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31

※ 낙서 형식으로 짧게 이어가고 있는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일부 원작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취향이 아니신 분들은 얼른 도망가긔. ※


오후의 환한 햇빛은 림보의 내부까지는 닿지 않았다.
일부러 늘어뜨린 폴리에틸렌 가림막과 비닐포장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건물 외벽을 두드린 빛은 먼지가 두껍게 쌓인 유리창이라는 복병을 또다시 만나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렇게 분산된 빛은 따스하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밝지 않았고, 철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온 핀치는 그래서 습관적으로 조명등 스위치로 손을 가져갔다. 익숙한 윙- 소리가 울리면서 머리 위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낮임에도 어둑어둑한 실내로 인공적인 빛을 덧칠했다.
코로 먼지의 내음을 마시며 부드러운 갈색 캐시미어 겉옷을 벗었다.

며칠간 기계는 침묵했다.
셜록 홈즈의 불평이 절로 떠올랐다.
《범죄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애석하게도 모리어티 교수가 사망한 뒤에 런던은 유난히 지루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네.》
명석한 탐정의 말에 친우이자 조수인 존 왓슨은 이렇게 대꾸했었다.
《분별 있는 시민들 중에서 자네 말에 동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구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틀리다.
일단 뉴욕은 지루할 틈이 없다. 신문을 펼쳐보면 매일이 대형 사건과 사고의 나날이다.
뉴욕과 뉴저지 부근에서 판매된 우유 8천 갤런이 부적절한 살균 처리를 이유로 전량 회수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미들랜드 팜스와 저지 데이리 팜스 등의 인기 브랜드도 예외가 아니어서 텔레비전 아나운서들은 현재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우유가 어느 제품인지 꼭 확인하고 먹어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다.
테리 존슨 목사가 코란을 불태워버리겠다고 선언, 이번에도 오바마가 골치를 싸매고 있다. 대통령은 이 정신 나간 목사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때렸으면 하고 내심 바랄지도 모르겠다.
십대 청소년이 포함된 아동 포르노 유통업자가 발각되었다. 검찰은 증거물로 부적절하고 비윤리적인 성관계 동영상 1만여 건을 압수했다. 무려 1만 건이다.
핀치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작업용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뉴욕은 다섯 명의 모리어티 교수가 활약 중인 도시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침묵하는 건 애시당초 기계의 설계가《사전에 계획된 범죄》만을 찾아내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노숙자가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선량한 시민의 등을 떠미는 건 안타깝게도 솎아내질 못한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도 돕지 못한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에 관리자 로그인 암호를 입력했다.
그 즉시 엄청난 속도로 화면이 바뀌면서 사전 프로그램 된 데이터들이 홍수처럼 닥쳤다.
핀치는 푸가를 연주하려는 피아니스트처럼 자판 위에 열 개의 손가락을 가만히 가져갔다.
『..........』
그러다 자판에서 손을 떼어내곤 어느새 흘러내린 안경을 콧잔등 위로 도로 올려세웠다.
오늘은 번호가 없는 날.
멍한 느낌으로 텅 비어버린 유리 보드판을 쳐다보았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날에도 도서관 출입을 열성적으로 하던 존은 오늘따라 소식이 없다. 고용주의 권고에 따라 오늘 하루는 그만의 사생활을 즐기기로 작정을 한 듯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10분을 살짝 넘긴 시각,「날씨가 참 좋습니다, 핀치.」이러며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아울러「같이 브런치를 먹으러 갑시다.」이럴 리도 없다. 브런치를 먹기엔 너무 늦어서 차라리 굶고 말지 이러고 끼니를 포기한 사람들 빼고는 대다수가 식사를 끝마쳤다.
초침이 온전히 한 바퀴를 다 도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앉았던 의자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넋 놓고 있을 틈이 어디 있다고. 의외로 할 일은 많다.
『어디보자... 읏샤.』
게을렀던 자신을 나무라며 꺼내왔던 책들을 도로 서가에 꼽는 일을 시작했다.
병적인 정리벽이 있는 리스와는 달리 그는 책들을 읽고 제자리에 잘 치워두지 않는 편이다. 젊었던 시절엔 벽돌이 아닌 것들로 바벨탑을 쌓으려 한다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더미가 아장아장 기어다니던 윌리엄 잉그램을 덥쳤던 적도 있어「나중에 다시 읽어야지」이러고 주변으로 책들을 배치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습관이나 버릇이라는 건 잘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지금도 작업 테이블 주변으로 책으로 만들어진 고분이 다섯 개쯤 생겼다. 서둘러 치우지 않으면 베어가 씹는 장난감으로 착각하고 아작을 내게 된다. 취향이 고급인 개는 꼭 비싸고 희귀한 종류만 골라 이빨로 씹었다.
아시모프를 보내버렸을 적엔 눈물도 안 나왔다. 핀치는 끙끙거리며 품안에 다섯에서 여섯 권의 책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끌어안은 자세에서 허리를 펴자 등뼈가 우두둑거렸다.
『운동부족이야. 반성해야 해.』
혼잣말하며 서가를 향해 뒤뚱거리며 걸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기분이다. 겨우 책을 들고 왕복을 했을 뿐인데 그새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죽어버린 공간은 어떠한 소음도 내지 않는다. 그 고요함은 스산함을 넘어 공포감까지 자아낸다. 제각각의 키를 가진 책들을 보다 가지런히 보이게끔 정돈하던 그는 일부러 팡팡 소리가 나도록 책의 표지를 두드렸다. 이렇게 하지 않음 무음(無音)에 질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 주변을 흘끔거리고 돌아보았다.
유령들, 유령들, 유령들. 그리고 또 유령들.
갑자기 뒷통수가 싸늘해졌다. 부랴부랴 몸을 돌려 그는 체온을 빼앗아가는 허깨비들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호흡이 한층 가파진다. 크게 상처를 입었던 과거를 가진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언제부터였을까.
혼자인게 마음 편하지 않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정하게 그를 바라봐줄 사람. 기쁘게 웃어줄 사람.

『리스.』
갑작스런 연락에 존은 반사적으로 물어왔다.
《번호가 나왔나요, 핀치.》
『어... 아뇨.』
번호가 나온 건 아니라는 말에 존은 제법 놀란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핀치는 잡담이나 하자고 전화를 걸어올 인간이 아니다. 리스는 말 못할 곤란에 처한 고용주를 상상한 것 같았다.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리고 급박해졌다.
《혹시 다쳤어요?》
『어. 그건 아니고요.』
《핀치?》
숨을 길게 들이마신 그는 변명조로 거짓말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번호를 실수로 잘못 눌렀어요. 미안합니다.』
《핀치? 왜 그래요. 무슨 일...》
다 듣지 않고 허겁지겁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핏기가 싸악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내가 방금 전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화끈거리며 귀가 달아오른다.
안경을 벗고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Posted by 미야

2012/11/29 10:41 2012/11/2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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