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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37

데이지의 꽃말은 희망, 평화, 천진난만함, 아름다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꽃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이승과 저승간의 불분명한 경계와도 같은 도서관에 도자기로 된 아름다운 꽃병이 있을 리 없다. 폐허로 변해버린 지하실까지 직접 내려가 곳곳을 두리번거렸지만 이거다 싶은 물건은 찾지 못했다. 다만 운이 좋아 청소용품을 넣어뒀을 창고로부터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깨진 플라스틱 물통을 겨우 하나 건졌다. 그렇다고 해도 3층 작업실에 있는 책과 컴퓨터 전부가 물기와는 상극이다. 그런 까닭으로 핀치는 먼지만 대충 털어낸 마른 물통에 리스가 선물한 꽃다발을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꽃을 보낸 사람의 성의를 대놓고 무시하는 작태다.
그 이전에 벌써부터 목말라하며 시들거리는 데이지가 가엾다.
어쩌다 애수에 젖어 턱받침을 한 자세로 꽃을 응시했다.

남자에게 꽃을 받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장난 - 도넛을 보란 듯이 상자에 담아와 베어에게 먹이고「강아지용 간식입니다, 미안하지만 당신 몫은 없어요.」이러며 짓궂게 구는 사내다. 시저는 황제다. 시저는 남자다. 나도 남자다. 고로 나도 황제다, 여러 추리의 단계를 거쳐 리스가 건넨 귀여운 데이지 꽃다발 역시 짓궂은 장난의 일종이라고 판단했다. 하여 장난에 유머로 대응,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이거... 지금 저에게 청혼하시는 건가요, 미스터 리스?」
「에엣?」
「그런데 반지가 빠졌군요. 그러니까 무효.」
리스는 새치름하게 삐진 모습의 고용주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연장자의 근엄함으로 야단을 치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꽃다발을 품에 안자 눈이 커졌다. 청혼 어쩌고 농담을 하자 입도 벌렸다. 순간 핀치는 벌린 입 구멍으로 껍질을 벗긴 땅콩을 던져 넣으면 반응이 끝내주겠다 생각하며 재밌어 했다.
「고마워요, 존. 참 예쁜 꽃이네요.」
「당신도 엄청 예뻐 보여요.」
「네? 뭐라고요?」
리스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수습했다.
「아뇨. 저번에 언성을 높였던 점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카드에 미안합니다, 이렇게 적었어야죠.」
「꽃집 주인이 그러지 말라던데요.」
「데이지와는 안 어울리니까요. 말씀대로라면 히야신스를 골랐어야죠.」
「왜요?」
「히야신스의 꽃말이 미안합니다, 이거든요.」
리스의 눈썹이 점점 더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여러 개의 테니스공이 그의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통통 튀었다. 몇 개의 공은 기어코 바구니 밖으로 튕겨나갔는데 도로 주워 담을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 그는 짐짓 바깥을 손가락질하며 핀치의 의견을 구했다.
「그럼 가서 히야신스를 다시 사가지고 와야 해요?」
「그러지 말아요. 데이지가 불쌍하잖아요.」
거기까지 대화가 진행되었을 적에 핀치는「설마, 장난이 아니고 진짜인가?」의구심을 품었다. 리스는 뒷통수를 긁었고, 정신 사납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특정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선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라 그러는 거였다.
「에잇! 베어를 산책시키고 올게요!」
그러더니 휑하니 달아나 버렸다.
이후로 2시간 동안 연락도 없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나도 모르겠다. 공원에서 양복 차림새로 달리기라도 하는가 보지.』
꽃잎을 건드리자 손가락으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약간의 터치에 꽃잎이 기력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실 리스는 달리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개를 끌고 광장을 지나 좁은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몸에 달라붙은 운동복을 입고 뜀박질을 즐기던 여성이「잠시만요.」이러고 양해를 구한 뒤 베어를 지나쳐 빠르게 달려 나갔다. 목줄에 매어있는 개는 끙끙 앓았는데 본능에 충실한 나머지 여자를 앞질러 뛰어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듯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1등을 먹겠습니다, 짙은 갈색의 눈이 애원을 담아 리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별나게 차갑게 굴고 있는 주인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목줄을 바짝 잡아당겼다.
개의 목덜미가 추욱 처졌다. 아아, 대단히 실망.
『지금은 안 돼. 왜냐하면 우린 어떤 사람을 몰래 훔쳐보는 중이니까.』
광장 방향에선 우거진 나뭇가지가 내려앉은 산책로를 쳐다봐도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이쪽에선 광장의 모습이 한눈에 잘 내려다 보여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애들이라던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는 여자, 비둘기를 관찰하는 노인, 그리고 휴대용 이젤을 펼쳐놓고 스케치에 여념이 없는 무명 화가의 존재를 알아보기 쉬웠다.
『붉은 머리카락의 저 여자란다. 이름은 그레이스지. 너도 잘 기억해두렴.』
망원경이 없는 탓에 이 거리에서는 그녀가 종이에 옮기는 내용이 어떤 종류인지 판가름하기 힘들다. 풍경을 그리고 있는 걸까? 아님 사람을?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하늘을 떠도는 구름 형태를 베끼는 중일 수도 있다. 여자는 간혹 가다 머리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고, 그때마다 지우개를 들어 어렵게 그린 형체를 지웠다. 좀처럼 뜻대로 되질 않았던지 콧잔등으로 주름을 만들고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연필 - 혹은 색연필이 빠른 속도로 슥슥 움직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귀에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다른 길거리 화가와 달리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온전히 집중하며 - 집중하는 모습이 누구와 많이 닮았다 - 빛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세계에 매료되어버린 모습은 꽃처럼 화사하고 고왔다.

