 왔는가. 앞발로 꽉 잡고 있던 장난감을 내버려두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다 철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곤 석상처럼 굳었다.
개도 사람을 향해 책망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안다.
다친 핀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베어가 고개를 돌려 리스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 포동포동한 양이 다쳤어! 내 양이 저 몰골이 되는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훈련받은 개는 짖지 않는다. 다만 으르렁거릴 뿐이다.
『베어.』
난처해진 리스가 개의 이름을 불렀지만 베어는 쉽사리 화를 풀지 않았다.
카악! 자존심 상해! 내가 데리고 다니는 양이 다쳤어! 짜증나! 내 포동포동한 양이 다쳤어!
그리고는 휙 소리를 내며 핀치에게로 가서 몸통을 다리에 붙이고 비벼댔다.
쯧쯧... 가엾게도. 많이 아프냐.
그리고 개는 눈빛으로 차분히 말했다.
어이, 말만 해. 내가 그놈의 불알을 와드득 와드득 꿀꺽 씹어줄게.

몸을 일으켜 세워 어떻게든 상처를 핥으려 하는 개를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 개 주제에 싫다며 반항을 했다 - 응급처치 키트를 찾아 타박상에 좋은 연고와 얼음주머니를 꺼냈다. 도서관 안으로 가정용 냉장고를 들여놓지 않은 탓에 주머니를 채울 얼음은 근처 커피숍에서 눈치껏 구해왔다. 식사를 이곳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으니 조만간 중고 냉장고도 한 대 구해놔야 할 듯하다. 이래저래 홀애비 살림이 늘어나고 있다. 리스의 시선이 무선주전자와 전자레인지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전자레인지 위로는 접시와 포크 같은 식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들 중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종류는 핀치 전용 물건이다. 최근 늘어난 종류로는 통조림 따개가 있다.
그렇게 리스가 얼음주머니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동안 핀치는 조립식 소파로 가서 몸을 기댔다. 리스가 안전가옥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물건이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체중이 있는 사람이 앉으면 쿠션이 아래로 푹 꺼져버린다. 그리고 등받이에서 섬유유연제 냄새와 같이하여 노인네 특유의 역한 살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핀치는 뭔가 사연이 있을법한 이 중고소파를 대단히 안 좋아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을 적엔 기꺼이 사용을 해줬다.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는「아유, 죽겠다!」이러고 푹 퍼지는 것이다.

『자요, 얼음주머니를 얼굴에 대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것보다 구경을 다 하셨으면 제 지갑을 돌려주셔야지요, 미스터 리스.』
『응?』
『부축하는 척하며 제 안주머니에 몰래 손 넣은 거 다 압니다.』
리스의 뺨과 귀가 확 붉어졌다. 아니 이건 그러니까 그게 - 눈에 띄게 횡설수설해하며 해롤드 피츠제럴드 이름의 신분증이 들어간 남성용 지갑을 꺼내어 핀치에게 돌려주었다.
소매치기 악행을 코앞으로 접했음에도 다행스럽게도 핀치는 그렇게 화가 난 눈치는 아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미스터 리스. 전 ICF 소속이기는 해도 그 재단의 정식 직원은 아닙니다. 안내 데스트에 가서 피츠제럴드 씨를 만나고 싶다고 해도 전 그 자리에 없을 겁니다. 컴퓨터로 한참을 조회한 끝에 아마 외근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겠죠.』
『그럴 것 같았어요.』리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문화재단 직원이라고 하면 개인 신용조회 절차를 생략해도 업계로부터 정중한 취급을 받죠. 주어지는 정보의 양도 많습니다. 어디로 가면 어떤 물건을 살 수 있다, 진귀한 물건이 언제 나온다더라, 예상 판매가가 이렇다더라,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근방으로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합니다.』
『....................』
『정말인데 안 믿어주네.』
그러나 리스와 핀치 두 사람은 그 맹세가 A4사이즈의 복사지보다 더 얄팍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근방으로 얼씬도 안 하겠다고? 설마. 차라리 평생 커피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게 더 신빙성 높았다.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리스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화제를 조금 바꿔보자.
『잘 몰라서 그러는데 책을 사고 그림을 사는 그쪽 일도 치열한가요?』
『치열하고 말고요.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의 종류가 차이가 날 뿐이지 인간의 탐욕은 거기서 거기로 비슷합니다. 리스 씨도 가지고 싶은 무기가 있음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게 비유하면 약간 틀릴 것 같은데. 전 다른 사람의 머리를 때려가며 총을 사지 않아요. 일을 그렇게 처리했다간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리죠.』
그 난장판을 나름대로 상상했던 것 같다. 비명과 고함소리가 어지럽게 섞인 와중에 사방에서 기관총이 난사되는... 핀치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지 못한 채 리스가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최신형 소총 말고 가지고 싶은 물건이 따로 있다고요.』
『오.』
불편한 자세를 바로잡으며 핀치가 즉각 관심을 드러냈다.
리스는 물욕이 거의 없다. 자동차 같은 물건이나 돈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비싼 시계나 양복, 구두로 몸을 치장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메마르고 건조해서 그가 사는 집에는 그림 한 장 안 걸려 있다. 그나마 좋아하는 거라면... 커피. 그리고 야구.
『조지 클루니가 광고했던 에소프레스 기계?』
『아니오.』
『메인스타디움 로얄박스 입장권.』
『경기 내용은 라디오로 들어도 충분한데요.』
『음... 설마. 탱크가 가지고 싶노라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안 돼요.』
『나를 뭐로 보고! 탱크는 어차피 도로주행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요.』
『그렇다면 헬기?』
『그 전에 조정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텐데.』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리스 씨가 가지고 싶은 물건의 정체가 뭐예요.』

존은 다소곳이 고개를 기울여 핀치와 시선을 맞췄다.
색을 짐작하기 어려운 푸른 눈동자 속으로 미세한 빛이 반짝거렸다. 그의 목소리 또한 소곤거리는 수준으로 낮아졌다. 핀치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메모요.』
『메모?』
『어떤 사람이 사는 주소가 적혀져 있는.』
『하아?』
『그걸 꼭 가지고 싶어요. 가지고 싶어 미치겠어요.』
『..........』
『핀치?』
약간의 점성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가 핀치를 불렀다.

누구의 집 주소냐고 묻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핀치는 있는 그대로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건 물건이 아니고 정보잖아요, 존.』

Posted by 미야

2012/11/27 11:56 2012/11/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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