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9

그들이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적에 리스는 당연하다는 투로 핀치의 손을 붙잡았다.
가까운 곳에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등교하는 코흘리개 어린애가 되어버린 그의 보스는「이게 지금 무슨 짓이죠?」따지며 화를 냈다.
화만 냈던가, 불쾌감을 피력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럴수록 리스의 손아귀 힘이 세졌다는게 문제였지만.
『안경이 없으니 앞이 잘 안 보일 거 아닙니까.』
『그야 전부 희뿌옇게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시력을 잃어버린게 아니라서 저쪽이 계단이고 이쪽이 복도라는 것쯤은 구분할 수 있... 아이쿠!』
『그것 봐요.』
림보의 1층은 폭탄 맞은 꼬락서니다. 내부 리모델링 중이지만 자금이 없어 공사가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탓에 버려졌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고, 쓰레기 천지고, 먼지가 솜뭉치처럼 뭉쳐져 사방에 굴러다니고, 하여 결론, 여기엔 사람 인기척 따윈 없다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청소를 하지 않는다. 짓밟힌 책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녀도 치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구둣발에 뭔가 걷어차이게 된다는 말씀. 혼자 걷겠다고 고집을 피운 핀치가 돌부리에 걸렸다는 식으로 비틀거린 것도 다 까닭이 있다. 평소 돗수 높은 안경을 쓰고 다니던 사람이 맨눈으로 다니기엔 펄프로 만들어진 지뢰가 사방에 널린 것이다.
『여기서 넘어져 다치면 진짜지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을 거예요.』
체중을 자신에게로 옮기라며 리스가 핀치의 팔을 바짝 잡아당겼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에게 기대어 걸어요, 핀치.』
다시 한 번 자존심이 와르르 붕괴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건물 3층에 위치한 그들의 작업실에서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이나 하고 있던 베어는 익숙한 발자국소리와 체취에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이제들 왔는가. 앞발로 꽉 잡고 있던 장난감을 내버려두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다 철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곤 석상처럼 굳었다.
개도 사람을 향해 책망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안다.
다친 핀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베어가 고개를 돌려 리스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 포동포동한 양이 다쳤어! 내 양이 저 몰골이 되는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훈련받은 개는 짖지 않는다. 다만 으르렁거릴 뿐이다.
『베어.』
난처해진 리스가 개의 이름을 불렀지만 베어는 쉽사리 화를 풀지 않았다.
카악! 자존심 상해! 내가 데리고 다니는 양이 다쳤어! 짜증나! 내 포동포동한 양이 다쳤어!
그리고는 휙 소리를 내며 핀치에게로 가서 몸통을 다리에 붙이고 비벼댔다.
쯧쯧... 가엾게도. 많이 아프냐.
그리고 개는 눈빛으로 차분히 말했다.
어이, 말만 해. 내가 그놈의 불알을 와드득 와드득 꿀꺽 씹어줄게.

몸을 일으켜 세워 어떻게든 상처를 핥으려 하는 개를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 개 주제에 싫다며 반항을 했다 - 응급처치 키트를 찾아 타박상에 좋은 연고와 얼음주머니를 꺼냈다. 도서관 안으로 가정용 냉장고를 들여놓지 않은 탓에 주머니를 채울 얼음은 근처 커피숍에서 눈치껏 구해왔다. 식사를 이곳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으니 조만간 중고 냉장고도 한 대 구해놔야 할 듯하다. 이래저래 홀애비 살림이 늘어나고 있다. 리스의 시선이 무선주전자와 전자레인지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전자레인지 위로는 접시와 포크 같은 식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들 중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종류는 핀치 전용 물건이다. 최근 늘어난 종류로는 통조림 따개가 있다.
그렇게 리스가 얼음주머니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동안 핀치는 조립식 소파로 가서 몸을 기댔다. 리스가 안전가옥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물건이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체중이 있는 사람이 앉으면 쿠션이 아래로 푹 꺼져버린다. 그리고 등받이에서 섬유유연제 냄새와 같이하여 노인네 특유의 역한 살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핀치는 뭔가 사연이 있을법한 이 중고소파를 대단히 안 좋아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을 적엔 기꺼이 사용을 해줬다.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는「아유, 죽겠다!」이러고 푹 퍼지는 것이다.