부디 나와 결혼해 주세요.
그녀에게 청혼했겠지.
반지도 줬을까.
금으로 된 가락지를 주었을 거야.
그리고 키스했겠지.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광장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자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물러서야 할 때다.
『베어, 그만 갈까?』
엉덩이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붙이고 앉았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래. 핀치가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릴 거야.』
후회와 미련을 담아 돌아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Posted by 미야

2012/12/07 15:27 2012/12/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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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36

※ 푸스코는 리스에게 반말을 할 것인가, 존댓말을 할 것인가. ※


《HR 수사가 깔끔하게 마무리 되질 않으니까 FBI가 엉뚱한 우물을 파려고 하고 있다고. 이젠 행방불명된 스틸스를 조사할 거래. 난 이제 어쩌지.》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간절하다. 벌벌 떨고 있는 것도 같다. 아니면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원망이 섞여있는 건 확실해서 존은 무의식적으로 쥐고 있던 핸드폰의 위치를 왼쪽 귓바퀴로 옮겼다. 그는 왼손잡이다.
『자네나 나나 스틸스가 몸통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잖아.』
사람 손바닥만한 크기의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봐도 꿈쩍도 하지 않을 차분한 목소리에 푸스코는 더 열불이 나는 듯했다.
《FBI는 그걸 모르니까 문제라는 거지! 이놈이 잠적한 우두머리인가 보다 착각하고 파고, 파고, 또 파다가 시체가 나오면 내 인생은 그 날로 끝장이란 말일세.》
『저런. 그 친구들의 실력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닌가, 라이오넬. 우리가 안다면 그들도 알고 있어. 잡아당겨서 뭐가 나오나 확인을 해보는 것 정도니까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1년도 되지 않아 시체가 튀어나오게끔 허술하게 처리한 것도 아니잖아.』
《무, 물론 그렇기는 하...》
달래며 낮게 소곤거리는 리스의 목소리는 독약처럼 달콤했다.
『게다가 남미 상틸루스 카르텔에게 당한 것처럼 미끼를 뿌려댔으니 FBI 녀석들은 시체 찾을 생각을 안 할 거야. 콜롬비아 친구들이 작정하고 미국의 부패한 경관을 손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분해해서 흔적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걸 잘 아니까. 운이 좋으면 손가락 뼈 하나 정도 건지는게 전부인데 그들이 그 많은 사막과 늪지를 부지런히 뒤지려 할까?』
사람의 시신을 난도질하여 분해하는 광경을 상상한 듯했다. 소심한 형사는 숨을 들이마셨다.
《허억.》
『그러니까 라이오넬...? 긴장 풀어.』
용건을 마친 리스는 별 감흥 없이 통화를 종료하려고 했다.
그러다 순간 뭔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닌데 입이 간질거리는 그런 종류의.

