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성직자들이 저마다 무소유를 부르짖는 까닭은 아마도 그것이 인간에겐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도토리를 수집하는 다람쥐와 비슷하다. 생존욕구를 닮은 물욕을 결코 떼어낼 수가 없다. 핀치 또한 만족이라는 걸 모르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 적이 있다. 퍼득 정신을 차렸을 적엔 그에게로 집중된 부귀영화가 너무 지나쳐 그토록 숨겨왔던 자신의 신분이 국세청을 통해 온전히 까발려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도망갈 방법을 급히 모색하여 위기는 모면했지만 - 네이슨 잉그램의 도움이 컸다 - 이후로 핀치는 많은 생각할 꺼리를 얻었다.
욕심, 권력, 자본주의의 어둠, 인간의 탐욕 기타등등.
하다못해 거리의 노숙자들조차 훔쳐온 카트에 산더미처럼 물건을 싣고 다니지 않던가.
영혼이 느끼는 갈증과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인간은 늘 무언가로 채우길 원한다.
그게 쓸데없는 헛발질일지언정, 그런 행위에 골몰하는게 인간답다고 핀치는 생각한다.
텅 비어있으면 안 된다.
『못 보던 소파가 새로 생겼군요, 미스터 리스.』
박스터 스트릿에 위치한 아파트는 진작에 버려져 리스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었다. 마음을 바꿔 이제는 제대로 써먹을 생각인가 보다. 핀치는 의미불명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텅 비어져 온기 하나 없던 공간에 변화가 생겼다. 핀치의 시선을 제일 먼저 사로잡은 물건은 너무나도 푹신해 보이는 소파 - 할렐루야 - 그리고 벽걸이형 텔레비전 - 세트로 DVD 플레이어 - 튼튼해 보이는 원목 좌탁 - 알록달록한 쿠션들 - 흥분한 나머지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불법) 무기만 잔뜩 사들인다고 걱정했는데 존이 가구점에 들러 평범하게 물건을 샀다!
글쎄다. 가격표만 보자면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지만, 어쨌든.
핀치는 기뻐하며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눌렀다.
아앙~ 만족감에 이상한 신음소리가 나오려 한다.
소파를 제작한 유명 가구 디자이너는 지금의 핀치를 보았다면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을 거다.
등받이 부분을 쓰다듬으며 핀치가 웃었다.
『설마 훔친 건 아니겠지요?』
『그걸 싣고 온 트럭은 훔친게 맞고요. 소파는 제 값을 다 주고 샀는데요.』
과일과 맥주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리스가 농담을 맞받아 쳤다.
팝콘은 지금 튀기는 중이다.
피자로 볼록해진 배가 다시금 고소한 버터 냄새에 자극받아「더 먹어도 괜찮아. 그런다고 배는 터지지 않아」신호를 보내왔다. 내일이면 분명 괴롭겠지. 그러나 당장은 폴탑을 따고 맥주를 홀짝거렸다. 마치 혈기 넘치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TV는 연결한 거예요?』
『케이블 신청은 하지 않았어요. 전 텔레비전 보는 걸 안 좋아해요, 핀치.』
『수퍼볼은 어쩌고?』
『전 야구 팬인데요.』
『그럼 월드 시리즈는 어쩌고?』
『라디오로 들어도 충분해요.』
『재미없는 사람일세.』
『그러는 당신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잖아요.』
『저야 책 읽는 걸 더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수퍼볼보다 더 재밌고, 월드시리즈보다 더 우월한 그 책의 제목은 뭐죠?』
『요즘에 뭘 읽고 있느냐는 질문인가요? 흐음... 책들은 모두 재밌습니다. 조금 덜 재밌고, 보다 더 재밌는 차이가 있는 거지요. 그래도 제 취향은 요즘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라기 보다는 고전 위주라서... 헤밍웨이라던가, 디킨스라던가, 카프카, 모파상...』
『다니엘 키스의「엘저넌에게 꽃을」이라는 제목의 책을 알아요?』
팝콘을 산더미처럼 유리볼에 담아가지고 온 리스가 특정 책에 대해 질문했다.
이마를 찡그린 모양새로 봐선 심심풀이 잡담하자고 꺼낸 주제는 아니다.
핀치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유명한 책이죠. 작가의 대표작이고 이것으로 휴고상과 네뷸라상을 수상했습니다.』
『엘저넌이 주인공 이름인가요?』
『아뇨. 주인공의 이름은 챨리입니다. 엘저넌은 생쥐고요. 그나저나 여기서 더 말하면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은데...』
아직 안 읽어본 것 같은데 내용을 떠벌려도 괜찮겠느냐며 핀치가 도중에 말을 끊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애나의 살인범이 살던 주소로 매년 배달되어왔던 책이 무슨 종류인지 궁금했을 뿐으로 그 책을 일부러 읽어볼 생각은 없다. 다만 애나와 얽혔던 인상이 워낙에 강렬했던 탓에 카터는 텍사스에서 돌아온 후 그 책을 직접 구입해서 읽어봤다고 한다.
「발굴이 하다말고 모두가 동작을 멈춘 채 그 책을 쳐다보았어요. 엘저넌에게 꽃을.」
마당을 파헤쳤을 적에 드러난 흙과 부패되어 글자가 희미해진 책은 오래전 죽어 사라진 소녀의 마지막 절규와 닮아 보였다고 했다. 카터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집에 있는데 빌려줄까요? 존.』
『글쎄요.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읽어보죠. 것보다 영화는 뭘 볼래요?』
역시 리스는 책에 대해 흥미가 적다.
『것보다 무엇을 빌려왔는지가 중요하죠. 월트 디즈니의 라이언 킹?! 여보세요?』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친구와 보기 좋은 종류로 가장 잘 나가는 것으로 추천받은 거예요. 난 잘못 없습니다. 불만을 표현하려면 대여점 직원에게 해요.』
『그 친구는 머리가 약간 이상하군요. 팀 버튼의 화성침공?! 맙소사.』
『그거 보고 싶어요?』
『화성침공을? 찢어 죽인다고 해도 싫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구두를 벗은 핀치는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꼼지락거렸다.
리스는 빌려온 DVD 타이틀을 쥐고 고용주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킬-빌.』
『고백해봐요, 미스터 리스. 대여점 직원과 트러블이 있지 않았나요?』
『나의 볼리우드 신부와의 결혼식.』
『..........』
『난 영화를 잘 모른다니까요.』
책망하는 사장의 표정에 리스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알았어요. 대여점 직원의 무릎으로 총알을 박아넣고 올게요. 오래 안 걸려요.』
벌떡 일어서려던 리스를 핀치가 황급히 붙잡았다.
『괜찮으니 아무거나 봅시다. 캡틴 아메리카. 이거 재밌겠네요.』
그래봤자 솔직히 두 사람 모두 오락 영화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핀치는 기분 좋은 피로감에 곧 하품을 했고, 리스는 절반가량 눈이 감긴 상태였다.
포만감에 몸이 무거웠다.
핀치가 거치적거리는 안경을 벗고 본격적으로 리스의 옆구리로 머리를 들이밀었을 즈음엔 쿠션 대용품으로 삼은 사내는 이미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