『자요, 얼음주머니를 얼굴에 대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것보다 구경을 다 하셨으면 제 지갑을 돌려주셔야지요, 미스터 리스.』
『응?』
『부축하는 척하며 제 안주머니에 몰래 손 넣은 거 다 압니다.』
리스의 뺨과 귀가 확 붉어졌다. 아니 이건 그러니까 그게 - 눈에 띄게 횡설수설해하며 해롤드 피츠제럴드 이름의 신분증이 들어간 남성용 지갑을 꺼내어 핀치에게 돌려주었다.
소매치기 악행을 코앞으로 접했음에도 다행스럽게도 핀치는 그렇게 화가 난 눈치는 아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미스터 리스. 전 ICF 소속이기는 해도 그 재단의 정식 직원은 아닙니다. 안내 데스트에 가서 피츠제럴드 씨를 만나고 싶다고 해도 전 그 자리에 없을 겁니다. 컴퓨터로 한참을 조회한 끝에 아마 외근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겠죠.』
『그럴 것 같았어요.』리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문화재단 직원이라고 하면 개인 신용조회 절차를 생략해도 업계로부터 정중한 취급을 받죠. 주어지는 정보의 양도 많습니다. 어디로 가면 어떤 물건을 살 수 있다, 진귀한 물건이 언제 나온다더라, 예상 판매가가 이렇다더라,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근방으로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합니다.』
『....................』
『정말인데 안 믿어주네.』
그러나 리스와 핀치 두 사람은 그 맹세가 A4사이즈의 복사지보다 더 얄팍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근방으로 얼씬도 안 하겠다고? 설마. 차라리 평생 커피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게 더 신빙성 높았다.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리스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화제를 조금 바꿔보자.
『잘 몰라서 그러는데 책을 사고 그림을 사는 그쪽 일도 치열한가요?』
『치열하고 말고요.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의 종류가 차이가 날 뿐이지 인간의 탐욕은 거기서 거기로 비슷합니다. 리스 씨도 가지고 싶은 무기가 있음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게 비유하면 약간 틀릴 것 같은데. 전 다른 사람의 머리를 때려가며 총을 사지 않아요. 일을 그렇게 처리했다간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리죠.』
그 난장판을 나름대로 상상했던 것 같다. 비명과 고함소리가 어지럽게 섞인 와중에 사방에서 기관총이 난사되는... 핀치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지 못한 채 리스가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최신형 소총 말고 가지고 싶은 물건이 따로 있다고요.』
『오.』
불편한 자세를 바로잡으며 핀치가 즉각 관심을 드러냈다.
리스는 물욕이 거의 없다. 자동차 같은 물건이나 돈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비싼 시계나 양복, 구두로 몸을 치장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메마르고 건조해서 그가 사는 집에는 그림 한 장 안 걸려 있다. 그나마 좋아하는 거라면... 커피. 그리고 야구.
『조지 클루니가 광고했던 에소프레스 기계?』
『아니오.』
『메인스타디움 로얄박스 입장권.』
『경기 내용은 라디오로 들어도 충분한데요.』
『음... 설마. 탱크가 가지고 싶노라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안 돼요.』
『나를 뭐로 보고! 탱크는 어차피 도로주행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요.』
『그렇다면 헬기?』
『그 전에 조정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텐데.』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리스 씨가 가지고 싶은 물건의 정체가 뭐예요.』

존은 다소곳이 고개를 기울여 핀치와 시선을 맞췄다.
색을 짐작하기 어려운 푸른 눈동자 속으로 미세한 빛이 반짝거렸다. 그의 목소리 또한 소곤거리는 수준으로 낮아졌다. 핀치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메모요.』
『메모?』
『어떤 사람이 사는 주소가 적혀져 있는.』
『하아?』
『그걸 꼭 가지고 싶어요. 가지고 싶어 미치겠어요.』
『..........』
『핀치?』
약간의 점성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가 핀치를 불렀다.

누구의 집 주소냐고 묻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핀치는 있는 그대로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건 물건이 아니고 정보잖아요, 존.』

Posted by 미야

2012/11/27 11:56 2012/11/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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