『있잖아. 화가 난 친구에게 사과를 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아?』
《실례. 지금 무어라 했수?》
눈에 띄게 당황한 푸스코가 손가락으로 귓밥을 팠다. 하지만 오른쪽 귀로 내용을 들으면서 왼쪽 귓구멍을 후벼봤자 도움이 되어줄리 만무하다. 그래서 작전을 바꾼 그는 애꿎은 핸드폰을 향해 매서운 따귀를 두어 번 내리쳤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혼잣말처럼 푸념도 했다.
《혼선이라도 된 건가. 망할 기계가 제 값도 못 하고 말이야.》
『어이, 어이.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라이오넬.』
《뭐요? 방금 전 내가 들은게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거요?! 당신이 사과를 한다고? 아침에 이상한 거 집어 먹었어요? 그런 건 옥상에 매달아놓고서 발바닥을 마구 때리기 전에 생각을 해봤어야지! 아니면 무릎에 총알을 쏘아대기 전에 고민을 해보던가!》
이어지는 건 신란한 비난이었다.
존은 괜히 물어봤다 후회했다.

일반인의 사고방식은 잘 모르겠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군인이 되었고, 임무를 수행했고, 외국에서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모종의 집단에 스카웃 되었고...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겠다, 가족 드라마를 시청하는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늘 낯설었다. 엄마 아빠가 세탁물을 찾아오는 순서를 두고 서로 싸우고, 툴툴거리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저녁이 되자 언제 싸웠느냐며 평범하게 화해하는 과정을 옆에서 볼 기회 자체가 없었던 탓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말싸움 끝에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아는 내용이 없었다.
《꽃을 사요.》
『어.』
《여자들은 꽃을 좋아해요, 존.》
카터는 리스가 사과하기 바라는 상대가 미모의 여기자, 내지는 언젠가 스치듯 만났던 금발의「계약 아내」라고 착각한 것 같다.
《레스토랑에서 식사 약속을 잡았다가 바람을 맞추기라도 한 거예요? 그렇담 악당들을 유리창 밖으로 던져버리느라 바빠서 그랬노라 사과하면서 풍성하게 장식된 꽃을 줘요. 알았죠?》
그 상대가 걸어 다니는 전자사전이라는 걸 고백할 수 없었던 리스는 얼랑뚱땅 알겠다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싫든 좋든 꽃을 사는 남자는 눈에 띈다.
꽃을 고르려고 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나는 꽃에 대해 잘 몰라요」이러는 남자는 더더욱 눈에 띄는 법이다.
부끄러워하는게 분명한 그 모습에 피식 옷음이 나오려 했지만 노련한 장사꾼인 에밀리는 화예 전문가의 근엄한 표정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쭈삣거리고 선 남자에게로 접근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대답했다.
『꽃이 필요합니다.』
이래서는 마치 공구상에 들러 십자드라이버를 원한다 말하는 꼬락서니다.
에밀리는 진열된 수십 종류의 꽃들을 둘러보라 눈짓하며 꽃 중의 꽃을 권해봤다.
『그럼 장미를 드릴까요.』
장미는 여자들의 꽃이다. 아무리 몰라도 그 정도는 안다. 리스는 곤란하다며 도리질했다.
『안 돼요.』
『저런. 받는 분이 특정 화초에 알레르기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니고.』
옳거니. 장사 15년이면 절반은 점쟁이가 된다. 남자는 화려한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종류가 좋을 것이다. 짐작대로 그는 색색의 데이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보였고, 고르기가 무섭게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보수적이고도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은 아버지들처럼 말이다. 슬픈 노릇이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구분하는 법에 대해 잘못 배운 그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걸 미덕으로 잘못 알아서 똑바로 쳐다보기라도 하면 게이가 된다 오해하고 있다.

어쨌거나 외면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있기 마련.
꽃을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 작업대로 자리를 옮긴 에밀리는 고개를 길게 빼고 물었다.
『메시지 카드는 직접 작성하실 거죠?』
『오.』
남자는 보기 좋게 허둥거렸다.
『직접 작성을 해야 합니까?』
『물론 카드에 적을 내용을 불러주시면 제가 대신 써드릴 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대필하는 걸 받는 분이 좋아할 것 같진 않군요.』
그래서 리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드를 책상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았다.

무어라 적으란 말이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소리를 질러 미안해요. 존으로부터.
적은 메시지를 단추구멍 눈으로 훔쳐본 에밀리가 왓, 이러고 외마디 고함을 질러댔다.
『안 됩니까.』
『하여간 남자들이라니!』
다시 적으라며 에밀리가 새 카드를 내밀었다. 허튼 짓을 하면 날려버리겠다는 식으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때 제가 소리를 질러댄 건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 기각.
화가 났다면 화를 풀기 바랄게요 - 기각.
당신이 좋아하는 인도 요리를 먹으러 같이 가요 - 기각.
이번 주 베어 산책은 저 혼자서 할게요 - 기각.
에밀리는 클래식을 연주하는 지휘자의 자세로 손을 둥글게 둥글게 움직였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보다 풍요롭게. 뿜겨져 나오는 사랑의 감정을 가득 담아! 그녀가 가슴을 부풀리며 외쳤다. 당신은 할 수 있어!

《당신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데이지 꽃다발도 그렇지만 카드의 내용 또한 낯간지러웠다.
핀치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었다.
『이거... 지금 저에게 청혼하시는 건가요, 미스터 리스?』

Posted by 미야

2012/12/06 12:29 2012/12/0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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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35

※ 야, 오늘 눈 온다...;; 퇴근 어떻게 하냐. 낙서 형식으로 짧게 이어가고 있는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내가 아저씨 버닝을 할 줄이야... 원작과 일부 맞지 않는 설정이 있습니다. ※


『당신도 나에겐 전부를 말해주지 않잖아!』
감정이 잔뜩 섞인 그의 외침을 듣고도 핀치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겪어온 세월의 굴곡이 다름이다. 지옥의 가장자리까지 굴러 떨어졌다가 자력으로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이 절름발이 사내는 노간지 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지팡이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이미 올빼미의 현자였다.
『지금 그 대답은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미스터 리스.』
존은 격분했다.
참을성이 2%만 부족했어도 리스는 팔을 뻗어 핀치의 목을 사정없이 졸랐을 거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졸랐다고 해도 무방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가운데 리스는 자신의 손아귀로 독특한 감각을 느꼈다. 타인의 피부를 힘껏 누르고, 그 뼈를 꺾고, 비정상적인 각도로 비트는 그러한 감각 말이다. 그 느낌이 어찌나 실제처럼 선명했던지 리스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래봤자 생명을 빼앗는 살의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는커녕 혈관을 타고 어깨 죽지까지 곧바로 올라갔다.

핀치는 리스가 겪고 있는 감정의 혼란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이해 못 한다는 눈빛을 띄었다. 존의 고통은 살 속으로 파고든 발톱의 뿌리를 강제로 파헤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봤자 발톱일 뿐이다. 심장이 다친 것도 아니며, 등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고통이 엄청나다는 건 안다. 그까짓 발톱일 뿐인데 존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파하고 있다.
나무라야 할까? 아님 다독거려야 할까.
회전하는 의자를 빙글 움직여 리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스가 재차 으르렁거렸다. 차분한 어조와 격식을 차린 말투는 인정사정없이 내팽개쳤다.
『당신은 프로필에 적혀져 있는 것처럼 내가 워싱턴 퓨알럽 출신이 아니고 미주리 태생이라는 것도 알아. 내 생일이 5월 1일이라는 것도 알지. 짐작하자면 돌아가신 내 아버지 이름도 꿰고 있을 거야. 그런데 난 당신 생일을 몰라.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 기껏해야 그 빌어먹을 센차에 설탕 한 스푼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지! 당신은 컵스와 레드삭스 야구팀을 좋아한다고 말해줬을 뿐이야. 그리고 잔인하게 그것으로 출신지를 추측하면 안 된다고 못도 박았지. 그런데 지금 당신, 나에게 무어라 말했나. 숨기는게 있으면 안 된다고?!』
다 듣고 핀치는 제발 진정하라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리스는 흡, 이러고 숨을 들이마셨고 폐 속으로 들어갔던 다량의 공기는 격앙된 단어들로 바뀌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당신은 처음부터 경고했었지.《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과 당신이 저에 대해 아는 것 사이에는 격차가 큽니다. 당신은 그 차이를 가능한 한 빨리 줄이려하겠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미스터 리스. 전 정말 비밀스러운 사람입니다.》나도 이해해. 당신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난 지금까지 당신의 미스테리한 사생활을 어떻게든 참고 용인하려 노력했어. 그리고 이걸 봐! 그게 지금의 이 결과야! 당신은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인데 난 당신이 모르는 이유로 밤새도록 컴퓨터로 조사를 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존. 그건 비난한게 아니라...』
『그럼 그건 비난이 아니고 칭찬이었나.』

아무래도 서서 말하기엔 분위기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핀치는 일단 대화를 중단한 채 앉았던 작업용 의자에서 일어나 리스에게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권유했다.
당연한 거였을까. 흥분한 상태인 리스는 펄쩍 뛰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제는 날 취조하려는 겁니까! 싫어! 거기에 안 앉아!』
『나는 취조 같은 건 할 줄도 몰라요, 미스터 리스.』
슬슬 지치려 한다. 옆으로 몸을 돌려 여벌 의자 위에 올라간 엉킨 전선들과 책들을 치웠다. 둥글어진 눈으로 리스가 그러한 핀치의 동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든 말든 등받이 부위의 먼지를 손으로 털어낸 뒤, 평소엔 선반이나 보조 테이블로 사용하는 나무 의자에 기꺼이 앉았다.
『나도 앉았어요. 그러니 당신도 이리로 와서 앉아요.』
『..........』
『부탁합니다. 앉아주세요.』
여전히 싫다는 표정이었지만「부탁합니다」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제야 리스는 핀치의 체온이 남은 작업용 의자로 가서 주춤주춤 엉덩이를 내렸다.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데워진 의자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단순하게「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라는 말로는 순간적으로 리스가 느낀 심리적 만족감을 표현하기 어렵다. 긴장된 어깨가 원래의 위치를 찾아갔다. 치솟던 혈압도 완만한 수준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존은 힐끔거리며 나무 의자에 앉은 그의 고용주를 쳐다봤다. 그러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정색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번들거리던 눈빛이 아까와는 달리 훨씬 차분해졌다.
자세를 바꾼답시고 엉덩이를 좌우로 돌려 의자에 비볐다. 적당한 따뜻함이 마음에 들었다.

핀치는 손깍지를 낀 자세로 리스와 가깝게 앉았다.
『스노우 요원이 폭탄이 장착된 조끼를 입고 있었다고요?』
『카터가 봤답니다.』
가까스로 대화가 가능해졌다.
두 사람 모두 이것으로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을 품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뻣뻣한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리스는 옆에 앉은 고용주를 존중하여 목소리를 낮췄다.
『확실한 건 아직 없어요. 그래서 말을 꺼내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변병하듯 덧붙였다.
『계속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말하려고 했어요.』
핀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존.』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말하려는 시기를 늦추려 했을지도.』
핀치가 등을 편안하게 구부렸다.
일부러 따라하려는 것도 아닌데 리스의 등도 구부러졌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 싸울 수 없어요. 이건 우리가 같이 대응을 해야 할 문제라고요.』
총에 맞은 리스가 피투성이가 되어 주차장 계단을 내려오던 모습을 떠올린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카터가 그들을 그냥 놔주지 않았더라면, 멀리서 저격당한 탓에 사입구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출혈이 심했다.
핀치는 겁이 났었다. 하마터면 어렵게 얻은 파트너를 잃을 뻔했다.
『우리의 삶은 매일이 위험의 연속이죠, 존. 나나 당신이나 언제 죽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위험에 대비하고 위협 요소를 사전에 파악해둬야 해요.』
리스는 쓰게 웃었다.
『죽고 싶다 생각한 적 없어요, 핀치. 당신과 만나고 난 뒤부터는. 단 한 번도.』
핀치의 손이 리스의 팔에 부드럽게 닿았다. 토닥토닥.
『나도요, 존.』

존은 손바닥을 들어 건조해진 뺨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화가 났던게 진흙탕 아래로 가라앉자 피곤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고백하자면 그는 지난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조사도 조사지만 초조감과 긴장감이 숙면을 방해했다.
『후지마 테크로닉스 연구실 출입증을 마크가 위조했어요.』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었던 건지 조사를 해봐야겠군요.』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도.』
『그녀?』
그녀의 이름은 카라 스탠튼입니다 대답하는 대신, 리스는 자신의 오른팔에 지긋이 올려져있던 핀치의 작은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동작이 흡사 떨어뜨린 심장을 줍는 것 같아서 핀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항의도 하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2/12/05 11:19 2012/12/0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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